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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벼리지 않으면
언어가 당신을 버린다

날 선 언어가 낯선 생각을 잉태한다

언어를 벼리지 않으면 언어가 당신을 버린다

날 선 언어가 낯선 생각을 잉태한다


 세상은 점차 복잡해지고 시시각각 급변하면서 불확실성의 정도가 심화된다. 반면에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은 점차 단순해지고 있다. 아예 복잡한 문제와 직면하면 외면하거나 지극히 단순화시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속성이 속성 재배되고 있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지성의 폐활량’이 더욱더 필요한 시기지만 역설적이게도 지성의 폐활량은 시간이 갈수록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지성의 폐활량이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서도 쉽게 결론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공중에 매달려있는 상태에서도 딜레마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적 인내심이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저마다의 화두나 이슈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려는 집요함과 끈기는 먼 미래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미덕으로 전락하고 있다. 복잡한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전문가는 날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출몰하고 있지만 한 우물만 깊이 파서 오히려 전체적인 시각과 안목을 잃고 자신이 판 우물에 매몰되는 기피 대상 전문가가 많다. 정답이 투명하게 보이고 무의식적 클릭만 유혹하는 단순한 영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심오한 의미를 품은 문장들이 깊은 사유체계로 건축되어 있는 두꺼운 책은 아예 읽을 수조차 없어진다.



우리는 움직이는 디지털 강제노동 수용소에 투옥된 정보 노예들이다


시간을 아껴주겠다면서 두꺼운 책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설하는 유튜브를 비롯, 각종 영상과 이미지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면서 한 개인의 지적 성장마저도 외부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아웃소싱하고 있다. 밖의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고 깊게 사유할 교양의 두께가 내 안에 없으니 늘 내 생각은 누군가의 생각에 종속되어 있으며 독립적으로 뭔가를 붙잡고 사투를 벌이며 대안을 모색할 능력도 의욕도 없다. 흐르는 정보를 붙잡고 그것의 진실성은 물론 어떤 맥락에서 탄생되어 여기 까 흘러온 텍스트(text)인지를 그것이 처음 출연한 콘텍스트(context)에 비추어 생각하는 맥락적 사유도 실종된다. 모든 텍스트는 탄생된 출생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콘텍스트다. 콘텍스트 없는 텍스트가 디지털 네트워크에 범람하고 있다. 맥락 없는 메시지는 메시지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을 실종한 채 표류하는 망망대해의 돛단배와 같다. “스마트폰은 움직이는 강제노동 수용소다”(41-42쪽). 한병철의 《사물의 소멸》에 나오는 말이다. 출퇴근 시간에는 물론 자투리 시간만 생겨도 스마트폰을 들고 뉴스 기사를 검색하고 수시로 알고리듬에 걸려 출몰하는 유튜브를 본다. 누가 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몰입해서 흐르는 정보에 눈길을 보낸다.


다름과 차이가 삶의 다양성을 증폭시키고 있지만 사람들은 동일한 데이터를 접속으로 만나 바라보면서 분주한 세계 속에서 흐르는 정보에 생각 없이 훑어보고 좋아요를 누른다. 흘러가는 정보가 나에게 뭔가 고민거리를 해결할 대안이라도 주는 것처럼 바라보고 잠시 주목했지만 거기에는 내가 찾는 답도 가능성도 없다. 좋아요를 누르며 디지털 아멘만 반복할 뿐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고 접근하는 날 선 언어를 의도적으로 개발하려는 노력은 타성의 늪에 빠져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타임라인의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데이터의 물결에 젖어 지적 문제의식이나 감각은 점차 둔감해지고 있음 조차가 감지하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필터를 거쳐 검색된 정보와 정보를 해석하는 특정한 관점에 종속되어 나의 다름을 증명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순응하는 정보 노예로 종속되어 살아간다. 나의 문제의식으로 가공한 정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특정한 관점으로 필터링된 정보고기만 편향적으로 흡수하는 편식이 반복된다. 이제 다르게 보는 시각은 차단되고 편견이 나도 모르게 의견으로 자라난다.



뭐든지 복잡하면 안 보고 투명한 직설법 문장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나쳐버리기 일쑤다. 생각하게 만드는 글보다 자극적인 정보나 이미지 또는 손가락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썸네일 제목의 유혹에 넘어가 별다른 고뇌 없이 이미지와 메시지의 홍수 속에서 오늘도 떠내려간다. 단순성이 삶의 구체성과 복잡성을 대체해렸다. 단순하게 자극하지 않으면 영원히 읽어보지 않고 사장시켜 버릴 운명에 처한다. 세상은 낯선 사유로 주목을 끌어 생각의 깊이를 심화시키기보다 자극적인 이미지나 메시지로 클릭을 유도하여 후두엽으로 들어가는 정보량만 늘린다. 누군가 가공해 준 데이터나 정보만 편식하다 보니 내가 뭔가를 가공하고 편집해서 나의 입맛에 맞는 정보나 지식으로 재창조하는 노력을 부실해진다. 나의 문제의식으로 정보를 가공하고 편집하는 기회가 없어지니 어제와 다른 언어를 사용할 기회도 없어진다. 사용하는 언어 수준도 늘 비슷하거나 관성의 늪에서 자라는 상식적인 언어만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니 생각도 천박해지고 사고 자체도 단순해진다.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해서 의미의 밀도를 높이고 전달 강도를 올리는 노력과는 상반되게 사고 자체가 단순해지니까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시켜 해결대안을 모색할 능력도 여력도 없다.



대신 사고(思考)해주는 시스템에 길들여질수록 심각한 사고(事故)가 일어난다


사고가 단순해지고 언어사용방식도 틀에 박히다 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이나 의지도 실종된다. 반면에 순간적으로 급습하는 다양한 자극적인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제와 다른 디자인 변경으로 구매욕구를 자극하는 신상품은 언제나 카드매출을 올리는 주범으로 작용한다. 세상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그것이 내 삶에 던져주는 의미를 성찰할 사색 능력이 부실하다 보니 나의 주관으로 반론을 제기하거나 옳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화두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지적 무기가 갖춰져있지 않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삶을 지향하는 의욕과 열망도 부재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관심을 갖고 흐름을 주도하는 트렌드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누군가 앞으로 사회는 이런 사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면 그런 변화추세에 맞추어 내 몸과 마음을 맞추어가거나 그런 흐름과 동조를 이루는 유행을 쫓아간다. 유행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유행을 창조하는 자본의 욕망은 지금까지와 다른 유행을 창조, 소비자들의 구매욕망을 자극하는 다른 전략으로 부단히 유혹의 그물을 던진다. 그런 유혹의 미끼는 언제나 단순하면서 어제보다 더 강렬하고 자극적이며 투명하게 다가온다. 누군가 심오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설명하거나 이해를 도모하면 바로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고 지금 당장 바로 이해가 되는 또 다른 정보로 눈길을 돌린다.


시작과 끝이 있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희로애락이 들어 있어서 기승전결을 따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감동적인 반응을 유발하는 서사적 글보다 순간적으로 흥분을 시키거나 기분을 좋게 만들어 감각적인 충동을 유발하는 스낵 콘텐츠가 대세로 자리 잡는다. 이때 사용하는 언어도 쉽고 간결해서 그 의미의 뒤안길을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게 알 수 있는 투명한 메시지로 무장한다. 생각의 깊이를 심화시키거나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화두를 설명하는 낯선 개념이 등장하면 바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타성에 젖은 언어로 패스트후드 먹듯 정보를 소비한다. 같음의 물결 속에 생기는 대중성은 집단 동질성을 보장한다. 거기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소통조차 되지 못하고 온갖 소음 속에서 시달리다 소외되기 일쑤다. 지금 이대로의 세계를 유지하려는 관성의 바퀴는 날이 갈수록 더 빨리 돌아가고 타성에 젖은 언어사용방식은 이제 집단적 습관으로 장착되어 어제와 다른 언어를 사용, 낯선 생각을 다르게 표현하는 사람은 외계인 취급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 그 언어로 매개되는 사유와 표현은 의미를 파고들어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해답보다 어떤 상황에서 한 가지 방법으로 통용되는 정답을 강압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과 다른 언어를 벼리고 별러서 다르게 표현하는 사람은 기존 커뮤니티에서 적응하기 어렵다. 같은 걸 보고 같이 생각하며 유행이 몰고 가는 사회적 흐름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낙오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라는 책에서 "전체는 비진리다"라고 천명한다. 여기서 '전체'는 체계, 독재 행정, 파시즘, 이윤경제, 야만성의 다른 이름이다. 개별적 특수성이나 구체성, 단독성이나 고유함, 또는 상황적 맥락성이나 부분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런 다름과 차이를 하나의 틀이나 체계 속에 집어넣으려는 발상은 개별적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전체주의적 사고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재독 철학자 현병철이 말하는 디지털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이름’만 다를 뿐, 다름은 인정되지 않고 하나의 보편적인 기준이나 틀에 비추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런 체계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체계가 요구하는 규율을 따르는 것이고 순응하라는 압박을 무리 없이 받아들여 기존 시스템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길들여져야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데 불편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목당하지 않는다. 군중의 무리 속에 파묻혀 정보의 바다에서 표류를 거듭한다.



낯선 사건은 낯선 사고로 전복을 요구한다


이런 시기일수록 별다른 이해를 위한 노력 없이도 쉽게 소화시킬 수 있는 패스트 데이터나 정보는 새로움이라는 옷으로 수시로 갈아입고 소비를 재촉하고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무한 자극한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며 산만한 정보 흐름을 타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떠내려가다 간혹 나뭇가지에 걸려 잠시나마 순간적인 쉼으로 정신을 차린다. 내 사유체계에 불법침입하는 낯선 지적 자극이 있어야 정신 근육에도 힘이 생겨 어제와 다른 문제해결능력이나 위기의식을 극복하는 지적 치밀함이 생긴다. 하지만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단순하고 투명해진 정보만 습득하다 보니 복잡한 세상에서 발생하는 난해한 문제와 맞서 문제의 본질은 물론 그것의 해결대안을 다양한 관점에서 모색하지 못하고 조급해하며 안절부절못하다 실기하거나 아예 문제를 외면해 버린다. 지성의 폐활량이 부족한 사람은 복잡한 문제를 만나면 조급해지니까 의사결정을 신중하게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서두르다 설상가상의 난국에 빠져버리기 일쑤다. 더욱더 조급한 사람은 지금 이 상황이 주는 위협감과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려고만 아등바등 댄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다만 경지에 이른 사람이 복잡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하다.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지만 단순한 생각을 복잡하게 표현하는 것은 단순하다. 경지에 이른 사람의 표현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으면서도 촌철살인의 지혜가 숨어있다. 하지만 단순하다고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분야는 여전히 아는 것보다 더 광대할 수도 있고, 안다고 생각하는 영역도 사실은 기존 지식으로 재단해 버린 타성의 텃밭일 수도 있다. 관점과 시각을 바꾸고 생각의 옷인 언어만 바꿔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상도 언제나 상상력이 비상하는 무대로 바뀐다. 세상은 아직도 보편의 잣대로 획일화시킬 수 없는 고유하고 특수하며 구체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대중성의 심리로 이해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빅데이터를 축적해도 왜 그런지를 알아낼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나 분야가 존재한다. 익숙하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낯선, 낯설지만 알아내고 싶은 욕망이 식은 미지의 세계에서는 오늘도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다만 그런 사건을 틀에 박힌 일상으로 평가하고 치부할 뿐이다. “진정한 사유는 사건적이다”(12쪽).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에 나오는 말이다.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 사건은 동일하게 재현되지 않는다. 어제와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낯선 사건이 품은 기호가 출현해야 어제와 다른 생각의 발동된다. 하지만 디지털 네트워크는 본질적으로 신비를 품은 지식이 사유를 요구하기보다 투명하게 벌거벗은 정보가 어제와 다른 자극을 유발하며 우리를 디지털 감옥에 가둘 뿐이다.



사건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해석되지 않는 낯선 현상이다. 사건은 처음 접하는 낯선 기호를 품고 우리들을 급습한다. 사건을 겪는 자아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사고(事故) 처리된다. 사건이 낯선 사고(思考)로 발전하려면 이전과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사건이 몰고 온 낯선 기호를 해석해내야 한다. 사건이야말로 사고방식의 혁명적인 전환을 요구하며 전도양양했던 익숙한 길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집단적으로 공유되던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잣대로는 해석되지 않는 낯선 사건은 낯선 사고로 전복을 요구한다. 이때 절실하게 필요한 게 날 선 언어다. 사건으로 급습당한 기존 사고방식은 이전과 다른 옷을 입고 밖으로 표현될 때 낯선 생각으로 잉태되고 출산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타성에 젖은 언어를 관성적으로 사용했던 방식을 폐기처분해야 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평범한 언어는 평범한 사유를 전달한다. 틀에 박힌 언어는 타성에 젖은 고루한 사고방식을 양산할 뿐이다. 더 높은 차원의 사유를 건축하는 언어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평균의 틀에 갇혀 관성적으로 사용했던 언어사용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낯선 경험을 날 선 언어로 벼려야 색다른 생각이 출산된다


어제와 다른 생각을 창의적으로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어제와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은 경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경험은 깨달음의 원천이자 타성에 물들어가는 몸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제다. 경험의 덫에 걸리기 시작하면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의 경험을 해석하려는 꼰대짓에 걸려들기 시작한다. 경험은 배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경험을 새롭게 축적하지 않으면 배움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돌변하기도 하다. 둘째 필요한 무기는 어제와 다른 경험을 어제와 다르게 번역하는데 필요한 언어다. 기존 언어사용방식에 물들어 있으면 아무리 색다른 경험을 해도 그 경험을 색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실하거나 부족해서 결국 낯선 경험은 익숙한 타성에 젖은 언어로 치부된다. 체험이 없는 개념은 관념일 수 있고, 개념이 없는 체험은 위험할 수 있는 까닭이다. 감동을 주는 작가는 어제와 다른 낯선 경험을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날 선 언어를 벼리고 별러서 새로운 사유를 부르는 문장을 건축한다.


하지만 갈수록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실종되고 있다. 벼농사를 디지털 공간에서 지을 수 없고, 삼겹살을 디지털 게임으로 구워 먹을 수 없다. 아날로그 공간에서 내가 생각하는 의도나 계획에 어긋나는 사건이나 사고가 생각지도 못하게 발생할 때 고통을 수반하는 새로운 깨달음이 수반된다. 나의 의지대로 풀리지 않고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예기치 못한 사고(事故)가 발생할 때 생각지도 못한 사고(思考)가 잉태된다. 고통의 강도가 강할수록 체중이 실인 언어를 찾아 자신이 겪었던 느낌과 생각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이럴 때 사람의 살갗을 파고드는 언어가 탄생된다.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걸 갖고 있다는 듯이, 또 내 말끝에 손가락이라도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110쪽).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는 생각과 감정을 담고 있는 메시지로 상대의 마음을 울리는 마사지다. 어떤 언어를 쓰는지에 따라서 의미가 심장에 꽂혀 의미심장해지고 마음이 움직여 감동받을 수도 있고, 의미가 머리에 꽂혀 골 때리며 이해타산을 따질 수도 있다. 어떤 언어는 전율하는 감동을 부르고 어떤 언어는 골머리를 아프게 하며 두통을 유발한다. 우리가 부단히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언어를 벼리고 벼려서 날 선 언어를 만들어내야 되는 이유다.



소설가 배수아 《당나귀들》에 보면 ‘언어의 틈새’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사람의 말이나 풍경을 보고 그 느낌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느낌과 언어 사이에는 언제나 틈새가 존재한다. 언어의 틈새는 매일 만나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기존 언어로는 그 순간에 담긴 의미나 느낌을 포착하기 어려운 현상을 말한다. 작가들은 평생 동안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평범한 일상에서 매일 느끼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적확한 언어 사이에서 치열하게 언어를 벼리고 벼려서 날 선 언어로 낯선 생각을 끊임없이 잉태한다. 이전과 다른 체험을 날 선 개념으로 벼리는 과정에서 낯선 생각이 잉태된다! 배운 언어로 배우지 못한 언어를 배워서 사물이나 현상이 말하고 싶은 의도를 표현해 내려는 안간힘이 바로 언어의 틈새를 메꾸려는 노력이다. 그때 비로소 적확한 언어는 생각의 옷을 입고 하늘을 날고 감정의 컬러를 지닌 채 심장박동을 부추긴다. 언어는 뇌리를 공략해 번개 치는 깨달음을 주고 심장을 공략해 의미심장해지는 감동을 동시에 주는 신의 선물이다.


경이로운 순간을 목격했지만 기존 언어로는 그 장관을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서는 안간힘 속에 언어의 틈새는 서서히 메꿔진다. 배운 언어로는 일상의 기적을 담아낼 수 없을 때 사람은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다른 언어를 찾아 나서거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는 몸부림을 부리는 사이에 언어의 틈새는 부단한 모색과 실험 속에서 그 간격이 조금씩 좁혀진다. 그 순간 언어 역시 비약적으로 방향으로 쓸모가 생긴다. 언어의 쓸모가 어제와 다르게 업그레이드될 때 사람의 쓸모 역시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언어의 쓸모도 이미 내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반복해서 생기지 않는다. 언어의 쓸모는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언어를 쓸 때가 왔을 때 적확하게 표현하는 순간에 생긴다. 나아가 언어의 쓸모는 기존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난국을 탈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새로운 언어를 구상하는 안간힘을 쓰는 사이에 쓸모가 새롭게 발견되기도 한다. 



언어가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배운 언어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어의 틈새가 좁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늘 낯선 생각을 잉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은 어제와 다른 낯선 세계를 탐험하기 때문에 경이로운 순간을 만날 때마다 언어의 부족을 느낀다. 배운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는 감동적인 순간이나 처절한 절망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언어의 틈새는 점차 벌어진다. 새로운 사유체계를 건축하려는 사람은 점차 벌어지는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다시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서거나 스스로 언어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배운 언어에 만족하지 않고 늘 배우는 언어로 생각을 정련하고 매 순간을 성찰하며 일상을 숙고한다. 언어는 거기 그냥 있는 명사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누가 그걸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동사로서 움직이는 생성이다. 언어를 배우는 시간, 새로운 언어 습득에 투자한 시간만큼 언어의 쓸모는 달라진다. 색다른 문장을 건축하려는 작가는 오늘도 언어를 배우기 위해 어제와 다른 모험을 떠난다.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일본 철도의 카피다. 모험을 했어도 그걸 표현할 언어가 부족하면 모험은 모습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언어가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언어 여행을 멈추지 말아야 할 까닭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우는 언어의 품격이 나의 품격을 결정한다. 오늘 내가 직면한 언어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내일 나는 어떤 언어 공부를 할 것인지, 배우는 언어가 우리를 삶의 주연 배우로 만들어 줄 것이다.   


문제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를 벼리지 않고 기존 언어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깨달음의 원천이자 행복의 터전에서 일어나는 일상 다반사(茶飯事)에서 매일 소소한 깨달음을 얻고 살아간다. 그리고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죽음, 그 앞에서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소중한 삶의 순간을 매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상다반사와 시한부 사이에 우리는 무불경(毋不敬)의 삶을 살아간다. 무불경은 존경하지 않을 만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 즉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기적이며 경이라는 뜻이다. 매일매일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떨림의 신호를 보내면 또 다른 존재는 울림으로 반응하면서 공명현상이 발생한다고 물리학자 김상욱 박사는 《떨림과 울림》에 주장한다. 결국 인생 드라마는 일상다반사를 무불경의 마음으로 경이로운 기적을 매일매일 체험하면서 시한부(時限附) 인생을 산다고 생각할 때 탄생된다. 무불경의 경험에서 생긴 언어의 틈새를 좁히려는 안간힘, 언어를 벼리고 또 벼리는 언어 디자인을 통해 우리는 어제와 다른 언어로 낯선 생각을 잉태할 수 있다. 언어가 앙상하게 야위면 생각도 가난해지고 행동도 천박해진다. 



언어를 벼르고 벼리지 않으면 버림 당한다. 벼르는 것은 기회를 엿보는 것이고 벼리는 것은 모루 위에서 불에 달궈진 쇠를 단련하는 과정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타성에 젖은 언어를 벼려야 언어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 낡아빠진 생각을 날조하는 꼰대에서 벗어나 익은 생각을 창조하는 리더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자기만의 언어 사용 방식으로 자아를 어제와 다르게 재창조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지칭한다. 아이러니스트는 타성에 젖은 기존 문법을 파기하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독창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고유한 어휘,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에 목숨을 걸고 어제와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다. 마지막 어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신념이다. 나의 마지막 단어는 도전이다. 도전을 키워드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깊고 다르면서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이전과 다른 적확한 언어로 번역해 내는 시인이 되기 위해 타성에 젖은 언어를 버리고 탄성을 자아내는 낯선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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