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나, 바다가 받아주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책을 읽는 건 나의 일이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228쪽).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 나오는 문장을 바꿔 쓰기 한 문장입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폭염의 한가운데 열기를 식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책의 바다로 빠지는 일이다. 최고의 피서는 독서이기 때문입니다.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은 독(毒)은 독서(讀書)로 풀어낸다는 이독치독(以讀治毒)이 되는 근거이자 이유입니다. 치열하게 읽고 열정적으로 메모하고 밥먹듯이 기록하며 꾸준히 씁니다. 읽기의 결과가 감동이나 감탄사로 끝나지 않고 쓰기로 연결되어야 사유의 흔적이 얼룩에서 무늬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223쪽). 김홍중의 《은둔 기계》에 나오는 말입니다. 책을 읽어야 뇌리 속에서 편안하게 자가 증식하는 바이러스에 변이를 일으켜 낯선 바이러스 변종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낯선 바이러스가 기존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바이러스 지도가 생기고 기존 생각의 근본을 뒤흔드는 새로운 사유체계의 밑그림이 그려집니다. 읽기의 결과는 재탄생한 바이러스가 다시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이전과 다른 생각의 숙주로 재탄생하는 과정입니다. a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했지만 바이러스 간 이종교배가 생성되어 기존에 없었던 색다른 생각의 바이러스 b가 거듭나는 과정이 바로 읽고 쓰는 과정입니다.
“페이지를 밝히는 지혜의 빛을 받을 때 읽는 사람의 자아에 불이 붙을 것이며, 그 빛 속에 읽는 사람은 자신을 인식할 것이다(38쪽).”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에 나오는 말입니다. 책을 읽다가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면 관련된 과거 경험이 연상되기도 하고 다른 책에서 읽은 비슷한 주장이 담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잠자던 자아에 불이 켜지는 이유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고양시킬 수 있는 색다른 깨우침과 우연한 마주침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에가 끼었던 뿌연 유리창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바깥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책 속의 한 문장은 흐릿했던 생각 창문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드는 청정 세제나 다름없습니다.
“책 읽기는 물을 건너는 것과 비슷하다. 강을 건널 때는 온몸이 젖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개천을 건널 때는 물방울 튀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깊은 강을 건너다가는 몹시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고, 작은 개울이라도 물이 불었을 때는 사고가 나기도 한다. 비가 온다면 어느 물가를 건너더라도 온몸이 다 젖을 것이다”(18쪽). 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연히 책을 폈는데 생각지도 못한 지혜의 빛을 품고 있는 문장을 만납니다.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전두엽은 강렬한 천둥과 번개를 맞은 듯 전율하기 시작합니다. 깊은 강을 건널 때 온몸이 젖는 것처럼 활자의 바다에서 만난 인두 같은 한 문장은 사람을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심각하게 반성하게 만드는 냉각제로도 작용합니다.
위기의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책은 스펀지처럼 빨려 듭니다. 별다른 독서법이 필요 없습니다. 책이 문제의식의 뇌관을 건드린 이상 멈출 수도 계속 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공중 부양하는 축지법과 같은 행동이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읽기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강행군을 마치고 그늘에서 마시는 차가운 샘물과 같은 것이다. 책이 그렇게 읽히는 것이라면 반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215쪽).” 사사키 아타루의 《이 나날의 돌림노래》에 나오는 말입니다. 갈증이 심각할수록 들이키는 물맛이 좋듯, 위기의식이 강렬해질수록 책 읽기 역시 몰입과 열정의 도가니탕으로 빠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동안 착각해 왔던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정신을 훔쳐오고 있다고 착각했지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니체가, 마르크스가, 푸코가, 그들의 정신이 관절을 타고 들어와 내 정신을 훔쳐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40쪽). 강민혁의 《자기 배려의 책 읽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책에 빠져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책 속에 숨죽이고 있던 저마다의 저자들이 나의 정신의 관절을 타고 들어와 정신 근육을 나도 모르게 단련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그들의 사유체계로 잠입한 게 아니라 그들이 나의 사유체계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와 내 정신 상태를 완전히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여전히 읽은 책 보다 못 읽은 책, 안 읽은 책이 더 많습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내가 읽은 책이 아니라 아직 여러 가지 이유로 읽지 못했거나 안 읽은 책입니다. 다른 책을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내 생각을 갖고 있는 까닭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과 다른 책을 더 읽었더라면 지금의 나와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사유는 어떤 책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책을 읽지 않았는지에 달려있다(191쪽).” 박총의 《읽기의 말들》에 나오는 말입니다. 천만다행으로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더 많기에 그만큼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생각을 임신할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책은 오늘의 나와 전혀 다른 모습,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해지는 미래의 나로 변신할 가능성에 설레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잠시 생각을 바꿔서 내가 책을 읽기만 하지 않고 책을 쓴다는 창작과정을 생각해볼 때 새삼 또 다른 생각에 잠시 빠지게 된다. “나는 내 책들의 기억이다. 그러나 나의 책들은 어디까지 내 기억이었던가(111쪽).” 에드몽 자베스의 《예상 밖의 전복의 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네가 읽은 책이기도 하지만 내가 읽지 않은 책 덕분에 지금 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쓴 책이나 쓰고 있는 책들은 어디까지가 나의 기억인지 알 길은 없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 속으로 침입해 들어와 자기 생각인양 행세하는 생각의 출처를 일일이 밝히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생각은 수시로 다른 생각과 짝짓기를 시도해서 출처불명의 생각의 자손을 끊임없이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벌써’ 읽었거나 ‘이미’ 읽은 책에게 한 마디 합니다. 세상의 모든 책은 ‘아직’과 ‘벌써’ 또는 ‘이미’ 사이에서 독자의 손길과 눈길을 기다리며 오늘도 저마다의 위치에서 절치부심하고 있습니다. 아직 못 읽었다고 한탄하거나 벌써 또는 이미 읽었다고 너무 감탄에 머무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한심해집니다. 오늘도 내일도 밥먹듯이 읽고 쓰면서 생각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격랑의 파도에 몸을 던져 활자의 바다를 위험을 무릅쓰고 유영(遊泳)하는 유영만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