이번 라이딩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하지 않고 타야 최고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라이딩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하지 않고 타야 최고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자전거를 즐기는 두 가지 다른 방식:

속도를 중시하는 PTA 방식과 밀도를 중시하는 LSD방식의 자전거 타기


마라톤을 뛰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달리는 방식은 PTA다. 고통(Pain), 고문(Torture), 극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이나 괴로움(Agony)의 약자다. 말 그대로 자신이 힘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내면서 극한의 한계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달리는 방식이다. PTA는 한 마디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달리기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PTA는 오로지 목표를 중심으로 결과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달리기 방식이다. PTA의 결과는 오로지 1등 하는 사람만이 우승자이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다. 그러니 죽기 살기로 달리는 방법을 가장 잘 배우고 익힌 사람이 경쟁의 승리자로 남는 방식이다. 달리다 몸이 아프고 견디기 어려워도 중도 포기는 나약한 사람의 빈약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이들이 믿는 철칙이자 삶의 금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게 이들의 생활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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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A는 Parent-Teacher Association, 즉 학부모와 교사 연합회를 지칭하는 모임을 의미한다. 학교와 학부모에게 자주 듣는 말,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말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미덕을 주로 가르치는 곳이 가정과 학교다. PTA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라는 미덕의 양산지이자 본거지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PTA는 “한 번 더 시도해보라”는 “Please Try Again”의 약자다. 지금 여기서 그만두지 말고 최선을 다해 힘을 모은 다음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도전해보라는 의미는 학부모-교사 연합회(PTA)에서 가르치는 미덕과 일맥상통한다. 중도 포기는 나약한 사람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어떤 악조건하에서도 끝까지 완주하는 길만이 존경받는 사람의 최고의 덕목이다. 완주를 목표로 달리다 보니 머릿속에는 온통 결승선에서 환호하며 골인하는 모습만 상상한다.


PTA의 또 다른 의미는 “신체 치료 전문가 협회(Physical Therapist Association)”의 약자다. 전력을 다해 달리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치료해주고 다시 일어나 달리게 만드는 협회일까. 이처럼 PTA는 달리는 즐거움과 행복보다 끈기와 인내심을 테스트하면서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버티고 견뎌내서 인간 승리의 기적을 이루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달리기 방식이다. PTA방식의 달리기는 그야말로 피땀 흘리며 피터 지도록 고통을 감내하며 물고 늘어지면서 끝까지 버티고 견디다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쓰려는 인간의 안간힘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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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달리는 비결


PTA 방식과 전려 다른 방식의 달리기가 있다. 바로 마라톤 잡지인 러너스 월드의 편집장이었던 조 헨더슨이 개발한 LSD 달리기다. LSD는 오랫동안(Long), 천천히(Slow), 멀리까지(Distance)의 약자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동일한 단어 조합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LSD는 Lovely Sweet Dream(사랑스럽고 달콤한 꿈)이나 Lunacy Savage Dream(광기어린 야만인의 꿈)을 의미하는 게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천천히 멀리까지 달리면서 사랑스럽고 달콤한 꿈을 꾸거나 광기 어린 야만인의 꿈을 야생에서 달리면서 꿀 수도 있다. 또한 LSD는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lysergic acid diethylamide) 약자로 에르골린족에 속하는 환각제를 지칭하는 약어다. 오랫동안 천천히 멀리까지 달리는 습관이 들면 달리기를 즐기면서 주변의 경관도 감상하고 늘 만났지만 지나쳤던 일상의 소중한 사물이나 현상에도 눈길을 주면서 존재 자체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는 과정에 중독될 수도 있다. LSD는 20~30㎍으로도 환각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강력한 환각제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앞만 보고 달렸던 그동안의 생활습관을 조금만 바꿔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평범한 반복이 아니라 어제와 늘 다른 차이의 무한 반복으로 느끼는 감동과 감탄의 경연장으로 돌변할 수도 있다. 2014년 제주도 100Km 마라톤에 도전하면서 느낀 점 한 가지는 1등 하는 사람에게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에 오로지 목표는 일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달성하고 싶은 목표 추구 욕망이다. 1등 한 덕분에 성취감을 맛보았지만 1등 했기 때문에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처럼 뒤에서 달리는 사람에게는 달리기로 일등하기보다 달리면서 제주도의 풍광을 감상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멈출 때마다 나는 듣네”라는 미국 시인 랄프 왈도 애머슨의 명구를 필사하다가 느낀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고두현 시인의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는 사랑할 시간을 따로 뗴어놓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다 시를 놓고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사랑을 놓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울리는 한 편의 경종이자 각성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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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익숙한 장면을 낯설게 보고 당연함에 물음표를 던져 시비를 걸고 물론 그런 현상에 색다른 논리로 다시 보게 만든다. “시인들은 바로 그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명징한 언어의 불꽃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그 속에 우리가 하고자 했던 말이 응축돼 있다. 흥겨운 감성의 물굽이나 가슴 아린 비애의 뿌리까지 그 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시를 읽고 감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6쪽). 고두현 시인의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에 나오는 말이다.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괴로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속 터짐, 내 맘처럼 생각해주지 않는 답답함, 당장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한없이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 금방이라도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 지금 이대로 사랑이 끝나갈 거 같은 안타까움,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없는 간절함,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사랑에 대한 애정과 열정과 격정으로 격동기를 보내는 시인들의 사랑 사건은 세상에서 가장 ‘앓음다운’ 사건이다. 최선을 다하여 달리지 않고 차선으로 달리면서 더 오랫동안 더 멀리까지 천천히 달리면서 일상에서 늘 만나는 익숙한 사물이나 현상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시인으로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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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登山)과 입산(入山), 산을 오르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


달리기 방식과 비슷하게 고산 등정 방식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단지 남보다 빨리 오르는 데에만 전력투구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와 남다른 방법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등로주의(登路主義)`다. 정상에 올라가는 목적은 같지만 올라가는 여정과 방법은 다르다. 모든 분야의 발전에는 상식을 거부하고 남 다른 대안을 제공하는 선구자가 있게 마련이다. 등산사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바로 앨버트 프레드릭 머머리(Albert Frederick Mummery)라는 영국의 등반가다. 머머리는 19세기 말에 주로 활동하면서 당시 일반적인 등반 방식인 정해진 능선을 따라서 산을 오르는 등정주의와는 달리 알려지지 않는 벽을 통해 산에 오르는 등로주의를 창시한 사람이다. 1880년대에 머머리는 등산계로부터 이단자(異端者) 취급을 당했지만 알파니스트들에게는 새로운 등산 철학을 알려준 시조였다. 등정주의로 일관한 알파니스트들에게 정복해야 될 미답봉(未踏峯)이 없어지면서 남 다른 방법으로 산에 오르는 과정을 중시하게 되었다. 알파니스트들의 눈은 이제 ‘정상 정복’이 아니라 ‘낯선 등로’ 개척으로 옮겨갔다. 이제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길, 다른 등반가가 어렵고 위험하다고 포기한 불확실한 길을 새롭게 개척해보려는 시도가 등로주의를 낳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최단기간`에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이나 산악 그랜드슬램(히말라야 14좌, 세계 7 대륙 최고봉, 3 극점)은 등정주의를 대변하는 말이다. 등정주의를 신봉하는 고산 등반가들에 의해 ‘내노라’하는 세계 최고의 고봉(高峯)들이 정복되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오를만한 미등봉(未登峯)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고봉 등반가들의 등정주의적 노력에 의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단순히 정상까지 올라가기만 하는 것은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뭔가 색다른 도전을 하고 싶은 욕구가 등로주의를 만들어냈다. 등로주의를 신봉하는 산악인들은 다른 사람보다 빨리 오르기보다 다른 사람과 다른 방법으로 산을 오르는데 재미를 느낀다. 등로주의자들의 비교대상은 다른 등반가가 아니라 등로주의자 자신이다. 그들은 어제보다 나은 방법으로 남과 다르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데 의미를 부여한다. 매경 신익수 기자는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체력 테스트로만 비칠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등로주의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개척,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등반 지도를 만드는 가슴 설레는 일에 온 힘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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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머리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은 시작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에서 비롯된 용어가 바로 ‘머머리즘(mummerism)’이다. 머머리즘은 보다 빠른 시간 내에 정상 정복을 목표로 하는 등정주의가 아니라, 남들이 걸어가지 않는 미답(未踏)의 루트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의미와 가치를 중시하는 등로주의를 가리킨다. 등정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는 등산철학이자 전략이다. 이에 반해서 등로주의는 남들이 걸어가지 않는 낯선 루트,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한계선을 그어놓고 포기한 어렵고 위험한 루트를 개척하는 과정에 보다 중요한 의의를 두는 등반 철학이자 전략이다. 알피니즘의 역사는 속도와 결과를 중시하는 등정주의가 모험과 과정을 중시하는 등로주의로 변천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등정주의는 결과적으로 정상에 가장 먼저 오른 사람을 영웅으로 대접하지만 등로주의는 정상에 도달하는 여정에서 남다른 방법으로 불가능과 한계에 도전한 사람을 영웅으로 대접해준다.


자본의 힘으로 산을 정복하는 등정 주의자와 자력으로 산의 정상에 오르는 등로주의자


1년에 한 번 선정되는 최고 알피니스트 상인 `황금 피켈상` 자격요건을 보면 등정 주의보다 등로주의에 높은 점수를 준다. 보통의 등반가들이 사용하는 산소, 셰르파, 고정 루프, 무전기를 쓰면 감점 요인이다. 등로주의 주창자들은 그래서 히말라야 14좌 완등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전과 비교한다. 등로주의는 이제까지 알려진 루트에서 반복해서 사용하는 등반 도구와 방법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낯선 루트를 선택, 힘겨운 도전을 즐긴다. 낯선 등산 루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등산 전략과 도구, 그리고 방법을 요구한다.


등로주의자들이 선택하는 루트는 익숙한 길이 아니라 낯선 길이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불편한 길이며, 확실한 직선 루트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지의 곡선 루트다. 등로는 정상에 도달하는 루트가 한 가지만 존재하는 정답의 세계가 아니라 등정 과정과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루트가 존재할 수 있는 현답의 세계다. 이단아적 변형과 변종을 즐기는 등로주의자들은 정상에 도달하는 정답이 보여도 의도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쉬운 루트를 포기하고 답이 보이지 않는 어려운 루트를 선택한다. 등로주의자들은 분투와 노고 속에서 발견의 기쁨을 즐기고 모험과 도전 속에서 성취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등정주의는 이전의 등산 루트를 따라 보다 빨리 정상에 도달하는 등산 전략이다. 이에 반해서 등로주의는 남들이 가지 않는 미답 루트를 선택, 정상에 오르는 여정을 즐기는 입산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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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정주의는 어떻게 하면 빨리 정상에 도달하는지가 관건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직선주로를 선택한다. 반면에 등로주의는 어떻게 하면 정상에 도달하는 여정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것인지가 관건이기 때문에 급할수록 돌아가는 곡선 루트를 선택한다. 등 정주 의자에 에게는 시계가 중요하지만 등로주의자에게는 나침반이 중요하다. 등정 주의자는 시간을 다투는 속도가 중요한 변수지만 등로주의자에게는 속도보다 방향 설정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방향 없는 속도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등정 주의자에게는 ‘시간’이 중요하지만 등로주의자에게는 ‘시각’(視覺)이 중요하다. 등로주의자에게 시각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경을 경력으로,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꿀 수 있는 일종의 스프링보드이기 때문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은 시작된다”는 머머리의 말은 ‘시작은 끝에서 시작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남들이 더 이상 갈 없는 끝이라고 하지만 등로주의자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시작되는 출발지점이다. 등정 주의자에게 끝은 인간의 힘으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한계선이지만 등로주의자에게 끝은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곳이다. 등로주의자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는다. 길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고 의지를 불태우며 도전을 시작한다. 등로주의자는 앞이 막히면 옆으로 돌아가고, 급할수록 돌아가는 우회적 전략을 사용한다. 등로주의자의 행복은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즐거움과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느끼는 색다른 깨달음에 있다.


등로주의자는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등산가가 아니라 산을 자기 연마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등로주의자는 ‘등산’(登山)보다 ‘입산’(入山)을 중시한다. ‘등산’은 산을 올라가야 될 정복의 대상이라고 보지만 ‘입산’은 산을 나와 분리할 수 없는 일심동체나 혼연일체의 또 다른 몸이라고 생각한다. 등로주의자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 달려가는 직선형 인간이라기보다 에둘러가면서 깨닫는 의미와 가치창조를 중시하는 곡선형 인간이다. 등로주의자는 인간이 산을 정복 대상으로 삼으면서 불행해지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등로주의자는 내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에 길이 있지 않고, 나의 뜻으로 걸어가면 산에 길이 뒤로 생긴다고 믿는다. 등정 주의자는 이미 난 길을 따라가지만 등로주의자는 자신이 걸어가면 뒤로 길이 생긴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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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자전거가 가는 탄탄대로가 열린다


PTA 방식과 등정주의 패러다임에 젖어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만 보고 내달리는 자전거 타기는 타면 탈수록 피곤에 젖어든다. 자연과 만나는 자전거가 아니라 자연을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라서 아무리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도 거리의 풍경은 미세한 점들의 연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골목길에 숨어있는 평범한 가게, 모퉁이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름 모를 풀은 더더욱 보이지 않을 것이다. PTA 방식이나 등정주의 패러다임으로 자전거를 타는 방식은 직선 주로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방식이다. 속도와 시간, 효율과 도달에 무게중심을 두고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달려간 직선거리가 중요하다. 거리에서 들리는 무수한 생명체나 비 생명체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더 먼 거리를 더 빠른 속도로 주파하는데 무게 중심을 두는 PTA 방식이나 등정주의 패러다임이 바라보는 자전거는 나와 분리 독립되어 존재하는 하나의 객체일 뿐이다. 이들에게 주로 통용되는 단어는 최단 시간, 최고 속도, 최선을 다하는 라이딩처럼 갖고 있는 힘을 최대한 발휘해서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길만이 자전거를 즐기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PTA방식과 등정주의를 지향하는 자전거는 나로 하여금 속도감을 즐기게 만들어주는 유희적 수단이자 목적지까지 안전하면서도 빠르게 데려다주는 기계적 장비일 뿐이다. 등정 주의자가 자본의 힘으로 산을 정복해나가듯이 PTA 방식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 역시 각종 첨단 장비와 용품 확보 여부가 자전거 라이딩의 결정적인 관건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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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서 LSD 방식과 등로주의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자전거 타기는 목적지에 빠른 속도로 도달해서 이루는 결과보다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에서 최대한의 여유로운 시간을 확보하면서 과정을 즐기는데 주안점을 둔다. 속도를 추구했던 PTA 방식의 자전거 타기와는 다르게 LSD 방식의 자전거 타기는 매 순간 느끼는 삶의 충만감, 즉 밀도를 중시한다. 이들은 본래 의도했던 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이전과 다른 길로 접어드는 도전과 모험을 즐긴다. 세상이 정한 규칙과 직선 주로를 쫓아가기보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해서 위험한 모험을 즐긴다. 이들에게 자전거는 자신과 동고동락을 같이하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혼연일체가 되어 세상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도전을 반복하는 탐험자다. 자전거가 나에게 말을 걸고 내가 자전거와 호흡을 같이 하며 언제나 한 몸이 되어 세상의 곳곳을 여행하는 동행자다.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하게 자전거와 한 마음이 되어 내가 가는 길이 바로 꿈의 목적지로 가는 탄탄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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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갈 수 없는 길은 나도 갈 수 없고, 내가 갈 수 없는 길은 자전거도 갈 수 없다. 자전거는 언제나 나와 일심동체가 되어 미지의 세계를 누비며 모험을 즐기는 위험한 탐험 동행자다. “직선의 도시 곳곳엔 곡선이 숨어 있다. 이념서적을 파는 고서점이나 우체국, 우리가 종아리를 드러낸 채 서서 먹던 떡볶이 가게나 포장마차, 직선에서 이탈한 것들이 곳곳에서 시간의 속도를 꺾고 있었다.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로에서 이탈한 샛길처럼 우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고. ‘꼬부랑 번지수’를 품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145쪽). LSD와 등로주의 패러다임 방식을 추구하는 자전거 타기는 직선주로를 달리더라도 곳곳에 숨어 있는 곡선의 물음표를 사랑한다. 지나치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물이나 현상도 모두 물음표의 대상이다. 물음표의 그물이 세상을 향해 던져지는 순간, 그 그물에는 이전과 다른 감동의 느낌표가 가득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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