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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몸의 언어로 번역한 진저리다

진리는 불안과 절망을 먹고 탄생하는 진저리

키에르케고르가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한 철학자와 소설가 7명을 초대한 까닭은?


비 오는 어느 날 철학자와 소설가가 불안과 절망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부름을 받고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까닭은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 세상의 흐름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다. 여기 모인 철학자 4명과 소설가 3명은 모두 책상머리에 앉아서 좋은 이야기나 주장을 편집해서 설명하지 않고 기존 이론적 접근과 실천논리에 반기를 들으며 생긴 문제의식을 직접 실천을 통해 체득한 몸의 언어로 설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겪어보지 않은 남의 이야기로 설명을 계속할수록 의미는 난해해지고 골치가 아프지만 자신이 직접 겪어본 자기 이야기로 감성적 설득을 통해 의미를 심장에 꽂으면 의미심장해진다. 살갗을 파고드는 이야기,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 전두엽을 뒤흔드는 의미는 모두 몸이라는 신체성이 삶의 구체성을 만나 합작해 낸 사투의 산물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앎과 삶과 함이 연주하는 삼중주다

     

첫 번째 등장한 철학자는 세계를 인식하는 매개체는 이성이나 언어가 아니라 신체, 즉 살이라고 주장하는 메를로 퐁티다. 몸을 관통하지 않는 앎은 관념의 파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퐁티는 몸으로 느끼기에 비로소 존재한다는 주장을 자기 신념으로 갖고 있다.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특정한 공간에 거주하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부단히 접촉하며 몸으로 깨닫는 감각적 각성이 필요하다. 인간의 신체성은 야생성의 산물이자 자기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관건이다. 신체적 개입이나 접촉하는 경험이 없는 각성은 관성과 타성에 젖어들기 어렵다. 자기만의 이론은 퐁티가 말하는 살이 세상이 맞부딛히면서 몸을 관통하고 남은 흔적이나 얼룩을 무늬로 직조하는 가운데 구축된다. 몸이 없는 정신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은 정신 나간 소리다. 내 몸이 특정 공간에 거주하면서 일정 시간을 보내며 만끽하는 가운데 의미는 무게감을 갖고 일정한 가치를 창조한다.  끝맺음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의미의 매듭을 지을 때 그 순간 시간은 두꺼워지고 의미는 무거워지면서 함께 머무르는 장소에서 우리 모두에게 의미심장한 의미가 창조된다.


두 번째 등장한 철학자, 마투라나에 따르면 “삶이 곧 앎이고 앎이 곧 삶이다.” 다시 말해 앎은 삶과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만들어지는 독립적인 산물이 아니라 환경과 부단히 접속하면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상호작용의 합작품이다. 모든 생명체의 생명활동이란 생물로서 존재하는 데 수행하는 효과적인 행위다. 앎은 몸에 밴 행동지식이 만들어가는 행위다. 앎과 함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마투라나는 먼저 알고 나중에 행동하는 지행일치설(知行一致設)에 반대한다. 오히려 마투라나는 앎과 삶과 함은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한다. 알량한 앎으로 변화무쌍한 역동적인 삶을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삶을 통해서 건져 올린 앎, 인지체계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상호의존적인 주객이 모두 변형되는 질적 비약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산물로서의 앎을 중시한다. 자기만의 이론은 몸의 적극적 참여 없이 뇌라는 공간에서 폐쇄적으로 일어나는 독립적인 변화를 앎으로 재단하는 가운데 구축되지 않는다. 자기만의 이론은 앎이 일어나는 동시에 행동이 발생하고 그 행동은 다시 앎에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주어진 상황적 맥락이나 문화적 전통에 비추어 발생하는 앎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만들어진다.  



자기만의 이론은 변신을 거듭하지만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미()완성이다


세 번째 등장한 철학자는 해체(deconstruction) 철학자 자크 데리다. 고정불변하는 개념의 의미를 부단히 재해석하는 해체는 영원히 마무리할 수 없는 미완성의 사건이다. 해체는 키스처럼 대체 불가능하고 반복 불가능한 사건이다. 같은 연인과 하는 키스지만 어제 했던 키스를 오늘 동일하게 반복할 수 없고, 오늘 하는 키스를 내일 다시 재현할 수 없다. 키스라는 사건으로 해석되는 해체는 고정된 의미로 사용되던 개념을 끊임없이 다른 의미로 재해석하면서 기존 개념과 다른 의미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이다. 의미의 고정성이나 결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공간을 열어놓고 탐구하면서 어제와 다른 개념으로 재개념화 시키려는 열정이 해체가 품고 있는 숨은 의도다. 해체와 더불어 데리다가 강조하는 핵심 개념이 차연(differAnce)이다. 차연은 공간적으로 다르고(differ) 시간으로 연기(defer)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념이든 현상이든 그 의미를 지금 여기서 알아보는 것과 다른 곳에서 그 의미를 재고해 보는 것은 언제나 같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정의하는 사전적 개념은 고정된 상태로 머무르는 명사가 아니라 그 의미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며 어제와 다른 차이로 거듭나는 동사로서의 차연(differAnce)이다. 차연은 영어 차이로 설명되지 않거나 의미가 확정되지 않는 현상을 붙잡고 시간적으로 연기해 놓고  공간적으로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발상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자아를 서술하는 개념을 고정시켜 놓고 통념에 젖어 살지 않고 기존 개념에 붙박여 있는 신념도 통념이 될 수 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어제와 다른 개념적 차이로 자아를 재창조하려는 노력을 통해 구축된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가 알려주는 자기만의 이론 역시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구축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관점과 접근을 머금은 채 끊임없이 어제와 다르게 도래한다고 볼 수 있다. 



네 번째 등장한 철학자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달콤한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자기 계발을 할수록 자기는 계발되지 않고 오히려 자아가 탕진된다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미셀 푸코다. ‘자기 배려’는 “단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단독적인 자기 되기’다. 바깥으로 시선을 던져 언제나 남과 비교했던 자기를 이제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신을 점검하며 자기 자신의 고유함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 자기 배려는 빛을 보기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자기 배려는 대체불가능한 자기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자기가 되는 까닭에 기존의 자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자기로 변신하기다. 푸코의 자기 배려가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데 이론적 기초로 자리 잡아야 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이론은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이론적 관점이자 접근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좋은 소리나 사회가 정한 기준이나 도덕을 근간으로 의사결정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결정하면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자기 고유의 이론적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 뿌리가 깊을수록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기만의 심지를 굳게 다져나갈 수 있다.


지금까지 몸철학자 메를로 퐁티, 지행합일을 주장하는 인지생물학자 마투라나, 해체와 차연으로 개념적 차이를 부단히 창조하는 데리다, 그리고 자기 배려로 대체불가능한 자기로 변신함을 주장하는 푸코가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철학적 기반과 정초를 다졌다. 지금부터는 이런 철학적 관점과 접근을 직접 자기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과감하게 익숙한 지금 여기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미지의 세계로 자기를 발견하는 여행을 떠나는 세 명의 소설가를 초대하려고 한다. 



자기만의 이론은 좌절과 몰락을 딛고 일어선 역경의 산물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초대한 다섯 번째 주인공은 성장 패러다임의 그 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우여곡절의 방황 끝에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재창조하기 위한 방향을 탐색하는 헤르만 헤세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218쪽).” 《데미안》에 나오는 상징적 메시지다. 헤세는 다양한 작품의 주인공을 통해 저마다의 방황 곡선 여정을 기술하면서 실존적 고통을 극복하면서 진정한 자아의 궁극적인 이미지를 찾아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제시한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 《황야의 이리》의 주인공 하리 할러, 《싯타르타》의 주인공 싯타르타는 모두 오늘의 틀에 박힌 타성과 통념을 깨부수고 가능성의 꿈이 자라는 내일의 세계로 몸을 던져 탐험을 계속한다. 자기만의 이론은 딜레마적 상황에서 현실안주나 대중의 무리 속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고통의 노선을 선택, 자기 변신을 위한 몸부림 속에서 구축된다. 이런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겪는 좌절과 몰락은 절망의 나락이자 패망의 숲이 아니라 오히려 제2의 변신을 위한 전환점이자 새로운 출발이다.  


여섯 번째 등장하는 철학자는 《달과 6펜스》를 지은 서머싯 몸이다. 현실적 굴레와 짐을 벗어던지고 자신 안에 꿈틀거리는 예술적 본능이 시키는 대로 지금 여기와 결별을 선언하고 과감하게 꿈꾸는 목적지로 몸을 던지는 스트릭랜드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기존 질서를 벗어나 자신이 하면 행복한 일을 찾아 자기 발견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매일 반복되는 동일성의 틀에서 벗어나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시켜 주는 다름과 차이를 반복하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그림 그리기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책 제목 《달과 6펜스》에서 달은 쉽게 도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내 마음을 움직이는 꿈의 목적지다. 이에 반해 6펜스는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필요한 현실적인 비용이자 경제적 수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6펜스를 버는 현재 삶이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달을 머리로만 지향한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검토를 거듭하고 고민을 반복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현실에 대한 불평불만의 반복으로 지금 이대로 삶을 살아간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듯이 욕망은 꿈의 목적지만 쉽게 갈 수 없는 달을 향하고 있지만 현실은 언제나 비참하게도 지금 당장 먹고사는 데 필요한 6펜스를 벌어야 하는 고달픈 삶이 반복된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비굴하게 만드는 6펜스의 현실적 굴레를 벗어나 그리운 사람조차 버리고 그림 그리는 심장 뛰는 달을 향해 몸을 던진다.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이 오늘보다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신념을 갖고 현실적 걸림돌을 디딤돌로 전환시키는 결단과 용기, 그리고 과감한 실천이 필요하다. 세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바깥에서 불어오는 원심력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중심을 잡아주는 구심력으로 세상을 이끌어가는 과정에 몰두할 때 자기만의 이론이 탄생된다. 



자기만의 이론은 역동적인 삶을 몸의 언어로 번역한 체험적 합작품이다


마지막으로 키에르케고르가 초대한 자기만의 이론 구축자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관념적 지식인을 혐오하는 조르바는 모험이 부족한 사람은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게 “행복은 바디감이 무거운 와인이 목구멍을 훑고 내려가는 충만감”이다. 신체가 개입되는 감각적 느낌이 없는 앎은 공허한 관념의 파편일 뿐이다. 조르바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일이나 복잡한 사안을 두고 긴 시간을 두도 검토하는 일은 없다. 조르바는 오로지 지금 여기서 결정하고 결정한 대로 몸으로 부딪히며 겪어보는 가운데 다음 실천사항을 즉석에서 조정하고 조율해 나간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그 과정을 즐기면 된다. 조르바는 니체가 말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아폴론적 인간이라기보다 정열과 광기로 뭉쳐진 비합리적인 디오니소스적 인간에 가깝다. 조르바는 책상머리에 앉아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관념의 파편을 양상 하기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몸을 던져 세상을 뒤흔드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언제나 몸을 관통한 육체의 언어로 책벌레들이 말하는 관념의 파편을 파괴한다. 조르바는 퐁티의 몸철학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며 마투라나의 지행합일설을 매일 증명하는 사람이다. 조르바는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관능과 욕망을 따라 재능을 실천하는 푸코의 자기 배려를 철학으로 삼고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와 차연을 삶의 무기로 장착하고 다닌다. 조르바는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이며 헤세가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싱클레어나 하리 할러 또는 싯타르타다. 자기만의 이론은 몸으로 겪은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교차시켜 직조한 사유체계다.


세상 좋다는 이야기는 다 들어보았고, 몸에 좋다는 자기 계발 처방전도 다 먹어보았다. 하지만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장식하는 수많은 처방전은 통증을 일시적으로 해소해 주는 진통제일 뿐 내 몸이 갈구하는 근원적인 욕망은 여전히 더 갈급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련과 역경을 뒤집어 아름다운 경력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절망을 뒤집어 희망으로 만들고 절벽 앞에서 새벽에 천지가 개벽하는 희소식을 접했다는 체험적 수기집은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은 공허해지고 불안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식은 가만히 앉아서 책상에서 깨달으며 생기는 여유로운 앎의 결과가 아니다. 새로운 인식은 어제와 다른 낯선 상황에서 내 몸이 받은 마주침만큼 느끼면서 생기는 진저리의 결과다. “각성은 지능이 아니라 용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처방전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전율하는 삶의 의미가 살아 숨 쉬는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지는 탐험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탐험을 시작하기 전에 모임을 주관하는 키르케고르에게 그 취지와 배경부터 들어본다.



절망은 지금과는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경고등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인생이론을 구축하는 탐험 여정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고 다시 용기를 갖고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주는 7명의 철학자가 모인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이 순간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유한 삶이며, 그 삶이 품고 있는 불안과 절망적인 상황 역시 누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제공되는 어떤 처방전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하기에 몸부림치며 자기만의 삶으로 녹여낸 저마다의 이론을 갖고 있는 성현들의 삶의 노하우를 공유하기 위해서 7명의 철학자가 키르케고르의 초대로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다섯 누이들을 모두 잃는 비극을 겪으며 깊은 절망과 우울에 빠진 아버지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때부터 키르케고르의 질문은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은 키르케고르가 평생 동안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평생을 고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개념, 즉 불안과 절망을 화두로 삼은 철학책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불안한 미래 앞에 절망할 수 있다. 절망은 지금 내가 보유하고 있는 경험이나 지혜로는 다가오는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이런 절망은 오히려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라는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이자 몸부림치며 세상과 맞서 싸우라는 경고등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더욱더 절망적인 점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가치관이나 세계관, 어떻게 사는 것이 나로서 살아가는 행복한 삶인지를 제시해 주는 이론, 공동체의 앞날에 대한 미래 지향적 지침이나 컨트롤 타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인지를 판단하는 지침이나 기준이 부재하거나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름길로 알려준 예전의 처방전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고 전문가가 되는 길이라고 알려주는 매뉴얼의 언어도 진부해진 지 오래된 시기에 뭔가를 참고할 수 있는 기준점이나 생각의 방향을 결정하는 프레임 자체도 망가져 있는 시대라는 점에서 더욱 곤란하고 절망적인  상황이다.



이런 철학 부재의 시대에 온갖 감언이설들이 급류에 휩쓸려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낭설로 난무하고 있다. 뭔가가 돈이 된다고 하는 만병통치약들이 우후죽순처럼 곳곳에서 자라고 있으며, 해마다 새로운 트렌드가 미래를 결정하는 신의 계시처럼 귓전을 때린다. 외부에서 전해져 오는 몸에 좋은 약방의 처방전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욕망을 부추긴다. 사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유혹의 헤로인들이 핏줄을 타고 온몸을 순식간에 마비시킬 정도로 강력한 약효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더 빠르게 변화되는 디지털 변화의 급물결에 휩쓸리며 더 좋은 약을 찾아 더 바쁘게 두리번거리는 삶을 살아간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절망을 영원히 없애기는 불가능하니 절망과 맞서 싸우면서 나만의 방법으로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나의 실존적 존재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절망적인 절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적인 상태를 간파하지 못하는 무지이며, 이를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자기 계발서가 주는 달콤한 알약이나 진통제에 빠져서 벗어나지 않고 유지하려는 의지가 키르케고르에게는 죄를 범하는 삶이다. 



불안은 낯선 마주침에서 깨우침이 탄생하는 긴장감이다


지금 여기서 내가 겪고 있는 불안감은 다른 상황에서 동일하게 느낄 수 없는 실존적이고 단독자적인 기분이자 감정이다. 내가 겪고 있는 실존적인 문제는 누군가의 일반적인 처방전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오로지 내가 겪어내는 삶의 방식으로 나의 주체적 결단과 책임을 통해서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남이 처방해 준 약을 너무 쉽게 받아먹으면서 마치 그것이 내 삶을 구원해 줄 만병통치약인양 믿으며 살아왔다.


 다른 사람의 고뇌에 찬 결단과 결행이 만든 해결책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들이 내민 손길에 몸을 맡겨버리는 기만적인 위안을 받으며 살아가는 관성의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고도, 즉 내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모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음에도 그걸 모르고 살아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시인의 그날이라는 시에 나오는 문구처럼 “모두가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음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불안과 절망은 개념 자체의 의미처럼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만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모름과 무지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내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다 알고 있다면 마음은 편안할 것 같지만 이런 순간이 반복된다면 사람은 관성을 따라가면서 타성과 통념에 젖어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깨달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가 올 것이라는 감지 앞에서 사람은 주체적 결단과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된다. 


비슷한 과거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했던 삶은 불안하지 않지만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삶이 불안하다는 의미는 기존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내 앞에 펼쳐지는 문제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실존적 각성이다. 불안은 미지의 세계에서 어떤 운명적인 마주침이 생각지도 못한 깨우침을 얻기 전에 심리적으로 느끼는 긴장감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은 새로운 가능성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촉진하는 각성제나 다름없다. 삶이 불안하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모르는 세계를 향하는 탐구가 시작된다는 의미이자 지금까지의 삶과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문으로 들어선다는 결단이자 선택이 따른다는 의미다. 키르케고르가 바라보기에 최악의 절망적인 상황은 스스로 답을 찾아 고난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언제나 누군가 제시하는 외부의 해답만 받아먹는 자세와 태도에서 비롯된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진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연한 선택과 실천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는 안간힘과 몸부림에서만 나온다. 수많은 성공체험으로 포장된 자기 계발서가 결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나에게는 그저 외부에서 주어지는 하나의 해답일 뿐이다. 이런 약은 먹으면 먹을수록 질병으로부터 나를 건강으로 구원해 주는 해결사가 아니다. 오히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처방약은 나를 더욱더 그 약에 의존하게 만들어 스스로 건강을 회복하는 길을 원천 봉쇄하는 차단제일 뿐이다.



불안의 깊이가 다르게 살아가려는 몸부림의 강도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는 아무리 좋은 해결책이나 위로를 건네주는 처방전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거나 내 삶에 적용해서 느낀 점이 없다면 그것은 나의 실존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진리는 오로지 나라는 유일한 단독자(Der Einzelne)가 직접 겪어보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진리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개별적이고 단독적인(singular) 것이다. 누군가 좋다고 선전하는 처방전은 그 사람이 만든 관념적 아이디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 몸으로 겪어내면서 내 몸을 관통하고 남아 있는 체험적 각성이자 통찰이다. 불안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그래서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의 강도를 지배한다. 누군가의 처방전에 종속되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실존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불안하지만 혼란스러운 미래에 내 몸을 맡겨 스스로 고통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결연한 출발을 감행해야 한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해도 삶은 나의 의도와 의지대로 풀리지 않는다. 언제나 불확실성이 넘쳐나고 불가능의 장벽이 앞을 가로막으며 우연이라는 변수가 끊임없이 창발 된다. 삶은 늘 불안감에 휩싸이고 절망감이 휘몰아치는 망망대해다. 이런 난국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삶의 바다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내려는 노력이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서 있는 것이지 인식 속에 있지 않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건 죄가 아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알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알려고 애쓰지 않거나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게 죄다. 이런 게으름에 빠져 절망의 수중에 몸을 맡긴 채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라 질타한다. 죄를 짓지 않고 자기답게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 휘말려 살지 말고 비록 고난의 바다가 나를 불안에 빠뜨리지만 나의 두 발로 매 순간을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좋은 이야기보다 내 삶의 얼룩과 흔적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 비로소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자기라고 하는 것은 모두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는 모가 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자기를 갈고닦아서 예리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를 갈아서 모서리를 없애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214쪽). 모가 나 있다는 것은 저마다의 개성과 다양성을 지칭한다. 이걸 모두 갈고닦아서 둥글게 만드는 순간 저마다의 개성은 상실되고 모두 둥근돌만 살아가는 재미도 의미도 없는 세상이 된다. 모가 나 있는 그 끝에 굽힐 수 없는 세상을 향한 나의 욕망의 분출구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걸 강제로 막아버리거나 갈아버리면 나로서 살아가려는 내 삶의 의지와 야망은 무뎌지고 세상 흐름에 떠밀려 흘러갈 뿐이다. 나를 나로 증명해 내기에는 세상은 온통 불안의 바다이며 절망의 심연이다. 예측불허의 절박한 상황이 휘몰아치는 불안의 바다에서 건강한 긴장감이 다양한 절망을 나에게 선물로 준다. 그럼에도 좌절하고 포기해서 삶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치열하게 자기 스스로를 갈고닦아 고통의 향연을 엮어 나갈 때 나는 비로소 실존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자유의 기반이다


유한한 존재지만 무한을 꿈꾸고 시공간적으로 제약되어 있지만 시공간을 넘어 자신의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사람에게 절망은 누구나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산물이다. 그것이 삶을 고달프게 만들지만 고생과 고난의 삶에서 건져 올린 의미와 가치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바위를 밀어 올려도 계속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불안감 속에서 절망이 반복되지만 그것이 나를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시켜 주는 양적 성장과 질적 성숙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일반화시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진리(眞理)’가 아니라 지금 내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일리(一理)’가 바로 키르케고르가 삶 전반을 통해서 만들고자 했던 진리다. 일리 있는 주장이 내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며 해석함으로써 의미를 생성하는 자기만의 이론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다. 구체적이면서 단독적인 일리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적 진리로 일반화될 수 없다. 개별적인 내 삶의 구체성은 어떤 일반론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오로지 내 삶의 고유함이다.


7명의 철학자와 소설가가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지 말고 너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저마다의 치열한 철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하면서 세상이 던져주는 좋은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나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세와 노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래서 자기 다운 이론을 구축, 평생을 반복해도 싫증 나지 않고 어제와 다른 재미와 의미가 반복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나를 위한 삶의 레시피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지향하는 삶과 사람은 ‘경험’으로 ‘경전’을 구축하고,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하며, 자기만의 언어로 나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세우는 자기만의 이론을 건축하는 사람이다. 자기만의 이론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이다. 고립된 개인보다 어울림 속에서 진솔한 울림으로 작은 감동을 만들어가는 튼실한 관계 속의 한 인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람. 추상과 관념으로 얼룩진 공허한 담론보다 구체적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비범한 사랑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사람. 시류에 흔들리며 유행 따라 표류하는 나에서 벗어나 어제와 다른 삶을 앎의 터전으로 삼아 자기 생각과 언어로 건축된 자기만의 이론으로 자기답게 살아가는 이유를 증명하는 사람이다.



자괴감 대신에 자신감, 자존심 대신에 자존감, 대체 불가능한 자기 다운 킬러 콘텐츠와 퍼스널 브랜드로 세상에서 자기 이상을 펼쳐나가는 사람. 취미가 직업이고, 놀이처럼 일하며,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아우르며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 앎으로 삶을 재단하고 평가하기보다 삶으로 앎을 만들어가며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사람. 속도와 효율로 물든 능률복음에 지친 삶보다 삶의 밀도가 매 순간 부르는 행복담론에 미친 사람. 


내일을 구상하는 계획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선물 같은 나날에 몸을 던져 어제와 다르게 느끼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이자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이 꿈꾸는 비범한 이상(理想)에서 그럴만한 이유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만나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가며 작은 소망으로 대망의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많아지기를 꿈꾸는 사람이 자기만의 철학으로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 가장 자기답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조금쯤은 괴로운 줄도 알아야 살아있는 것이다/끼니마다 내는 수저소리가 모두 음악일순 없지 않으냐.” 이기철 시인의 ‘어떻게 하면 들국화처럼 고유할 수 있을까’라는 시의 일부 구절이다. 견딜 수 없는 불안과 괴로운 절망이 기존 삶과의 단절과 결별을 선언하게 만들고, 그 순간부터 다른 가능성의 미래로 몸을 던지는 탐험을 시작한다. 절망 없는 희망은 관망이나 로망이며 희망 없는 절망은 원망이나 책망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연주하는 삶의 이중주는 ‘확신’과 ‘확실’ 사이에서 오늘도 ‘맹신할 것인지 아니면 ‘소신’을 갖고 탐험여정에 몸을 던질 것인지 절치부심한다. 


믿었던 사람이나 삶으로부터 ‘배신’당했거나 ‘불신’의 씨앗을 품었다고 할지라도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은 오로지 내 몸으로 정면 돌파하면서 ‘변신’이나 ‘혁신’을 꿈꾸는 수밖에 없다. 그때 비로소 역설(逆說)을 역설(力說)하는 자기만의 문장이 탄생되고, 그것이 자기만의 이론을 건축하는 재료로 쓰이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는 7명의 철학자가 과연 어떤 주장을 펼쳐나갈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한다. 여러분을 자기만의 이론을 건축하는 철학자와 소설가와 함께 하는 여행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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