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이론은 자신의 삶을 사랑할 때 주인으로 거듭나는 이론이다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세계에 대해서 말한 것도 다정함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113-114 쪽 쪽). 김연수의 《너무 많은 여름이》에 나오는 말이다. 이유 없는 다정함으로 현실 너머 또는 밑바닥을 관찰할 때 뜻밖의 통찰이 선물로 다가온다. 자기만의 인생이론도 마찬가지다. 타성에 젖은 눈과 관성의 늪에 갇힌 자세로는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상식에 매몰되어 살아가다 식상해진 시각으로는 반복되는 일상은 지루한 습관일 뿐이다.
자기만의 성공이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겪었던 경험도 다른 관점에서 이유 없이 다정하게 바라볼 때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깨달음도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당구공 만나듯 만났던 사람과의 관계도 이유 없는 관심과 다정함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저마다의 사연과 사유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악전고투를 경험하고 있는 이면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유 없는 다정함으로 내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면 보살펴야 되는 대상이나 사람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저마다의 사연과 사유를 품고 있는 이야기로 엮이기 시작한다. 아무런 관계없이 발생했던 현상도 그걸 움직이는 구조적 동인이 밝혀지고 산만하게 다가왔던 데이터도 일정한 관계로 구조화되면서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생기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이론은 ‘궁지’에서 ‘경지’로 이르는 길을 개척할 때 일어나는 ‘긍지’의 증표다
소설가 김연수의 ‘이유 없는 다정함’은 시인 이원이 《시를 위한 사전》에서 시인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시인은 별 걸 다 걱정하는 사람이지요. 예감으로 먼저 마중 나가고, 다 돌아가고 난 뒤에도 혼자 남아 배웅하는 사람이지요”(27쪽).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은 이유 없는 다정함으로 남들이 지나친 익숙한 일상에 다가서서 평범한 모습의 이면을 파고들어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을 가꾼다. 난처한 상황에 처해도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려고 하기보다 이질적 접속으로 생긴 곤란함 속에서도 정답을 찾아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기보다 문제 상황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지며 궁지에서 경지에 이르는 지난한 길을 모색한다. 폭염의 열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마솥보다 들끓는 아스팔트 바닥을 뚫고 싹을 틔워 불가능한 어려움 속에서도 줄기차게 솟아오르는 식물의 희망에서 시인은 걱정도 하지만 예감으로 미지의 결과에 대해 근거 없는 확신을 부른다.
지금 여기서는 복잡하게 얽힌 난제들의 지옥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감이 나타나 ‘예감의 실타래’를 풀어낼 것이라는 미신에 가까운 확신으로 밀고 나간다. 궁지에 몰린 곤란함이 경지에 이르는 길로 안내해 주며 마침내 성숙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세상의 쓸모를 찾아 열심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꾸미기보다 세상이 버린 쓸모없음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쓸모를 찾아 가꾸는 일에 전력투구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을 걱정하면서도 어떤 일의 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은 행복하게 모든 순간을 즐길 수 있다고 예감한다.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은 전후좌우를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관점(觀點)’보다 몸이 반응하며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감점(感點)’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은 늘 낯선 곳으로 향하는 관문으로 자기 몸을 던져 우연과 마주치는 순간을 만끽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우연이다. 우연은 ‘현실의 생산점’이다”(103쪽). 키코와 이소노 마호의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중에 나오는 말이다. 모르는 세계에 잠입하는 순간 모르는 현상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저것은 무엇일까? 언제부터 저기 저렇게 서 있는 것일까? 무슨 사연과 배경을 품고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을까? 모르는 세계는 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모르는 세계는 모르는 단어가 가리고 있다. 그 단어를 알아내면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세계도 베일을 벗고 신비한 세계를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자기만이 이론은 기존 언어로 누렸던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고 낯선 세계와 만나 이루어지는 모든 순간적 경험을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비로소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지루한 지성이 느닷없는 야성의 시비에 걸려 절룩거릴 때 탄생되는 이론이다.
모루 위의 달궈진 철강이 망치로 두드려 맞는 고통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스로 항복을 선언하며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자기 변신의 과정에서 철강은 더 강력한 제3의 자기로 탄생되듯, 자기만의 이론도 타성에 젖은 언어를 혹한의 눈보라에 노출시켰다 예고 없이 폭염 뒤에 쏟아지는 소나기에 맨몸을 드러낸 채 관성과 관습의 때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탄생된다. 자기만의 이론은 자기만의 속도로 걸어가면서 빗방울의 하소연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은 경청의 기록물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쉼표의 연주자가 사연의 뒤안길을 걸으며 가랑잎의 괴로움과 나뭇잎의 불안감에도 한 눈 팔지 않고 뛰는 심장으로 바라보며 받아쓴 서늘한 감동의 산물이다. 자기만의 이론에는 곤경이 풍경으로 바뀌면서 몸부림친 얼룩이 무늬로 바뀐 발상의 고독과 연상의 고뇌가 숨어 있다.
자기만의 이론은 밤하늘의 북두칠성이자 이정표로 안내해 주는 지남철이다
자기만의 이론을 갖게 되면 절망의 도화선을 끊어버릴 수 있다. 도화선에 붙은 불은 잠재우기 어렵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종착역을 행해 불길이 내달리기 때문이다. 절망의 도화선도 정말 끊어내기 어렵다. 절망이 도화선을 타고 광란의 몸짓으로 내달리기 시작할 때 부정적인 생각의 연결고리라 자가발전하면서 무한궤도로 질주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절망의 뒤안길에서 강력한 욕망의 불길이 순식간에 절망을 집어삼키며 갈 길을 막아서는 힘이 바로 자기만의 이론에서 나온다. 자기만의 이론은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서 말하는 ‘고집스러운 기쁨’이기 때문이다. 고집스러운 기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종류를 바꾸는 용기다. 사방 천지 절망의 그림자가 엄습할 때 부정적 기운을 차단하고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위기 속에서도 앞이나 뒤에서만 문을 찾지 않고 옆으로 가면 새로운 문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진퇴양난의 위기는 없다.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면 옆으로 가면 된다. 옆문도 있다는 사실은 벽에 질문을 던져 문으로 뒤바꾸는 가능성을 믿는 희망과 용기에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자기만의 이론은 절망의 절벽에서도 새벽에 맞이하는 개벽의 서늘한 용기를 샘솟게 만드는 위독한 위대함이다. 자기만의 이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삶의 위기도 다른 사람에 비해 어렵지 않게 극복하면서 내공(內功)을 쌓고 내성(耐性)을 기를 수 있는 이유다.
자기만의 이론이란 세상이 변하고 시류가 바뀌어도 흔들리되 뿌리째 뽑히지 않고 자기중심을 잡고 묵묵히 걸어가는 길을 밝혀주는 밤하늘의 북두칠성이자 힘들 때 의지해도 받쳐주는 든든히 버팀목이며, 긴장하며 떨고 있어도 마침내 진북을 가리키는 지남철이다. 북두칠성은 어두운 밤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다. 버팀목은 힘들 때 의지해서 다시 세상을 향해 힘찬 걸음 내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원군이다.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손 내밀어주는 사람의 따듯한 위로는 위기를 극복하는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의지(依地)할 대상이 밖에 있을 때 나는 스스로 의지(意志)를 불태우기 힘들다. 자기만의 이론이 밖의 좋은 이야 가나 사고 싶은 구매욕망을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유혹의 손길을 물리치고 자기중심을 잡아가기 위해서 사람이 갖추어야 필수적인 무기가 되는 이유다. 자기만의 이론은 영감의 버팀목이자 시련과 역경을 뒤집어 걸림돌도 디딤돌로 바꾸는 내 인생의 동반자다. 지남철은 긴장감으로 떨다가 마침내 진북을 포착했을 때 흔들림을 멈추고 목적지로 향하는 결단의 칼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세상의 좋은 이야기보다 북두칠성을 이정표 삼아 험난한 길을 걸어갈 때 버팀목이 되어주는 든든한 나의 지원군이자 딜레마 상황에도 흔들리되 동요하지 않고 결연한 각오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이야기로 구축한 신념과 가치관의 결정체다.
자기만의 이론은 일상의 신비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의 변주다
자기만의 이론이란 일상의 작은 신비를 먹고 산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무겁고 힘든 몸을 이끌고 버스에 몸을 싣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등에 담긴 삶의 고단함이 일상의 신비다. 얼어붙은 새벽 출근길이 먹고사는 괴로움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게 새벽어둠과 추위를 뚫고 전진하는 버스의 대견함이 일상의 신비다. 나를 기다리던 신발장의 신발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간택당해 신고 나왔지만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할 우비 하나 없이 질퍽한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발길이 일상의 신비다. 아무리 위대한 신비라고 해도 맹목적으로 신봉하지 않고 사소함이 품은 경이로운 의미의 기적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경시나 경멸보다 삼라만상을 무불경(無不敬)의 자세로 배우려는 겸손함이 일상의 작은 신비다.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피해 자세를 낮추고 낮은 포복 자세로 엎드려 있는 풀 한 포기의 지혜가 일상의 신비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꽃샘추위에도 흔들리며 위태로운 자세를 취해도 뿌리째 뽑히지 않고 자신을 괴롭히는 생존의 적을 뿌리치며 꽃샘추위를 꽃세움으로 바꿔 치는 꽃들의 임기응변력이 일상의 신비다. 한겨울의 혹한의 추위에도 군말하지 않고 나목으로 버티며 때가 되면 새싹을 틔우는 나무의 기적이 일상의 신비다. 겨울준비를 위해 다람쥐가 물어다 숨긴 도토리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해 이듬해 신갈나무 숲을 이루는 터전이 된다는 사실이 일상의 신비다.
자기만의 이론은 깨달음의 변주가 낳은 자식이고, 깨우침의 겸손이 계속 변화시켜 나가는 역동적인 흐름이다. 한 번 구축된 이론이라고 해서 정체된 된 명사 상태로 머무르는 게 아니라 주어진 현실이나 현상에 대한 깨달음이 추가될수록 더 업그레이드되는 이론으로 재탄생한다. 자기만의 이론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더 낮게 세상을 들여다보며 자기중심을 잡아가는 이론을 업데이트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완벽보다 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부단한 깨우침을 얻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자기만의 이론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 여기서는 일리 있는 이론이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먹히지 않는 무리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상황에 몸을 던져 수시로 다가오는 시험무대 위에서 이론적 신뢰성과 타당성을 단련하는 기회를 갖고 내가 주장하는 이론적 관점이나 주장도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을 가정한다. 비판적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아직 간파하지 못한 이론적 한계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는 제안을 수용하고 수정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먼저 주장하고 제안하기보다 자세를 낮추고 들으면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간파하려고 노력할 때 자기만의 이론은 자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른 자기에게도 자기다움을 실현하는 중요한 촉발점을 제공할 수 있다.
자기만의 이론은 울분과 격정을 냉정으로 다스려 숙성시킨 온정의 금자탑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굶주림의 항거이자 아우성의 정열이 피와 눈물과 땀을 만나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남의 이론에 무임승차해서 편집한 짜깁기의 산물이 아니라 배고픈 가난함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참아내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꿈의 목적지에 이를 때 소리 높여 외친 조용한 아우성의 산물이다. 자기만의 이론에는 몸부림의 끈기와 안간힘의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는 이유다. 자기만의 이론은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이 축적되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태어난 시간의 두께다. 자기만의 이론에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지나갔던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관통하며 남아있는 추억의 그림자를 소생시켜 직조된 마주침의 기적이다. 우발적 만남이 준 경이로운 순간도 놓치지 않고 붙잡아 메모하고 기록으로 정리되면서 생긴 삶의 흔적의 산물이다. 흔적은 목적을 만나 축적되는 순간 어느 사이 기적이 일어나는 씨앗이다. 흔적에 담긴 의미의 두께를 해석하는 과정은 배움이 멈추지 않는 한 계속되는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필수적인 통로다.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은 한 끼 밥을 먹더라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수저질에서도 강한 회의를 품고 어제와 다른 감각으로 수저에 잡히는 음식물의 출처를 따라가 본다. 쌀 한 톨에 숨겨진 농부의 땀방울과 봄부터 가을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맞은 이른 봄의 꽃샘추위, 여름날의 천둥과 번개, 가을날의 느닷없는 소나기를 생각하는 과정적 사유에 깊이 빠져든다.
자기만의 이론은 수동적으로 사고(事故)당한 경험을 능동적으로 사고(思考)한 산물이다. 세상과 부대끼면서 생각지도 못한 마주침으로 다가온 놀라운 깨달음과 황당한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온몸으로 끌어안고 그것의 의미를 파고들어 해석한 사유노동의 부산물로 생긴 게 자기만의 이론이다. 김명인의 ‘내일’이라는 시에 나오는 “어둠을 접붙이는 용접공의 불꽃”처럼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음지와 양지, 절망과 희망, 밑바닥과 정상, 성공과 실패, 걸림돌과 디딤돌, 오르막과 내리막, 전경과 배경, 경계를 통해 구분된 양극단의 경지에서 경계를 관계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탄생하는 애쓰기의 달인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자기 분야에 갇혀 사는 좌정관천의 한계와 문제점에 안주하는 과정에서는 절대로 탄생되지 않는다. 그런 자기만의 이론은 아집과 독선, 자만과 교만의 극치를 달리면서 이유 없는 관심보다 이유 있는 사심(蛇心)으로 뭉쳐져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악한 교리로 전락한다. 자기만의 이론은 불에 저항한 만큼 물이 따듯해지듯 세상의 비리에 눈감지 않고 자기만의 일리로 진리를 전하려는 역행의 산물이자 몸이 토해내는 울분과 격정을 냉정으로 다스려 숙성시킨 온정의 금자탑이다.
자기만의 이론은 조용하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앞으로 갈 길을 알려주는 좌표다
자기만의 이론은 살갗을 파고드는 언어로 구축된다. 폐부를 찌르고 살갗을 파고들며 전율하는 감동을 주는 언어는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편집한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몸을 던져 시궁창에서 건져 올린 몸의 언어다. 몸의 언어에는 그 사람의 땀과 피눈물이 담겨 있다. 무거운 체중이 언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듣는 순간 머리로 가지 않고 심장에 꽂힌다. 그래서 머리의 언어는 머리를 공략해서 골치 아프게 만들지만 몸의 언어는 심장에 의미를 꽂아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언어는 살갗이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언어로 문지른다. 마치 손가락 대신에 말이란 걸 갖고 있다는 듯이, 또 내 말끝에 손가락이라도 달려 있기라도 하듯이, 내 언어는 욕망으로 전율한다”(110쪽).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의 아무리 올바른 진리도 내 몸을 관통한 경험이 없으면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을 줄 수 없다. 소설가 양귀자가 《모순》에서 내 삶의 부피는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라고 하면서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15쪽)라는 반성을 한다. 자기만의 이론은 내가 일구는 내 삶의 텃밭에 경작되는 수확물이다. 삶의 부피가 보잘것없으면 겨자씨 하나도 틔울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질 것이다.
인생은 자기가 해석한 만큼 해답이 생기고, 그런 해답이 축적되면 난제를 풀어내는 해법을 체득하면서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기반을 마련한다. 해석체계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하고 확장하려면 모진 삶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온 기반을 뒤흔드는 슬픔과 아픔의 언어로 번역해 보고 기쁨과 즐거움의 언어로도 재음미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해봤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당시의 정황을 꼼꼼히 따져보면서 내가 느끼면서 몸으로 반응했던 감각적 깨달음의 흔적을 다시 캐보기도 하면서 만약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어떤 역전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상상의 날개도 펼쳐본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상상하며 만약(萬若)이라는 약을 먹어본다. 하지만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암담함과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막막함 사이에서 끈기보다 끊기로 단절할 수밖에 없는 사이에서 다시 용기를 내보려고 몸부림을 칠 때, 자기만의 이론은 한 줄기 서광을 선물로 가져온다. 간신히 이어졌던 과거와의 끈을 끈기로 버티기보다 낯선 세계로 가는 끈을 잡고 이전 끈을 끊어버리는 용기도 자기만의 이론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 발휘된다. 무턱대고 앞만 보고 ‘정진’하는 것보다 때로는 멈춰 서서 ‘정지’할 때 자기만의 이론은 조용하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앞으로 갈 길을 알려주는 좌표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아가면 생각지도 못한 낯선 세상에서 모르는 세계가 나를 반기면서 또 다른 출발을 모색하며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