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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은 적극적 수용이자
긍정이고 욕망이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알려준 삶의 ‘일리’와 ‘진리’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알려준 삶의 일리와 진리


“오늘 밤 네 시 마술 극장으로 올 것

―미친 사람만 입장 가능

입장료로 이성을 지불할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음. 헤르미네는 지옥에 있음”(233쪽).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 나오는 말이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오십 줄의 고독한 지식인이다. 그가 지닌 이중적 성격을 한 마디로 말하면 황야의 이리다. 낮에는 고립된 다락방에서 정신적 사부인 괴테를 흠모하며 은둔자처럼 살아가고 밤에는 싸구려 술집을 전전하며 내면의 관능적 감성을 조금이나마 털어버린다. 사상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며 꽃을 피운 시민사회의 규율과 도덕에 길들여진 정돈된 이성과 본성의 세계와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과 본능적 충동으로 어둠과 잔인함의 세계에 동거하며 주어진 현실적 고통을 승화시키려 발버둥 치는 고독한 이상주의자다. 삶이 오르락내리락, 들락날락하면서 극심한 동요를 거듭한다. 자유와 일탈을 얻기도 했지만 고독과 이해받지 못한 안타까움에 절망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헤르만 헤세는 하리 할러의 삶을 지속적인 몰락이자 부단한 일탈이었다고 소회 한다. 하지만 이런 몰락과 일탈이 이전과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한 전초전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편 내면에서 밖으로 나오려는 야성적 이리의 속성은 공식적 제도교육이나 시민사회의 다양한 규율과 도덕적 규범으로 억누르고 제거하려는 노력이 전개된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보면 황양의 이리처럼 날뛰려는 야생마적 기질을 길들여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소년의 내면에는 거칠고 야만적인 무질서의 요소가 숨어있다. 먼저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 그것은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다. 먼저 그것을 밟아 꺼버려야 한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예측불허의, 불투명한, 위험스러운 존재이다. 인간은 미지의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72쪽). 야만적 무질서와 위험한 불꽃은 강압적인 제도적 권력으로 억누를 수 없는 인간의 또 다른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래서 헤세는 인간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철길위의 철도나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각종 자동차라기보다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물줄기이며 과학으로도 밝혀내기 어려운 미지의 원시림이라고 한 것이다. 원시림으로 향하는 내면여행은 평생을 반복해도 끝이 나지 않은 영원한 미완성의 여정이다.



고통의 개성화를 통해 어제와 다른 개성을 지니다


하리 할러는 문학과 예술에 남다른 식견과 안목을 갖고 있는 명망 있는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전쟁에 반대하는 기고문을 발표한 후 그의 삶은 송두리째 휘말리기 시작한다. 아내와 이혼하고, 당대 지식인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마땅한 도리이자 권리인 저작물 출판권도 금지당한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명성과 덕망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하리 할러는 깊은 회의감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의 의미를 붙잡고 사투를 벌이지만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동안 온 힘을 다해 축적한 이성과 논리의 세계가 오히려 자신을 경멸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하리 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쌓아 올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적 가치의 체계다. 여기는 시민사회가 유지되어 온 전통과 문명의 힘으로 축적한 다양한 사상과 예술적 교양의 산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황야의 이리》에서 이리가 추구하는 세계는 야성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성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다. 이런 이분법적 구분 속에서 인간과 늑대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원수지간으로 평생을 갈등과 대립 구도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선천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에 거친 야성 세계로 도약할 수 없고 그렇다고 타성에 젖은 시민 사회의 무겁고 버거우면서도 포근한 별에 사로 잡히기 싫은 이중적 회색지대에서 안간힘을 쓰는 하리 할러는 내면 깊숙이 잠자는 야성의 본능을 갖고 있지만,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사회, 즉 시민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야성을 이성과 지성으로 억압하며 살아가야는 운명을 타고났다. 야생의 위험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중생이 안주하는 시민사회에 길들여지는 모습을 알면서도 지금은 일면 수긍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모순은 이런 것이다. 즉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면서도 그 세계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실제로 인간들은 세계에 집착하며, 거의 대부분이 세계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449쪽). 알베르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이야기했던 모순처럼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의 안온함에 젖어 벗어나지 않으려는 타성에 젖어 살아가려는 모순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하리 할러는 그 모순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살아가지만은 않는다. 딜레마적 상황에서 현실안주를 선언하고 시민사회가 길들여놓은 대중의 무리 속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고통의 노선을 선택, 이성과 야성, 본성과 본능, 통제와 충동, 어둠과 밝음, 갈등과 평화를 오고 가며 자기 변신을 위한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 하리 할러는 니체가 말하는 고통의 능력을 통해 고생하지만 그런 삶으로 지고의 가치를 지닌 창작욕에 몰두하는 고통의 천재이기도 하다. 헤르만 헤세는 이런 점에서 “고통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모든 고통은 우리의 고귀함에 대한 기억”(27쪽)이라고 말한다. 헤르만 헤세가 하리 할러를 주어진 고통 속에서도 자기 고유한 개성을 창조하는 몸부림의 상징으로 “고통스러운 개성화”(91쪽)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다. 


미친 사람만 입장 가능한 마술 극장에 초대된 하리 할러는 길들여진 이성을 입장료로 지불하고 새로운 자세와 태도로 빠져든다. 취한 듯 눈이 풀린 사람들이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춤을 추며, 황홀경에 빠진 사람들이 모임의 도취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미친 듯한 몰락을 경험한 하리 할러는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유혹한 헤르미네의 마력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마술극장에서는 그동안 자신을 생각의 감옥에 가둔 개성이라고 생각했던 허상과 황야의 이리가 쓰고 있었던 고리타분한 안경을 벗고 온갖 욕망의 굴레와 자본의 향락에서 벗어나 존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머를 배워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야 다른 사상가의 지나친 진지함에 종속되지도 않고 황야의 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하리 러는 마술의 극장에서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소중한 진리를 깨닫는다. “세상을 부정하면서 세상에 사는 것, 법을 존중하면서도 법을 넘어서는 것, 소유하지 않는 듯이 소유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듯이 포기하는 것-자주 인용되고 즐겨 요구되는 이 모든 고귀한 삶의 지혜들을 실현시켜 주는 건 오직 유머뿐이다”(79쪽). 마침내 하리 할러는 유머 세계의 지혜를 통해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억압의 굴레와 자살충동을 이겨내고 예술적 감각을 잃지 않은 채 시민사회로 복귀한다. 



몰락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적극적 수용이자 긍정이고 욕망이다


몰락은 절망의 나락이자 패망의 숲이 아니라 오히려 제2의 변신을 위한 전환점이자 새로운 출발이다. 한 세계에서 익숙했던 보금자리와 안락한 타성의 늪을 버리지 않는 이상 새로운 세계로의 입문은 불가능하다.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으로 시작한다. “보라! 나는 너무 많은 꿀을 모은 꿀벌이 그러하듯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나 있다. 이제는 그 지혜를 갈구하며 내민 손들이 있어야겠다. 나는 베풀어주고 싶고 나누어주고 싶다.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롭다는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기뻐하고 가난한 자들이 새삼스레 자신들의 넉넉함을 기뻐할 때까지. 그러기 위해 나는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네가 저녁마다 저편으로 떨어져 하계에 빛을 가져다줄 때 그렇게 하듯”(12쪽). 나이 서른이 되던 해 몰락한 차라투스트라는 10년 동안 산속에서 절치부심하다 지혜로운 인간, 즉 현자(賢者) 차라투스트라로 새롭게 거듭난다.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으로 내려와 지속적으로 주장한 메시지는 산상수련을 통해서 깨달은 바로 ‘몰락과 변신’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신념이다. 몰락을 긍정하고 욕망하는 인간만이 지금의 인간적 경계나 한계를 넘어서려는 위버멘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 살아가는 자, 언젠가 위버멘쉬를 출현시키기 위해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려는 자를. 그런 자는 이와 같이 그 자신의 몰락을 소망하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위버멘쉬가 머무를 집을 짓고, 그를 위해 대지와 짐승과 초목을 마련하는 자, 그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뭔가를 만들어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이와 같이 그 자신의 몰락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21쪽). 몰락은 한 번 나락으로 빠지면 영원히 복귀할 수 없는 절망의 끝자락이 아니라 몰락의 끝과 함께 다시 변신이 시작되는 희망의 텃밭이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다른 책,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 같은 맥락에서 몰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누구가 자신의 별을 가지고 있고, 누구가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라고는 단 한 가지, 몰락뿐입니다...우리 모두,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62-63쪽). 죽음은 육체적 생명체의 영원한 사멸이 아니라 나를 생각의 감옥에 가두고 사고의 식민지로 종속시키는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통념의 파괴를 의미한다. 몰락해서 죽어야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체가 탄생한다. 탄생된 생명체는 이전 생명체의 몰락이 가져다준 새로운 선물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강조하는 알을 깨고 태어나는 새의 몸부림도 몰락과 죽음을 통한 탄생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123쪽). 껍질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몸부림이 새로운 세계로 입문하는 일종의 열쇠인 셈이다.  


몰락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자멸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몰락은 니체가 말했듯이 적극적 수용이자 긍정이고 나아가 욕망이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수동적 몰락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존 시스템과 조직이 몰락해야 그 위해 새로운 시스템과 조직이 건축된다. 지루한 한 시대가 몰락해야 심장 뛰는 한 시대가 펼쳐진다. 이처럼 몰락은 몰락을 욕망하는 사람에게만 다가오는 선물 같은 방향전환이다. 몰락은 기다린다고 다가오지 않는다. 때로는 기존 시스템이 가정하는 가치관에 저항하고 그것이 휘두르는 폭력과 강압에 반항해야 한다. “반항은 그것이 바로 생의 운동이라는 것을, 살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반항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반항의 가장 순수한 부르짖음은 그때마다 한 존재를 일으켜 세운다. 반항은 그러므로 사랑이요 풍요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524쪽).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에 나오는 말이다. 반항은 무조건적 저항이 아니라 내가 믿는 세계를 건설하려는 뜨거운 안간힘이자 서늘한 항거다.



영혼의 화랑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모순에 저항하고 반항하면서 기존 질서를 바꿔보려는 자발적 몸무림이 없는 강제적 압박이나 깨뜨림은 알에서 생명체를 탄생시키지 못하고 영원한 파멸을 부를 뿐이다. 계란을 깨면 병아리라는 생명체는 탄생되지 않고 한 끼 먹을 수 있는 계란요리로 바뀔 뿐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7쪽).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이 바로 파블로 네루다가 《질문의 책》에서 말하는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에 나오는 ‘나였던 그 아이’다. 우리는 나였던 그 아이를 잃어버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냐고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다. 나였던 그 아이는 여전히 내 안에 있지만 내가 더 이상 찾지 않으니 잠재된 채로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갈 뿐이다. 


"당신이 찾는 것은 당신 자신의 정신세계라는 것도 아십니다. 당신이 동경하는 저 다른 현실은 오직 당신 자신의 내면에만 있습니다. 나는 당신 속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열어드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의 영혼의 화랑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건 기회와 자극과 열쇠일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드릴 뿐입니다(248).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 나오는 말이다. 내 안에서 그 어떤 창작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영혼의 화랑이 특유의 컬러와 스타일로 빛나고 있다. 자기 다운 색깔을 찾아 색다르게 살아가면 저절로 남달라 진다. 색다름은 남다름을 낳는 보장된 자기다움의 비결이다. 나였던 그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사라지듯이 남다르게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나만의 색다름을 잃어버린다. 



헤르만 헤세는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무시하고 통념이라는 범주를 만들어 그 속에 집어넣는 순간 자기다움은 사라진다고 한다. “자연은 수만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단계를 스무 개 정도의 색으로 축소해서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네. 이것이 그림이야”(20-21쪽). 저마다 다른 색깔의 삶을 살아가면 똑같은 자연의 생명체도 다르게 포착되어 이해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라만상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획일화시켜 하나의 범주 속에 집어넣는 순간 일반성의 그물에 걸려 생명체의 고유한 개별성이나 구체성은 실종된다. 영혼의 화랑 속에서 자라는 나다움이나 자기다움은 그 어떤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 나만의 독특함이나 개별성이 스며들어있다. 그림에는 그 사람의 그리움의 독특한 색깔이 스며들어 있다. 자기만의 화풍(畫風)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는 세상이 받아주지 않는 광기 어린 삶의 뜨거운 항거와 차가운 냉소가 뒤범벅되어 있다. 피카소의 그림에는 아무리 자기 방식으로 표현을 해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과 갈등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투사된 야심과 야망이 꿈을 꾸고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의 모순에 반항해서 기존 화풍을 몰락시키고 자기만의 영혼의 화랑을 건설한 것이다.


기존 질서에 편입되어 길들여진 방식으로 살아가는 타성이나 관성을 거부하는 사람이라야 기존 삶을 몰락시키고 새로운 삶을 건축할 수 있다. 이들은 고통과 위기 속에서도 난국을 돌파하는 혜안을 갖고 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을 맞이해도 더 ‘복(福)’된 기회를 찾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철학자란 무엇인가? 전화위복을 할 수 있는 자가 철학자다. 다가온 나쁜 일로 인하여 오히려, 악습을 끊거나 안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강을 건너가 다른 사람이 되어 강 건너편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 자. 철학자는 가장 지독한 실천가”(113쪽). 이응준의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강을 건너가는 용기 없이는 기존 틀에 박힌 삶의 연줄을 끊기로 대응할 수 없다. 가장 대담한 ‘용기’는 타성과 관성에 젖은 기존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거나 넘어서려는 ‘끊기’다. 끊어내기만 해도 집중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이 생긴다. 



살아감의 의미는 일상의 작은 신비가 낳은 산물이다

     

강건너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철학자는 가만히 앉아서 사유하는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다. 더구나 저편에서 이편을 관조하며 관념의 파편으로 삶을 재단하는 공허한 이론가도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육체노동으로 정신노동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생각함이 세계 안에서 인공호흡을 하듯 끊임없이 숨을 불어넣어 세계가 살아 숨 쉬도록 해야 한다. 사유의 노동이란 이미 완성되어 있고 저 혼자 잘 움직이는 세상을 멀리서 흘깃 훔쳐보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가슴속에서 멈추지 않고 생명을 길어내는 허파의 운동과도 같다”(43쪽). 서동욱의 《타자철학》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의 가슴은 세상을 움직이는 심장박동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개념이다. 세상의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 박동은 세상과 분리 또는 고립된 공간에서 자본의 욕망이 들끓는 본능과 충동의 세계를 이성의 통제하려는 무모한 노력에 반대한다. 오히려 세상의 가슴속에서 멈추지 않는 허파의 운동은 일상의 작은 신비마저도 놓치지 않고 감지한 다음 그것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작은 동인으로서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를 따져 물어보는 뜨거운 몸짓이다.


일상의 작은 신비가 보이기 시작하고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미지의 영역도 부각된다. 그동안 내가 무기력하게 살았던 이유도 이것저것 다하려고 살면서 너저분하게 늘어놓기만 한 삶, 삶의 신비를 밝혀주지 못하고 습관적 반복이 가져다주는 고루한 삶에 젖어들었기 때문이다. “무기력이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작은 ‘신비’를 잃어버렸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무자비하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잃은 것은 실용이나 보람이 아니라 바로 이 ‘신비’다”(84-85쪽). 이응준의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에 나오는 말이다. 작은 신비를 발견하는 어제와 다른 차이의 반복이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의 삶이다. 작은 신비를 발견하는 일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습관적으로 지나쳤던 익숙한 일상도 어제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거기에도 경이로운 신비와 기적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순간 그곳에서 의미가 살아나고 나에게 작은 신비로운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응준 작가가 말하는 일상의 신비는 대단한 놀라움이 아니다. “비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구두를 닦고 수선하는 한 늙은 사내를 알고 있다. 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루하루를 그 비좁은 생의 참호 안에서 고개를 숙인 채 앉아서 무슨 병든 세계를 치유하듯 더럽혀지고 망가진 구두를 빛나고 온전케 한다. 저녁 무렵 붉게 물드는 그의 야윈 등은 우리의 서글프고 착잡한 연대가 아니다. 나의 작은 신비다”(85쪽). 이응준의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에 나오는 말이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 늙은 남자의 야윈 등에서 고독한 노동자의 고단한 삶이 보인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도 굴하지 않고 고립된 공간이지만 고독한 사투를 벌이며 한 가정을 책임지는 노년의 뒷모습에서 사람을 읽고, 삶을 들여다보며 세상을 굽어보는 와중에 다가오는 서늘한 감동은 왜 몸을 뜨겁게 달구는 일상의 신비로 다가오는 것일까. 일상의 작은 신비는 익숙한 일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의 그물에 걸리는 놀라움이다.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서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113쪽).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나오는 말이다. 이유 없는 다정함으로 일상에 다가갈 때 보이지 않았던 존재나 현상들이 일상의 신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일상의 작은 신비’를 발견하는 순간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서 말한 ‘고집스러운 기쁨’이 연상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고집스러운 기쁨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라는 태도다. 고집스러운 기쁨이란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 희망의 종류를 바꾸는 용기일지 모른다. 그럴 때, 일상의 신비가 경험되고 삶의 또 다른 기쁨이 열린다. 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절망의 벽이 둘러쳐져 있어도 희망의 문을 찾아내려는 고집스러운 노력이 뜻밖의 경이로운 기쁨을 선물로 가져다준다. 그 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저절로 삶의 의미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그 어떤 시간보다 두껍게 흐르고 그 추억은 의미심장하게 축적될 것이다. 때로는 불행의 벽으로 둘러싸여도 어제와 다른 질문을 던져 놓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면 행복의 문으로 둔갑하는 고집스러운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우연은 어제와 다른 현실의 생산점을 생산하는 경이로운 마주침이다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고 생각하면 차이가 뚜렷해질 것 같습니다. 휴식 중에 창고가 무너진 것은 불운이지만, 그 일을 자신의 인생에서 어느 자리에 둘 지에 따라 의미는 크게 변합니다. 불행으로도, 웃긴 일화로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둘 수 있지요. 그러니 불운이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가능성 중 실제로 한 가지(점)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편 불행은 이미 일어난 일을 과거와 미래 사이 어딘가에 두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입니다”(139쪽).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에 나오는 말이다. 불운한 점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점과 점을 연결해 보면 새로운 의미를 지닌 행복한 사건으로 거듭난다. 일어나는 불운을 나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지만 일어난 불운을 해석하는 관점은 얼마든지 내가 선택 가능하다. 불운한 점이 다른 점과 우연히 만나 새로운 사건으로 거듭나는 기회도 무시할 수 없다. 불운한 점은 불운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불운하다고 생각하는 점과 우연히 만나 새로운 가능성의 시선을 갖는 사건으로 거듭날 수 있다.


문제는 가만히 앉아있어서는 어떤 점도 생기지 않으며 선으로 연결해서 나만의 면모를 만들어나갈 수 없다. 몰락의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몸을 던져 낯선 세계로 뛰어드는 용기(勇氣, courage)가 내 삶의 용기(容器, container)도 바꿀 수 있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뛰어드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온갖 우연이라는 만남에서 ‘나’를 발견해 내어 새로운 ‘시작’이 태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쩜 이 세계란 이토록 경이로울까. 저는 ‘시작’을 앞에 두고 사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우연과 운명을 통해서 타자와 함께 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합니다”(265쪽).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에 나오는 말이다. 미지의 세계를 책상에 앉아서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안다고 해도 아는 순간 그 세계는 다른 불활실성을 품고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할 것이다. 신간 《결심이 필요한 순간》이라는 책에서도 경제학자 러셀 로버츠는 완벽한 내일을 위한 정답 찾기보다 결심을 굳히고 미스터리의 세계에 뛰어들다 보면 삶의 지혜도 마스터리 수준이 된다고 한다. 불확실성의 세계를 뚫고 나가는 방법은 뛰어들며 몸으로 물색해 보는 가운데 부각되는 부산물이다. 뛰어들지 않고서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우연을 만나는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미래는 앉아서 생각을 거듭할수록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세계다. 알 수 없는 세계에서 고집스러운 기쁨을 발견하고 일상의 신비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연히 만들어주는 불확실한 세계로 뛰어들거나 기존 경계를 넘어서는 틀밖의 일탈이 필요하다. 익숙한 여기서 낯선 저기로의 부단한 탈주가 새로운 시작을 탄생시킨다. 우연으로 하여금 어제와 다른 ‘현실의 생산점’을 만들어내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뛰어듦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결국 위험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 기초를 두는 대신에, 소묘된 노선들의 충분한 특징들로 되돌아가는 대신에, 수많은 실책과 밤을 보낸 뒤 모든 것이 구체화되었다고 공언하는 이 은총 받은 원환을 수행하는 대신에,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보장을 멀리 떠나 친숙한 광경들의 바깥으로, 우리가 아직 그 범주들을 구성하지 못한 땅으로, 예견하기 어려운 종말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69쪽).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 나오는 말이다. 예견하기 어려운 종말에 직면하면 한 세계는 자연스럽게 몰락하고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법이다.


철학자 메를로 퐁티가 말한 것처럼 “힘겨운 평형을 유지하며 끝없이 새로 시작하는” 자세야말로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보다 다양한 가치관이 갈등과 모순을 겪으면서도 그 속에서 삶을 다른 세계로 구동할 수 있는 모티브를 찾아가는 노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힘겨운 평형’은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 나오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사유와 충동과 시민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길들여진 합리적 사유와 이성적 통제 능력의 조화를 말한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도 힘겨운 평형에 필요한 대립되는 두 가지 역량이 등장한다.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 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74쪽). 예술가의 통제불가한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사상가의 통제가능한 아폴론적 사기가 서로를 견제하고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조화와 융합이 이루어질 때 ‘힘겨운 평형’을 유지하면서 자아가 파괴되지 않고 갱신을 거듭하면서 재탄생하는 여정을 반복할 것이다.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가지 뒤섞일 때에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380-381쪽).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다시 나오는 말이다. 나르치스의 지성과 골드문트의 감성은 《황야의 이리》 속에 잠자고 있는 지성과 야성에 각각 상응한다. 예술적 창작에 관여되는 디오니소스적 광기와 대책 없는 정열은 숭고한 인생에 필요한 아폴론적 합리성과 지성의 통제를 받으며 힘겨운 평형을 유지해나가야 한다. 《황야의 이리》는 한 걸 더 나아가 인간은 이분법적 구도하에 딜레마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을 넘어서 자기 안에 존재하는 수천 개의 영혼과 싸움을 통해 세계와의 갈등을 극복하기를 요구한다. 하리 할러가 괴테의 꿈을 꾸면서도  헤르미네를 만나 마술극장에 초대되어 감각적 혼란과 극도의 황홀감을 맛보면서도 관능적 쾌락과 합리적 이성 세계와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이유다. 


“시의 기울기는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같은 접속사에 의해 만들어져요. ‘그리고’는 너무 밋밋하고, ‘그러나’는 너무 가팔라요. 이상적인 각도는 ‘그런데’가 아닐까 해요. ‘그런데’는 벨트의 운동 방향을 무리 없이 바꿔주는 톱니바퀴 역할을 해요”(42쪽). 이성복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하리 할러가 드디어 세기의 창녀, 헤르미네를 만났다고 하거나 하리 러가 헤르미네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성을 지불하고 마술극장에 초대되었지만 이성을 회복했다는 말은 관점의 전환이 가파르다. 우여곡절 끝에 마술극장에 초대된 하리 할러는 환락의 정점에서 헤르미네를 만났다. 그런데 하리 할러는 난생처음 보는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도 험난한 세상을 극복하는 유모가 지닌 촌철살인의 지혜를 터득했다. 하리 할러의 삶의 기울기는 ‘그리고’나 ‘그러나’보다 ‘그런데’로 묘사될 때 일리 있는 삶의 단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후에 펼쳐진 하리 러의 세계는 감각적 충동과 이성적 통제가 맞붙어 싸우는 이분법 전쟁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관이 저마다의 의미를 품고 펼쳐나가는 다양성의 터전에서 온전히 자기다움의 뿌리를 내려가는 삶이다.



하리 할러가 극심한 자아분열의 경험 속에서 인간과 이리의 이중성이 품고 있는 딜레마의 세계에서 사투를 벌이다 마술의 극장에 초대되어 자신이 직면한 난국을 돌파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 비결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직접 몸으로 겪어본 느낌과 깨달음의 체험이 없다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불가지의 세계다.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206쪽).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오는 말이다. 지혜는 일상의 작은 신비에서 고집스러운 기쁨을 찾아 우여곡절의 경험을 통해 경이로운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일생일대 사건의 산물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의 유희》에서 진리를 지혜와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다.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107쪽). 음악은 손과 손가락으로, 입으로 허파로 하는 것이지 두뇌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악보는 읽을 수 있지만 악기는 어느 것 하나 완전히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음악을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17쪽). 삶을 논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텍스트는 논의의 출발을 위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진리나 지혜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하리 러처럼 광란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신체성으로 구체적인 삶의 맥락성을 겪어봐야 한다.



진리체험은 삶의 본질을 파고드는 근원적 각성체험이다


진리체험은 삶의 본질을 파고들 때 뿌리끼리 만나는 근원적 각성체험이다. 그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존재의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하면서 공명의 장을 마련한다. “서정성이란 자아를 분산시키는 충동이다…우리가 서정적이 되는 것은 내면의 삶이 인간 본연의 리듬으로 진동할 때이다…저 깊은 곳에 있는 주관적 경험이 가장 생생한 이유는 삶의 본질과 만나기 때문이다…실상 나의 가장 깊고 생생한 내면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이 서정이다(9쪽)...서정이란 피와 살과 신경의 노래다(10쪽)...서정성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오롯이 피와 진정성과 불꽃이라는 데 있다”(11쪽).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 나오는 말이다. 본연의 리듬이 삶의 본질과 만나 자신도 모르게 내면의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온몸으로 느끼는 깊은 감정이 서정성이다. 서정성이야말로 주관적 경험이 단독적 의미와 가치를 띄면서 대체 불가능한 지혜의 불꽃으로 피어나는 근원적 뿌리다.


그 때 내 몸이 겪어보는 사건은 다시 반복할 수 없는 비가역적 경험이다. 몸을 던져 접속했거나 접촉한 우연한 만남은 어제와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사건으로 다가온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낯선 현상이 해석되지 않은 기호다. 그 기호가 담고 있는 의미를 해석될 때 사건은 나에게 늘 다른 의미의 차이를 반복하며 시간의 두께를 다르게 만들어간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언제나 다가올 세계, 또한 보다 더(more)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불가능성에의 열정’의 촛불을 켜는 소중한 생명 긍정의 초대장이다”(222쪽). 강남순의 《데리다와의 데이트》에 나오는 말이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연인과의 키스에 비유할 수 있다. 연인과 마주하는 키스는 오늘과 내일이 같을 수 없다. 오늘 한 키스의 감각적 느낌은 절대로 반복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다. 오늘 한 키스는 영원히 반복될 수 없는 개별적 사건이다. 오늘 연인과 나눴던 달콤한 키스를 돌이켜 생각하면서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멋진 키스를 상상하는 경험, 진정한 키스 경험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꿈이라고 미뤄두는 기다림과 그리움에 키스는 늘 어제와 다르게 태어나는 사건이다. 키스에 대한 의미의 고정성이나 결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공간을 열어놓고 탐구하는 열정의 근간에는 사랑이 매개되어 있다. 해체 대상이 되는 모든 개념은 고정된 의미를 품고 잠자는 명사가 아니다. 시공간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동사다.



하리 할러가 꿈꾸었던 세계도 결국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 명사들의 축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어제와 다른 의미로 미끄러져가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동사들의 향연이었다. 불확실한 야성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이성의 논리로 시민 사회에 적응하려고 했던 하리 핼러에게 생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적 충동과 예술적 관능의 세계로 초대한 헤르미네와의 만남은 하리 할러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하리가 헤르미네로부터 배운 춤의 세계는 인간이 추구하는 합리와 이성의 세계와 이리가 추구하는 충동과 본능의 세계를 조화시켜 하나의 온전한 세계로 합일시키는 일상의 탈출구이자 새로운 세계로 입문하는 이정표였다. 내면의 이리에게 먹힐 수도 없고 밖으로 쫓아낼 수도 없는 딜레마 상황에서 마술 극장에 초대된 하리 러는 스스로 진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존 가치나 질서체계와 정반대 되는 것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신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살 수 없음’과 ‘죽을 수 없음’의 딜레마에서 발버둥 치던 하리 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죈 자는 다름 아닌 헤르미네였다. 그녀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포의 동굴에 난 작은 창이요, 한 자락 빛이 비쳐드는 조그만 구멍”(148쪽)이었다. 무조건 복종하는 낙타와 무조건 저항하는 사자를 거쳐 세상의 바꾸는 궁극적 해결책은 어린아이의 미소라고 설파했던 니체처럼 하리 핼러에게 유머는 ‘마법의 물약’이었다. 《황야의 이리》는 믿었던 전통적 ‘진리(眞理)’에 ‘무리(無理)’가 있음을 깨닫고 특정한 맥락에서만 일정기간 진리로 통용되는 다른 ‘일리(一理)’들을 몸소 겪으면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불확실한 세계의 등불이 되어줄 각성사건을 통해 체험적 지혜를 쌓아나가는 자아의 고통스러운 투쟁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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