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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지기 전에 길 들자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길, 험난하지만 난해하지 않다

길들여지기 전에 길 들자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길험난하지만 난해하지 않다


‘눈길’만 주어도 추운 ‘눈길’도 녹을 수 있는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총을 쏴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다. ‘눈길’을 주면서 힘든 사람에게 ‘손길’을 내주고 손만 잡아주어도 힘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화가 난다고 ‘발길질’을 하면서 상대를 무시할 때 우리 관계는 경계로 바뀌면서 소통은 단절된다. 그때 주고받은 한 단어는 깊은 상처를 남기며 가슴에 박힌 못이나 다름없다. 따듯한 ‘눈길’을 주고받다 덤으로 ‘손길’이 가고 오순도순 나누는 정담 가운데 내미는 ‘손길’에 다시 ‘눈길’이 간다. 너에게로 가는 ‘손길’은 나에게로 오는 ‘눈길’을 부르고 ‘손길’과 ‘눈길’은 함께 걸어가는 ‘발길’을 맞이한다. 그게 바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가는 길이다. 힘든 ‘고생길’이지만 함께 흐르는 ‘물길’을 만나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함께 비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돌아가는 굽잇길이 빠른 길이다


‘인생길’은 ‘꿈길’이나 ‘지름길’ 또는 ‘비단길’만 있는 게 아니다.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험난한 인생을 경험할 때도 있고, ‘빙판길’에서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하고, ‘초행길’에서 두려움에 떨며 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길 위에서 내가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깨달은 만큼 앞으로 안 가본 길을 가는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너무 많이 넘어져서 히든거리는 순간마다 다짐을 하면서 가는 길 위에서 절치부심하기를 밥먹듯이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걸어갈 길이 더 많다. 세상에는 하늘의 별의 수만큼 아직도 가봐야 할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 ‘고생길’을 걸어오며 산전수전 다 겪어봤지만 그때 겪은 곤경이 오늘의 풍경으로, 그때 힘들었던 배경이 지금의 전경으로 드러나 나를 빛나게 해 줄 수도 있다.


때로는 ‘옆길’로 새서 뜻하지 않는 ‘샛길’로 빠지는 경우도 생긴다. ‘샛길’로 빠졌지만 우연히 만난 ‘골목길’에서 길모퉁이에 숨어있는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옆길’이나 ‘갓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것이 나를 난국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탈출구가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인생의 ‘뒤안길’에서 ‘외길’을 만나 황당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사잇길’에서 ‘살길’을 찾아 ‘곧은길’을 만나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내가 만난 ‘곧은길’은 ‘출셋길’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더 걸어가면서 삶의 희로애락을 배우는 ‘순례길’이었다. ‘순례길’은 따로 없다. ‘밭길’이어도 좋고 ‘논길’이나 ‘논두렁길’이어도 좋으며, ‘산길’이나 ‘숲길’이면 어떠랴. ‘출근길’과 ‘퇴근길’이나 ‘귀갓길’도 ‘순례길’이며, ‘덤불길’을 벗어나 걷는 ‘강변길’이나 ‘바닷길’도 인생의 순간마다 돌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굽잇길’이다. 돌아가는 굽잇길, 곧장 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우직지계(迂直之計)가 빠른 길이다.



벼랑길도 배움 길이다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리고 선택하지 않으면 곤란한 길목을 만나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 중요한 길은 지금 당장 선택하지 않으면 그 어떤 길도 나에게 갈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길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게 아니라 내가 걸어가면 뒤로 생기는 것이다.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는 것은 누군가 걸어간 길은 내가 뒤쫓아 따라가는 길이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눈이 쌓였을 때 내가 가장 먼저 걸어가는 길이 ‘숫눈길’이다. 처음 걸어가는 길이라고 ‘꽃길’일 수만은 없다. ‘자갈길’을 만날 수도 있고 ‘비탈길’을 만나 갑자기 넘어질 수도 있다. 길을 가도 뚜렷해지기는커녕 갈수록 흐릿하고 애매모호해서 걸어가는 길 위의 여정은 성에 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답답함과 닮았다. 아무리 걸어가도 삶의 시름은 줄어들지 않고 주름만 늘어가지만 그래도 이 길 위에서 내 이름값을 해야 되지 않을까.


‘뒷길’이나 ‘옆길’로 빠져 헤맬 때도 있었지만 에둘러 돌아가는 ‘에움길’을 만나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걸어온 인생의 ‘뒤안길’을 생각해 보는 뜻밖의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에움길’을 빨리 가는 길은 아니지만 나에게 생각할 화두를 던져주고 어떻게 살아가는 길이 내가 걸어가면 행복한 길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오솔길’이다. 비록 그 길이 잘 못 들어선 ‘헛길’ 일 수도 있고,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자드락길’ 일 수도 있다. ‘자드락길’을 걷다가 지나간 일들의 부르는 상념에 잠겨 늘키면서 혼자 슬퍼하기도 했다. 자드락길은 강가나 바닷가로 통하는 ‘벼룻길’이 ‘벼랑길’ 옆에서 새로운 길로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벼룻길’은 다시 산등성이의 평평하게 넓은 곳에 난 ‘등판길’로 안내해 줄 수도 있다. 길은 또 다른 길과 연결되어 끝없이 이어진다. 모든 길은 ‘배움길’이기 때문이다.



길은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다


때로는 곧장 가지 않고 멀리 피하여 가는 ‘돌림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냇가나 강가에 나 있는 돌이 많은 ‘서덜길’에서 잠시 숨 돌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골목길’을 걷다가 ‘큰길’을 만나고, ‘꿈길’을 헤매다 ‘지름길’을 찾아내는 우연한 행운을 만날 수 있다. ‘인생길’은 때때로 어긋나게 갈라진 ‘엇길’이나 ‘큰길’에서 갈라져서 난 ‘곁길’을 만나 ‘벼랑길’로 떨어질 수도 있지만 구사회생해서 기분이 호습기만 할 뿐 별다른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엄습하지 않을 때도 많다. 생각의 말로(末路)는 말로만 할 때 생기고,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부터 나온다. 생각이 현실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힘든길’도 지금 발 벗고 나서서 걸어가야 한다. 지금 걷지 않으면 거덜 나는 이유다.


‘시골길’도 걷다가 ‘논둑길’을 만나 ‘벌판길’을 걷기도 하지만 그 어떤 길도 나에게 ‘막다른 길’은 아니었다. 시골마을 좁은 ‘골목길’에서 만난 ‘고샅길’이었지만 그 ‘방랑길’이 다시 ‘큰길’을 만나 ‘숨길’을 터주기도 한다. ‘살길’을 찾다 ‘숨길’ 조차 막히지만 ‘발길’ 닿는 데로 하염없이 걷다 보면 힘들고 가파른 ‘고빗길’을 지나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그넷길’을 걷는 여유도 생긴다. 세상의 모든 길은 저마다 사연을 품고 길을 걷는 사람의 친구가 되어 지금 여기서 저기로 향하는 동경심을 품게 만든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마음고름을 풀어버리고 풀쳐생각을 시작할 수 있다. 길은 그 자체가 우리들의 스승이다. 복잡했던 생각도 걷기만 해도 엉킨 실타래 풀리듯 쉽게 풀어지기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 스스로 추스르며 깨닫고 위로받는 때도 많다. 



(road)’을 걷는 사람은 (load)’을 짊어지고 간다


‘지름길’로 빨리 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에움길’을 따라 돌아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낯선 마주침으로 깨우침을 주는 수많은 사물과 현상이 있다. 지금 우리가 에워 걷고 있는 ‘에움길’은 나를 따듯하게 위로해 주고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길로 안내해 주는 뜻밖의 행운의 길일 수도 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초행길’이자 잃었던 일상을 다시 만나는 ‘마중길’도 주변에서 언제나 마중 나와 우리를 기다린다. 나를 타성에 젖게 만들고 습관적인 사고에 물들어 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했던 통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배웅길’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길을 나서기 전에 들었던 생각도 온데간데없고 전혀 다른 생각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한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만나 끊임없이 짝짓기를 통해 생각의 자손을 출산한다. 어떤 생각이 진짜 내 생각인지 알 길이 없다. 길을 걸으며 부단히 생각에게 물어 흔들어 깨울 뿐이다.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자드락길’을 걸을 때 그 길은 내가 홀로 걸을 수밖에 없는 ‘외딴길’이라고 생각했다. ‘새벽길’을 걷든 질퍽질퍽한 ‘진창길’을 걷든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길은 언제나 탄탄대로(坦坦大路)만은 아니다. 모든 ‘길(road)’을 걷는 사람은 다 저마다의 인생 ‘짐(load)’을 짊어지고 간다. 길에는 남북으로 뻗은 가로수가 있는 넓은 길(avenue)도 있고, 동서를 관통하는 보도블록이 있는 도로(street, 街)도 있다. 여러 사람이 함부로 발로 차거나 밟는 ‘뭇발길’을 걸으며 화를 내고, 길바닥에서 길길이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빙 둘러서 멀리 돌아가는 ‘돌음길’이나 ‘두름길’을 걷다 보면 ‘천길만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만나 뜻밖의 가능성을 선물로 받는 길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은 언제나 낯선 마주침으로 깨우침을 주는 선물이다


‘불길’이 나야 불붙을 수 있고, ‘물길’이 나야 물도 흐를 수 있듯 ‘발길’을 따라가면 우리가 걸어가고 싶은 ‘꿈길’을 반드시 만날 수 있다. 비록 그 길이 크고 멋진 ‘벼슬길’은 아니지만 작고 험한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더 많이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이전과 다른 실패 속에서 색다른 실력을 쌓는 길을 만날 수 있다. 길눈이 어두워 헤매고 가던 길에 길들여졌어도 수많은 길동무나 길라잡이 덕분에 안개가 걷히고 조금씩 ‘앞길’이 보이기 시작하며 함께 버티고 견디며 걸어가는 ‘동행길’이 열린다. ‘먼 길’을 가는 나그네지만 그 길 위에는 나와 같이 고민하는 길손이나 길동무를 만날 수 있고, ‘갈길’은 멀고 길이 바쁘지만 어떻게든 나아갈 방도를 찾아보며 길을 열어갈 것이다. 살아있다는 의미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간다는 의미이며, 어제 걸었던 길과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는 의미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길 위해서 나는 어제와 다른 마주침이 출산한 깨우침이라는 스승을 만난다.


가던 길을 잃은 덕분에 우리는 전혀 색다른 길을 만날 수도 있다. 길들여진 길에서 벗어나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곳으로 길들 때 나는 다시 길들여진다. 길들여지기 전에 길드는 노력을 반복할 때 삶은 언제나 새로운 길 위에서 경이로운 기적을 만나는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다. 길에서 나는 넘어지고 거기서 다시 일어나 어제와 다른 나로 세울 것이다. “갈 길은 아직 못 가본 길.”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명대사다.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사람이다. 남이 걸어간 길 위에서 남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고 뒤떨어질 뿐이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옳은 길은 있어도 틀린 길은 없어요.” 영화 ‘인턴’에 나오는 대사처럼 남들이 보기에 틀린 길이지만 내가 보기에 옳은 길을 가야 한다. 그 길 위에서 겪어낸 나만의 경험을 몸의 언어로 번역, 품격이 돋보이는 단독적인 언어로 내 삶을 녹여낼 때 전인미답의 길은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계속 열릴 것이다.



글은 길이자 삶이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인다.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무관하게 글을 쓸 수 있고, 삶과 다르게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은 독자와 공감하기 어렵고 감동을 주기도 어렵다. 글과 삶은 하나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삶이 바뀌지 않고서는 글도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 자기 다운 색깔이 드러나는 글, 살아온 삶을 담아내는 글쓰기가 진짜 글이고 글쓰기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명대사가 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남긴 말이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라는 충언을 전하면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겠다는 치욕을 견디면 살 수 있다는 명분을 담은 글이다. 하지만 글은 글로서 끝나지 않고 길로 연결된다. 자신이 살아온 삶대로 글을 쓰고, 쓴 글 대로 삶을 살아간다.


나에게 글은 역시 길이다. 나의 글에는 내가 살아온 길이 있고, 살아갈 길도 있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길도 있다. 글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자 길이다. 글과 길, 그리고 삶은 하나다. 내가 살아가는 삶대로 글을 쓰고 쓴 글대로 길을 만들어 걸어간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보이고 삶이 보인다. 글과 길과 삶은 따로 노는 객체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 삼위일체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지 않고 글 쓰는 기법을 가르치는 글쓰기 과정은 어떤 면에서 무의미하다. 삶을 바꾸지 않고 글쓰기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력이 그 사람의 글이 된다. 글 짓기나 책쓰기는 그래서 애쓰기다. 애간장을 녹이면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삶만큼 내 글도 언어로 번역된다. 파란만장한 삶만큼 파란을 일으키는 문장도 쓸 수 있다. 삶의 농도와 밀도만큼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 사람이 말하는 메시지는 그 사람의 삶이 농축된 결정체다. 삶을 담은 메시지를 긁으면 글이 되고 그리면 그림이 되며, 목소리로 담아내면 노래가 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진짜 나다운 삶인지를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겪은 스토리가 바로 창작의 원료가 된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삶을 재료로 예술적 창작을 한다. 그들에게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 창작의 기본은 기법이나 기교로 만들어지지 않고, 창작하는 사람의 삶의 깊이와 넓이가 만들어 간다. 내 삶의 깊이만큼 글도 깊어지고, 내 삶의 넓이만큼 내 글도 폭넓은 식견을 품을 수 있다. “경험은 글을 잘 쓰는 모든 이들의 안주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명언이다. 경험은 글감이 된다. 산전수전 겪어본 경험이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의 상상력 재료가 된다. 글쓰기는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다. 연결시켜 상상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문장이 건축된다. 넓고 깊은 경험의 연상의 텃밭으로 작용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폴 부르제의 말이다. 그런데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생각한 대로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기에는 삶이 너무 복잡하고 예측불허다.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고 예기치 못한 일이 갑자기 발생하기도 한다. 생각이 삶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이 생각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통찰이 행동을 바꾸기보다 행동이 통찰을 낳는 경우가 많듯이 방법을 구상한 다음 실행하는 게 아니라 실행하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 부각된다. 이런 점에서 생각하는 대로 살기보다 사는 대로 저마다의 독특한 생각이 결론적으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내 생각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글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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