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뭔가를 몰랐던 상태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아는 상태가 되는 과정을 인지(認知)라고 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 무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실을 깨우침으로써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앎의 산물이다. 인지는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이나 현상을 마치 거울에 비추어 자기 얼굴을 보는 것처럼 그대로 복사해서 알게 된다는 초기 인지적 입장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정해진 사물이나 현상이 품고 있는 정보나 속성을 인식 주체가 머릿속에 그대로 복사해서 이미지를 만든다고 한다. 밖에 존재하는 이미지와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가 1:1로 정확히 매칭될 때 비로소 완벽한 앎에 도달했다고 평가하는 입장이다. 이런 과정으로 탄생되는 앎은 인지과정에 인식주체의 열정적인 참여가 전격적으로 배제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건조한 앎, 신념과 철학이 휘발된 논리적 앎이다.
‘체하는 인지’와 ‘체한 인지’는 인간적 지혜로 이르는 길을 차단할 뿐이다
인간의 앎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철학적-심리학적으로 여러 분파적 입장이 난립하지만 고전적 인지이론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인지는 외부에서 입력되는 정보를 인간의 몸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와 무관하게 뇌가 컴퓨터처럼 계산을 하거나 처리해서 신경세포간 배열을 화학적으로 배열하거나 조정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입장이다. 앎이 일어나는 환경과 몸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나 이성의 독립적 작용으로 앎이 생긴다는 이런 인지론적 입장은 인간의 앎을 단순한 계산이나 기호처리 과정으로 전락시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한다는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서 이런 앎을 ‘체하는 인지’라고 명명하고 싶다. ‘체하는 인지’는 앎의 과정을 저마다의 주관과 나름의 증거로 입증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앎의 본질과 정수에 접근하는 과정에 많은 문제점과 한계가 있는 인지적 입장이다. ‘체하는 인지’에 빠질수록 일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적인 앎의 노선에서 멀어지면서 의미의 바다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삶을 지향할 뿐이다.
흔히 ‘체하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체하다’ 는 보조동사로 “앞말이 뜻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꾸밈을 나타내는 말”이다. 잘난 ‘체하다’나 못 이기는 ‘체하고’ 받다 또는 알고도 모르는 ‘체하다’처럼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지금 상태를 위장하거나 가장할 때 사용한다. ‘체하다’와 비슷한 말이 '척하다'가 있다. ‘척’은 동사나 형용사 뒤에서 '-은 척하다', '-는 척하다' 구성으로 쓰여서 앞말이 뜻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거짓으로 그럴듯하게 꾸밈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체하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못 이기는 척하다', '못 이기는 체하다'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진리인체 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근거 없는 권위의식으로 군림하면서 마치 누구나 반드시 따라야 할 도덕이나 규범인 체 위장한 거짓 신념이나 가치관이 삶과 무관한 관념적 앎을 대량 양산해 왔다.
두 번째 ‘체하다’는 ‘체(滯)하다’는 말로써 “먹은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아니하고 배 속에 답답하게 처져 있다”나는 말이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인 것처럼 음식을 먹었지만 소화가 되지 않고 얹혀서 답답한 상태다. 이런 입장에서 인지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정보를 흡수했지만 소화를 시키지 않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학습소화기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입력된 정보가 소화되기도 전에 또 다른 정보가 계속 입력되니까 일종의 학습 변비에 걸린 것이다. 물이 한 곳에 오랫동안 고여 있으면 썩듯이 정보나 지식도 한 곳에 정체되면 썩는다. 입력된 정보가 문제의식이나 일정한 목적을 만나 다른 정보와 조합되어 제3의 정보로 편집되거나 지식으로 재탄생되는 흐름을 탈 때 정보는 체하지 않고 무한 변신을 거듭하며 제2의 정보나 지식으로 재창조된다.
인지는 앎의 결과로 머물러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정체된 명사적 앎이 아니다
‘체하다’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지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런 앎을 ‘체하는 인지’와 ‘체한 인지’라고 부른다. 첫 번째 아는 ‘체하는 인지’의 의미는 사실은 모르는 데 실제로 아는 것처럼 행동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아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없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자괴감이 들까. 아는 체하는 경우는 잘 모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진짜 앎이라는 사실을 모를 때도 일어난다. 사실은 피상적 앎에 불과해서 본질적인 앎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먼 앎의 상태도 ‘체하는 인지’에 해당된다. 무엇인지 진정한 앎인지, 내가 알고 있는 앎이 진실에 도달하려는 앎인지의 여부는 앎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도 생기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어떤 앎이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나 한계를 인식할 때 일어난다. 참된 앎에 이르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없다. 저마다의 관점과 접근으로 참된 앎에 도달하는 자신의 방법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기 때문에 언제나 앎의 세계는 춘추전국시대다.
아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아는 게 없는 또 다른 경우는 보다 근본적이다. 바깥의 소나무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소나무에 대한 여러 가지 속성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그린다. 예를 들면 소나무는 침엽수이고, 바위틈과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독야청청의 지조와 절개를 뽐내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소나무에 대해 자신이 겪어본 경험을 근간으로 “소나무는 이렇다”라고 생각하는 다양한 모습을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담아둔다. 소나무에 대해 저마다 생각하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린 모습을 전문용어로 표상 또는 재현(representation)이라고 한다. ‘체하는 인지’에 따르면 소나무 종류가 다르고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살아가는 다른 소나무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소나무에 대한 보편적인 속성을 공유한 까닭에 저마다 다른 위치에서 다른 모습으로 자라는 소나무라도 사람마다 거의 비슷한 이미지를 공유한다. 소나무를 거울에 비추어 소나무의 본질적인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결과 생기는 이미지가 바로 소나무에 대한 표상이고 그것이야말로 소나무를 가장 잘 아는 인식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체하는 인지’에 따르면 소나무를 인식하는 주체와 무관하게 객관적인 소나무가 이미 밖에 존재한다. 소나무를 안다는 것은 밖에 이미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소나무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 그 모습을 그대로 옮겨 그려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소나무를 인식하는 사람의 유일한 역할은 이미 바깥에 존재하는 소나무의 실제 모습을 머릿속의 이미지로 1:1로 매칭될 정도로 실물 모습 그대로의 이미지로 옮기는 작업이다. 머릿속에 그려진 소나무의 모습이 바깥에 있는 소나무의 모습과 가급적 동일하게 그려질 때를 표상 또는 재현이라고 한다. 밖의 소나무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듯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놓은 결과 머릿속에 생긴 심상(心象)이 표상인 셈이다. ‘체하는 인지’로 파악된 소나무의 모습은 일정한 시점에서의 소나무의 한 모습을 나타낼 뿐, 소나무의 진면목을 담고 있는 진정한 앎이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소나무를 아는 ‘체’ 할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는 앎일 뿐이다.
아는 ‘체하는 인지’의 치명적인 한계나 문제점은 사물이나 현상의 진면목은 이미 바깥에 정해진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누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생각 소나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지에 따라 인지과정 자체가 소나무를 인지하려는 노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데 있다. 인지는 앎의 결과로 머물러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정체된 명사적 앎이 아니라 앎이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앎으로 거듭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의 동사적 앎이다. 예를 들면 생물학자에게 소나무는 침엽수이고, 시인에게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이미지로 그려지며, 지식생태학자에게 소나무는 다른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독단적 나무다. 왜냐하면 소나무 주변에는 다른 나무가 살지 못하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독소 같은 액을 뿜어냄으로써 자기 혼자 살아가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앎은 한 존재의 떨림에 반응하는 울림이 공명작용을 일으킬 때 발생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부른다. 관찰(observation)에 의해 같은 물질도 전혀 다른 성질로 파악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혁신적인 발견이다. 파동에너지의 상태로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양자가 관찰자에 포착되는 순간 양자가 입자로 관측되는 효과다. 관찰자 효과를 양자 물리학자 울프 박사는 ‘신의 속임수(God’s trick)’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관찰자 효과에 비추어 세상의 존재를 들여다보면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떨림으로 신호를 보내는 순간 다른 존재가 그 떨림에 반응하면서 울림으로 교감되는 순간 공명이 일어난다. 한 존재의 떨림이 다른 존재가 받아들여 울림으로 반응할 때 공명이 일어나는 순간, 두 존재는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매 순간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간직한 채 가능성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는 또 다른 존재에게 포착되는 순간 떨림의 신호가 울림의 기호로 전달되면서 공감의 연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이처럼 모든 앎은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객체나 대상과 무관하게 뇌에 입력되는 기호나 정보를 처리하고가 계산하는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이거나 뇌세포 간 연결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화학적 반응이 아니다. 이런 앎에는 앎의 주체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나 열정, 지향하는 철학과 신념이 거세된 건조한 앎이다. 이런 앎을 대하는 순간 책상에서 머리로 재단한 관념적 앎으로 역동적인 생활세계를 재단하려는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 느껴질 뿐이다. 세상에는 인식주체와 무관하게 그냥 거기 존재하는 사물이나 현상, 사람이나 환경은 없다. 다 저마다의 목소리로 뭔가를 향한 갈망을 지닌 채 흔들리거나 떨고 있다. 그런 흔들림이나 떨림에 민감한 촉수로 반응하는 울림이 공명작용을 일으킬 때 새로운 구조접속이 일어나며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나 연기로 묶인다. 그 순간 운명적인 깨달음의 향연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거대한 앎의 촉수가 상호 연결되어 지각의 연대가 일어난다.
앎은 앎이 발생하는 특수한 환경이나 상황적 맥락을 무대로 태어난다. 모든 앎은 그 앎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적 특수성이나 절대로 반복할 수 없는 단독적 사건을 계기로 탄생한다. 그 어떤 앎과도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구체적이고 상황 구속적인 깨달음이기에 일정기간과 특정 공간에서만 통용되는 일리(一理)일 수밖에 없다. 그 앎에는 사람 냄새가 들어 있고 하나의 앎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개입된 모든 사람과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가 서로에게 인연이 되어 만들어낸 사회역사적 합작품이다. 특정한 맥락에서 고유한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모든 앎은 몸이 환경과 밀착된 상호작용 속에서 문화적 고유함과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생성되는 과정이자 역동적인 흐름이다. 이런 앎은 진리라는 미명으로 무조건적 권위에 호소하며 강압적 복종을 강요해 왔던 독선적 주장이야말로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헛소리라고 일갈한다. 앎은 육체성이나 신체성으로 전쟁과도 같은 삶의 구체성 속에서 육박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몸으로 건져 올린 열정적인 주장이자 굽힐 수 없는 신념의 산물이다.
앎은 상호의존적인 주객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질적으로 비약하는 과정이다
고전적 인지론이나 전통적인 인식론에 따르면 앎의 과정에 개입되는 인식주체의 결연한 결단이나 열정적 문제의식은 순수한 진리를 만드는 과정에 개입되는 불순물이라고 생각한다. 앎에는 한 사람의 열정과 문제의식, 지향하는 신념과 가치관이 들어갈수록 보편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이유로 몸속에 들끓는 욕망이나 변화무쌍한 감정, 몸과 함께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차단하고 오로지 개관적인 이성으로만 앎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체하는 인지나 체한 인지로는 진정한 인지의 본질을 밝히는 데 여러 가지 한계나 문제점이 있음이 밝혀지면서 제3의 인지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발제(enaction)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대안적 인식의 지평을 열어가는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다. 이들에 따르면 “인지는 경험대상과 맺는 관계”(p.103)다. 따라서 언제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면서 경험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인지에 따라 인지는 전혀 방식으로 생성된다.
‘체화된 인지’는 데카르트가 저지른 몸과 마음의 이분법적 분류로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이성의 힘만으로 진리에 도달하려는 발상은 물론 인간의 복잡 다변화되는 마음의 상태를 몇 가지 기호로 조작해서 컴퓨터처럼 입력되는 정보처리 기계로 환원시키는 고전적 인지주의나, 뇌 속에서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뇌세포의 생물학적-신경과학적 접근으로 파악하려는 모든 입장에 반기를 든다. 체화주의는 말 그대로 몸이 주어진 환경이나 유기체와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과정에서 인지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체화주의는 몸의 적극적 참여 없이 뇌라는 공간에서 폐쇄적으로 일어나는 독립적인 변화를 앎으로 보지 않고, 몸이 개입되는 함과 동시에 환경이나 유기체와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지각은 인식 주체의 다음 행동을 규정한다. 앎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행동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앎이 일어나는 동시에 행동이 발생하고 그 행동은 다시 앎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주어진 상황적 맥락이나 문화적 전통에 비추어 발생하는 앎을 해석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 체화주의자에게 앎은 특정 상황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자 문화적 전통에 따라 해석되는 보편적인 틀이다. 구체적 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보편적 틀에 비추어 재해석되고, 보편적인 틀은 구체적인 사건이 지니는 의미체계에 영향을 받으면서 또 다른 문화적 전통으로 거듭난다.
‘체화된 인지’에 따르면 인지는 앎의 주체인 유기체 내에서만 폐쇄적으로 일어나는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다, 오히여 인지는 인공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물론 비생명체가 인간의 몸과 뇌 또는 마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만나면서 일어나는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체화는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반성”(p. 67)이다. 몸이 환경을 매개로 마음에 작용하는 과정은 물론 마음이 몸을 매개로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과정을 반성할 때 이전과 다른 인지가 생긴다. 여기서 일어나는 체화된 “인지는 세계 내에서 한 존재가 수행하는 다양한 행위의 역사에 기반을 두고 마음과 세계가 함께 만들어내는 과정”(p. 42)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지는 두뇌의 독립적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몸을 기반으로 특정 상황적 맥락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두뇌나 마음이 함께 참여하면서 만들어내는 관계의 산물이다. 앎은 인지체계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상호의존적인 주객이 모두 변형되는 질적 비약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이다.
‘체화된 인지’ 접근은 인지과정에 몸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강조하는 입장과 문제의식을 풀어가려는 관점에 따라 주장하는 바가 다소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체화된 인지’처럼 ‘몸’을 기반으로 인지과정을 복원시키려는 입장(embodied mind), 마음이 환경에 붙박여 있다는 구현된 마인드(embedded mind), 구체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인지된다는 상황인지(situated cognition), 생명체는 물론 비생명체에도 마음이 붙박여 있다는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 등 다양한 입장을 표명하는 마음과 인지에 관한 주장이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해결하려는 자기만의 접근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체화된 인지’는 두뇌의 고유한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뇌와 환경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일어난 사회역사적 합작품이라는 사실에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일리’라는 가슴을 거치지 않고 ‘진리’라는 머리에 이를 수 있는 방식은 없다
앎이 발생하는 상황이나 배경은 “의미연관적 사건들의 계속적 생성”(p.245)이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다. 인지는 그래서 우선 주어진 상황이 요구하는 바대로 몸을 개입시켜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인지구조가 변하는 경험의존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심리적인 문제다. 의미연관적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는 과정에 몸이 관여되지 않고 책상에서 두뇌회전으로 생기는 앎은 맥락에 의존하지 않는 공허한 앎일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 특정 경험이 만들어내는 경험의존적 이해는 그 경험을 발생시키며 해석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화적 체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문화적 체계는 특정한 시공간에서만 진리로 통용되는 일리를 생산하는 콘텍스트다. 콘텍스트에서 일어나는 실천은 복잡한 가치관이 상충하고 갈등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판단과 윤리적 결단의 문제다.
여기에는 보편타당한 진리나 누구나 반드시 따라야 하는 도덕적 계율은 없다. 이런 상황은 “진리보다 정리(情理), 이치의 정합성보다 사태의 긴급성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현실”(김영민, 1998, p.191)이다. 몸과 마음, 이성과 감성, 주체와 객체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어 의사결정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진리라는 이름의 폭군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주어진 맥락에 조응하지 못하는 우상에 불과하다. 주어진 상황적 맥락에서 일정 기간만 믿음의 근거로 통용되는 “일리라는 가슴을 거치지 않고 진리라는 머리에 이를 수 있는 방식은 없다”(김영민, 1998, p.196). 체화된 인지가 생산하는 모든 앎은 진리도 무리도 아닌 일리다.
인지가 몸에 근거하고 있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라는 가정을 품고 있다. 몸이 없는 마음은 거처를 잃은 채 방황하는 방랑자일 뿐이다. 여기서 ‘체화된 인지’의 중요한 개념인 ‘발제(enaction)’에 주목해야 되는 이유가 부각된다. 인지가 발제인 이유는 앎이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두뇌회전을 하는 가운데 탄생되지 않고, 오히려 앎은 몸을 움직여 주어진 환경에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 신체적 자각에 두뇌가 반응하고, 깨달음을 얻은 두뇌는 다시 다음 몸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친다. 그 사이 몸은 주어진 상황적 맥락에서 순간적으로 어떤 행동을 다음에 취할 것인지를 결정해서 몸을 움직이는 순간 이전과 다른 지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몸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며 주어진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순간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앎을 몸에 각인시킨다.
앎의 과정에 개입되거나 관여하는 모든 구성요소들이 서로가에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치면서 공진화하는 과정이 바로 발제다. 앎은 삶이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곳에서 일어나는 함과 무관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앎은 곧 행위이자 그 행위는 다시 앎을 규제하는 가운데 상호의존적으로 공진화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이런 점에서 체화된 인지가 주장하는 발제는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앎의 나무》에서 밝힌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p.34)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의 저자로 거듭난다
발제라는 개념에 비추어 독서를 재해석해보면 고전적인 인지론이 옹호하는 표상이나 재현 개념과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표상이나 재현의 입장에서 독서는 책을 쓰는 저자와 독자는 독립적인 두 행위자다. 책은 언제나 독자의 입장과 무관하게 밖에 존재하는 진리체계의 모음집이다. 책 속에 저자가 쓴 모든 지식정보는 미리 만들어져서 독립적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메시지다. 저자가 독자의 관심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저술한 메시지는 독자의 마음속에 거울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처럼 그대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독자의 해석가능성은 이미 저자가 정해놓은 셈이다. 저자의 메시지에 담긴 의미와 의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표상으로 재현하느냐가 독자의 책 읽기 방식을 결정하는 유일한 관점이자 접근이다. 이게 바로 저자가 원하는 메시지가 독자의 마음속에 그려지기를 원하는 표상이다. 저자의 표상과 독자의 표상은 한 치의 오차나 오독 없이 1:1로 매칭되어야 한다. 저자의 의도나 의미는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때 가장 이상적인 독서가 발생한다고 보는 입장에 표상이나 재현을 주장하는 고전적 인지론자의 주장이다.
한편 발제를 중심으로 체화된 인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이상적인 독서는 표상이나 재현의 독서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우선 체화된 인지에 따르면 책을 쓰는 저자와 읽는 독자는 따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사람이 아니다. 작가(作家)가 독자(讀者)가 되고 독자가 작가가 되는 작독자(作讀者)로 거듭난다.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와 만나면서 연속적인 자기 변화를 통해 창조적으로 오독되거나 재창조된다. 책의 초반부를 읽을 때의 독자의 모습과 중반부를 넘어 마지막 부분을 읽어나가는 독자, 종국에는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 독서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저자의 메시지가 독자에게로 파고들어 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변화된 지각이 다음 독서행위에 영향을 끼치면서 저자는 독자에게 독자는 저자에게 책을 매개로 혼연일체가 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무한 발제를 거듭한다. 발제는 이처럼 인지과정에 관여하는 참여자들을 주객으로 나누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인연이 되어 무한 연기(緣起)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책을 썼지만 그 의도대로 독자가 해석을 할 수도 있고 저자의 의도와는 반대 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책의 메시지를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독자가 저자의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저자의 의도가 담긴 텍스트는 여러 번 탄생과 죽음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독자는 자신의 체험과 사고체계 안에서 저자의 텍스트가 지향하는 메시지의 의미와 의도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창조적 오독자다. 오독은 잘 못된 독서가 아니라 독자가 저마다의 자유로운 해석으로 저자의 텍스를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독서다. 알랭 드 보통이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의 저자"라고 말한 까닭이다. 책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수많은 독자로부터 또 다른 저자를 탄생시킨다. 책을 읽어내는 독자의 인지체계에 의해 체화되는 앎의 구조는 지금까지 이해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자의 메시지를 지각하고 해석하는 특수한 세계를 끊임없이 발제(enaction)하는 이유다. 독서에 발제는 책을 읽는 이해력이나 해석방식을 부단히 창조하는 촉발점일 뿐만 아니라 책을 만나는 독서행위의 방향과 성격에도 영향을 미치는 각성제다.
몸짓은 눈짓과 만날 때 전율하는 감동으로 몸을 파고든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발제개념을 도입, ‘체화된 인지’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시도하면 발제 개념이 추구하는 ‘체화된 인지’ 개념의 구체적인 의미와 의도를 보다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꽃을 인지하는 주체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미 자연에 꽃이 존재하고 있지만, 꽃의 떨림을 몸으로 감각하지 못한 주체는 울림으로 화답하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표현은 인식주체와 무관하게 밖에 존재하던 꽃이라는 객체는 이제 비로소 인식주체의 적극적 개입으로 인하여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특별한 꽃이다. 하나의 이름 없는 몸짓에 불과하던 무의미한 꽃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관찰하는 순간 잊을 수 없는 의미심장한 꽃으로 몸에 각인된다. 양자역학으로 해석하면 파동으로 존재하던 몸짓이 관찰자의 애정 어린 관심과 관찰로 입자로 변신하면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표현은 이제 꽃은 관찰자에게 일방적으로 포착되는 객체로서의 꽃이 아니라 나와 한 몸이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꽃이다. 즉 나는 너에게 꽃이지만 너는 나에게 꽂힌 상태가 된 것이다.
마지막 연에 나오는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를 ‘체화된 인지’에 비추어 해석해 보면 바깥의 꽃이 보낸 몸짓은 이제 나에게 눈짓으로 다가왔고, 꽃의 몸짓을 포착한 나는 눈짓으로 꽃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는 과정이다. 꽃의 몸부림으로 보여준 존재의 떨림은 꽃을 인지한 사람의 울림을 끌어냈으며, 울림과 떨림은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어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인연의 연장선을 탄 것이다. ‘체화된 인지’에 따르면 꽃은 보는 사람에 따라 똑같은 이미지로 표상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아무리 꽃이 발악을 하며 자신을 봐달라고 아우성을 쳐도 그 꽃의 몸짓을 받아들이는 눈짓이 없다면 꽃은 그저 이름 없는 풀에 불과하다. 하지만 꽃의 몸짓을 눈여겨본 사람이 꽃이 의도하는 의미를 포착하는 순간 꽃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은 그 순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몸에 각인되면서 전율이 일어난다. 이미 꽃에 꽂힌 몸은 이전과 더 적극적으로 꽃의 존재가 던져주는 의미심장한 바다에 몸을 던져 꽃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받은 꽃은 이제 들판의 지나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하나의 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에 빠뜨린 전 세계 유일무이한 단독적인 꽃으로 거듭난다. 발제 개념에 비추어 해석해 본 꽃에 대한 ‘체화된 인지’는 인간적 지혜로 거듭나는 고속도로를 탄 셈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자신을 봐달라고 온몸으로 떨림의 신호를 보내며 몸짓하는 무수한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존재한다. 늘 만나는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 일상에서 비상을 꿈꾸는 상상력을 잉태하고 있는 무수한 존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 보내는 몸짓은 누군가 나를 봐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애절한 몸부림이다. 나를 비롯해 우리 주변에는 꽃의 몸짓처럼 저마다의 위치에서 관심과 애정의 손길을 기다리며 아우성을 치는 존재들의 숲이 펼쳐져 있다. 몸짓은 따듯한 관심과 애정 어린 손길을 품은 ‘눈짓’을 만날 때 어제와 다른 존재로 혁명을 거듭하며 운명조차 바뀌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과 이유를 갖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위치에서 오늘도 뜨거운 몸짓’을 보내고 있다. 그 몸짓을 인지한 눈짓은 도토리가 참나무로 변신하고 달걀이 병아리로 부화되는 감동적인 발제(enaction)다.
물리학자 울프가 “우주의 모든 양자는 물질(입자)의 형태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동들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주의 모든 존재는 누군가의 부름을 받기를 기다리며 몸부림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발버둥 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를 기울일 때 내 몸은 마인드의 통제를 받기 전 몸으로 반응한다. 존재의 애절한 몸짓을 몸으로 인지한 첫 번째 반응이 상대를 향한 뜨거운 눈짓이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몸은 마음의 통제권을 벗어나 사랑하는 상대를 향해 스피드 범퍼도 무시하고 달려간다. ‘체화된 인지’는 이렇게 주어진 상황적 맥락이 요구하는 반응에 몸으로 반응하는 가운데 어제와 다른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기반으로 어제와 행위를 반복하며 삶의 터전을 앎의 텃밭으로 일궈나가는 혁명의 주동자다. 이유 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주변을 돌볼 때 체화된 인지는 일상의 어느 곳에서나 폭발하는 인식의 혁명을 시작할 수 있다.
p.s.: 이 글은 다음 책을 읽고 느끼고 깨달은 점을 참고해서 작성된 글입니다. 본문의 페이지 숫자는 해당 책의 페이지입니다. 프란시스코 바렐라, 에반 톰슨, 엘리노어 로쉬(지음), 석봉래(번역)(2013). 《몸의 인지과학》. 서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