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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전한 보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본 체험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본 ‘체험’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험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본 체험이다

시작은 위험하지만 끝은 위대하리라


방법은 실행 속에 있다


“일단 내 앞에 있는 조잡한 도구로 시작하라, 망치로 삽을 만들면 삽으로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 열매를 팔면 책을 살 수 있다. 시작을 해야 능력의 확장이 일어난다”(55쪽).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너무 방법을 행동하기 전에 완벽하게 세우는 방법을 가르쳐왔다. 모든 행동과 실천 이전에 계획을 수립하고, 실제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과 수단을 책상에서 강구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한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과 방법을 구상해도 실제 현장에서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으며,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초기의 의도가 풀리는 경우가 많다. “방법을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쓰고 싶어 하면 손이 움직인다. 대상이, 상황이, 문제가 길을 알려준다. 가난한 어머니가 별 재료 없이도 어떻게든 음식상을 차려 내듯 글쓰기란 백지 위에 펜으로 어떻게든 뭘 적어 내는 것이다. ‘어떻게든’은 눈물겨운 것이다. 방법은 실행 속에 있다(197쪽).” 이영광,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에 나오는 말이다. 방법은 실행 이전에 구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실행 속에서 색다른 방법,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방법이 우연히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실행해보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는 방법이 실행 속에 잠자고 있다. “배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하면서 배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험적 지혜다. 너무 많은 것을 현실과 무관하게 배우기만 하면 실제 현장에 가서는 속수무책일 수 있다. 일단 시도해보면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책상에 앉아서 절대로 알 수 없는 인생의 많은 지혜는 현장에서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숙고하는 것이 손전등이라면 행동하는 것은 전조등이다. 행동의 빛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훨씬 더 멀리까지 비춘다. 그러므로 흥미롭고 새로운 장소로 나아가려면 고민의 손전등을 꺼야 한다”(27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실행하지 않고 숙고를 거듭해봐야 가까운 주변밖에 비출 수 없는 손전등에 불과하다. 반면에 책상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고 직접 현장에 나가서 왜 그런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다가오는 깨달음은 전조등과 같다. 손전등에 비유되는 숙고와 전조등에 비유되는 행동은 저마다의 탄생 목적과 배경이 있다. 숙고를 거듭할수록 손전등으로 비출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숙고를 그만두고 지금까지 숙고한 바를 과감하게 저질러보는 것이다.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 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183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한 가지 생각밖에 안나 던 어떤 이슈나 고민을 나가서 직접 해보면 10가지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노하우다. 그 이유를 신영복 교수는 머리와 손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머리는 하나지만 손가락은 열 개나 되잖아요”(184쪽). 책상머리에 앉아서 머리를 써봐도 뚜렷한 해결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일수록 나가서 손발을 움직여 실천해보면 전조등처럼 멀리까지 비출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실천하지 않으면 내 생각이 맞고 틀림을 알 수 없다.



위험한 세상,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라, 불안한 개인의 분노와 허탈감이 몰고 오는 위기의 시대를 넘어설 단 하나의 결단은 안전지대를 벗어나 새로운 운명을 창조하는 위험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기다리면 늦어지고 생각하면 어긋난다"(27쪽). 이성복 시인의 《무한 화서》에 나오는 글이다. 상황이 더 좋아지기를 기다리다 기회를 상실할 수 있고 너무 오랫동안 생각만 하다가 잘 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다 오히려 몸에 때만 낀다. “진리탐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별도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두 번째 방법의 탐구를 위해 세 번째 방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인식에도 이르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말이다. 우리는 시작하지 않고 시작하는 방법을 계속 연구한다.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작하지 않고 시작하는 방법만 책상에서 연구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준비를 하다가 완벽하게 시작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일단 시작하는 게 좋다.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엇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니체의 말이다. 시작하기 전에 시작하는 게 너무 두렵거나 위험하다고 시작조차 시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두통이다. 행동하지 않고 앉아서 걱정과 고민만 반복하기 때문에 머리만 아프게 된다. 두통을 치유하는 방법은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체험이다. 행동하고 실천하면 머릿속의 골치 아픈 고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된다.  



진짜 생각은 몸으로 실천하면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영어로 ‘경험’을 뜻하는 ‘experience’는 라틴어로 ‘실험을 뜻하는 ’experimentia‘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로 ‘위험’을 뜻하는 ‘periculum’과도 연관이 있다(p.350).” 로먼 크르즈나릭의 《인생을 짧다 카르페 디엠》에 나오는 말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지혜는 몸으로 체득할 수 없다. 일본 철도(JR: Japan Railroad) 카피 중에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어”라는 말이 나온다. 책상에 앉아서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험은 위험함을 무릅쓰고 모험을 거듭하면서 축적한 체험이다.” 유영만의 《나는 배웠다》에 나오는 말이다. 체험은 머리로 배우기보다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다. 머리로 배우기만 하고 몸으로 익히는 활동을 하지 않으면 머릿속에 야적된 지식은 모래알처럼 파편화된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는 않으면 위태롭다.  《논어》 '위정(爲正)' 편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생각은 머리로 생각하는 걸 넘어선다. 진짜 생각은 몸이 하는 것이다. “사(思)는 생각이나 사색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경험적 사고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의 구성도 전(田)+심(心)입니다. 밭의 마음입니다. 밭의 마음이 곧 사(思)입니다. 밭이란 노동하는 곳입니다. 실천의 현장입니다”(179쪽).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노동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생각이 생긴다. 책상에 앉아서 고민하면서 생기는 생각은 노동을 통해 몸에 각인되는 생각보다 건강하지 못하다. 



신영복 교수님은 더 나아가 학을 보편적 사고라고 하고 사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경험이라고 말한다.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現場性)입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은 구체적이고 조건적이며 우연적입니다. 한 마디로 특수한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지(經驗知)는 보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학(學)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 임에 비하여 사(思)는 특수한 것(specialism)입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 사상(捨象)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뜻이 됩니다”(181쪽). 지금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장이나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험적 사고를 간과하거나 무시한다는 데에 있다. 현장의 특수성이나 구체성을 일반화시켜 이론적인 앎을 현장과 격리시켜 배우고 가르치는 지금의 교육 패러다임은 전면적인 해체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생각하는 ‘사(思)’를 책상에서 잔머리 굴려가면서 현장과 무관하거나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순수한 생각이라고 오해하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 있다. 진짜 생각(思)은 머리(田)와 가슴(心)이 하나가 되어 몸으로 체험하면서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실천이 실종된 머리로 이해하는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비록 오늬 죽의 맛에 날카롭지는 못했어도, 소금 그 자체의 맛에는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251쪽).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소금 맛을 보고 소금의 원산지를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능력은 이론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원산지별 소금 맛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금 맛을 감별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다양한 시도 끝에 몸으로 그 미묘한 맛의 차이를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체험적 지혜는 오로지 몸으로 익히고 몸으로 체험하며 깨닫는 수밖에 없다. “사랑에 관해 물으면 한 수 시까지 읊겠지만. 한 여인에게 완전한 포로가 되어본 적은 없을 걸? 눈빛에 완전히 매료되어 신께서 너만을 위해 보내주신 천사로 착각하게 되지. 절망의 늪에서 널 구하라고 보내신 천사! 또한 한 여인의 천사가 되어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그 사랑은 어떤 역경도... 암조차 이겨내지.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두 달이나 병상을 지킬 땐 더 이상 환자 면회 시간 따위는 의미가 없어져.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 넌 몰라. 타인을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낄 수 있는 거니까. 누굴 그렇게 사랑한 적 없을 거야?” 영화 굿윌 헌팅에 나오는 대사다. 사랑학 개론 책을 아무리 읽어도, 사랑에 관한 이론적 진리를 아무리 읽고 이해해도 내가 꿈에 그리던 사람이 나타났을 때의 느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당혹감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이다.



해보지 않고서는 공감할 수 없다


내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 공감능력은 책상에서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몸으로 체험해봐야 비로소 생기는 능력이 바로 공감 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실제로 걸어 다녀보는 것은 중요하다. 배우자, 동료, 유권자 등 중요한 파트너를 대상으로 그렇게 역할 교체를 해보라. 역할 교체는 사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다”(279-28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책상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통경찰이 열십(十) 자를 보고 사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으로 생각한다. 약사는 녹십자라고 생각하고 목사는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체험해본 범주 내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산부인과 의사가 열십자를 보고 교통경찰처럼 사거리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역지사지가 말처럼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사람의 경험 속에는 이해할 수 없고 가 닿을 수 없는 익명인 채로 남아있는 감정이 때때로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그 순간에 어떤 느낌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72쪽)." 데이비드 리코의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저마다의 상황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정은 일반화시킬 수 없다. 모두가 주관적인 체험이고 상황에 따라 고유함을 드러내는 특수한 자각이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도 생각사(思)가 일반화시킬 수 없는 특수한 주관적인 경험이라고 한 것이다.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은 언어로 말할 수 없다. 다만 고통에 대해 고통의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고통에 대해 여전히 우리는 말할 수 있는 존재다”(261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준다. 눈에 뭔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153족).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을 통해 느껴지지 않으면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으로 느낌이 와야 비로소 나는 그 아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물며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직접 몸으로 느껴지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데 타자의 고통은 어떨까. 고통 체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고뇌와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의 핵심은 타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능력, 그 아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육성하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지나치게 책상 공부를 통해 지능을 연마하고 지식을 축적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아부어왔다. 책상에서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고 그걸 기반으로 일상에서 실천을 촉구하는 교육 패러다임은 앎과 삶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다. 진짜 공부는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공부는 사유가 먼저 있고 나중에 행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다”(228쪽). 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 에세이》에 나오는 말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위대한 결실도 없다


관념적 사유를 강조하는 교육은 관념적 지식인을 양성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체험을 통해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교육으로는 난공불락의 딜레마 상황이 펼쳐지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낼 수 없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식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온몸으로 깨달은 체험적 지혜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쌓은 지식에는 그 사람 특유의 신념과 열정과 용기가 없다”(47쪽). 유영만의 《공부는 망치다》에 나오는 말이다. 사투 끝에 건져 올린 체험적 지혜에는 그 사람이 고뇌하는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머리보다는 발바닥으로 세상의 곳곳을 직접 내가 가볼 때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체험은 가보지 않고 책상에서 그냥 보는 경험과는 천지차이다. 가보는 것과 보는 것은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인식과 통찰의 물이 흐르고 있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박노해 시인의 발바닥 사랑이라는 시다. 발바닥이 움직이는 바로 그곳에서 몸으로 반응한 감각적 느낌을 가급적 정리해보려고 한다. 물론 언어의 한계가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가로막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투를 벌여가며 감각적 체험과 교훈을 체중이 실린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머리로 결정하지 않고 발바닥이 향하는 곳으로 과감히 떠나는 것이다. 머리로 계산할수록 의사결정은 어려워지고 대안 모색은 지체되기 쉽다. 운명과 문명, 그리고 혁명을 불러오고 싶다면 위험한 결단과 과감한 실천만이 살길이다. 위험하지 않으면 위인도 위대한 결실도 없다. 위험하지 않으면 위인도 위대한 결실도 없다.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몰래 그대의 뒤를 따르는 자는 그 누구도 없어야 한다. 그대의 발로써 그대가 걸어온 길을 지워버렸고, 그 길 위에는 불가능이라고 쓰여 있다." "위험하게 살아라" 외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우리 아이들을 너무 안전한 곳에서 현실과 유리된 창백한 교실에서 양육해왔다. 학부모는 아이들을 극진한 보호막 속에서 지나치게 간섭하고 지시하며 통제해왔다. “편안함이 끝나고 궁핍이 시작될 때 인생의 가르침이 시작된다.”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위험이 없는 길로는 약한 사람만 보낸다.” 헤르만 헤세가 《유리알의 유희》에서 한 말이다. 스스로 추진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진 아이들에게 교육은 독립적 사유를 길러주는 각성제가 아니라 의지(依支)할 수 있는 능력을 심화시켜 한 순간의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진통제에 불과하다. 체험적 지혜는 지식의 축적으로 생기지 않는다. 위험한 도전을 감행하고 시행착오 끝에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있는 혜안을 몸으로 깨달을 때 복잡한 상황을 해석할 수 있는 혜안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생긴다. “몸으로 체득했기에 그것이 밑바닥 진실이며 마지막 진실이다. 어떤 경우에나 세상의 변화를 꾀하게 하는 힘은 마지막 진실에서 온다”(200쪽).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 나오는 말이다. 



밑바닥 진실이자 마지막 진실은 몸으로 체득하는 수밖에 없다. 몸이 동반되지 않는 관념적 공부는 진심을 담아낼 수 없다. 진심과 진정성은 그 사람의 몸이 동반될 때 비로소 느껴지는 신체적 진실성이다. 체중이 실리지 않는 말과 언어는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다. 직접 내 육체로 체험하지 않은 사실은 밑바닥 진실이자 마지막 진실처럼 힘과 에너지를 실어 전달할 수 없다, 밑바닥 진실을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이 건져 올린 언어에는 치열한 사투 끝에 피워낸 사유의 결정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어를 보면 심장이 뛰고 숨이 막히고 뇌가 번개를 맞은 듯 잠시 생각을 멈추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 관념의 거품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생생한 체험적 얼룩이 아픈 흔적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경이로운 깨달음의 즐거움이 아름다운 무늬로 채색되어 있기도 하다. 체험적 깨달음의 여정은 멈추는 순간 이전의 체험적 교훈과 지혜는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향수에 불과하거나 경험이 미천한 후배들에게 설명하는 고리타분한 강제적 지침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부단한 경험의 업데이트만이 경험의 덫에 걸리지 않는 비결이다. “40대가 넘으면 ‘경험의 직업인’들은 작은 집착이나 몇몇 속담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자동판매기가 되기 시작한다. 왼쪽 주입기에 동전 몇 개를 넣으면 은종이에 싸인 일화가 나온다. 오른쪽 주입기에 동전을 넣으면 물렁물렁한 캐러멜처럼 귀중한 충고가 나온다”(131쪽).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은종이 일화를 포장해서 전달해주는 꼰대가 되어 있고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충고를 캐러멜에 담아서 전해주는 권위적인 멘토가 되어간다. 



현장과 몸이 만나야 혁명이 시작된다


자신의 경험을 지나치게 포장해서 강조할수록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인식되기 쉽다. 경험은 소중한 스승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은 장본인이 될 수도 있다. 경험은 언제나 또 다른 경험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통해서 부단히 성찰하는 가운데 통찰을 얻을 때 삶의 소중한 스승으로 격상된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에 안주하기 시작하는 순간 안락사로 가는 급행열차를 탄 셈이다. “경험의 뜨거운 열기 속에 푹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만족감을 느끼는(또는 못 느끼는) 직업을 찾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349쪽). 로먼 크르즈나릭의 《인생을 짧다 카르페 디엠》에 나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경험의 뜨거운 열기 속으로 빠지지 않고서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면 재미있는 일을 알 수 없다. 내가 하면 재미있는 능력, 재능은 오로지 몸으로 실험하고 모색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다. 현장과 몸이 만나는 곳, 몸의 욕망이 현장을 매개로 펼쳐지는 가운데 가치관이 충돌이 일어나고 직업관의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몸으로 부딪친 체험이 가장 효험 있는 지혜를 낳고 그런 지혜만이 현장과 현실을 변혁시키는 혁명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고뇌의 깊은 바다에 빠져나가는 길조차 알 길이 없는 당혹감 속에 사투 끝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체험적 여정이 바로 내가 걸어가면 재미있고 즐거운 꿈으로 가는 여정을 알려줄 수 있다. 지식인을 관념을 먹고사는 창백한 책상 지식인과 동격으로 생각하는 것도 몸으로 공부하지 않고 머리로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성향과 맞닿아 있다. 



《어린 왕자》에 보면 지리학자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지. 하지만 난 탐험가가 아니거든. 나는 탐험가와는 거리가 멀단다. 지리학자는 도시나 강과 산, 바다와 태양과 사막을 돌아다니지 않는다. 지리학자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니까 한가로이 돌아다닐 수가 없지. 서재를 떠날 수가 없어. 서재에서 탐험가들을 만나는 거지.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여 그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거야. 탐험가의 기억 중에 매우 흥미로운 게 있으면 지리학자는 그 사람이 정말 성실한 사람인지 어떤지를 조사한단다." 지리학자는 지리를 발로 뛰면서 몸으로 익히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만 이해하려는 관념적 태도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글이다. 지리학자는 ‘이리저리’ 구석구석을 다녀봐야 지리를 알 수 있다. 지리학자가 지리학 책을 보면서 ‘요리조리’만 굴려서는 지리의 본질과 핵심을 파악할 수 없다. 지리는 발로 걸어봐야 피부로 느끼고 몸으로 터득된다. “책상에서 지리학을 배우고/독도법을 배운 사람들은/지도를 펴 들면/산의 높낮이와 길이가/숫자로 떠오른다고 한다./산사람이나 특전사 요원들은/지도를 펴 들면/먼저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박노해 시인의 ‘정신의 발’이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지리학을 공부하는 학자가 지리를 잘 모른다는 어린 왕자의 역설은 단지 지리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학자가 교육현장을 발로 뛰면서 현장의 아픔을 이해하지 않고 창백한 연구실에서 논리적으로 공부만 한다. 경영학자가 경영현장의 아픔을 몸으로 이해하지 않고 경영학적 논리로 경영현장을 재단한다. 경제학자가 경제현실을 피부로 느끼면서 현장을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경제현실을 파악하지 않고 경제적 통계와 지표를 경제현상을 설명하는데 주력한다. 공부를 많이 해서 석학이 되었지만 책상 지식일 뿐 격전의 현장에서 먹힐 수 있는 삶의 지혜는 아니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29쪽) 요한 볼프강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이다. 철저히 공부했지만 더 철저한 바보가 된 아이러니, 파우스트가 그 정곡을 찌르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몸을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또는 텅 빈 방 안에서 생각하고 고민만 한다. ‘지리(地理)’에 ‘학(學)’이 붙어 ‘지리학(地理學)’이 되고, ‘경영(經營)’에 ‘학(學)’이 붙어 ‘경영학(經營學)’이 탄생하며, ‘교육(敎育)’에 ‘학(學)’이 붙어 ‘교육학(敎育學)’이 탄생하고, ‘경제(經濟)’에 ‘학(學)’이 붙어 ‘경제학(經濟學)’이 되면서 지리와 경영, 그리고 교육 현장 및 경제현실과 거리가 먼 이론(理論)이 대량 양산되면서 현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상(異常)한 논리(論理), 이론(異論)이 탄생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학’을 떼는 경우가 많다. ‘학을 떼다’는 말은 본래 ‘학질(瘧疾)을 떼다’에서 나온 말이다. 말라리아를 한자어로 학질(疾)이라고 한다. “귀찮게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아주 학질을 뗐다”는 말처럼 ‘학질을 떼다’는 말은 괴롭거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느라고 진땀을 빼거나, 그것에 거의 질려 버린다는 말이다. ‘학을 떼다’는 말은 거북하거나 어려운 일로 진땀을 뺀다는 말이다. 지리, 교육, 경영, 경제에 ‘학(學)’이 붙기 시작하면 더 많은 전공으로 세분화된다. 세분화된 전공에 각각 또다시 ‘학(學)’이 붙기 시작하면 ‘학(學)’이 붙기 이전의 현장과 거리가 먼 이론이 양산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세분화되는 전공에 ‘학(學)’이 붙기 시작하면서 나중에는 그 ‘학(學)’을 떼어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곤란함이 있어야 파란을 일으킬 수 있다


지리학과 경영학, 그리고 교육학과 경제학을 현실과 격리(隔離)된 공간에서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학문적 탐구 대상인 현장과 거리(距離)가 먼 학문으로 전문화되면서 더욱더 심각한 문제점을 낳고 있다. 공부는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며 손발을 움직여 실천하는 가운데 점차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체험적 느낌 없이 차가운 논리의 세계에 빠지면 빠질수록 현장의 현실이 말해주는 진실을 이해하기보다 은폐 또는 왜곡하는 역기능이 발생할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고 할지라도 내 몸을 움직여 적용해보고 체험해보지 않으면 결코 나의 생각이나 주장으로 체화되지 않는다. 몸을 쓰지 않고 머리만 쓰면 머리는 바빠지고 답답해질 수 있다. 몸을 움직여 고통 체험을 해보면 복잡했던 생각도 말끔히 정리되고 답답했던 마음도 편안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책도 읽어야 되지만 읽은 책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산책을 해야 한다. 산책은 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한 가지가 아닐 수 없다. 머리로 읽은 책을 실제로 느껴보고 무슨 의미인지를 반추해보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 실천해봐야 한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은 몸을 움직여 체험해보는 가운데 남다른 느낌과 깨달음이 다가올 때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20년 경력의 구멍가게 아주머니와 같은 경력의 대학교수의 IQ를 비교하면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더 높을 수 있다는 게 《나와 너의 사회과학》을 쓴 우석훈의 주장이다. 여기서 IQ는 단순 어떤 문제를 이해고 숙고해서 해결하는 지능을 넘어선다.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실제로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복합 능력을 지칭한다.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구매, 품질, 재무, 회계, 마케팅과 브랜딩, 인사와 노무 등을 혼자 다 한다, 하지만 경영학을 전공하는 교수는 자기 분야의 전공을 세분해서 공부한다. 당연히 경영 전반을 폭넓게 이해하는 능력은 구멍가게 아주머니보다 현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학(學)과 특수한 사(思)를 이야기하는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과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의 의미를 반추해본다. 상황적 특수성이 거세된 일반적인 이론은 현실에 어둡고 특수한 상황에서 몸으로 체득한 경험적 지혜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지식인이 비판받는 이유는 구체적인 맥락에서 상황적 특수성을 몸으로 체득하는 고통 체험 없이 보편적인 이론으로 구축하려는 어리석은 노력 때문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특수한 상황에서의 실천을 통해 오로지 자신밖에 느낄 없는 이론적 토대나 프레임을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삶으로 앎을 재단하려고 한다. 반대로 앎과 삶이 따로 노는 사람들에게는 앎으로 삶을 재단하려는 관념적인 공부를 책상에서 즐긴다. 고통 체험을 스스로 하면서 깨달음의 지혜를 건져 올리기보다 고통 체험한 흔적을 더듬으며 앎을 만들어간다. 내 몸이 실린 언어보다 먹물 좀 먹은 지식인들의 관념적인 언어가 깨달음을 설명하는 언어로 자주 등장할 때 믿음의 기반이 무너져 내리고 관념화된 앎의 파편으로 도처에 흩어지기 시작한다. “냉정히 말해서 지식인이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곁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은 고통의 곁에서 연구하며 그 연구가 끝나면 언어를 회수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언어가 고통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자리는 고통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실이며 서재이다. 아무리 현장을 누비는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290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의 자리매김을 근원적으로 다시 성찰해보는 죽비를 맞은 듯하다. 전율하는 각성과 통렬한 반성의 메아리를 온몸으로 들은 듯했다. 고통 곁에 있는 사람과 고통 곁에 있는 척하다 떠나는 사람, 만일 지식인의 위치가 후자라면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논문과 저서에 담긴 메시지는 무슨 울림으로 다가가고 있을까? 


學然後知不足(학연후지부족) 

배운 연후에야 부족함을 알고

敎然後知困(교연후지곤) 

가르친 연후에야 곤(困=어려움)을 안다.


知不足然後能自反也(지부족연후능자반야) 

부족함을 안 연후에야 능히 스스로 반성하고

知困然後能自强也(지곤연후능자강야) 

곤함을 안 연후에야 능히 스스로 힘쓴다.


故 曰 敎學相長也(고 왈 교학상장야) 

그러므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서로 돕는 일이다.

-  《예기(禮記)》의 ‘학기(學記)’ 중에서-


가르친 연후에야 가르침의 곤란함을 몸소 깨닫게 되고, 곤란함을 몸소 깨달은 연후에야 스스로 더 잘하기 위해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행동하고 실천에 옮긴다. 곤란한 삶을 타개할 수 있는 묘안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각성과 예전의 지식으로는 곤란함을 해결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위기의식이 어제와 다른 출발을 북돋운다. 곤란함은 곤궁의 상태로 몰아넣기 위한 걸림돌이나 덫이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 이상적으로 꿈꾸는 목적지로 유도하는 디딤돌이다. 곤란이 파란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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