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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처방'을 앞선다

묘사하지 않으면 묘미를 찾을 방법이 없다

기술이 처방을 앞선다

묘사하지 않으면 묘미를 찾을 방법이 없다


“신비로운 일은 친숙한 장소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늘 세상 반대편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사울 레이터, 2022, p.196).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비상하는 상상력을 개발할 수 있다. 문제는 일상을 구체적으로 경험해보지 않고 일상을 바꿔보려는 처방적 사유가 앞선다는 점이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의 구체성을 신체성을 매개로 겪어보면서 심층 기술(thick description)을 해야 일상을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으로 어떻게 바꿀지를 생각해낼 수 있다. 처방의 언어는 머리의 언어에 가깝고 기술의 언어는 몸의 언어에 가깝다. 머리의 언어는 몸으로 겪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추상적인 언어와 맥을 같이 한다. 


반면에 몸의 언어는 현장의 구체성을 몸으로 직접 겪어보면서 머리가 개입되기 전에 감각적으로 깨달은 각성의 언어와 맥을 같이 한다. “머리의 언어는 언어라는 몸에 돋아난 뾰루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일상생활에서 늘 확인하게 되는 것은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에 비해 훨씬 근원적이고 거짓이 없으며 자연에 가깝다는 점이다”(이성복, pp.27-28). 몸으로 겪어본 감각적 깨달음이 머리의 언어로 희석되고 각색되는 순간 ”욕망보다 규범을, 묘사보다 설명을, 존재보다 당위, 그리고 기술보다 처방을 고집하는 편향된 시대정신은 분별력 없는 이들로 하여금 도덕주의를 가장한 이중성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다”(김영민, 1992, p.168).



해결할 수 없고 다만 해소될 뿐이다


어떻게 연구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생각하기 이전에 연구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연구 대상에 대한 오해나 몰이해는 자연스럽게 연구방법의 부적절성을 낳는다. 부적절한 연구방법은 연구대상을 곡해하고 오도할 뿐이다. 연구방법의 적절성과 타당성을 논의하기 이전에 그 연구방법이 적용되는 대상이나 현장의 복잡성과 중층성이 만들어내는 역동성을 올바르게 포착하고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처방(prescription) 이전에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기술(description)이 앞서야 한다. 심층 기술 이전에 방법적 처방을 가하는 연구는 평범한 보통의 상식이 특정한 콘텍스트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삶의 터전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 이전에 가해지는 처방전은 대상을 더욱 심각한 문제의 온상이나 진원지로 부채질할 뿐이다. 처방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복잡한 일상의 역동성을 몇 가지 법칙으로 단순화시키거나 단선적 인과관계로 상정하고 조건에 맞는 성급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처방은 또한 설명을 전제로 자리 잡는다.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전후관계나 인과관계를 조정하고 통제하며 급기야 변화시킬 수 있는 처방전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설명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곧 로고스가 지향하는 이상이며 서구 과학이 꿈꾸는 이상향이다.



질적 연구는 설명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 무한히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모든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solution)’될 수 있다는 주장은 모든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다. 설명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은 없다고 가정하는 게 양적 연구 전통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이나 사회를 그것이 소속된 더 큰 생태계나 사회체계로부터 분리-독립시켜 대상화시켜야 한다. 대상화시킨다는 의미는 탐구 주체와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 주체가 대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처방을 가해서 원하는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의도의 다른 이름이다. 


설명은 대상이나 현상이 일정 시점에서 주어진 본질을 유지한 채 ‘명사’ 상태로 정체되어 있어야 한다는 가정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 연구 대상은 부단히 다른 구성요소나 부분들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전개하면서 변신을 거듭하는 ‘동사적 현상’이다. 한 번 설명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술해야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반복해서 기술한다고 주어진 대상이나 현상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복잡한 의미나 난제들을 어느 정도 ‘해소(resolution)’할 수 있을 뿐이다. 해결의 과학은 완벽을 지향하지만 해소의 과학은 심리적 만족을 추구한다.



실증할 수 있는 지식보다 미지의 세계를 알아내려는 상상력이 중요하다


질적 연구가 설명이나 처방 또는 해결보다 기술이나 해소를 지향하는 이유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나 일상에는 지금 이 시점에서 기존 지식이나 지혜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무한히 많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지성뿐이다. 알 수 없는 정보를 ‘알 수 없는 정보’로 둔 채 시간을 들여 묵히는 미뤄 놓기 능력은 인간 지성의 두드러진 특징이다”(우치다 타츠루, 2013, p.36). 기존 지식이나 지혜로 아직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인간이 만든 과학의 힘도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겸허한 자기반성이다. 


“서구의 정신은 설명되지 않은 채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여백을 참지 못한다”(김영민, 1992, p.180). 서구 정신에게 여백은 여유로운 공간이 아니라 사유가 침범하지 못하고 아직 설명과 처방전이 강구되지 않는 황무지나 다름없다. 서구 정신을 근간으로 전개되는 양적 연구의 지적 전통은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가정은 아직 과학적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미지의 세계를 완벽하게 설명해낼 수 있다는 과학적 방법은 언젠가는 개발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양적 연구는 과학적 방법의 이상을 신화적 사고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과학만능주의를 양산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셈이다. 



하지만 질적 연구 대상인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뒤덮인 앎의 황무지다. 질적 연구가 관심을 갖는 연구 대상은 몇 가지 수식이나 법칙으로 단순화 또는 일반화시켜 성급한 처방전을 기다리는 일상이 아니다. 우리들이 매일 살아가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문제는 몇 가지 해결 대안(solution)을 조합해서 제시할 수 있는 처방전으로는 역부족이다. 성급한 처방전을 제시하기 전에 어떤 상황적 맥락에 따라 특수한 의미 구조를 지니는 일리는 주저함이나 머뭇거림 속에서 서서히 숙성되는 해소 방안(resolution)이다. 복잡한 문제를 발 빠르게 분석해서 성급한 처방전을 제시한다고 해결될 리 만무다. 오히려 복잡한 문제일수록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체계를 대입해가면서 얽힌 실타래의 매듭을 풀 듯 끈질기고 집요하게 해소해보려는 지적 인내심이 필요하다. 


“모든 정답이 단수하고 명쾌하고 주어진 표피, 이념의 옷이 주는 편익에 마취된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처방적(prescription)이다. 그러나 절절하고 형언할 수 없는 삶의 층층 면면과 복잡성을 깊이 살아내는 글쓰기는 종종 기술적(descriptive)인 고백에 멈출 도리밖에 없다. 파스칼 변별처럼 ‘기하학적 정신’을 넘어서 섬세의 정신을 익힌 글쓰기는 주변의 소외된 지역을 찾아다니며 펜 끝으로 어루만져준다”(김영민, 2020, p.146). 파스칼이 말하는 섬세의 정신이야말로 복잡한 일상성을 무대로 질적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연구자세가 아닐 수 없다. 질적 연구대상으로서의 일상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이다. 복잡성은 한 가지 분야의 전문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해관계가 중층으로 엮여있어서 하나의 완벽한 이론체계로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불가능의 속성이다.



복잡성을 연구대상으로 끌어안은 질적 연구자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현상이나 사건이라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한 다음 단언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지닌 사회 역사적 의미를 캐내려는 끈질긴 집요함이나 탐구심이다. 끈질긴 집요함이나 탐구심은 쉽게 결론을 내리려는 성급한 효율을 추구하지 않고 복잡한 현실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질적 연구자로서 머뭇거리고 망설이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의미의 늪을 파고들어 삶의 진면목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려는 상상력으로 무장한다.


 “논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출처가 분명하고 실증할 수 있는 지식이었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그녀로 하여금 대학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충동질한 지도교수는 그녀의 상상력을 가장 경계했다. 영주가 제일 자주 들은 듣기 싫은 충고는 논문을 쓰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거였다”(박완서, 2021, p.223). 소설가의 상상력이 죽는 순간 소설은 일상적 삶과 격리되는 허황된 세계의 관념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논문에서 연구자의 주관과 주장이 거세되고 남의 글에 무임승차하는 인용으로 자기주장의 객관성만 피력한다면 논문은 더 이상 현실 변화에 무력한 모래알 같은 주장의 뒤섞임으로 끝날 지도 모른다.



질적 연구는 불멸의 아이보다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아이를 연구한다


처방보다 기술이 앞서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질적 연구대상으로서의 현장은 한두 가지 변수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단선적 인관관계로 설명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구성하는 다양한 변수들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예기치 못한 창발이 수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질적 연구자가 지금 보고 있는 현상도 이미 결정된 정체된 상태로서의 완결된 의미망이 아니다. 질적 연구대상으로서의 현실은 불현 듯 어떤 변수가 갑자기 침입, 주어진 생태계를 교란하는 다양한 문제가 수시로 창발되는 특수한 상황적 맥락이다. 질적 연구는 실험으로 양산된 명사적 결과의 통계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연구라기보다 연구 도중에도 시시각각 의미의 연결고리가 바뀌면서 다양한 변주를 거듭하는 동사로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사회문화역사적 의미망을 캐내는 작업이다. 


“동사의 암은 명사”(김영민, 1996, p.34)이므로 주어진 연구대상을 역동적 흐름으로 파악하지 않고 주어진 시점에서 완결된 정태적 명사로 파악한다. “정보나 대상중심의 사고는 내가 일컫는 명사적 사고 한 유형이다. ”계몽은 명사에서 동사를 잉태시켰으나 엉덩이가 무거워진 명사들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동사를 깔아뭉개고 있다“(김영민, 1996, p.44). 연구현장은 여전히 동사들의 경연장으로서 다양한 움직임과 흐름을 통해 특정 시점에서 결론지을 수 있는 연구결과를 양산하는 곳이 아니라 어제와 다른 동사들이 명사적 사유를 파괴하려는 격전지(激戰地)다.



질적 연구 대상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연구 대상자는 물론 연구대상을 시시각각 다른 현상으로 바꾸게 만드는 다양한 변수들이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며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세계다. 이처럼 “살아가는 모습의 구체성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움직임을 잡아둔 명사의 상자(human-being)을 볼 것이 아니다. 형용사를 던지는 현재분사의 흐름(being human) 속에서 의당 인간을 볼 일이다”(김영민, 1996, p.136). 명사적 인간(human being)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양적 연구에 비해 질적 연구는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창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부단한 변신을 거듭하는 동사적 인간(being human)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동사적 인간상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질적 연구는, 비고츠키가 말하는 ‘역사적 아이’, 괴테가 말하는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아이’에 비유될 수 있다. 


질적 연구는 ‘불멸의 아이’를 상정해놓고 이상적 아동의 이미지를 마치 이데아처럼 추구하는 주류 심리학적 연구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진 환경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제와 다른 아동으로 부단히 변신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역사적 아이’를 연구하는 길이 바로 질적 연구자가 지향해야 될 이상적인 연구 방향이다. 역사적 아이는 절대로 자기 완결적인 독립적 인간으로 자리 매김될 수 없다. ‘역사적 아이’에 해당하는 질적 연구자는 주어진 상황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행위나 활동, 또는 사건을 분석단위로 삼아 그것이 의미하는 사회문화역사적 의미를 발굴하고 생성하는 연구다.



기술(記述)은 한두 번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 없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기술하는 과정에도 끊임없이 의미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질적 연구자가 관찰하고 기술한 기록물은 언제나 미완 성물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질적 연구자의 기술은 언제나 실패자지만 그 실패가 이전과 다르게 기술할 수 있는 실력을 낳는다. “우리가 진정한 글쟁이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늘 현실의 패배자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영원한 신인, 영원한 삶의 순례자로서 언제나 새로운 고행 앞에 다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살아야 했습니다”(이청준, 2001, p.318). 질적 연구자는 어제 연구했던 현장이지만 오늘 다시 만나는 현장은 어제와 다른 연구대상으로 다가오는 미지의 개척지일 뿐이다. 오늘 연구현장에서 만난 깨달음의 무늬들은 당시 상황이 만들어낸 사회 역사적 사실이자 일리(一理) 있는 이야기다. 


결국 질적 연구자는 어제와 다른 눈과 언어로 동일한 연구 현장이라고 할지라도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기술함으로써 일리로 통용되는 진리를 발굴하는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나 다름없다. 특정한 상황적 맥락이 낳은 일리에 담긴 의미를 당시의 시대 역사적 사연과 사회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해석하는 잡된 글쓰기를 추구하는 연구자다. 엄격한 형식과 객관적 논리 체계에 맞게 재단해서 쓰는 논문중심 글쓰기로는 현장의 복잡성과 역동성을 담아낼 수 없다. “일리라는 가슴을 거치지 않고 진리라는 머리에 이를 수 있는 방식은 없다”(김영민, 2020, p.177). 느낌이 앎으로 정제되는 순간 현장성이 품고 있는 섬세한 디테일은 단순화되거나 일반화됨으로써 특수한 구체성이나 개성 기술적인 단독성은 실종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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