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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를 모르면
‘애로’사항이 많아진다

‘에로’를 모르면 ‘애로’사항이 많아진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책을 지난해 11월부터 틈틈이 거의 다 읽어보았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방대한 탐독의 결과 인용되는 철학자의 깊이와 넓이는 가늠할 수 없다. 자기주장을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지만 시적이고 탁월한 언어 선택으로 건축된 문장은 사유의 주름이 깊이 파여 있다. 단문이지만 의미심장하고 곱씹어 반복해서 소화시켜야 할 의미의 진액이 농축되어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의 뒤안길에서 거시적 담론을 비판하면서도 미시적 흐름의 역사를 놓치지 않는다. 



살갗을 파고들다 폐부를 찌르고 전두엽을 강타하다 의미를 심장에 꽂는다.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문장도 수두룩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은 일목요연하고 시종일관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확신에 차 있다. 어려운 이야기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사례로 설명하고 설득한다. 다른 사람의 주장에 의지하면서 그 근거의 한계와 문제점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결국 자기주장의 확고부동함으로 밀어붙인다. 한 편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다가도 오두막에서 쉬었다가 다시 강풍이 몰아치는 드라마가 전개되기도 한다.


모든 책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면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메시지는 정보는 가산적이고, 누적적이며 투명해서 포르노지만 진실이나 지식 또는 이야기는 서사적이고 독점적이며 애매모호해서 신비하고 에로틱하다는 주장이다. 시간이 원자화 파편화되면서 한 곳에 머무르거나 머뭇거리지 못하고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時)-점(點)으로 전락하면서 함께 거주하며 의미를 반추하고 사색할 시간이 없어지고 홀로 덧없는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멈춰 서서 뭔가를  “맺음”을 통해 의미를 생산해야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어디론가 반복해서 미끄러져 내려가고 빠져들어가 나오지 못할 정도로 산만하고 바쁘다.


오로지 확인가능한 목표만을 향한 행진곡이 매일 성과제고를 외치며 앞만 보고 달리기를 강요한다. 유유자적한 산책의 마음과 태도로 시간을 여유롭고 정처 없이 보내는 방랑자의 경쾌함은 잊은 지 오래다. 조급하고 부산스러워 늘 불안하고 신경과민증에 시달리며 막연한 두려움이 오늘의 삶을 엄습하는 동안 소셜 미디어 교회에서 예배를 올리고 ‘좋아요’라는 아멘을 반복하며, 떠도는 정보 공유를 통해 성찬식을 올리며, 소비를 통해 구원을 받지만 욕망의 물결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마음은 늘 허전하며 지갑은 늘 비어있다. 인공지능에게 물어보고 답을 찾아 만족하며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치명적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지능은 주어진 수평적 데이터에서만 선택할 수 있지 기존의 것들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성과사회의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 자기 자신의 착취자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시자이기도 하다. 자기를 착취하는 주체는 노동수용소를 몸에 달고 다니며 그 속에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자기를 조명하고 감시하는 주체는 몸에 파놉티콘을 지니고 다니면서, 그 속에서 감시자이자 수감자 노릇을 동시에 하면서도 무한목표 달성을 위해 직선주로를 달려가다 목숨이 끊어지는 위험궤도를 달리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해야 한다는 강제성의 규율사회가 광인과 죄인을 양산하고 있지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성과사회로 전환되면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대량 양산하고 있다.  


오늘도 움직이는 강제노동 수용소인 스마트폰에게 자발적으로 발가벗고 모든 걸 다 보여주면서  거기에 갇힌 줄도 모르고 매일 반복되는 같음의 지옥으로 몸을 던진다.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은 “바보처럼 굴기”에서 시작된다. 바보는 기존 체제에 대한 순응의 압박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탈할 용기 있는 이단아다. 지능이 아니라 바보짓이 생각하기의 특징이다. 너무 지능적이어서 바보처럼 생각할 수 없는 인공지능에 매달릴수록 우리는 인공지능에 종속되는 바보가 된다. 신체성의 접촉을 통해 땀으로 일궈낸 깨달음의 흔적을 나만의 내러티브로 엮어내는 서사적 상상력과 실천력만이 내 삶은 물론 세상을 밝히는 빛의 언어가 될 수 있다. 남의 정보와 데이터에 내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는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 몸을 던져 겪어내는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건져 올린 낯선 사유체계를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타자의 관심과 주목을 끄는 서사가 탄생된다. 


계산하는 투명한 데이터나 정보에 현혹당하지 말고 사물의 새로운 질서와 경이로운 일상의 작은 신비를 발견하는 정신을 통해 어제와 다른 깨달음의 향연을 엮어내는 내러티브 탐구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열정과 혼이 담긴 이론이라야 땀과 눈물로 얼룩진 내 삶의 이야기 조각이 한 편의 서사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내러티브로 직조될 때 타자에게 근원적 신뢰를 주고 힘든 사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감동적인 작품이 탄생된다. 



나와 다른 타자가 추방되고 신비를 머금은 애매모호함이 벗겨진 모든 곳이 투명해지는 세상에 부수적인 우회로를 따라 흐르는 에로스의 유혹은 사라지고 촌음을 다투는 시간의 얄팍한 흐름에 의미를 잉태하는 시간의 향기마저 실종되는 시점에서 함께 머무르며 소통 없이도 공동체를 구축하는 신체성의 연대인 리추얼은 찾아볼 수 없다. 나아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자기만이 서사를 창작할 시간은 디지털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정보상품 소비에 농락당하며 피폐해진 심신을 수습하느라 확보가 불가능하다. 


더 열심히 찾고 더 많이 더 빠르게 뭔가를 보고 끌려다니고 있지만 나를 멈추게 하고 끌림을 주는 매력은 늘 자본으로 치장한 마력으로 둔갑해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뿐이다. 누군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보편적 처방전으로 모든 사람들이 따라가야 할 능률복음으로 둔갑하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와는 무관하게 앞날의 흐름을 제시하는 트렌드는 늘 나를 변화에 적응하라는 디지털 충격으로 들린다.


“이론은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근본적 결단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존재하고-혹은 존재해야 하고-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원천적, 근원적 결단인 것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서사이며,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열어가는 구별의 숲길이다(91쪽).

-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중에서 -


2024년에는 그동안 경험하고 고뇌하며 집필했던 저작물을 집대성,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해서 세상에서 끌어당기는 원심력 인생을 종식시키고 나와 주변의 관계 속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구심력 인생을 살아가는 한 가지 방도(方道)를 제시해보려고 한다.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살아가는 2024년이 되기 위해서 지금은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결단만 남았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으며, 내가 모든 걸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시대에 나를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많아도 나를 부정하는 이런 타자성을 기꺼이 끌어안고 받아들일 때 변신을 거듭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트인다. 


자기만의 이론은 나의 고집으로 세상을 포섭하려는 헛된 야망이 아니라 나의 본성조차도 기꺼이 포기하면서 타자의 이질성을 받아들이는 상처와 고통을 녹여내는 에로스적 사랑의 산물이다. 현병철이 《에로스의 종말》에서 말하는 에로스란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강한 타자다. 하지만 자본이 정한 상품이나 누군가 제시한 성공 처방전에 유혹당한 동일한 소비자만 대량 양산되는 지옥 같은 삶에서 에로스적 사랑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59-60쪽).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 중에서



에로스를 모르면 애로사항이 많다. 에로스는 언제나 에로틱한 형상을 띠면서 베일에 가려져 있고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한 두 번의 노력으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화신이 아니다. 오히려 에로스는 자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다른 모습으로 부단히 변신하려는 과정에서 나와 다른 타자성도 내 생각의 씨앗을 어제와 다르게 발아시키는 촉발점 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한계를 알면서도 불가능성을 포용하고 그걸 품어 나를 다르게 재창조하는 과정을 책임지려는 가운데 에로스는 에로틱한 신비의 매력으로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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