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는 움직이는 인생학교다

체념의 텃밭에서 자라는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자전거를 타라!

자전거는 움직이는 인생학교다!

체념의 텃밭에서 자라는 관성에서 벗어나려면 자전거를 타라!


이반 일리치가 《깨달음의 혁명》에서 말하는 진부한 ‘관념의 감옥’에서 탈출, ‘신념의 급소’를 찌르기 위해서는 체념의 텃밭을 벗어나야 한다. 자전거 타기야말로 ‘관념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가장 육체적인 방법이며 ‘신념의 급소’를 찌르기 위해 몸으로 겪어내는 체험적 깨달음의 향연이다. 오로지 내가 발휘할 수 있는 힘만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전거는 신체성이 땅과 가장 오랫동안 만날 수 있는 축복의 도구다. 이반 일치는 다른 책,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에서 “자기 힘으로 이동하는 세계로부터 떠 밀려난 사람이며, 자기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는 느낌을 상실한 사람”(42쪽)을 ‘상습화된 승객(habitual passenger)’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이나 자가용과 같은 동력 엔진이 발휘하는 엄청난 속도 기계에 의지해서 출퇴근을 하고 어딘가로 이동한다.


교통수단이 기술적으로 진보하면서 더 빠르고 기술적으로 탁월한 이동수단이 생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하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을 두 발로 땅을 밟으면서 걷기보다 나를 빠르게 이동시켜주는 교통수단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기술적 수단에 내맡겨진 몸은 능동성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뭔가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고 있다. 상습화된 승객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것보다 건강에 좋다는 점을 머리로 알고 있지만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다. 몸이 수송수단에 길들여져 관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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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속도감에 사로잡힌 상습범이다


이런 상습화된 승객의 심각한 문제점은 “수동적으로 실려 가는 데 중독이 되어 인간의 두 발에 깃들어 있는 물리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을 잊고 말았다”(45쪽)는 점이다.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자체 생산하지 않고 다른 기술적 수단에 의존할수록 인간의 능동성은 그 빛을 잃어간다. 복잡하고 어려운(difficult) 일,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ous) 일과 같은 3D업종에서 손을 뗄수록 인간의 신체는 무기력해지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맞닥뜨릴수록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기술이 인간의 불안감이나 불편함을 해소해줄수록 인간의 기술 종속적인 피동체로 전락하면서 스스로 움직이면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다. 두 발로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인간의 걷기 능력뿐만 아니라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부터’라는 철학적 사색과 소요(逍遙)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어쩌다 한 번 해봤더니 사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속도감이 주는 쾌락에 빠지는 순간 다시 수송수단에 자신을 내맡기는 습관이 반복된다. 습관의 반복과 일상화가 바로 상습화의 지름길이다. 상습화된 승객은 상습범(常習犯)이다. 상습범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매일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 내 몸을 망가뜨리는 주범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상습화된 승객은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는 행동을 매일 반복해서 하면서 어제와 다른 결심을 하고 다르게 살기로 마음을 먹는 것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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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화된 승객의 심각한 문제점을 극복하고 인간의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힘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자전거 타기다. 이동 수단에 몸을 싣고 기계가 움직이는 속도에 매몰되어 일상의 풍경을 잃어버린 사람은 매 순간 만나는 삶은 더 이상 경이로운 감탄의 대상이 아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의 지루한 반복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상화되면서 매사를 맞이하는 자세 역시 한심하고 한탄하기 일쑤다. 매일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도 내가 직접 다가가서 어제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 움직이는 교통수단이 나로 하여금 그 옆을 스쳐 지나가게 만든다.


계절의 변화는 물론 생명체들의 놀라운 변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든 일은 빨리 끝내서 성과를 달성해야 되는 효율과 속도의 문제다. 일을 끝내서 성과는 달성했지만 성취감을 맛볼 수 없는 이유다.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이 산 넘어 산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계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일에 치여서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감마저 느낄 수 없게 된다. 나의 두 발로 내딛으며 걷는 속도가 아니라 기계가 끌고 달리는 속도에 몸을 실은 우리들은 가을날 길가에 핀 코스모스도 울긋불긋한 점으로 보인다. 사스로 풍경이 되어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결과를 경치로 바라보는 관조적 삶의 소비자로 살아간다. 내 몸으로 살아가도 내 몸의 주인이 아니라 누군가 욕망하는 삶을 살아가는 타자의 몸으로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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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자유로운 ‘법’은 ‘방법’이다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싶은 욕망보다 속도와 효율 담론에 파묻혀 밖의 풍경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감상하는 방관자로 전락한 사람 역시 상습화된 승객의 일상이다. 상습화된 승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의 속도로 일상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송수단에 구속된 나의 자유를 빼앗아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단 하나의 진실한 법은, 자유로 이어지는 법이다. 다른 법은 없다.”(99쪽).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말이다. 단 하나의 진실한 법은, 자유로 이어지는 법이다. 그 법은 방법이라는 법이다. 법은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없지만 방법이라는 법은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


법대로(法對路)하는 도로(道路)가 있다. 그 도로는 누군가 닦아 놓은 길이다. 법대로는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이 수송수단을 이용하여 물건이나 사람을 이동시킨 대로(大路)다. 그 도로가 요구하는 법을 지키지 않으면 교통법규 위반으로 벌금을 내고 벌점을 받는다. 말 그대로 법대로 도로를 따라가지 않으면 심각한 사고가 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상습화된 승객은 그 도로를 따라 하루를 시작하고 그 도로 위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상습화된 승객은 일단 법이 정해지면 그 법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국회가 정한 법을 포함해서 누군가 이미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관습이나 관행도 포함된다. 법대로 안 되면 방법을 개발하라는 의미도 기존의 관례를 습관적으로 따라가는 관성에서 벗어나 어제와 다른 도전을 통해서 이전에 없었던 색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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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상습화된 승객의 수동성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일상에서 만나는 색다른 마주침을 즐기기 위해서다. 교통수단에 실린 내 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도로가 정체되면 거기서 멈춰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내 몸이 상습화된 승객으로 전락하면서 얻은 것은 수동적 기다림뿐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길이 막힐 가능성은 없다. 자전거를 타면 내 마음대로 속도를 조절하며 자유롭게 내가 가고 싶은 방향과 목적지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다른 교통수단에 의해서 길이 막히면 뚫린 다른 길을 선택해서 지나가면 된다. 자유롭게 내가 선택해서 가면 되는 길이 바로 자전거를 타면서 지키는 법이다. 자전거가 가는 길은 자유로 이어지는 법이다.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내가 방법을 개발해서 난국을 극복하면 되는 방법이 나타난다.


상습화된 승객이 법대로라는 도로를 따라가는 수동적인 인생을 산다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자유로(自由路)를 따라 자신의 속도대로 삶을 즐기며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1825년 프랑스의 미식가,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_Savarin)이 미식 예찬에서 쓴 유명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내가 타고 다니는 이동 수단에 대입해도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겠다.” 교통수단에 몸을 맡기고 달리는 속도에 지배당하는 상습화된 승객과 자전거에 몸을 싣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속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사람의 삶의 질은 질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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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 공간이 있어야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인간의 자아상은 생활공간 및 생활시간을 덧붙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이 이동하는 보폭에 의해 통합된다. 만일 이 관계가 인간 자신의 이동능력이 아니라 수송 수단의 속도에 의해 결정되면, 인간은 공간의 설계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단순한 통근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36쪽). 이반 일리치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한 통근자’가 바로 이반 일리치가 같은 책에서 말하는 ‘상습화된 승객’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공간에서 보낸 시간의 산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설계한 공간에서 자신이 의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설계한 공간에서 다른 사람의 시간계획에 따라 살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공간으로 이동한다.


주체적 의지로 만들어가는 생활공간과 생활시간의 상실은 곧 자아 상실의 체험과 직결된다. 설레는 마음은 차치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들어간 공간과 끌려다니는 시간 속에서 인간의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자전거를 이용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한다는 뜻이다. 자전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생활공간과 생활시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자신의 거주지와 자기 존재의 맥박 사이에 긴밀한 관계를 설정한다. 인간 존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균형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91쪽). 이반 일리치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순간 만나는 모든 공간은 내가 대지와 직접 만나 접촉하는 다양한 공간이 나의 신체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시간의 합작품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생활공간과 생활시간이 주체적으로 만나는 행복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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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기는 무한한 대지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나를 전경으로 드러내는 안간힘의 연속이다. 먼동이 터오기 직전에 자전거를 타고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출근길의 배경은 희망의 서곡이나 다름없다. 일몰로 붉게 물드는 서산의 노을을 뒤로하고 자전거로 퇴근하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선율이 아름다운 세레나데가 울려 퍼지는 풍경이 배경이다. “아름다움이 드러나자면 공간이 있어야 한다. 공간이 있어야만 사건과 목적이 있고, 사람들은 진기해하고 의의를 갖게 되며, 그리하여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무는 탁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쳐다보아야 대단해 보인다. 음악의 선율은 앞뒤에 침묵이 있을 때 감동을 얻는다. 촛불은 어두운 공간에서 꽃처럼 밝게 피어오른다. 비록 조그맣고 우연한 것일지라도 공간의 세례를 받으면 의미심장해 보인다. 마치 동양화에서 커다란 여백 한 귀퉁이에 낙엽 한 두 개가 그려진 것을 보는 것처럼”(134-135쪽). 앤 머로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에 나오는 말이다.


늘 만나는 생활공간이지만 내 몸으로 직접 만나보는 순간 공간은 허공에서 만나는 나와 환경과의 싸늘한 사이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오감각이 저마다의 느낌으로 연주되는 앙상블의 무대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얼마든지 나의 의지대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공간을 창조하거나 연출할 수 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매 순간마다 만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아름다운 경치다. 버스나 지하철이 지나가는 모습은 공간성을 확보하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여기서 저기로 이동한다. 하지만 자전거는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내 몸이 필요한 만큼의 힘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매 순간 이전애 만났던 공간도 이전과 다르게 공간의 세례를 받으면서 내 몸안으로 눈물겹게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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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나에게 움직이는 인생학교다


김훈도 《자전거 여행》에서 엔진이 없는 자전거야말로 인간이 누길 수 있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17쪽). 자전거의 연료는 사람이 쏟아붓는 안간힘이다. 사람을 연료로 움직이는 이동수단이 바로 자전거라는 점에서 자전거는 인간이 개발한 위대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몸에 과도하게 축적된 지방을 태울수록 자전거는 더 빠르고 멀리 달려갈 수 있다. 내 몸속에 축적된 과도한 지방을 태워 자전거를 탈수록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심장박동을 뛰게 할 수 있으며 그 사이 바깥의 산소는 내 몸을 관통하면서 피를 더욱 맑게 한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며 오르막을 오를 때 허벅지 근육은 부푼 꿈을 품고 부풀어 오르며 장딴지 근육에 연결되어 페달을 밟아내는 에너지로 폭발한다. 그 사이 뱃살은 줄어들고 세상을 느긋한 미소로 바라보며 웃음 짓게 만드는 익살이나 넉살은 늘어난다.


삶의 윤활유인 유머는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편집한 파편의 산물이 아니라 격투가 늘 벌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겪어내며 체득한 깨달음의 산물이다. 내가 자전거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관성을 따라가는 일상을 벗어나 미지의 세상으로 나가보라고 자전거가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 영화 팜 스프링스(Palm Springs)에 나오는 명대사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항상 기억하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린 길을 잃도록 태어났을지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발견됐습니다.” 어느 날 자전거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길을 잃을 수 있지만 당신은 잃어버린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자전거가 데려다주는 낯선 세상에서 오늘도 힘든 세상을 겪어낼 힘과 용기는 물론 여유와 해학을 배운다. 자전거는 나에게 움직이는 인생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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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는 나에게 이전보다 너 나은 삶을 살고 싶게 만들었다. 자전거는 자칫 지루한 삶으로 빠질 수 있는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 조금만 바꿔도 내가 원하는 삶을 나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듬직한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은 자전거를 타면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과 이전과 다른 사유의 문으로 향하는 나의 설렘과 기대감을 담아낼 단어나 개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단어에 자전거에 대한 나의 마음을 담아내고 싶고, 이전과 다른 개념 안에 자전거를 타면서 바뀌는 내 삶에 확신이 체념으로 바뀌기 전에 신념으로 만들어 녹여내고 싶다. 자전거를 통해 변화되는 삶의 다이내믹을 드라마 각본으로 담아내고 싶을 때, 그 각본에 들어가는 심장 뛰는 언어를 직조해서 아름다운 문장의 향연이 생을 향한 축제로 이어지게 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전율하는 희열과 감동이 휘발되기 전에 언어라는 그물로 잡아 끊임없이 변신하는 주어가 목적어를 바꿔가면서 감동과 감탄을 담아내는 동사로 동원, 어제와 다른 생의 축제가 심금을 울리는 음악과 함께 밤이 깊도록 울려 퍼지는 문장을 건축하고 싶다. 사투 끝에 찾아냈거나 새롭게 조어한 개념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키고 깊이를 파고들게 만든다. 자전거를 타면서 온몸으로 다가오는 느낌의 교향곡을 담아낼 언어를 위해 나는 오늘 밤도 지새우며 단어 찾아 삼만리를 떠날 것이다. “습관적인 좌절 속에서 나를 구원한 것은 더 나은 언어였다. 일터의 나를 선명하게 밝혀줄 더 나은 언어를 충전하고 나면 흡사 에너지 코어를 흡수한 캡틴 마블처럼 용감했다”(7쪽). 김지수의 《일터의 문장들》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 타면서 겪은 느낌을 적확하게 표현할 언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더 많은 자전거 여행을 통해 언젠가 몸속으로 스며들 단어들의 행렬에 부푼 희망을 걸고 오늘도 자전거에 몸을 싣고 밖으로 나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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