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을 뒤집느라 보낸 절반의 ‘경력’이 말하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한양대학교 교수
10대에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시골에서 수렵, 어로, 채취, 농경 생활을 경험하면서 책보다는 자연, ‘공자’보다는 ‘놀자’라는 스승을 모시고 낮에는 밭은 갈고 밤에는 잠을 자는 주경야침(晝耕夜寢)하는 생활을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들어갈 형편이 못되어 뒤늦게 공부를 이어가다 어렵게 공고에 입학하여 국영수과목 대신에 철판용접을 하면서 회색빛 청춘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 후배 구타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맞고 배운 술과 담배로 회색빛 청춘을 보냈다. 10대에는 노을이 아름다운 가을도 계절의 한 순 간일뿐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도 여유도 없었다. 누군가의 심장을 두드리는 꿈도 오늘을 넘기기에 바쁜 나에게는 한 낯 사치에 불과했다.
20대에는 평택 화력발전소에 근무하면서 유흥가를 점철하며 방황을 거듭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다 우연히 만난 고시체험생 수기집을 읽고 인생역전을 꿈꾸기 시작했다. 공고생이 고시에 합격한 감동적인 합격수기집을 읽고 밑바닥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길이 고시공부라는 잘 못된 판단과 결단을 내리고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시공부가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줄 거 같지 않아서 고시를 포기하고 읽고 싶은 책의 바다에 빠져 새벽을 잉태하는 독서로 오이가 피클로 바뀌는 혁명적인 경험을 했다. 20대에는 밤새 내린 된 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낮의 열기를 그리워하는 이름 모를 풀잎의 가냘픈 미소에도 주목할 낭만이 없었다. 나에게 20대는 뒷굽이 다 닳은 고독한 신발을 신고 여전히 갈 길이 먼 다급한 마음 억누르며 다시 분발하려는 바람의 여행자였다.
30대에는 스승님 덕분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 주독야경(晝讀夜耕) 생활을 했다. 공부하는 삶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알아가는 경이로운 감동이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힘이라는 걸 깨달았다. 장기적으로 몰입하는 뇌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요함을 몸소 깨닫고 30년 이상 매일 아침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면서 신체성이 한 사람의 정체성이자 미래 가능성임을 몸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유학 후 삼성인력개발원에서 5년간 현장 체험을 통해 책상지식으로 쌓은 신념이 무력한 관념의 파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석사(碩士)도 돌 ‘석(石)’자고, 박사(博士)도 엷을 ‘박(薄)’자가 될 수 있음을 격전의 현장에서 겪은 아픈 현실경험 덕분에 30대 초반에 첫 책을 출간했지만 졸작을 면치 못하는 고전을 경험했다. 덕분에 그동안 고뇌했던 지식생태학적 문제의식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생존방식과 원리를 연구, 사람의 생각과 조직변화를 위한 단서를 찾아 문제 상황에 적용하는 지식생태학자로 퍼스널 브랜딩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관념적 지식으로 지시하기보다 체험적 지혜로 지휘하는 삶이 소중함을 몸소 깨달으며 내 몸을 관통하는 체험적 얼룩을 언어적 무늬로 벼리기 시작했다. 파란만장한 삶의 파노라마가 1998년 안동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일단락되었고, 2001년 모교의 교수가 되면서 잘못 탔던 방탕과 방랑의 기차가 방황을 거듭하다 방향을 잡고 인생의 후반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30대는 한 많은 눈물방울들이 어둠의 이불을 덮고 체온을 보존하며, 아파하는 울부짖음 속에서도 저녁노을이 부르는 어둠을 맞이하는 아련한 그리움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모두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일 수는 없으며, 매번 맞이하는 아침이 경이로운 기적일 수는 없어도 보잘것없는 보행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위대한 행보로 다가올 것이라고 대책 없이 믿었다. 바람 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내 인생악보를 구성하는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되지만 곤경 속에서도 풍경을 낳는 상상력이 삼십 대의 생을 지배하는 위력이었다.
절반의 생을 불태워 후반전의 언어를 얻다
40대에는 모교로 돌아와 교직생활을 시작하면서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방향’을 가리키는 교수로 자리매김하고 싶었다. 책상 지식인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야성으로 지성을 일깨우며 낯선 사유체계를 건축하기 위해 몸이 개입되는 도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현장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기업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길들여지는 타성과 상식을 흔들 어깨 우는 낯선 책을 읽으며 습득한 날 선 개념으로 낯선 체험을 번역하는 과정을 꾸준히 전개했다. 야성이 없는 지성은 지루하고 지성이 없는 야성은 야만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신념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관념의 파편으로 제조된 맴도는 ‘머리의 언어’보다 눈물과 땀으로 건져 올린 꽂히는 ‘몸의 언어’로 말하고 쓰기 위해 애쓰며 경계를 넘나드는 읽기와 쓰기를 병행하려고 노력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 2007년 4월 11일 잠깐 졸다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날 뻔했던 대형교통사고로 갈비뼈와 팔뼈, 그리고 목뼈까지도 중상을 입는 대형교통사고가 났다. 곡선의 몰음표를 던지지 않고 직선의 느낌표를 찾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목숨 걸고 직선으로 질주하다 목숨이 끊어질 뻔했던 아찔한 사고로 사고를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시를 읽고 곡선의 은유로 사유체계를 재건축하는 40대 후반을 살았다.
2007년 4.11일 밤 12시 50분 분당 수서 고속도로에서 전복사고
본격적인 저술작업과 대중강연을 시작했지만 전율하는 감동과 생각의 지진을 일으킬 정도로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혁명적인 작품과 강연이 되기에는 아직 갈길이 멀다는 걸 깨달았다. 더 치열하게 독서하고 더 처절하게 한계에 도전하는 체험을 융복합, 어제와 다른 날 선 언어로 벼리고 벼리면서 낯선 생각을 잉태하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지식생태학적 문제의식도 갈고닦으며 지식생태학 책을 출간하면서 즐거운 학습을 통해 건강한 지식을 출산하는 생태학적 대안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마흔은 게으름을 먹고살던 나태함이 태만과 교만을 만나 세상사는 고민을 털어놓는 순간 당돌한 하품이 입을 고속으로 닫으며 내뱉는 슬럼프의 하소연을 말할 때 고단한 몸에 의미의 파편을 심으며 순간 속에서 영원을 지향하는 구도자의 마음이었다. 주소도 없이 흩날리다 비에 젖은 단풍잎 하나가 찬 바닥에 달라붙어 긴 한숨을 쉬는 것처럼 남을 위해 달리기만 했던 마흔에게도 우수에 젖어 앞조차 보이지 않았던 어둔 시절을 달빛에 비추어 위로의 한마미를 건네주어야 하는 이유였다. 나에게 사십은 상처 입은 짐 심이 방향감을 상실한 채 뛰어다니는 것처럼 내면의 아픈 기억을 보듬으며 새벽공기가 엄습할 때까지 몸부림치며 행간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어리석은 여행객이었다.
50대에는 인생 전반전을 앞만 보고 달려오며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남은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살아갈지 자문을 거듭하다 2012년 문득 사하라 사막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장을 머뭇거리지 않고 내밀었다. 결과는 완주 도중에 체력의 한계로 포기하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마라”는 세계적인 명언을 남겼다. 2014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제주도 100Km 울트라 마라톤에 참가하고 2015년 킬리만자로(5,895m), 2019년 2,500m급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뚜르드 몽블랑 트레킹, 2022년 말레이시아의 키나발루 산 등반(4,905m) 등반, 2023년 일본의 후지산 등반(3,776m)을 이어가면서 통념과 타성에 젖으려는 관성을 폐기하고 어제와 다른 탄성으로 실천적 지혜를 몸으로 깨닫는 방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다양한 체험적 깨달음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번역하고 쓰면서 현재 97권의 저역서를 출간한 지식생태학자는 오늘도 사건 속에서 잉태된 의미를 기반으로 차이를 반복하는 지식임신 중이다. 새로운 책을 구상하는 순간 심한 지식입덧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심한 진통을 경험하며 책이 출산되는 산통을 기꺼이 수용하며 즐거운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한 권을 쓰거나 번역할 때마다 익숙한 일상을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며 비상하는 상상력을 언어로 낚아채는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낯선 질문으로 어제와 다른 파문을 일으키며 전대미문의 관문을 열어가는 질문술사로 여전히 변신 중이다.
나에게 오십은 ‘단조로움’이 일상을 뒤덮어도 ‘날카로움’을 무기로 ‘대수로움’을 만나 ‘경이로움’으로 뒤바꾸거나 ‘여유로움’으로 번역하는 느긋한 지혜가 손을 내미는 시기다. 오십은 어제 흘러간 강물을 되돌려 후회하지 않고 스치는 바람에 맨살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은 황혼 예찬자다. 새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타고 허공에 몸을 던져도 두렵지 않은 어릿광대이며,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던져 바다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싶은 철부지 예술가다. 적어도 나에게 오십은 지금부터라도 내 숨결을 채집해 세상 살아가는 지혜의 연료나 원료로 쓰겠다고 다짐하는 나이다. 인간의 힘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새벽이슬 한 방울에 담긴 자연의 섭리도 경건한 마음으로 배울 수 있는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오십이다. 오십은 모든 역경이 경력이 되는 제2의 봄이다.
비애를 씻어 비상하는 상상력의 언어를 벼리다
60대에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다.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불운’도 ‘불행’으로 달려가는 급행열차를 타기 전에 깨달음을 던져주는 의미로 재해석하는 공부를 즐긴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 괴롭혀도 끌어안고 그것의 숨은 의미와 의도를 파고드는 앎의 두께와 깊이를 사랑한다. 앎으로 삶을 재단하는 관념적 지식인이기보다 삶으로 앎을 직조하며 늘 낯선 생각이 잉태되는 개념의 궁전을 건축하고 싶다. 삶의 모든 순간이 몸에 외로움의 촉수로 박혀 있어도 건드리면 아무 데서나 세레나데가 울리고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 예술을 살고 싶다. 몸이 움직이면 영혼도 따라 움직이고, 걸어가는 족적마다 다 음악이며, 달빛에 그을려진 서글픔도 그림이 되는 아슬아슬한 기적을 만들고 싶다.
나에게 육십은 녹슨 기차 길 위로 눈보라 몰아치다 외로움의 평행선과 맞닿는 순간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휘파람 불며 노곤함을 달랠 때에도 한 뼘 자란 생각으로 내일의 찬가를 작곡하는 나이다. 나에게 육십은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는 순간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의 경적이 세월의 흐름을 추월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는 산책하는 나이다.
유씨 집안의 씨앗으로 세상에 뿌려졌지만 수많은 접속과 접촉을 통해 변신을 거듭하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우연한 만남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방랑하는 예술가다. 한 사람의 인간은 살아가면서 우연히 접속했거나 접촉했던 만남으로 어제와 다르게 부단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대체불가능한 동사적 존재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어제와 다른 의미를 생산하는 사건의 산물이다. 사건은 우연한 접속이나 접촉으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모든 만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 명사적 존재가 아니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제와 다르게 다른 존재와 접속하거나 접촉하면서 늘 변신을 거듭하며 새롭게 태어나는 동사적 인간이다.
《노자》에 난이상성(難易相成)이라는 말이 나온다. 어려움이 쉬움을 만나거나 쉬움이 어려움을 만나 그 사이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는 의미다. 의미는 내가 타자와 만나는 사건을 통해 비로소 발생되는 데 그 의미도 어떤 순간 고정된 의미로 정체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대체되면서 계속 새로 태어난다. 이전과 질적인 차이가 나는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삶은 의미심장해진다.
모든 존재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며 거듭나는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저마다 다른 사건을 만나 의미가 생성되면 그만큼 내 몸에는 다른 경험적 흔적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그 사람 특유의 주름이 생긴다. 사람마다 겪는 사건이 다르고 그 사건마다 어제와 다른 의미의 차이가 생성되면서 각자의 다양한 주림이 겹쳐서 생기는 게 다양체(multiplicity)다. 다양체는 살아가면서 만든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multi) 주름(pli)으로 직조되며 생기는 정체성의 여러 가지 모습이다. 자연과 벗 삼아 수렵-어로-채취-농경생활을 하면서 생긴 주름은 고등학교 때 용접을 하면서 전혀 다른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평택화력 발전소를 거쳐 고시 공부하기 위해 한양대학교 입학하면서 공부하는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삶의 희로애락이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유영만의 다양체는 어제와 다른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탄생되는 의미 속에서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60대를 향해 또 다른 변신을 거듭하며 50대의 유영만과는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는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는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의 잠재성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우발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생성하는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생산하는 의미의 차이는 반복되는 사건에 거주한다.
‘삶이 쓰다’는 사실을 몸소 겪어본 느낌으로 책을 읽고, 읽은 대로 실천하며, 실천하는 대로 몸이 말하는 글을 짓고 책을 계속 쓸 것이다. 언제나 신인의 자세로 배우는 배우를 꿈꾸며 영원한 현역으로 뛰기 위해 밥먹듯이 체력을 단련할 것이다. 또 다른 작품을 창작하고 어제와 다른 서사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일상을 관찰하고 묘사하며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을 가꿔나갈 것이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절반의 기쁨을 발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