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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구체성을 추상화시키는
개념어는 폭력적이다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의 미래가 아름다운 미래(美來)다

삶의 구체성을 추상화시키는 개념어는 폭력적이다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사람의 미래(未來)가 아름다운 미래(美來)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에 갑자기 맞닥뜨릴 수 있다. 삶은 늘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나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마치 하늘에 떨어진 빗방울이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불안하게 던져진 존재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갑작스러운 세상의 변화흐름과 급변하는 일상적인 작은 상황에도 대처하지 못하면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위험한 일의 연속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서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담론은 저마다의 신념과 주장을 담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거만하거나 오만한 약속은 냉혹하고 불확실한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미래는 현재에서 직선으로 흘러가는 확실한 목적지가 아니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몇 가지 선택옵션을 가질 수 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을 근간으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할 수도 있고, 비록 지금은 미약하고 의지가 박약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극복하려는 안간힘을 쓰면서 극복할 수도 있다. 전자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사람을 ‘현재 안의 과거형’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를 ‘현재 안의 미래형’ 삶을 사는 사람이다.



현재 안의 과거형 삶과 현재 안의 미래형 삶의 차이


‘현재 안의 미래형’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어제와 나와 다른 나로 변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만으로는 역부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난국을 극복하고 오늘의 나와 다른 나로 끊임없이 변신하려는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이고, 그 위버멘쉬가 발버둥 치며 어제와 다른 삶을 욕망하는 현실적인 힘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the Will to Power)’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에서 배운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에티카》에서 자기 보존의 욕망을 지칭하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실존을 지속시키려는 근원적인 욕망이다. 자기 보존의 욕망인 ‘코나투스’가 실현되면 기쁨이라는 감정이 찾아오고 자기 보존의 욕망이 막히면 슬픔이라는 감정이 찾아온다. ‘코나투스’는 가급적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주는 욕망을 추구하며 자기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일종의 관성이다.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발전시켜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을 성취하려는 끈질긴 경향이다. 우리가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코나투스’를 찾아내서 그걸 더 강화시키는 공부를 하면서 자기다움을 강화시키는 욕망탐구 여정이다. 자신이 하면 즐겁고 신나서 ‘코나투스’가 더욱 발현되는 길을 찾아간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발버둥 치며 성장하려는 의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저기로 가려는 상승작용의 의지, 나에게 없었던 힘을 주는 의지, 내가 하면 행복한 에너지가 솟아 나오는 것을 못하게 막는 구속과 저항을 극복하려는 의지,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면서 힘이 되는 의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적 의지다. 나에게 힘이 되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공부를 통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 여기에서 만족하는 공부가 아니라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저기로 가려고 발버둥 치며 동료들과 함께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과정이 공부의 참맛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의 개인적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활력이 생기는 코나투스를 넘어선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서로가 서로에 힘이 되는 일을 통해 혼자 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생명력뿐만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의 생명력을 창조하려는 의지로 발전시킨 것이다. 


‘힘에의 의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틀에 박힌 일상의 무료함에서 벗어나 뭔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고 보람과 의미가 드러나게 만드는 에너지 또는 생명력을 말한다. 이런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사람은 틀에 박힌 일상에서 어제와 다른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고 끊임없이 예술적 창작욕망을 불태우며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고 창조하면서 기존의 억압된 구속이나 틀에 박힌 통념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뭔가를 창조하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통념이나 관성에 젖은 타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존의 해석 체계를 창조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다. 니체를 전복의 철학자나 망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다. 


해석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어제와 다르게 해결될 수 없다. 해석을 바꾼다는 의미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물론 옳다고 믿는 가정이나 신념체계 자체를 뒤흔들어 새로운 가치체계로 재정립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해석을 바꾸는 일은 기존 해석체계를 따르는 사람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해석을 바꾸는 일은 기존 해석체계를 따르는 사람으로부터 심각한 도전과 저항을 피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남의 해석 체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주관대로 주체성을 만들어나가기 어려운 사람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맥을 같이하는 개념이 바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나오는 ‘엘랑비탈(Elan Vital)’이다. '엘랑(Élan)'은 '도약과 약동'을 의미하고, '비탈(Vital)'은 '생명'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다. 엘랑비탈은 결국 ‘생명의 도약을 달성하는 근원적 힘’을 의미한다. 극한의 조건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진화와 창조를 이루어내는 생명이 가진 근원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엘랑비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이 가진 근원적이고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 엘랑 비탈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간직한 그 에너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도전과제에 직면하면 열정으로 불이 붙고 도약하는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러한 엘랑 비탈을 한 시대의 흐름을 꺾는 위업을 달성하고 싶은 개인과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시시때때로 맞닥뜨리는 어렵고 힘든 상황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는 무한한 힘과 에너지, 즉 엘랑 비탈로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안의 과거형’은 중심부의 고인 물에 동화되어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답습이자 관성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살고 있는 시제는 지금 여기서의 현재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예전의 관행이나 관성을 따라 습관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기계적 알고리즘을 따라 규칙을 따라가는 공학적 논리의 산물이다. 이들에게 창작은 지금 여기서 전통과 과거의 유산 속에 머물러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료를 편집, 정보를 만드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현재 안의 과거형’를 따라가는 사람은 니체의 위버멘쉬나 베르그송의 엘랑비탈과 같은 창조적 변혁의지가 없다. 현재의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현재 안의 미래형’을 추구하는 사람은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 속에서 진정한 사고의 변혁을 꾸준히 모색하는 사람이다. 즉 이들은 신영복 교수의 《변방을 찾아서》가 추구하는 이방인에 가깝다. 이 책의 핵심은 진정한 변화는 변방에서 일어나고 중심에서는 동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이다.



변화는 변방에서 일어난다!

나도 한 때는 변방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변방에서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한 사회의 획을 긋는 혁명적인 ‘변화’는 중심에서 일어나기보다 ‘변방’에서 일어난다. 중심부는 변화보다 동화(同化)가 목적이다. 중심부는 자기 생각에 주변부 사람들의 생각이 동조(同調)하기를 강권하는 데 중점을 둔다. 중심부의 생각은 그래서 보자기형 사고라기보다 가방형 사고에 가깝다. 보자기는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을 포용하고 수용하는데 유연하다. 반면에 가방 크기에 맞추지 않으면 가방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가방은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을 무시하고 무조건 자기에게 맞추라고 강권한다. 보자기는 변화무쌍함을 인정하고 수용하지만, 가방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표준화시켜 자기 방식에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가방은 변화보다는 동화를 목적으로 한다. 


변방은 아직 정해진 시스템이나 제도적 틀이 없기에 어떤 변화 추구도 가능하지만, 중심부는 이미 잘 짜인 시스템과 제도적 틀이 있어서 다름과 다양성을 쉽게 수용하기 어렵다. 중심부는 자기만의 평가 기준이 정해져 있어서 거기에 맞추지 않으면 실패자이자 낙오자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변방은 어떤 변화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어서 정해진 틀에 끼워 맞출 필요 없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려 있다. 연암 박지원의 독특한 문체도 바로 변방에서 중앙 무대의 문체와 무관한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실험하면서 생긴 산물이다(신영복, 2012). 


중심부의 주류 담론에 횝싸여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느끼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변화의 추동력으로 일어설 수 있는 곳이 바로 변방이다. 밖에 있어봐야 안을 들여다볼 수 있고, 주변부에 있어봐야 중심부가 부패되어 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안의 변화는 내부적 절박감과 갈등구조 속에서도 발생하지만 밖의 자극이 안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바깥의 소용돌이는 안의 안주(安住)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요동치는 자극을 통해 변화를 촉발시킨다. 중심부는 안이고 주변부는 밖이다. 중심부는 안에 머무르려 하고 주변부는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가기 위해서는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지만, 밖에서 더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저 결심하면 된다. 밖의 세상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더 많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보면 낯선 세계와의 마주침을 색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색다른 마주침이 색다른 변화를 일으키는 추동력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쇤베르크 12 음계 음악도 주류 음계로 자라 잡고 있던 7 음계 외부에서 사건으로 돌출한 결과 독창적인 음계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한 시대의 흐름을 주름잡는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문화와 예술적 담론도 외부와 바깥, 변방과 마이너리티에서 새로운 소용돌이를 일으켜 중심부를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안의 미래형’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변방의 ‘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잘 올라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성공한 사람일수록 잘 내려간 사람이다. 비행기도 이륙할 때 보다 착륙할 때 사고가 많이 난다. 등산할 때보다 하산할 때 사고가 많이 난다. 성공은 올라가는 데에서 비롯되기보다 내려가는 가운데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바닥’으로 내려가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늑대도 사냥에 실패하면 대강대충 중간 지점에서 시작하지 않고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바닥’은 희망의 터전이다. 


‘바닥’은 실패한 사람들이 절망과 울분을 토로하는 장소가 아니라 언제가 비약(飛躍)을 꿈꾸는 사람들이 비련(悲戀)을 삭히고 꿈과 희망을 싹 틔우는 터전이다. ‘바닥’은 인생을 새롭게 세울 수 있는 튼실한 기반이다. ‘바닥’은 지금과는 다른 방법으로 ‘다시’ 출발하기 위한 원점이다. 삶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바닥에서 ‘다시’ 성찰해봐야 한다. 밑바닥부터 ‘다시’ 뜻을 세우는 것이다. 중심부의 담론에 휩쓸려 우왕좌왕하고 한 때의 유행에 빠져 정신없는 소비 욕망에 물들기 이전에 변방에서 나를 닦고 밖을 다스리는 성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성숙해지는 지름길은 나를 지탱하고 있는 바닥을 흔드는 것이다. 바닥은 신념이다. 바닥의 신념을 흔들어야 내가 바뀐다! 


변방은 주로 밑바닥이다. 변방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이다. 밑바닥의 크기가 성장 포텐셜의 크기다. 밑바닥에서 지낸 역경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을 길러주고 마침내 역경을 뒤집어 남다른 경력을 만들어 준다. 실패하고 밑바닥에 있지만 언젠가는 정상을 치고 올라갈 수 있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태운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간다. 중심부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젖어 변방에서 막연하게 지낸다면 평생을 막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은 변방의 맨바닥에서 울분을 토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저력이 발휘될 시점이 올 것이다. 중심부를 벗어나 변방에서 내공을 닦고 저변에서 저력을 키울 때 기회는 온다. 


기회는 노력하는 사람이 때를 만날 때 온다. 성공한 재일교포 사업가, 손정의는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 만성간염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지만 좌절하지 않고 병상에서 사력을 다해 필사적으로 관련 논문을 읽고 서적 3천 권을 돌파한다. 그리고 변방에 있는 무명의 대체 의학자를 만나 기사회생한다. 목숨을 걸면 생명은 연장되고 성장할 수 있다.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 보자. 나의 전부를 걸고 도전해 본 적이 있는가? 변방의 바닥은 좌절한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피신처가 아니다. 오히려 변방의 바닥은 도전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는 터전이다. 변방의 바닥을 기어봐야 인생의 진수를 알 수 있고, 올라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다. 바닥을 기어본 사람만이 정상의 쾌감을 알 수 있다. 



“질퍽질퍽한 진창에서 어떻게 몸이라도 일으켜 보려고 버둥거리는 나 자신이 처참하게 느껴질 때 흐르는 뜨거운 눈물, 이 눈물이 피눈물이다. 자수성가한 이들의 이야기가 가슴 절절한 것은 그들의 가슴에 아직 피눈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피눈물을 잊지 않는다. 그 피눈물이 그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서광원, 2009, p.262). 슬픈 눈물이지만 뜨거운 삶의 욕구가 꿈틀거리는 눈물이다. 서러움에 복받쳐 나오는 눈물이지만 미래를 지향하는 의지의 눈물이다. 참을 수 없는 힘에 겨운 눈물이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비장의 각오가 서려 있는 눈물이다. 그 ‘눈물’이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눈’이다. “바닥에는 처절함이 있다. 바닥에서 시작하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위기에 빠진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바꾼다.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독하지 않으면 못한다. 살아남은 생명체는 그 독함으로 새로운 생존을 시작한다. 어려움을 이기고 나면 독함이 경쟁력이 되고 힘이 되는 까닭이다”(서광원, 2009, pp.264-265). 세상에는 독종이 많다. 독종이지만 마음이 따뜻한 독종이다. 세상에 대해 독기를 품고 있지만 삶에 대해서는 열기가 흐른다. 독종들의 독기는 그래서 삶을 바꿀 수 있는 열정 에너지다. 쓰라린 밑바닥 체험에서 시련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긍정의 힘이 나오는 것이며,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이 나오는 것이다. 바닥에서 축적한 생존지혜는 어느 순간 상상하기 어려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원동력이다. 자신도 모르게 축적된 실력이 한순간에 빛을 발할 수 있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날은 반드시 온다. 다만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그날은 그들만이 잡을 수 있다. 그들만의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바닥을 기어야 하고 처절하게 바닥을 뒹굴어야 한다. 


모든 단어는 편견의 산물이자 그 사람 특유의 냄새가 스며들어 있다


변방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힘에의 의지’나 바닥에서 정상을 향하는 ‘엘랑비탈’의 경험도 결국 언어를 매개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아무리 독특한 경험을 많이 했어도 기존 언어 사용방식을 답습할 경우 ‘현재 안의 과거형’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 정의한 언어적 의미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나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는 건축되지 않는다. 각종 사전에 등장하는 개념적 정의는 거대한 동어반복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물고 물리는 생각의 꼬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의되어 있다. 마음은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이라고 정의되어 있고, 품성은 “품격과 성질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다. 사랑은 마음이고, 마음은 품성이며, 품성은 품격과 성질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동어반복의 연결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언어가 낯선 생각을 잉태하는 그릇이 아니라 낯선 생각의 잉태를 방해하는 틀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기존 언어 사용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낯선 경험을 했어도 어제와 다르게 표현되지 못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삶은 사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이다. 삶이 복잡하다는 이야기는 한두 가지 개념으로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인 장면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창발(emergent)된다는 이야기다. 창발은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예기치 못한 상호작용을 통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정도로 발생하는 예측불허의 갑작스러운 발생장면을 지칭한다. 특정한 장면에서만 다가오는 느낌을 몸이 반응할 때 들리는 숨결도 있고, 미세한 차이에 반응하는 감각적 각성도 있다. 이런 모든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되는지를 모두 정리해서 매뉴얼로 만들 수도 없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름길이나 처방전도 무용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몸으로 반응하는 느낌이나 감각적 각성을 모두 언어로 담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사전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삶의 구체성을 담아내기 위해 고뇌를 거듭하다 만들어낸 추상화의 산물이다. 특정한 상황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고 언어로 다 담아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이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언어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한 모습이다. 언어는 삶의 모든 디테일을 다 담아낼 수 없기에 그중에서도 자주 나타나서 일정한 모습을 띄는 것들의 공통점을 찾아 ‘명명(命名)’한 결과다. 특정한 장면은 나에게 자신의 이런 모습을 담아달라고 ‘명령(命令)’하지만 언어는 그런 명령 중에서 공통점만을 찾아 추상화시키는 과정에서 ‘명명(命名)’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김훈 작가는 “개념어라는 것은 대단히 권력적이고 폭력적인 것이지요. 그 개념 안에 들어오지 않은 구체성을 다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유다. 개념어는 그걸 만든 사람의 의도가 반영된다. 삶의 모든 구체성을 다 담아낼 수 없는 개념어는 그 개념어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편파적 의견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개념어에 담기지 않고 선택을 포기당하는 구체성은 추상성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다. 니체도 비슷한 맥락에서 “모든 단어는 하나의 편견”(266쪽)이자 “모든 단어에는 자신의 냄새가 있다”(301쪽)고 주장한다. 개념은 한 사람의 신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몸으로 겪어보는 고단한 체험 속에서 난국을 돌파하려는 의지가 의미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과 철학이 개념 속에 담긴다. 그 개념어 속에는 개념을 만든 사람의 불온한 의도는 물론 편파적 주장이 담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순수한 의도로 일상을 살아가도 일상 속에서 겪는 모든 경험은 결국 언어로 번역되고 의미로 해석되는 과정에서 자기 특유의 컬러와 스타일이 담길 수밖에 없다.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에 나오는 모든 느낌은 언어로 완벽하게 재현이 불가능하다. 그냥 느낌으로 몸에 남아있는 경험의 흔적들이 더 많다. 이 시에는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내 너무 개념을 사용해서/개념들은 오염되지 않았을까/내 너무 그 개념이 포함된 문장을 읽어서/문장은 틀에 박힌 관념으로 전락하지 않았을까”로 바꿔 읽어보고 싶어졌다. 통념을 먹고사는, 관념의 파편으로 얼룩진 문장 속에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개념들이 낯선 생각을 잉태하기도 전에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내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내 몸으로 실감한 현장의 구체성을 포착하는 어휘는 아무리 찾아봐도 깜깜무소식이다. 온몸으로 감각한 느낌의 현실성을 담아내기에는 나의 언어가 너무 부실하거나 부재하다는 통렬한 깨달음 뒤에 날 선 언어를 벼리는 치열한 벼리기를 계속하는 게 글짓기다. 마치 소설가 배수아의 《당나귀들》에서 언급한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감각적 각성과 깨달음의 환희가 희석되거나 휘발되기 이전에 적확한 언어를 찾아 삼만 리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현실은 밑바닥 아픔을 다 반영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엉뚱한 논쟁으로 오히려 현실적 아픔을 치료하기는커녕 설상가상으로 상처 위에 상처를 만드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뼈아픈 현실, 누군가 공사장 비계에서 발을 잘 못 디뎌서 추락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회는 중대재해 처벌 법안을 놓고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사고를 ‘중대산업재해’로 규정할 것인지, 아니면 2명 이상을 정할 것인지를 놓고 재계와 긴 줄다리기를 하며 법안을 검토 중이다. 그 사이에 산업현장에서는 오늘도 추락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산업재해’라는 개념은 정부의 이데올로기가 포함된 예방적 개념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산업재해’라는 개념어에는 노동자의 구체적인 아픔의 현실을 대변하는 생사의 문제가 걸린 현실적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비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감수하다 언제 추락사로 삶을 마감할지 모르는 구체적인 현장을 외면하고 오늘도 한 인간의 생명을 계량화시켜 숫자로 법안의 성립여부를 논의하는 국회의원의 관념성은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엄연한 현실적 아픔을 외면한 심각한 정신질환이 아닐 수 없다.



내 몸은 아직도 목적어와 동사를 만나지 못해 방황하는 언어들의 임시거처다


모든 예술적 창작은 정신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육체노동의 산물이다. 밑바닥을 겪어본 사람은 어눌한 어투지만 살아 숨 쉬는 글을 쓰려고 애쓰기를 거듭한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고 머리로 쓰는 글은 관념의 파편으로 얼룩진 건조한 문장건축이다. 집 짓기는 밑에서 위로 정초에서 지붕까지 땅에서 하늘을 향하며 짓는 육체노동이다. 집을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지붕부터 집을 그리지만 집을 지어본 사람은 절대로 지붕부터 집을 그리지 않는다. 집 짓기와 집 그리기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 집 짓기와 집 그리기는 모두 육체노동이다. 육체가 가미된 노동의 산물에는 관념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밑바닥 경험을 다 언어로 재현하기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구체성을 담아내는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노동을 반복한다. 오로지 육체만이 삶의 구체성을 일부라도 담아내는 유일한 수단이자 매체다. 


일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몸을 관통하고 남은 얼룩과 무늬가 남긴 느낌을 몸이 말할 때 대체 불가능한 글이 나온다. 동일한 사건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즉 사람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경험을 해도 사람마다 몸으로 받아들이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감정이나 정서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교통사고를 당했어도 교통사고가 일어난 상황적 맥락에 담긴 시간성과 공간성에 대해 사고 당사자가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 감각은 저마다 다르다. 삶의 모든 장면에 담겨 있는 구체성을 어떤 언어로도 다 담아내기 불가능하기에 여전히 몸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받아들인 느낌의 창고로의 역할을 감내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삶의 이런 일상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오늘도 꾸역꾸역 한 걸음을 내딛으며 겨우 살아내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은 어쩌면 완전히 틀린 말이다. 존재는 100% 언어로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기껏해야 감각된 경험의 일부를 재현(representation)하거나 표현(expression)할 뿐이다. “언어는 존재의 불투명한 반영이거나 존재의 허구를 구성하는 벽돌에 가깝다...언어와 존재는 일대일 함수관계가 전혀 아니다. 따라서 언어 샘플을 아무리 쌓아도 존재는 구성되지 않는다”(86쪽). 김재인의 《AI 빅뱅》에 나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예술가가 특정한 순간을 포착, 자신이 몸으로 느낀 점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예술가가 감각적으로 느껴 표현한 예술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를 동원해서 설명한다고 해도 예술작품 속에 담긴 예술가의 의도는 늘 부분적으로 표현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파격적인 언어 담론을 펼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어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며 언어는 정보나 의미(semantics)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명령과 행동(pragmatics)의 문제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문장에는 명령어가 들어 있고 그 명령어대로 행동하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우리 술 한 잔 하러 가”라는 말은 “술 한 잔 마시러 간다”는 말 이외에 이 말을 듣는 상대방도 “같이 술 마시러 가자”는 명령이 들어 있어서 지금 행동에 옮기자는 의미가 숨어 있다. 언어에 담긴 명령과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언어가 어떤 물질적 상황과 맥락 속에서 사용되는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어이론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이론인 언어사용이론과 유사해 보인다. 예를 들면 “너 물 먹었니?”라는 말은 갈증이 나서 실제로 물을 마셨느냐는 질문과 “너 조직에서 해임되었니?”라고 물어보는 말일 수도 있다. 즉 물이라는 언어는 사용맥락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가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 말이 어떤 상황적 맥락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게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 사용이론이다. 언어사용이론을 주장하는 비트겐슈타인 역시 여전히 언어는 정보나 의미라는 주장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는 철저하게 명령과 행동을 통해 구체적인 실천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사용이론과 구분된다. 예를 들면 “나 지금 배고파”라는 말은 “나 지금 배고프니까 뭐 먹을 것 좀 달라”라고 명령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을 화용론(話用論)이라고 하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어이론을 화행론(話行論)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김재인, 2023). 화용론은 언어는 사용(使用)되는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전달된다는 의미이고, 화행론은 언어는 명령과 행동(行動)을 촉구한다는 의미다.


언어에 담긴 의미는 어차피 현실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보루도 아니다. 여전히 현실 속의 무수한 구체성은 언어적 추상성으로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현실의 아픔이나 기쁨의 단면을 날 선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낯선 생각을 잉태하려고 오늘도 안간힘을 쓸 뿐이다. “책임은 아래로 내려가서 소멸하고 이윤은 위로 올라가서 쌓인다.” 소설가 김훈이 한겨레신문(2019.5.14.일)에 기고한 “아, 목숨이 낙엽처럼”이라는 기고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런 문장을 읽으며 절망적인 현실이 절규하는 아픔을 그나마 담아내고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할 뿐이다. 


뭔가를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걸 느낌으로 안다. 영원한 완성이 없는 세계에서 늘 미완성 작품을 바라보며 한 걸음 내딛으며 미래의 언젠가 쓰일 밑거름으로 삼는다. 아직 덜 된 건 알지만 구체적으로 지금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비통함이 통렬하게 자아의 각성을 찌른다. 여전히 내 몸에 담긴 각성의 흔적은 파편처럼 떠다니지만 마땅한 언어를 만나지 못해 몸의 어딘가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모든 시집은 단어들의 임시 거처다”(9쪽). 오은의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라는 시집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 내 몸에는 목적어와 동사를 만나지 못해 임시로 거주하는 경험이 여전히 산재해 있다. 고통스러운 고행이 어느 순간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행복감을 만끽하지만 그것도 순간이고 찰나(刹那)다. 단지 어제보다 나아지기 위해 무목적성(無目的性)을 띠고 안간힘을 쓰며 애간장을 녹인다. 애쓰기가 쓰기의 유일한 길이자 방법임을 알고 있지만 늘 다른 방법을 향해 또 애를 쓴다. 고뇌와 사투 끝에 서광이 비치다가도 이내 어두워지고 영감은 영원히 깜깜무소식이다. 그럴수록 절대 고독과 고뇌의 심연에서 사유의 샘물을 찾아 나선다. 


불현듯 다가서는 생각과 생각에 대한 느낌을 적확한 언어로 포착하지 못하고 서성거릴 때, 언어는 여전히 방황을 거듭한다. 늘 미진하고 부진해서 전진은커녕 진전도 없다. 그래도 간신히 읽어내고 겨우 쓴다. 흐릿하고 애매한 경계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고 넘어섬의 경험으로 미지(味知)의 세계를 기지(旣知)의 세계로 돌리려고 다시 몸부림을 친다. 보통과 정상, 당연과 물론의 사이에서 의심을 넘어 의문의 화살을 날려 ‘원래’를 물리치고 그 자리에 ‘미래’를 앉혀본다. 지루한 반복이 반복되지만 진지한 실천이 손을 내밀어 반복을 반전시키는 그 순간, 나는 잠시 웃을 것이다. 잠시는 다시에게 손을 내밀어 멈춤의 여유 속에서 절치부심을 만끽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멈춤 속에서 도천에 산재하는 영감의 파편을 모아 내 삶의 귀감으로 숙성시킬 삶의 단면을 찾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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