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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경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눈과 안경

경험을 오색찬란 빛나게 만드는 네 가지 눈과 다섯 가지 안경

경험에서 인생 경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눈과 안경

오리무중 했던 인생오색찬란 빛나게 만드는 네 가지 눈과 다섯 가지 안경 


경험에서 경전을 건축하려면 경험을 해석하는 관점과 언어가 필요하다. 경험을 아무리 다양하게 해도 그 경험을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이 부족하고 자신의 경험을 어제와 다른 언어로 표현하려는 언어선택이 뒤따르지 않으면 경험은 그대로 몸에 남아 흔적으로 살아간다. 경험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루하거나 틀에 박히면 아무리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도전체험을 반복해도 경험은 색다른 깨달음을 얻는 원천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자기만의 언어로 어제와 다르게 경험을 해석하는 눈과 안경이 필요한 이유다. 여기서는 경험을 해석하는 네 가지 눈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다섯 개의 안경을 이야기한다. 네 가지 눈은 육안(肉眼),  뇌안(腦眼), 심안(心眼), 영안(靈眼)이고 다섯 가지 안경은 망원경, 현미경, 만화경, 내시경과 투시경이다.


1. 네 가지 눈, ‘사안(四眼)’이 있어야 사안(事案)’에서 사색이 시작된다

당신은 지금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남다르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외수 작가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에 따르면 사람은 네 가지 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육안(肉眼)은 얼굴에 붙어 있는 육체적인 눈이고, 뇌안(腦眼)은 두뇌에 들어 있는 과학적인 눈이다. 심안(心眼)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감성적인 눈이고, 영안(靈眼)은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는 전체적인 구조를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이다. 



누구나 다 갖고 있는 눈육안과 뇌안이다 


먼저 ‘육안(肉眼)’은 물리적으로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이다. ‘육안’은 사물의 물리적 특성을 보는 눈이다. ‘육안’이 겉으로 드러나 있는 사물의 물리적 특성을 보는 눈이라면 ‘뇌안(腦眼)’은 사물의 과학적 특성을 분석하는 눈이다. 콩을 보면서 콩이 까맣거나 동그랗다고 보는 눈은 ‘육안’이지만 콩의 종류별 영양성분이 달라서 각각 다른 요리재료로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눈은 ‘뇌안’이다. 햄버거 포장지를 보면 영양정보가 과학적 분석에 의해서 제시되어 있다. 사물의 속성이나 특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눈이 바로 ‘뇌안’이다. ‘육안’과 ‘뇌안’은 누구나 갖고 있다. ‘육안’과 ‘뇌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삶이 무미건조하다. 무엇이든지 보이는 대로만 보고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 특히 ‘뇌안’은 느낌보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눈이다. 감동과 감흥이 없다. 사물이나 현상의 속성은 우선 육안으로 보고 뇌안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사물이나 현상의 본성은 심안으로 느끼고 영안으로 보이지 않는 구조나 관계를 꿰뚫어 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육안으로 책을 정의하면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이 된다. 뇌안으로 책을 정의하면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저자의 생각의 산물”이 된다. 심안으로 책을 정의하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거울”이나 “마음의 밭을 가는 쟁기” 또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아니면 책은 “저자의 그리움이 긁혀 남겨진 얼룩과 무늬”라고 하면 더 시적일까. 심안으로 책을 바라보면 단순한 물리적 실체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거울이나 쟁기 또는 창으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영혼의 눈인 영안으로 책을 정의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 권의 책은 그 사람의 일생이다. 책이 곧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책이 되어 책과 저자는 분리되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는 혼연일체다. 영안으로 바라본 책의 의미는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삶이 고스란히 담긴 목판경전”이다.



누구나 다 갖고 있지 않는 색다른 눈심안과 영안이다 


남다른 성취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남이 갖고 있지 않은 ‘심안(心眼)’을 갖고 있다. 뭔가 다른 사람은 육안과 뇌안보다 심안과 영안으로 만든 자기 특유의 사전을 끊임없이 개발한다. 햄버거를 보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눈은 ‘육안’이며, 햄버거가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눈은 ‘뇌안’이다. 햄버거를 육안으로 정의하면 바라보면 빵과 고기로 만든 음식물이다. 뇌안으로 햄버거를 정의하면 살찌게 만드는 지방이 많이 포함된 패스트 드다. 과학적 분석으로 포착되지 않는 깨달음을 보는 눈은 ‘심안’에서 비롯된다. ‘심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햄버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심안’은 겉으로 보이는 피상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현상의 이면을 보는 눈이다. ‘심안’은 한마디로 사물을 머리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눈이다. 똑같은 물질적 피상을 보고도 거기서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시적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삼라만상의 미물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모든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이 하나의 시요, 문학적 재료다. ‘심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깊은 관심과 뜨거운 애정을 갖고 다른 사람과 사물을 바라본다. 햄버거를 먹을 때 겉으로 드러난 영양성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햄버거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햄버거에 담긴 소의 아픔을 읽고 햄버거를 생산하는 패스트푸드의 역기능적 폐해를 읽어내는 눈이다. 심안으로 햄버거를 정의하려면 햄버거에 감정이입을 해서 내가 햄버거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햄버거는 이제 단순한 먹거리나 한 끼를 때우는 음식물이 아니다. 햄버거는 소의 희생으로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눈물겨운 음식이다.


“생각은 가슴이 합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얻고 조용히 생각합니다. 누구도 머리에 손을 얹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이란 잊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가슴에 담는 것입니다. 생각은 애정이며 책임이며 포옹입니다”(230쪽). 생각 사(思)를 분석해 보면 밭 전(田)과 마음 심(心)의 합성어다. 밭을 의미하는 전은 본래 인간의 숨골을 뜻하는 상형문자라고 한다. 그래서 생각 사의 윗부분은 머리나 이성을 아랫부분은 가슴이나 감성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말은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관여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은 머리가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생각은 곧 그래서 논리적 생각을 의미했다.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머리로 하던 생각을 가슴으로 하는 생각으로 전환하는 사람이다. 개념에 대한 체험적 느낌을 중심으로 나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나만의 언어가 탄생한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내 생각에 들어 있는 단어를 정의하는 사전이 아니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생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현상, 느낌이나 생각을 상대 입장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달라고 아우성을 칠 때 내가 받아 쓴 사전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정의하려는 자만과 오만에서 벗어나 사물과 사람이 말하고 싶은 내면의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표현된 솔직 담백한 단어들의 향연이다. 



남다른 생각은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에서 비롯된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물어봤을 때 스스로 말하고 싶은 내용을 역지사지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받아쓴 사전이다. 예를 들면 의자는 피곤한 사람들,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앉아서 쉬면서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의자는 힘들고 지쳤을 때 잠깐이라도 의자에게 의지해서 위로받을 수 있는 활력충전소다. 머리로만 생각해서 정의한 수많은 개념들을 나의 따뜻한 가슴으로 다시 관심을 갖고 애정을 부여할 때 세상의 모든 개념은 나에게로 다시 다가온다.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이미 국어사전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단어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물아일체나 역지사지가 되어 가슴으로 생각해 볼 때 그동안 간과했던 속 깊은 심정이 떠오른다.


심안으로 쓴 이외수 작가의 개념 정의를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고독은 선잠결 객지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이며, 환희는 봄날 햇살 속에서 어지럽게 펄떡거리는 만국기다. 참담은 저물녘 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막다른 골목이며, 비애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울리지 않는 휴대폰이다. 이처럼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단어를 논리적인 생각으로 정의하는 사전이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하면서 심안으로 정의하는 사전이다. 고독이라는 추상명사가 기적소리라는 보통명사로 들리며, 환희라는 추상명사가 만국기라는 보통명사로 펄떡거린다. 참담이라는 추상명사도 일상에 만나는 막다를 골목으로 느껴지고, 비애라는 추상명사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아서 홀로 쉬고 있는 휴대폰의 외로움으로 묘사된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에는 이처럼 관념적 추상명사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명사를 사용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한 정의가 많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되기 이전에 가슴으로 와닿는다. “심장이 오늘 깨달은 걸 머리는 내일쯤 가서야 이해한다." 미국의 작가 제임스 스티븐슨(James Stevenson)의 말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심장으로 오늘 느낀 점을 머리로 생각하면서 논리적으로 정의한 사전이라기보다 심장이 느낀 오늘의 깨달음이 사라지기 전에 받아 적은 체험적 기록이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흥부와 놀부의 대응방식은 다르다. 한 마디로 흥부는 부러진 다리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다리를 고쳐주며 제비와 나를 동일시하는 정서가 발동된다. 이때 부러진 다리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이 바로 마음이다. 한편 놀부는 제비 다리를 고쳐주고 부자가 된 흥부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자기도 부러진 제비 다리만 고쳐주면 부자가 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멀쩡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려 고쳐주고 부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나와 다른 것과 나를 분리해서 계산하고 판단하는 정서는 생각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놀부의 계산과 이해타산을 따지는 판단이 개입된 생각이 아니라 흥부의 측은지심으로 부러진 제비 다리를 돌보는 마음으로 정의한 사전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개념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신념으로 다시 정의하는 사전이다. 논리적 의미로 분석하고 재단하기 이전에 가슴으로 다가오는 느낌으로 생각해 보는 사전이다. 국어사전이나 전공별 용어사전은 모두 다른 사람의 머리로 하는 생각을 정리한 사전이다. 머리가 생각하는 사전적 의미는 설명을 들어봐도 와닿지 않는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생각하면 와닿지 않는 이유는 체험적 깨달음이 동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뿐입니다”(147쪽). 글도 그리움을 긁는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 글도 내가 그리워하는 것뿐이다. 내가 쓰는 글에 사용되는 다양한 개념도 나의 신념이 담긴 개념이다. 내 글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개념에는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낀 체험적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내가 자주 사용하는 개념은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나의 개인적 체험적 느낌이 일정한 시간을 거치면서 내 방식대로 다시 정의된 개념이다. 나의 개념에 담긴 나의 체험적 느낌이 독자와 체험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 감동의 느낌표가 탄생한다. 무의식 중에 사용하는 개념에 담긴 사연을 그리워할 때 개념은 그냥 언어적 의미를 넘어 사람과 삶을 떠올리게 만드는 생각의 결정체다. 개념에 담긴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고뇌와 성찰이 신념화되면서 개념은 내 생각의 양념처럼 나를 맛깔나게 드러내는 소통의 매개체다.



남다른 생각은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에서 비롯된다


남다른 문제의식은 물리적 특성을 보는 ‘육안’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뇌안’보다 시적 상상력을 떠올리는 ‘심안’을 넘어 사물의 본성에서 보이지 않는 구조와 관계를 읽어내는 ‘영안(靈眼)’에서 나온다. ‘영안’은 일상의 작은 사물이나 현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질서와 체계를 읽어내는 눈이다. 작은 사물 및 실체가 다른 전체와 맺고 있는 구조적 관계를 꿰뚫어 읽어 내거나,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는 ‘혜안(慧眼)’이다. ‘영안’은 부분 속에서 전체를 읽어내는 직관적 통찰력의 눈이다. ‘햄버거 커넥션(Hamburger Connection)’이라는 말이 있다. ‘햄버거 커넥션’이란 햄버거의 재료가 되는 소고기를 얻기 위해 조성되는 목장이 열대림 파괴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햄버거용 소고기 100g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물 2000ℓ가 필요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점점 더 빨리 소비되는 햄버거용 소고기를 대량 양산하기 위해 숲을 태우고 목초지를 만들면서 숲이 그만큼 빨리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이후 중앙아메리카 숲의 25% 이상이 소를 키우는 목초지 조성을 위해 벌채되었다고 한다. ‘햄버거 커넥션’이란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가 먹는 햄버거 하나에도 이렇게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햄버거를 많이 먹을수록 소화시키면서 소가 내뿜는 가스와 더 빨리 파괴되는 숲으로 인해 환경오염과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을 아는 눈이 바로 ‘영안’이다. 영안의 입장에서 바라본 햄버거는 단순히 하나의 햄버거가 아니라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정의된다.



눈은 세계를 읽어내는 필터다. 내가 어떤 필터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세계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해되고 해석된다. ‘육안’을 넘어서 ‘뇌안’으로, ‘뇌안’을 넘어 ‘심안’으로 사물과 실체의 본성을 읽어내는 시적 상상력을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연마하고 개발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보이지 않는 구조적 관계나 힘을 읽어내는 ‘영안’을 개발해야 남다르게 볼 수 있고 남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생각지도 못한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육안’이나 ‘뇌안’에서 비롯되기보다 마음으로 읽는 ‘심안’과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안’으로 정의한 사전이다. 


나는 지금 사물을 ‘육안’으로 바라보면서 사물의 겉모습만 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사물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편협된 눈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나는 지금 ‘육안’과 ‘뇌안’을 넘어 측은지심으로 세상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심안’으로 바라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영안’을 갖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남다른 ‘혜안’은 영혼의 눈, ‘영안’에서 비롯된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육안과 뇌안을 넘어 몇 사람만 갖고 있는 심안과 영안으로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사전이다. 세상이 아무리 흔들리고 빠르게 변해도 나만의 무게 중심을 잡고 열심히 살아가려면 세상을 자기만의 눈으로 바라보며 축적한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2. 오매경(五魅鏡), 

오리무중(五里霧中)했던 세상을 오색찬란(五色燦爛)하게 바라보는 다섯 가지 안경 

     

당신은 지금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본래 삼매경은 한자로 삼매경(三昧境)이다. 삼매경(三昧境)의 한자를 풀이해 보면 三:석 삼, 昧:새벽 매, 境:지경 경, 즉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의미한다. 세상을 남다르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우선 ‘삼매경(三魅鏡)’은 망원경(望遠鏡), 현미경(顯微鏡), 만화경(萬華鏡)으로 대변되는 3가지 매력적인 안경이다. 세 가지 안경에 대한 아이디어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간된 《삼매경(三魅鏡)》이라는 책에서 얻었다. 남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세 가지 다른 안경에 비추어 자신의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했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나는 틀에 박힌 모습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남다른 생각은 자기만의 고유한 안경에서 비롯된다

     

편협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색다른 눈으로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갖춰야 할 안경은 책에서도 얻을 수 있다. 책을 보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이 들어있고, 지금 현실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현미경이 있으며, 다양한 모습을 띠면서 시시각각 변화되는 요지경(瑤池鏡)의 세상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만화경이 들어 있다.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저자의 메시지를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망원경으로 바라본 미래를 내다보고, 현미경으로 관찰한 현실을 들여다보며, 만화경으로 바라본 다양한 요지경을 감상해 보는 것이다. 책은 추한 나를 비추는 반성의 거울이며,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전망의 안경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망원경과 현미경, 그리고 만화경 이외에 내시경(內視鏡)과 투시경(透視鏡)을 갖고 있다. 내시경은 시선을 밖으로 향하면서 남과 비교하는 안경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서 내면적 성찰을 도와주는 안경이다. 투시경은 보이지 않는 걸 보는 영안과 닮은 안경이다. 투시경은 보이지 않는 게 보이는 걸 움직인다는 신념을 갖고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눈이다. 삼매경에 더해 두 가지 안경을 더하면 오리무중(五里霧中)했던 세상을 오색찬란(五色燦爛)하게 바라보는 오매경(五魅鏡)이 탄생한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은 다양한 안경을 쓰고 다양한 가능성을 찾아보는 사람이다. 내가 쓰고 있는 안경대로 세상은 보인다. 여기서 안경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지만 관점도 어떤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면 망원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미래학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회 변화 추세나 이슈를 중점적으로 본다. 현미경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현실주의자 관점으로 지금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안이나 문제를 중심으로 관찰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만화경으로 세상을 살펴보는 사람은 몽환주의자 관점에서 다채로운 변화가 갖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망원경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고, 현미경으로만 세상을 들여다보면 미래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게 현실문제에 매몰될 수 있다. 만화경으로만 세상을 감상할 경우 변화의 본질을 망각한 지나친 환상이나 몽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 세상의 변화가 요구하는 '욕망(desires)'을 정확하게 간파하면서도 현실 세계가 원하는 '희망(hopes)' 사항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현실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열망(aspirations)’을 포착해야 한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하고 세 가지 안경으로 요지경인 세상을 균형 잡힌 관점으로 바라본다.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는 언어적 안경이다


문제는 쓰고 있는 안경의 종류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일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 형성된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기 신념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 신념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사실만 보려는 편향이 있기 때문이다. 망원경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희망의 안경이지만, 어떤 꿈을 갈망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자기가 보고 싶은 미래대로 채색될 수 있다. 현미경은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안경이지만 어떤 문제의식으로 주어진 이슈를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문제도 다르게 이해되고 다른 해결대안이 동원될 수 있다. 


만화경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형형색색은 객관적인 수학이 만들어낸 과학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현실문제나 미래의 이슈는 인간의 환상을 담은 주관적 몽상일 수 있다. 망원경, 현미경, 그리고 만화경은 각각 자신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 기저에는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 채색해서 보는 색안경의 산물이다. 결국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떤 안경을 쓰는지에 관계없이 안경으로 바라본 세상을 해석하는 경험적 렌즈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남다른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 경험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독특한 안경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개념사전을 만드는 관점으로 사용한다. 경험적 소산과 지식이 생각을 정리하고 제어하며 ‘옳다’라고 믿는 신념체계나 가치관을 형성한다. 자신이 ‘옳다’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경험을 통해서 축적한 지식과 신념, 그리고 가치관이다. 세상은 내 생각과 신념 그리고 믿음대로 보인다. 아니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은 보인다. 사람들에게 ‘十’ 자가 새겨진 카드를 보여주면 직업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수학자는 덧셈,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 목사는 십자가, 교통경찰은 사거리, 간호사는 적십자, 약사는 녹십자, 그리고 기능공은 십자나사못이나 십자드라이버라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것만큼 보이고 내가 경험한 대로 세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경험한 것을 근간으로 내가 보고 싶은 방식대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경험한 대로 보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것은 기존 경험적 렌즈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성향이 있다. 경험은 다른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반을 제공함과 동시에 다른 경험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의 사유를 차단해 버린다.


딴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딴 길을 가야 하고 딴짓을 해야 한다. 딴 세상은 별천지(別天地)이고 딴 길은 별로(別路)다. 그런데 ‘별로’, 즉 특이한 딴 길을 가는 사람을 두고 ‘별로’라고 하거나 ‘별 볼일 없다’ 또는 ‘별꼴이다’고 생각하는 사람치고 ‘별’이 된 사람은 없다. 정상에 올라간 사람 치고 정상인 사람이 없듯이 뭔가 위대한 업적이나 성취를 이룬 사람은 모두 비정상적이며 평범한 사람이 가지 않은 딴 길을 걸어가면서 딴짓을 한 사람들이다. 기존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체험하며, 그 체험도 어제와 다른 안경으로 바라보면서 다른 언어로 재해석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딴짓에 대해 딴지 거는 사람이 나와도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자기만의 언어로 부단히 재해석하는 과정을 멈춰서는 안 된다. 세상의 흐름을 판단하고 중심을 잡는 자기만의 교양의 두께를 두껍게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은 어제와 다른 경험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이전과 다른 언어로 재서술하는 부단한 노력이 만들어간다.



나를 들여다보는 안경-내시경(內視鏡)

답은 에 있지 않고 에 있다.


내시경(內視鏡)은 본래 수술을 하거나 또는 부검(剖檢)을 하지 않고서는 보고 싶은 장기의 내부에 기계를 삽입하여 의심이 가는 병명이나 병의 원인 등을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고안된 기구이다.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장기의 내부를 내시경을 통해 안을 들여다봄으로써 궁금한 부분이나 사항을 확인하는 것이다. 내시경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내부를 보는 거울이자 안경이다. 거울은 흔히 얼굴을 비롯해서 겉모습을 비추어 보는 생활용품이다. 거울은 그래서 자신의 현재 겉모습을 비추어 봄으로써 무엇인가를 부분적으로 변화를 주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데 내시경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장기의 내부를 작은 거울과 기계적 원리를 활용하여 장기의 내부를 보는 새로운 안경 역할을 한다. 내시경은 이렇게 물리적 기구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지만 내 안이나 마음을 들여다보고 비추어보는 은유적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다. 


사람들은 주로 밖은 보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다. 침묵 속에서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시간보다 소란 속에서 남과 만나는 시간이 많다. 그렇다 보니 진정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왜 가고 있는지를 물어보면서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제나 바쁘고 주변은 산만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달성해도 점점 높아져만 목표, 빨리 해도 더 빨리 처리해야 되는 시간적 압박감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밖을 향하는 끝없는 욕망의 열차를 타고 달리기 때문이다.



잠시 달리던 길 위에서 멈추고 나를 들여다보자. 나를 들여다보는 강력한 내시경 중에 책이라는 거울이 있다. 책은 자신의 현재 위치를 반추해 보고 반성하는 거울로 쓰일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이나 저자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나의 현재 위치를 재점검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데 중요한 화두나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우선 책은 저자의 살아온 배경이나 문제의식에 비추어 나를 반추해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책을 쓰는 사람의 경험과 배경, 사연과 문제의식과 내 것을 비교해 봄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둘째는 책은 책에서 제시하는 주요 메시지가 주는 의미에 비추어 볼 때 고민하는 이슈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거울이다. 책을 읽으면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이유가 책이 나의 추한 모습이나 자만 또는 거만한 모습을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현재위치나 보유하고 있는 지식, 깨달은 체험적 노하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비추어 볼 수 없다. 어딘가에 비추어봐야 부끄러워할 수 있다.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은 이런 점에서 매우 위대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자신보다 훌륭한 무언가에 비추어 봐야 자신도 그런 모습으로 변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은유적 의미로서의 내시경을 언제나 갖고 다녀야 하는 이유는 겉모습만 보는 물리적 도구로서의 거울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꿈과 비전, 그리고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마중물처럼 적절한 외부적 자극이 가해지지 않아서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꿈은 꾸어오는 것이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꿈을 누군가에게 꾸어오기 위해서는 이미 내 안에 꿈꿀 수 있는 열망이나 욕망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남에게 꾸어오는 꿈이지만 결국 내 안에 그런 가능성의 꿈이 이미 있기 때문에 꿈꿀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답도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이미 있다. 잠자고 있는 내 안의 답이 외부적 자극이나 문제 상황과 연결되어 밖으로 인출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단서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문제해결은 밖의 문제 상황이 요구하는 아이디어를 내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체험적 노하우와 연결시켜 남다른 방식으로 조합하는 과정이다. 나는 어떤 체험적 노하우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면 색다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자. 밖으로 뛰쳐나가서 찾으려고만 하지 말고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되는 이유다.



혼돈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안경-투시경(透視鏡)

본질을 포착해야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다!


투시경(透視鏡)은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 보는 안경(眼鏡)이다. 우리에게 투시경이 필요한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안목(眼目)과 혜안(慧眼)을 갖게 된 것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나 징후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착시나 착각을 방지할 수 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움직인다.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움직이는 이면의 보이지 않는 힘을 간파할 때 보이는 현상만 주목하고 의사결정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좀 더 심사숙고하면서 보이지 않는 이면의 힘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마침내 보이지 않는 힘이나 구조적 관계가 눈에 들어온다. 


유니타스 브랜드 권민 편집장에 따르면 관점(觀點)은 시점(時點)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을 과거에서 보는가? 현재에서 보는가? 아니면 미래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 보인다. 어린아이가 되어서 보는가? 노인으로서 보는가? 시간은 어떤 사람에게는 오목렌즈고 어떤 사람에게는 볼록렌즈다. 따라서 바라보는 위치만 바꾸면 망원경(望遠鏡)이 되기도 하고 현미경(顯微鏡)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절대로 지금 보이는 것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관점은 또한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視角)이다. 관점은 보려고 하는 것만을 선택해서 보는 눈이다. 따라서 관점에는 이미 선택되지 않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른 이유는 관심을 갖고 바라보려는 의도와 선택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내가 경험한 것 중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누구나 두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보는 것도 다를 뿐만 아니라 잘 못 보는 것도 부지기수(不知其數)다. 올바르게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 본질이 아니라 피상을 보고 마치 본질을 본 것처럼 착각하고 오해할 경우 엉뚱한 생각이나 치명적인 행동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헬렌 켈러는 만약 자신이 대학교 총장이 된다면 대학교에 ‘보는 방법(Ways of seeing)'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동일한 사실이나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보다‘라는 말이 27가지가 있다고 한다. 보는 사람의 위치,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 그리고 겉모습보다 사물의 본질 이면을 보는 방식에 따라 보는 방법이 무려 27가지나 된다는 것이다. 잠시 김수업의 《우리말이 서럽다》에 등장하는 ’보다‘라는 말의 차이를 인용해 본다.


우선 보는 자리를 안과 밖으로 나누면 ‘내다보다’, ‘들여다보다’, ‘넘어다보다’, ‘넘겨다보다’를 시작으로 보는 자리를 안팎이 아니라 높낮이로 나누면 ‘바라보다’, ‘굽어보다’, ‘쳐다보다’, ‘도두보다’, ‘우러러보다’, ‘낮추보다’, ‘깔보다’ 같은 일곱 가지를 쓴다. 보는 눈이나 마음의 높낮이가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돌보다’, ‘엿보다’, ‘노려보다’, ‘쏘아보다’, ‘흘겨보다’, ‘째려보다’ 같은 낱말들도 있다. 이제까지 살핀 열일곱 가지 ‘보다’가 주로 겉모습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겉모습 속에 감추어진 속살까지 겨냥하는 ‘보다’도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에는 가장 건성으로 보는 ‘거들떠보다’, 뼈대 추려서 보는 ‘훑어보다’, 꼼꼼히 보는 ‘(눈) 여겨보다’, 샅샅이 보는 ‘살쳐보다’를 쓴다. 이들 네 가지는 아직 속살을 보는 데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눈에 보이는 무엇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이모저모 헤쳐서 보는 ‘뜯어보다’, 눈으로 본 바를 마음으로 맞추어 보는 ‘따져보다’, 마음으로 셈하여 보는 ‘헤아려보다’. 마침내 보아야 하는 그것을 겉모습에서 속살과 속내까지 온전히 하나로 보아 내는 ‘알아보다’에 이른다. 그리고 ‘알아보다’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키워 나가면 그 걸음에 따라 속살이 환히 보이는 ‘뚫어보다’에 닿았다가, 드디어 속살의 구석구석까지 남김없이 보이는 ‘꿰뚫어 보다’에 다다른다. 여기에 이르면 비로소 더 보아야 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온전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견시관(見視觀), 세상을 바라보는 세 가지 방식의 차이!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본다’는 것도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한자를 분석해 보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한자에는 보는 것에 세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이를 견시관(見視觀)이라 한다. 한문으로 '볼 견(見)'은 보기는 보는 데 눈뜨고 있으니 보이는 것이다. 영어의 see에 해당하는 말이다(95쪽). ‘견(見)’은 눈(目)을 크게 뜬 사람(人)의 눈으로 외부의 사물이나 현상이 보이는 것을 형상화한 한자다. ‘견(見)’은 무엇인가 보일 때 가지게 되는 의견(意見)이나 견해(見解)다. ‘견(見)’은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보고 의로움을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나 눈앞의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말해주듯이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앞에 있어서 보이는 것이다. ‘견(見)’은 또한 자기 방식 대로 보는 것이다. 자기 방식대로 본 의견과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남의 의견과 주장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면서 견해차(見解差)가 발생한다. 견해의 다름은 틀림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의견은 옳고 타인의 의견은 틀린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볼 시視'는 어느 차원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다. ‘시(視)’는 ‘견(見)’과 ‘시(示)’가 결합해 어떤 대상을 보여 주거나 보는 것을 말한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시각차(視角差)가 발생하는 이유는 보는 각도(角度)가 다르다. 때문에 동일한 것을 봤다고 해도 결국 보는 각도로 인하여 실제 본 것이 다르다. 정면과 측면, 또는 후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고 보는 것이 다르다. 장님 여럿이서 코끼를 만진다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이 시사하듯 코끼리를 어느 각도에서 어떤 부위를 보면서 만지느냐에 따라 코끼리에 대한 시각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시선(視線)이 다르면 시각(視覺)도 달라지고 시야(視野)도 달라지는 이유다.  



견시관의 ‘관(觀)'은 중심에서 보는 것이다. 볼 ’관(觀)‘은 큰 눈을 가진 수리부엉이가 목표물을 응시하듯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을 무심코 시각적(視覺的)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서 자세히 응시(凝視)하면서 꿰뚫어지게 보는 것이다. 관형찰색(觀形察色)이라는 사자성어가 말해주듯이 ‘관(觀)'은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얼굴빛을 자세히 살펴보거나 잘 모르는 사물(事物)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고 보이는 것도 본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이나 현상의 겉모습만 보고 그것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을 보려면 눈동자에 초점을 맞추고 봐야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보면 볼수록 다른 것은 보지 못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눈동자가 없어야 전체를 볼 수 있다. 눈동자가 없어야 전후좌우를 골고루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관(觀)’자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견(見)’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시(視)’는 여러 각도로 두루두루 보려는 노력이며, ‘관(觀)’은 전체를 꿰뚫어 보면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에 따르면 ‘견(見)’은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고, 시(視)는 능동적으로 보는 것이며, 간(看)은 스쳐 지나가면서 보는 것이고, 관(觀)은 개념적으로 가장 깊이 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밖에도 관람(觀覽) 박람(博覽), 열람(閱覽), 일람(一覽), 편람(便覽), 회람(回覽)이라는 말에 쓰이는 볼 람(覽)은 자세히 보지 않고 얼른 또는 죽 둘러보면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대충 보는 것을 의미한다. 습관과 타성에 젖어 상식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육안(肉眼)으로 본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오해하면서 내가 보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거나 보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 것도 인정해 주고 그것도 세상을 보는 눈에는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해할 때 다양한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투시경은 미래나 먼 곳을 바라보는 망원경, 현재나 가까운 곳만 세밀히 보는 현미경, 안에만 들여다보는 내시경의 문제점과 한계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안경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역지사지 입장에서 관점을 바꾸어 보고 보는 시제를 달리해서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는 시점을 바꿔서 봐야 될 뿐만 아니라 보는 각도를 달리해서 보는 시각을 수시로 바꿔봐야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잘 못 본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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