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동굴에서 데이터 고기로 사육당한 디지털 수인(囚人) 관찰기
충동적 체험만 제공하는 정보가 포르노인 까닭은?
디지털 동굴에서 데이터 고기로 사육당한 디지털 수인(囚人) 관찰기
경험이나 체험은 모두 겪어보는 과정을 통해 감각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경험이 일정기간 지속하거나 반복할 때 어울리는 말인 데 반해 체험은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이거나 단속적이어서 주로 일회성으로 끝나는 의도적 계획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주말농장체험은 주말에 한 번 농장에 가서 고추농사나 배추 농사를 직접 지어보는 경우인데 그 체험이 반복되지 않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일이라는 점에서 주말농장경험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기업에서 신제품을 개발해서 본격적으로 출시하기 전에 고객을 대상으로 제품의 질적 속성이나 요구사항을 점검하기 위해 고객체험단을 모집한다. 의도적으로 계획된 고개체험단에 소속된 사람들도 지속적인 신제품을 평가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고 일회성 행사로 끝난다.
충동적 체험은 깨달음을 주는 성찰적 경험을 능가할 수 없다
진로교육 또는 진로적성체험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계획된 체험기회에 특정한 사람이 직접 참여해서 특별한 경험을 그 프로그램이 지속되는 경우에만 겪어볼 수 있다. 경험이라는 말이 일상적 삶 속에서 비의도적으로 지속적이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도 쓰는 예외적인 사례가 있다. 첫 키스 경험이나 짜릿한 번지점프 첫 경험처럼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우에는 특정한 무대에서 겪어보는 단 한 번의 기회라고 할지라도 경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체험이 뭔가를 겪어보는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둔 개념이라면, 경험은 그런 지속되는 체험 속에서 체득하는 지식이나 기술, 색다른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뭔가를 겪었지만 그 이후에 깨달은 통찰이나 각성처럼 특별한 것을 체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경험이라기보다는 체험이다.
벤야민은 경험과 체험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전통’과 ‘기억’을 든다. 그는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Ü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에 경험은 이전의 전통에 비추어 재해석되는 기억이 다. “사실상 경험(Erfahrung)이라는 것은 집단생활이나 개인생활에서 모두 일종의 전통 문제이다. 경험은 기억(Erinnerung)속에 엄격히 고정되어 있는 개별적 사실들에 의해 형성되는 산물이 아니라 종종 의식조차 되지 않는 자료들이 축적되어 하나로 합쳐지는 종합적 기억(Gedächtnis)의 산물이다”(182쪽). 경험은 하나의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단편적 추억의 파편이 아니라 이전에 겪었던 다양한 작은 기억들이 하나의 체계로 구조화되면서 이전의 경험적 전통에 비추어 지금 경험의 의미를 반복해서 재해석한다.
그 결과 경험으로 축적되는 새로운 지혜는 기존 전통에 전승되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전통을 구축하는 기반으로 작용한다. 반면에 체험은 경험과는 다르게 이전 체험이 다음 체험으로 전승되거나 전통을 만드는 지혜의 기반으로 쓰이지 않는다. 파편화된 정보나 찰나적 이미지의 자극이 순간적으로 출몰하는 디지털 사회에서는 경험보다 파편화된 경험, 즉 충동적이고 단편적인 체험을 순간적으로 느낄 뿐이다. 경험적 추억과 다르게 체험된 내용은 체험의 주체가 뭔가를 기억해야 되겠다는 의지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창고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충동적 체험이 경험을 대체하는 순간 삶의 위기가 시작된다
디지털 기술로 무장된 플랫폼의 세계에서는 한 가지 정보를 보는 와중에도 중간에 어떤 사이트로 빠질지 예측할 수 없는 링크와 자극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갑자기 날아드는 광고 사이트의 자극적 유혹이나 연결된 링크를 따라가다 낯선 정보와의 우발적 접속 등 도처에 클릭을 유도하는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들의 현란한 손짓을 무시하고 원하는 정보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 볼 시간적 여유와 공간적 안정감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낯선 정보와 부단히 부딪치면서 맞이하는 단절적인 정보 흐름으로 이전 정보와 현재의 정보가 하나의 의미체계로 정리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정보조각을 만나는 순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전 정보를 보면서 생각하거나 염두에 둘만한 의미를 지금 보는 정보에 투영, 색다른 해석을 하는 사유과정을 심화시키기보다 의미 간 연결도 이어지지 않는 가운데 전승되지 않는 정보의 파편은 무한대로 흘러 다니는 충격적인 체험만 반복될 뿐이다. 충격 체험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경험적 의미는 생산되지 않고 알로리즘에 예속되어 다른 사유 자체를 포기당할 뿐이다. 자본주의가 유혹하는 상품에 담긴 유혹은 끊임없이 소비자로 하여금 물건을 구매하라는 욕망을 자극한다. 상품 구매를 자극하는 자극적인 정보들은 더 강렬한 짜릿함을 체험하게 만들어 더 이상 구매의사결정을 지연시키지 못하게 막무가내로 덤벼든다. 능동적 소비주체로 살아가기보다 상품구매 욕망과 그걸로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선전하는 무수한 소비자들의 인증행렬에 나도 모르게 수동적으로 종속되어 살아간다.
바우만도 발터 벤야민과 비슷한 맥락에서 그의 저서, 《새로운 빈곤》에서 체험과 경험을 구분하고 있다. “내가 그 안에 거주해 거쳐 온 것”인 ‘체험’(Erlebnis)과 “나에게 [인과적으로, 혹은 깨달음으로] 나타난 것”인 ‘경험’(Erfahrung)을 구분하고 있다. 체험은 난반사적이고 예측불가능하며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다. 따라서 체험으로부터 배우는 교훈이나 깨달음은 없다. 반면에 경험은 일상적인 삶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반복해서 이어지는 지속적인 활동이기에 그것으로부터 새롭게 깨우치는 삶의 교훈을 담고 있다. 벤야민이나 바우만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은 ‘찰나적 체험’이 지속적 경험을 대체할 경우 자기만의 독특한 스토리가 축적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적 통찰력이 축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자극적이고 찰나적인 파편화된 정보나 상품에 담긴 욕망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저당 잡혀 살아가면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삶을 살아가면서 보고 느끼고 깨닫는 고유한 서사가 실종된다는 것이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삶의 위기라고 보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24시간 예배와 성찬식이 이루어지는 교회다.
문제는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기술 간 연결을 통해 일상적 삶의 방식이나 습관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이전과 다른 깨달음을 얻는 배움의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 더불어 충격적인 자극적인 체험을 단속적으로 받는 상황에 노출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깊은 사색을 통해 자기만의 사유체계를 건축하고 서사를 작성하는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간을 살아가는 정보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긴 호흡으로 자기만의 경험을 깊은 사색과 폭넓은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시간은 실종되기 시작한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시대의 특징을 “경험의 빈곤(Erfahrungsarmut)”이라고 규정한다. 나를 유혹하는 남의 순간적 정보에 늘 관심이 쏠리면서 ‘산만한 나’와 ‘바쁜 너’는 산만하고 바쁜 정보 생태계를 만들어나간다.
“디지털로 된 종이의 숲인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 정보 사냥꾼들이 꿈의 새를 사냥하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과잉 활동성 안에서 우리는 결코 깊은 정신적 이완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22쪽).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에 나오는 말이다. 잠시도 사색하거나 정신적으로 이완된 상태에서 뭔가를 관조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막는 정보는 시시각각 놀라운 자극으로 무장해서 주의를 지속적으로 산만하게 만드는 체험에 종속될 뿐이다. 나의 주체적 의지와 자유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흐르는 정보의 순간적 자극에 노출되고 알고리듬을 따라 클릭하고 지나가는 참을 수 없는 체험의 가벼움을 느낀다. 내가 정보를 통제하고 조정하는 게 아니라 자극적 정보에 나도 모르게 예속되어 클릭하는 무의식적 기계로 전락하고 있다.
자유롭게 결정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자본논리와 알고리듬의 요구사항에 즉각적으로 클릭하는 자유다. 온몸을 움직여 도전하고 실패하며 배우는 실천과 행위의 자유가 아니라 참여나 소비욕망을 자극하는 구매버튼이나 다른 사람의 게시물에 대한 좋아요 누르기, 오감각을 자극하는 영상 올리기나 인스턴트적으로 가공된 메시지 올리기 등을 말한다. 한 마디로 손발을 움직여 자유롭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자유가 아니라 손가락을 마음대로 움직여 클릭할 수 있는 자유다. 더 많은 정보에 노출될수록 손가락을 더 자주 움직여 클릭기회를 높이려는 속셈이 알고리즘의 뒤안길에 숨어 있다. 손가락으로 클릭할수록 그래서 한병철은 《정보의 지배》에서 소셜미디어는 교회와 같다고 한다. “좋아요는 아멘이다. 공유는 성찬식이다. 소비는 구원이다...반복은 전체에 예배의 성격을 부여한다”(19쪽). 좋아요 버튼과 공유 횟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구매는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행위들이 다른 곳에서 얼마나 반복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검토한다. 계획된 시간에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점검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찰나적 체험은 시간적으로 위축되어 휘발되거나 증발되어 버린다.
찰나적 순간을 포착하지 않으면 체험적 기록이 일정한 장소기억으로 저장되지 않고 시간적 흐름과 함께 휘발되거나 증발되어 버린다. 수많은 스냅사진과 정보가 순간적으로 포착되거나 기록되지만 바로 사라지는 순간적인 현실일 뿐이다. 시간적 흐름에 경험의 깊이 있는 의미의 반추가 담기는 시간의 두께는 한 없이 얇아지고 시간적 폭이 한없이 줄어드는 ‘시간적 위축증’에 걸린다. 시간적 위축증은 어떤 일을 하든지 보다 적은 노력으로 빠른 시간에 목표를 달성하려는 효율이나 능률복음을 낳았고, 과정적 사유보다 성과제일주의를 양산해 왔다. 효율과 성과지상주의는 깊이 파고드는 인식의 깊이를 기피 대상으로 만들었고 사고가 싹틀 수 있는 시간의 두께를 한 없이 얇게 만들어버렸다.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맞으면 손잡고 그렇지 않으면 즉시 연결을 끊어버리는 인스턴트 기반 순간적인 소통과 관계를 기반으로 생산성만 무한 증가시키려는 공장과 기계식 담론만 양산해 왔다.
숙고와 성찰을 기반으로 서로의 사유체계 건축에 도움이 되는 깊은 담론과 논쟁보다 방금 채집한 신선한 정보를 중심으로 사고방식의 혁명이나 패러다임 전환을 가속화시키는 지성을 자극하기보다 정보의 흐름 속에서 관전하는 사람들의 충동을 자극하고 흥분을 북돋는다. 지성에 색다른 입력을 제공하기 위한 낯선 마주침보다 지금 당장 바로 결정하고 판단해서 구매나 참여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시간 통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출몰하는 정보의 자극적 신호에 홀린 상태로 무의식적 클릭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정보의 행렬에 종속되어 간다. 고도화된 기술에 현혹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파편화된 정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순간적인 체험만 반복한다. 설상가상으로 살면서 과거의 사건과 사고에 담긴 감각적 깨달음의 흔적을 현재로 불러와 시간의 추억을 공간기억과 연결시켜 새로운 깨달음의 집을 건축하려는 노력은 무시되거나 간과된다.
발터 벤야민의 지적대로 현대인은 심각한 ‘경험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과거의 경험을 현재로 끌어내고 미래를 현재로 데리고 와서 지금 하는 경험과 연결시켜 과거-현재-미래를 일련의 연속선상에서 성찰해 보고 거기서 얻은 깨달음의 흔적을 새롭게 소생시키는 가운데 한 사람의 희로애락이 씨줄과 날줄을 직조되면서 강력한 ‘서사적 장력’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적 장력이란 과거의 어떤 경험을 근간으로 현재 경험을 재해석하는 기반을 제공함은 물론 미래를 상상하는 연상능력의 강도를 말한다. “기억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고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구성요소다. 기억의 폭이 좁을수록 미래를 폭넓고 독창적으로 구상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기억이 빈약하면 이전에 가본 곳 말고는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상상할 수 없다”(174-175쪽).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 나오는 말이다. 과거의 경험이 과거의 추억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는 물론 미래를 상상하면서 한계를 넘어서는 원동력이 바로 ‘서사적 장력’이다. 이런 점에서 이문재 시인이 ‘소금창고’라는 시에서 말한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은 대단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정보는 자신의 본질을 감싸는 껍질이 없어서 포르노적이다.
‘서사적 장력’이 작용하는 긴 스토리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인생의 시기별로 경험하면서 겪은 감각적 깨달음이나 감성적 느낌을 긴 호흡으로 곱씹어보고 그것의 시사점을 되새겨보는 여유로운 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접속, 떠도는 정보에 접속하는 순간 고립되어 파생되는 정보를 일정한 프레임이나 체계로 엮어 하나의 흐름을 구성하는 스토리 라인을 구성할 수 없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이다. 사물을 감싸는 껍질이, 베일만이 설득적이고 서사적이다. 껍질 벗기기나 베일로 감싸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에 필수적이다. 포르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동안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65쪽).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에 나오는 말이다. 정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의미를 직설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찰나적 순간에 포착되는 정보의 의미가 껍질에 쌓여 불투명하면 사람들은 바로 다른 검색을 통해 그 의미를 알아보거나 다른 사이트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의미가 은유적일 때 그 의미의 껍질을 파고들어 곱씹어보고 주어진 맥락 속에서 어떤 사연과 배경으로 탄생된 문제의식인지를 되짚어본다. 하지만 정보검색의 속도와 효율이 중요한 가치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는 디지털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정보가 탄생한 사연과 배경은 물론 그것의 맥락적 의미를 되새겨볼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는 곳에는 사유도 없다.
모든 걸 데이터와 정보로 처리해도 세상의 복잡한 현상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와이어드(Wired)의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은 에세이 ‘이론의 종말(The End of Theory)’에서 거대한 데이터 축적만으로도 기존의 이론들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 수 있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한 마디로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면 전례가 없는 정확한 예측력으로 인간이 특정 행동을 언제 어떻게 하는지 데이터 기반 심리학이나 사회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런 현상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인지에 관한 정보는 줄 수 있지만,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지는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야기는 정보들로 파멸한다. 정보는 이야기의 맞수다. 빅데이터는 장대한 이야기와 대립한다. 빅데이터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93쪽). 한병철은 《정보의 지배》에서 빅데이터 기반 이론의 무용성을 반박한다. 데이터나 정보는 찰나적 트렌드나 성향을 반영할 뿐, 어떤 상황적 맥락과 문제의식, 그리고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을 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정보의 홍수 속에 떠내려가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시간적 여유가 없다. 순간적으로 출몰하는 정보에 보다 발 빠르게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능력만 필요할 뿐이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영점에 해당한다. 데이터와 정보로 가득한 세상은 이야기할 능력을 위축시킨다. 그 결과로 이론은 잘 구축되지 않으며 매우 모험적이기까지 하다”(103쪽). 한병철의 《수사의 위기》에 등장하는 말이다. 이야기하는 정신을 데이터가 몰아낸다. 데이터가 넘칠수록 사람들은 점차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변해간다. 정신을 차려야 자신이 처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어디서 왔고 그 과거가 현재 어떻게 작용하고 있으며,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는지를 일상을 기반으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칠 때 한 사람의 고유한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스토리 텃밭이 생긴다. 그 이야기들이 레고 블록이라면 레고 블록을 조립해서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서사다. 하지만 디지털 플랫폼이나 인터넷에서는 하염없이 머물러 침묵을 유지하며 사색할 시간과 공간도 허용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속삭이며 판단과 의사결정을 요구하며 지금 당장 구매와 같은 클릭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각종 유혹이 향연이 부단히 펼쳐진다.
현대인은 디지털 동굴에서 데이터 고기로 사육당하는 디지털 수인(囚人)이다
더 자극적인 광기를 품은 정보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우리를 ‘디지털 동굴’에 가둬둔다(한병철, 2023) 디지털 동굴 안에 존재하는 죄인들은 가공해서 제공하는 ‘데이터 고기’를 먹으며 사육당하는 ‘데이터 가축’이자 소비 동물이다. 데이터 가축은 떼거리 정보 속에 파묻혀 정보 우리 안에서 무한정 주어지는 신선한 데이터 고기를 주워 먹으며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고속성장을 거듭한다. 데이터 고기에게 내면적 성숙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고속 성장을 거듭하며 몸집을 키워야 데이터 가축으로서 몸값을 올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 가축은 방향성이 없는 정보를 자유롭게 취식한다고 하지만 이미 알고리즘으로 통제되고 조정된 데이터 고기만을 편식하고 있다는 점을 모르며 무한 쾌락에 몸을 맡긴다. 동굴 밖에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가 없다. 그래서 굳이 거센 눈보라와 비바람이 몰아치는 험난한 세상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데이터 가축은 평화롭고 안락한 동굴 안에서 무한정 주어지는 정보 고기를 마음대로 받아먹고 누군가 원하는 데이터 가축으로 사육되는 데이터 울타리에 갇혀 사는 데이터 수인(囚人)이다.
현대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진실된 이야기를 들어볼 여유가 없다. 늘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기계적 운송수단에 몸을 맡긴 채 언제나 눈은 디지털 감옥 속으로 들어가 순간적으로 지나다니는 데이터나 정보를 채집해서 요리도 하지 않고 취식한다. 정보더미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은 시간도 촌음으로 잘린다. 더 정화하게 말하면 시간은 토막으로 살인된다.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파편화된 정보가 연결되어 하나의 의미체계로 엮일 시간이 없거나 시간을 못 낸다. 토막 살인된 시간은 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면목없이 산만하게 흩어진다. 시간이 일련의 연속선상에서 일정한 동력으로 흐르지 않고 시시각각 다른 주제들의 파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에 충동적으로 체험했던 정보와의 만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시간의 점을 연결해서 선으로 연결해야 거기서 내가 살아오면서 직조한 지난 삶의 씨줄과 날줄이 하나의 면모로 거듭난다. 그 면모 속에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은 이야기가 하나의 장편 서사로 숨겨져 있다.
디지털 감옥에서 데이터 고기를 먹는 사람은 식사하지 않고 사료를 먹는다. 디지털 사료는 먹고살기 위해 '의무감으로 먹는 것'을 의미하지만, 식사는 '스스로를 위하고, 서로 간의 보살핌 속에서 먹는 것'이라고 했다. 동물에게 먹이는 사료의 목적은 인간이 원하는 동물을 살 찌우기 위해서 먹이는 것처럼 데이터 고기의 목적도 몸집을 불리기 위해 데이터 가축도 모르게 누군가 먹여주는 디지털 사료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 사료로 둔갑하면 마지못해서 억지로 때우는 한 끼의 음식 먹는 노동에 불과하다. 반면에 식사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즐거운 순간일 뿐만 아니라 먹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만끽하는 가운데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직장인의 아침 식사는 이제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 빠른 시간에 몸에 집어넣는 사료가 되었다. 심지어는 그런 사료조차 몸에 집어넣을 수 없는 시간이 없어서 운전하면서 짜 먹는 죽을 사료로 대용하는 직장인도 있다.
정보는 질주하게 만들지만 서사는 정주하게 만든다
촌음을 다투어 가며 생성되었다가 흘러가며 소멸되는 정보는 원심력이 강하다. 누군가 그 정보를 포착해서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한 구심력의 동인으로 사용하려고 해도 중심 자체를 뒤흔드는 더 강력한 정보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원심력을 가속화시키는 주범은 아날로그적 접촉으로 느끼는 신체적 질감보다 잦은 디지털 접속과 속성으로 달성하려는 효율적인 사고방식, 삶의 충만감을 가져오는 밀도감보다 속도감을 즐기려는 본능적 욕구, 불편함을 감수하고 땀 흘려하려는 안간힘보다 편안한 가운데 뭔가를 쉽게 성취하려는 안이함이다. 도처에 정보가 신출귀몰할수록 한 존재의 윤곽은 모습조차 희미해지고 도대체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파악해 보려는 근성도 상실된다. 늘 차려진 정보 밥상에 숟가락을 들고 알고리듬이 선택해 주는 데이터를 먹고 살아간다. 사료는 먹고살기 위해 '의무감으로 먹는 것'을 의미하고, 식사는 '스스로를 위하고, 서로 간의 보살핌 속에서 먹는 것'이라고 했다. 동물에게 먹이는 사료의 목적은 인간이 원하는 동물을 살 찌우기 위해서 먹이는 것처럼 사람이 먹는 음식이 사료로 둔갑하면 마지못해서 억지로 때우는 한 끼의 음식 먹는 노동에 불과하다. 반면에 식사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즐거운 순간일 뿐만 아니라 먹는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만끽하는 가운데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는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다.
사료를 먹는 사람은 집(home)에 거주하기보다 주택(house)에 세 들어 살아간다. 집에 거주하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보다 주택에 입주해서 사료를 먹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진실된 이야기나 서사를 창작할 시간적 여유를 잃고 순간적인 정보의 충동적 체험에 파묻혀 살기 시작한다. 발터 벤야민의 '사료와 식사'의 차이는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의 '주택과 집'의 차이에 상응한다. 그는 주택이 사람이 짐과 가구를 보관하는 물리적인 장소라면, 집은 심리적으로 안정을 취하면서 내면의 힘을 키워줄 수 있는 창의적인 터전이라고 했다. 이반 일리치는 시멘트와 벽돌로 건물을 짓고 그 속에 가구나 기타 편의시설을 물리적으로 배치한 상자"를 주택이라고 했고, 집은 거주자의 따뜻한 온기가 흐르고 더불어 살아가는 희망의 연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기억의 장소라고 했다. 일리치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에서 집에서 거주하는 정주(定住)를 강조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대지에 뿌리박고 정주하던 거주자였지만, 지금은 대량 생산된 주택이나 건물에서 다양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법적 문제가 없을 때 비로소 공동주택 소비자로 정식 등록된 입주자가 된다.
현대 도시인은 주택(house)에 살고 있을까, 집(home)에 살고 있을까. 삶의 자존감을 상실할 정도로 급하게 사료를 먹듯 끼니를 해결하는 것처럼, 현대 도시인은 집을 가꾸는 능력 또한 잃어버렸다. 주택에 가전제품과 전자기기를 채워 넣기에만 급급하다. 경제적 가치를 먼저 생각하다 보니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하고, 온전한 의미의 집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이반 일리치는 집의 조건은 정주(定住)라고 강조한다. 정주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흔적 속에 깃들여 산다는 뜻이었고, 그날그날 살아가며 자신의 일대기를 한 올 한 올 풍경 속에 적어 넣는다는 뜻"(75쪽)이라고 했다. 정주하지 못하면, 자신의 숨결을 집에 불어넣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을 온전한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낼 수 없다. 자기만의 스토리로 자기만의 진실도힌 서사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멈춤이 필요하다. 정보는 질주하게 만들지만 서사는 정주하게 만든다. 서사는 정주해서 자신의 삶의 결과 골을 직조하면서 안간힘을 쓴 사투의 산물이다. 서사는 온전히 디지털 접속으로 편집된 속성 가공물이 아니라 아날로그 접촉으로 우려낸 숙성의 결정체다. 정주 속에서 창작된 서사가 바로 한 사람을 삶의 주인공으로 재탄생시키는 예술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