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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언어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광고판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시간의 두께가 만들어가는 의미의 중력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자기만의 스타일과 컬러를 드러내는 광고판이다


“이론적 사상은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개념의 주위를 맴돈다. 마치 잘 보관된 금고의 자물쇠들처럼 그 개념이 열리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때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비밀번호가 바뀐다. 하나의 비밀번호로 모든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어제 거기서는 열렸었는데 지금 여기서는 안 열리는, 그래서 다른 비밀번호로 재배치해서 열어야 하는 다른 지혜가 필요하다. 어제의 지식과 경험으로 해결되었던 문제가 오늘은 열리지 않는 문제가 부지기수로 부각된다. 어제의 언어로 표현하면 뭔가 부족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느낌이 들 때 기존 언어를 재배치하거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생긴다. 예전에 열 수 있었던 문이 오늘은 열리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당황하지 말고 다른 비밀번호로 무장하는 경험적 지혜가 필요하다. 어제는 마음을 열고 시가 와닿았었는데 오늘은 시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자기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어제의 열쇠로는 열리지 않는 마음의 문이 또 생겼기 때문이다. 한편 어제는 열리지 않았던 시의 문이 오늘은 왠지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스며드는 경우도 있다.



타인의 언어는 나의 문제의식을 풀어줄 대안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언어가 내가 겪어가는 경험적 통찰을 번역해 낼 수 있는지를 아는 데 있다. 사물이나 현상이 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내가 감응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적확한 언어가 떠오른다면 금상첨화지만 대부분의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감지했지만 감지된 상황이 전하는 의미와는 여전히 격차가 존재하는 데 이걸 소설가 배수아는 《당나귀들》이라는 소설에서 ‘언어의 틈새’라고 했다. 담이나 벽 따위의 벌어진 틈을 메우는 걸 사춤을 치다라고 한다. 벌어진 틈새를 메꾸는 사춤을 치는 것처럼 언어의 틈새도 언어를 벼리고 벼르는 부단한 노력을 통해 좁혀 나가야 나의 언어 실력도 레벨업된다. 작가는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평생 동안 언어를 벼리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일상을 반복하는 평범한 우리들은 언어의 틈새가 있어도 어제 사용했던 언어사용방식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서 언어적 타성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다. 똑같은 경험을 하지만 누군가는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을 담아내는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사람이 있다. 언어가 자기 생각의 옷으로 갈아입을 때 비로소 나는 존재이유가 드러난다. “자기 삶과 존재에 직결되는 낱말을 세계의 주머니 밖으로 꺼내놓는 데서부터 글 풀려나간다”(15쪽). 윤경희의 《그림자와 새벽》에 나오는 말이다. 아무리 독특한 삶을 살았어도 남의 언어로 채색되는 순간 내 삶은 사라진다. 내 삶의 고유함은 오로지 자기만의 언어로 디자인될 때 비로소 그 독특한 색깔과 스타일이 드러나는 법이다.



김지수의 《위대한 대화》에 보면 누군가의 떨림을 독자가 울림으로 받을 때 그 사이에는 ‘언어의 다리’가 생긴다고 한다. 언어의 다리는 놀라운 광경 또는 어제와 다른 낯선 현상을 목격한 내가 대상의 떨림에 감응하는 나의 울림 사이에 건설된 다리다. 그 다리에는 여전히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보고 느낀 감각이나 생각이 흐르면서 적확한 언어를 찾는, 소설가 배수아가 말하는 ‘언어의 틈새’를 메꾸려는 사투가 벌어진다. “자기 삶을 해석할 인생 언어를 한 조각이라도 채굴”(김지수, 2023, 13쪽) 하기 위해 부단히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사람에게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자기 삶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희열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 언어를 벼리는 과정이 곧 내 삶을 자기답게 건축하는 자기 발견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관성의 늪에 살면서 사용하는 타성에 젖은 언어보다 탄성을 유발하는 언어, 평범한 언어지만 비범한 사유를 담아내는 언어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이상, 언어는 내 생각의 옷을 입고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세상 구경으로 나갈 것이다.


“타인의 언어는 결코, 나의 정답이 될 수 없음을 알기에 홀로, 밤을 읽지 않기로 한다.” 일본의 사이하테 타히라는 시인의 짧은 시, ‘공백의 시’ 구절의 일부다. 타인의 언어로 내가 고민하는 답을 찾아낼 수 없다. 타인의 언어로 밤을 지새우며 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읽어봤자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밤의 의미는 부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나의 언어로 내 생각을 정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지적 사고의 식민지를 벗어나기 어렵다. 책에 흠뻑 빠져서 읽되 다 읽은 다음에는 거기서 완전히 빠져나와 나의 언어로 내 삶을 반추하며 나의 사유체계를 구축해야 되는 이유다. 이 시집 끝에 짧은 시인의 말이 나온다. 여기에도 인두 같은 한 문장이 나온다. “나의 시가 조금이라도 좋았다면, 그건 결코 내 언어의 힘이 아니며, 애초부터 당신 안에 있던 무언가의 힘이다”(101쪽). 내 안에 시를 해석하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시라도 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시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아름답게 읽히는 이유다. 시인은 이런 맥락에서 촌철살인의 언어로 화룡점정한다. 



자기만의 언어는 체중이 실린 몸의 언어다


자기만의 언어는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했거나 의도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거나 의도했던 일을 통해 변화를 추진하는 사건을 일으켰을 때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몸의 반응을 적확한 언어로 담아내려고 애쓰는 가운데 탄생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이 경험하는 가운데 가졌던 생각이나 느낌을 상상하면서 그 상황에 걸맞은 단어를 찾아 골똘히 고민하는 과정에서 낯선 개념이 잉태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만의 언어는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틀에 박힌 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겪으면서 느낀 감정이나 생각의 흔적을 이전과 다르게 표현하려는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힘겹게 출현한다. 이런 점에서 “말은 이론적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운전이나 수영처럼 행위에 속하며 행위 속에서 습득”(p.305)하는 즉, “말은 신체위에서 가시화되는 행동”(p.305)이다. 서동욱의 《타자철학》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는 두뇌 속의 생각을 관념적으로 편집하는 와중에 신체적 경험과 무관하게 생물학적으로 처리-가공된 산물이 아니다. 특히 자기만의 언어는 자신이 몸으로 겪은 단독적인 경험을 그 경험이 발생한 상황적 맥락성을 배경으로 사유하는 가운데 경작되는 애쓰기의 산물이다. 언어는 개념적 의미를 전달하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신체적 경험을 결부시키는 몸의 반응이다. 어떤 문장을 읽으면 머리로 이해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면서 그 문장을 쓰는 작가의 몸이 경험하는 감각적 체험이나 깨달음의 느낌을 내 몸도 고스란히 느끼는 까닭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관념적 사유의 산물로 탄생하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경험적 고통이나 상처, 성취의 즐거움이나 좌절의 아픔을 담아내려고 애쓰는 가운데 비로소 모습을 보여주는 몸의 언어다. 


몸의 언어는 살갗을 파고드는 언어이자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언어다. 자신이 직접 겪어본 이야기를 적확한 언어를 선택, 몸으로 느낀 감정이나 정서를 언어라는 생각의 옷으로 갈아입히는 와중에 탄생하는 언어가 바로 몸의 언어다. 몸의 언어는 체중이 실린 언어다. 몸의 언어는 머릿속의 파편화된 생각을 논리적 언어로 편집하고 가공해서 만들어진 건조한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철학은 물론 치열한 문제의식과 열정이 담겨 있어서 듣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을 보여주는 경험적 언어다. 머리의 언어는 자신이 직접 겪어본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나 주장을 인용하면서 설명하는 언어다. 당연히 머리의 언어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이 스며들어 있지 않아서 남의 이야기하듯 설명을 통해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된 언어다. 반면에 몸의 언어는 당사자 자신이 겪어본 일이라서 당시 상황에서 본인이 직접 느낀 감각적 반응이나 각성을 어눌하지만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상대가 자신도 모르게 설득당하는 언어다. 몸의 언어는 체중이 실려있는 진심 어린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막혔던 사유를 뚫어주는 불쏘시개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조르조 파리시는 과학에서 진보가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창의적 아이디어, 특히 인류역사상 사상적 흐름을 바꾼 혁명적인 아이디어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기는 것인지를 본인의 경험을 포함해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단한 발상이나 거창한 아이디어보다 일상 속의 작은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이런저런 실험을 하면서 시행착오 끝에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로 발전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조르조 파리시는 이런 경험적 깨달음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까 고민하다 ‘미시적 창의력(microcreativity)’이라는 개념을 창조해 냈다. 창의력이라는 단어는 너무 많이 쓰이고 있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어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과학사의 흐름을 바꾸는 놀라운 혁명을 일으키는지 고민하던 조르조 파리시는 대단한 발상이나 놀라운 계획보다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깨달음을 관념적 사유체계에 집어넣고 생각하기보다 작은 실험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겪어본 어려움으로 난관에 부딪혔을 때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는 기존 언어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때 뜻밖의 해결 대안이 부각된다. 자기만의 언어는 이런 점에서 불쏘시개 같은 역할을 한다. 꺼져가는 불구덩이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는 불쏘시개처럼 자기만의 언어는 막혔던 사유에 윤활유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준다.


“개념이란 A와 B를 자기 안에 포함하면서, 이를 통해 A와 B가 이해되도록 만드는 C를 가리킨다. 개념은 A와 B를 포괄하여 양자의 관계에 근거를 제공하는 최상의 연관성이다. 이에 따르면 A와 B는 더 고차원적인 제3의 계기를 이룬다. 개념의 단계에서 비로소 지가 성립한다”(98쪽). 한병철의 《심리정치》에 나오는 말이다. ‘창의력’과 ‘미시적’이라는 말을 연결시켜 ‘창의력’과 ‘미시적’이라는 이질적인 단어가 만나 더 고차원적인 또는 차원이 다른 창의력의 지평을 열어가는 ‘미시적 창의력’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냈다. 한병철은 《서사의 위기》에서 “과거를 현재에 끌어내어 엮고 현재 안으로 계속해서 작용하게 하는, 즉 소생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력이 필요하다”(41쪽)는 주장을 펼치면서 “기억은 사건을 항상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서사적 실천”(83쪽)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나아가 데이터는 의식이 포함되지 않을수록 질적 수준이 높게 평가되기 때문에 서사적 성찰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최근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를 자기만의 문제의식이 담긴 언어를 창안, 현실 문제를 진단하고 관련 철학적 관점의 한계와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새로운 개념어를 창조한다. 서사라는 개념과 장력, 실천, 성찰이라는 개념을 연결시켜 서사라는 개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간다. 그는 또한 ‘데이터 가축’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창안, 빅데이터 시대에 다른 사람이 가공한 데이터만 일방적으로 먹으면서 사육당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문제점이나 위험성을 제기한다.



자기만의 언어는 익숙한 개념 낯선 조합으로 탄생되는 우발적 마주침의 산물이다


“영감을 받은 단어들이 마법을 부려 등장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상은 없으며 그녀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일한 도구, 오직 자신의 언어 안에서만, 모두의 언어 안에서만 쓸 것이다”(322쪽). 아니 에르노의 《세월》에 나오는 말이다. 때가 되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포착, 적확한 단어들을 조합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생각을 담아내는 창의적인 문장을 쓰고 싶지만 사투를 벌여도 한숨만 나오고 한 글자도 못쓰고 애간장만 태우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겪어낸 경험이 잉태한 낯선 생각을 영감으로 녹여낸 단어를 찾아내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소설가 배수아 씨가 말한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끝없는 문장건축을 시도한다. 앞서 생각난 단어를 목적어 배치해 봤지만 목적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기존 단어를 조합,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개념을 창조, 다시 목적어에 배치해 보니 가치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뒤섞인 개념 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문장,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외치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278쪽). 아니 에르노의 같은 책에 나오는 문장이다. 침묵 속에서도 수많은 익숙한 단어들은 우발적 만남을 통해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는 리좀의 원리를 따라간다. 리좀은 나무뿌리가 뻗어가다 우연히 다른 뿌리와 만나 색다른 가능성을 꿈꾸는 접속을 의미하는 것처럼 사전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 새로운 깨우침을 선사하는 낯선 개념이 잉태되는 경이로운 기적을 만날 수 있다.


“철학은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70-71쪽).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개념으로 철학자의 문제의식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기존 언어를 조합하거나 아예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의 저자, 우치다 다쓰루가 말하는 ‘지성의 폐활량, 같은 저자의 《소통하는 신체》라는 책을 보면 ‘언어의 해상도’라는 개념이 나온다. ‘지성’이라는 개념과 ‘폐활량’을 연결시켜 ‘지성의 폐활량’이라는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복잡한 문제를 만났을 때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적 인내심의 수준을 색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조급함의 차이다. 아마추어는 복잡한 문제나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직면하면 조급해하고 당황해서 문제의 본질을 깊이 따져보면서 적절한 대안을 모색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다. 동분서주하고 이런저런 해결책을 동원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반면에 프로는 문제의 본질을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고 접근할 수 있는 정신근육이 발달해서 아무리 사안이 시급해도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이 보유한 다양한 참고자료를 근간으로 이런저런 방식으로 문제상황에 대입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모색해 본다. 이런 프로들의 노련한 접근논리의 근저에는 바로 ‘지성의 폐활량’이 지적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내공이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언어’와 ‘해상도’라는 익숙한 개념을 낯설게 조합, ‘언어의 해상도’라는 개념을 창안, 이미지에만 해상도가 있는 게 아니라 글에도 해상도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좋은 글을 평가하는 한 가지 색다른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언어와 해상도라는 개념을 조합, 언어의 해상도라는 개념을 창조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글과 그렇지 못한 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 차이는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우치다 타츠루 작가는 오랫동안 고민했을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글이 감동적이다.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 글이 감동적이다. 미천한 경험이지만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를 쓰는 글이 감동적이다. 세상에는 감동적인 글이 되기 위한 수많은 필요조건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치다 타츠루는 ‘언어의 해상도’라는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 앞으로 우리가 글을 쓴다면 이런 글을 써야겠다는 자기주장을 펼치는 기반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쓰면 안 되는 글의 반례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익숙한 단어의 우발적 마주침으로 탄생되는 자기만의 언어가 생각을 다르게 전달하는 순간, 기존의 개념으로 바라본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 새롭게 생길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문제상황에서 색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자기만의 언어는 시간의 두께가 만들어가는 의미의 중력이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 SNS를 타고 흐르는 비슷한 이미지에 담긴 비슷한 메시지는 쓰레기를 방불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범람한다. “풍성한 한가위, 가족과 함께 건강하세 보내세요.”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추석, 소중한 분들과 넉넉하고 건강한 시간 보내세요.” “몸도 마음도 넉넉한 추석,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시고 가장에 웃음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행복하고 안전한 귀성길 되세요.” “즐거운 귀향길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왜 한가위만 되면 변함없이, 한결같이, 거의 똑같이 풍성한 한가위가  반복되고, 가족과 함께 건강하게 보내야만 하는 명절이 되었을까? 한가위가 누군가에게는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하는 풍성하지 않고 서글픈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병원에서 건강하지 못한 한가위를 보내면서 아픔을 함께 겪어내는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천편일률적인 언어가 대장간에 들어가서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단련되어 동일성의 반복으로 탄생된 쌍둥이 언어의 행렬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듯하다. 이런 타성의 텃밭에서 자라는 식상한 한가위 메시지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아서 한가위 삼행시를 만들어 응답해 주었다. 


한눈에 반했어도 숨길 수 없는 설렘

가랑잎 흩날리듯 가눌 수 없는 그리움

위장해도 감출 길 없는 아련함


한가위의 설렘과 그리움과 아련함을 드립니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드림



한 해가 바뀌면서 연말연시에 SNS로 주고받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해마다 타성에 젖어 식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승승장구하세요.” “2024년 건승을 기원합니다.” “승천하는 청룡처럼 희망찬 갑진년 되세요.” “웃음 가득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꽃길만 걸으시고 청룡처럼 비상하세요.” 비슷비슷한 이미지와 메시지가 비슷비슷하게 바뀌어서 연말연초가 되면 폭탄처럼 SNS를 타고 흐른다. 특히 단톡방 몇 개만 들어가도 타성의 텃밭에서 자란 식상한 언어들의 조합으로 이미지의 홍수를 이룬다. 이런 유사 이미지와 메시지의 홍수를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고 조금이라도 새로운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자세와 태도를 바꿔보기 위해 이런 연하장 메시지를 만들었다. “올해의 ‘발걸음’이 내년의 ‘밑거름’으로 쓰이고, 오늘의 평범한 ‘보행’이 내일의 비범한 ‘행보’로 역전되는 앓음 다운 시간으로 충전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인생 반전을 일으키는 절반(1/2)의 철학자 유영만 교수 드림.”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보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이전과 다른 반성과 성찰, 다짐과 각오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메시지를 줄 때 오랫동안 기억하고 감동받는다.


자기만의 언어는 특정 공간이나 상황에서 직면했던 난제를 해결하거나 딜레마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치부심할 때 기존 언어로는 지금 난국을 돌파하는 대안이 구상이 안 될 때 지금의 고민을 풀어낸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새로운 언어를 벼를 때 탄생된다. 그때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내가 벼른 언어에는 나의 치열한 고민과 깊이 파고들었던 생각의 깊이가 고스란히 무게가 실린다. 순간 고민하는 시간은 두꺼워지고 단어의 무게가 무거워지면서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다. 언어를 벼르는 시간은 SNS에서 정보가 흐르는 것처럼 얄팍하지 않고 단어의 의미를 반추하며 되새김질을 반복하는 시간이라 두꺼워진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가 멈춰 서서 곱씹어보는 시간이다. 자기만의 언어에는 이렇게 시간의 두께가 만들어는 의미의 중력이 실린다. 자기만의 언어는 한 인간이 특정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의 합작품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인간적 고뇌, 공간적 의미, 시간적 추억이 만들어내는 삼중주의 작품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겪은 경험을 특유의 문제의식으로 녹여내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만들어내는 사투의 산물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파란만장한 삶이 남기는 파란 문장의 재료다


예를 들면 장석주 시인은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책에서 ‘상상력의 촉수’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시는 ‘실패의 광휘’가 숨 쉬는 ‘고백의 건축술’이며, ‘존재의 내출혈’이라고 한다. 시인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겪으면서 생긴 고유한 생각을 이전과 다르게 표현하려는 안간힘 속에서 ‘상상력’과 ‘촉수’, ‘실패’와 ‘광휘’, ‘고백’과 ‘건축술’, ‘존재’와 ‘내출혈’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연결시켜 독립적인 개념이나 기존의 개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우연의 출발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촉수’를 만나는 순간 허공에 떠있던 공허한 담론이 오감각으로 포착되는 구체적 실체로 와닿는 촉감이 생긴다. ‘실패’가 ‘광휘’라는 단어를 만나는 순간, 뒷골목에 가려졌던 창피한 과거가 찬란한 꽃으로 다시 살아난다. ‘고백’이 ‘건축술’을 만나 고백도 건축가처럼 설계만 잘해도 예술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언어적 조합으로 증명해 준다. 존재가 내출혈이라는 단어를 만나 시라는 존재가 탄생하기 위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시인의 땀과 눈물이 아른거리게 만든다.


파란을 일으키는 자기만의 언어는 저자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삶의 산물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에 나오는 “이유 없는 다정함”, 까뮈의 《결혼.여름》에 나오는 “불모의 장엄함”, 박정대 시인의 《삶이라는 직업》에 나오는 “고독의 영유권”이라는 단어는 모두 저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어떤 언어적 옷을 입혀서 생각을 출산할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뇌하다 탄생된 사투의 산물이다. 소설가 김연수에 따르면 창조는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유 없이 상대나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다가갈 때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 까뮈가 말하는 ‘불모’와 ‘장엄함’의 합성어, ‘불모의 장엄함’은 불모지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수고 역설적으로 불모에서 장엄함을 발견하는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시인 박정대가 말하는 ‘고독’과 ‘영유권’의 연결로 만들어진 ‘고독의 영유권’이라는 개념은 고독한 사람이 즐기는 치외법권적 영토에 대한 권리를 표현하기 위해 출산된 새로운 생각의 자손이다. 



개념은 세상을 내다보는 새로운 안경을 선물로 주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지 못하게 막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개념적 렌즈는 다른 개념적 렌즈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기능도 갖고 있기 때문에 렌즈를 부지런히 갈아 끼우지 않으면 특정 개념적 렌즈로 필터링된 세상만 나에게 보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개념은 권력적이고 폭력적이다. 하나의 개념에 담긴 개념창조자의 의지와 의도로 화자는 세상을 읽는 방법을 규제하고 한정한다. 다를 개념으로 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해당 개념으로 보는 세계를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장본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개념이 권력적이고 폭력적인 두  번째 이유는 해당 개념으로 일상에서 몸으로 겪는 신체성이나 현장의 살아 숨 쉬는  구체성을 관념화시키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쉬던 활어가 냉장 또는 냉동되면서 죽은 물고기가 되듯이 살아 숨 쉬던 현장의 구체적인 생어(生語)가 추상화를 통해 관념적 개념으로 탄생되면서 현장성이 실종되고 사어(死語)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육체성으로 일상에서 살아가는 구체성을 담아내는 안간힘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이 휘두른 추상적 권력의지에 함몰되는 안타까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개념이 관념으로 전락하지 않고 나의 신념으로 용솟음치기 위해서는 특정 개념을 실제 문제 상황에 적용하면서 부딪쳐보는 신체적 질감이 필요하다. 신체적 질감만이 나의 신념이 담긴 자기만의 언어로 사유체계를 건축하는 가장 소중한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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