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노동, 작업, 행위에 비추어 본 자기 계발의 진정한 의미
자기 계발은 독립적 활동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협력적 관계형성 작업이다.
한나 아렌트의 노동, 작업, 행위에 비추어 본 자기 계발의 진정한 의미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새롭게 태어남으로 인해 누구든 이 세상에서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삶을 시작한다는 ‘탄생성(nat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탄생성은 다시 엄마의 도움을 받아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 제1의 탄생과 말과 행위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새로움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동체에 참여하는 제2의 탄생으로 구분된다. 제1의 탄생이 태어났다는 사실로서의 한 인간의 고유한 존재론적 특성을 강조하는 사실적 탄생이라면 제2의 탄생은 나의 새로움을 간직한 채 또 다른 새로움이 존재하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미덕을 배우는 정치적 탄생이라고 볼 수 있다. 1차적 탄생이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데 반해 2차적 탄생은 한 생명이 살아있는 한 사멸되기까지 끊임없이 재탄생되는 연속적 사건이다.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도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다름을 지니지만, 살아가면서도 어느 누구의 삶과도 닮은 점이 없는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간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어 정체되는 특성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지속적 탄생을 무한 거듭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 역동적 과정으로서의 특성이다. 이런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탄생성은 정체된 명사가 아니라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는 역동적 동사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 가지 활동(praxis)이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색다른 존재이유나 가치를 드러낸다고 한다. 그녀는 인간의 본질을 ‘정신’에서 찾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양식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탐색하는 과정에서 세 가지 양태인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에서 찾고 있다.
고립적 노동과 작업을 넘어 협력적 행위를 통한 공동체 건설
아렌트에 의하면 노동(labor)은 인간의 ‘생명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신체적이고 생물학적인 활동으로서, 사적영역에 속한 활동이다. 노동은 인간의 생명성을 보존하고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수행하는 지극히 기초적이고 필수적이며 개인적인 활동이다. 한 마디로 노동은 생존 수단을 확보하기 위한 의식적 작용이다. 노동은 노동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사회와의 연관성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자체에만 매몰될 때 자기 개인의 삶의 유지에만 집착함으로써 필요의 충족에만 사로 잡힐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한나 아렌트가 결과적으로 노동에만 집착하는 개인은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이유다. 노동은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대상물을 생산하는 ‘생존’ 차원의 필수적인 일이다. 노동은 생물학적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명체가 살아있는 한 반복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노동의 태생적 한계는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지만 노동으로 생산되는 산물은 지속되지 못하고 찰나적이고 순간적이라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노동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연속적인 과정이라서 살아있는 한 벗어나기 어렵다.
이에 반해 작업(work)은 먹고살기 위한 노동의 차원을 넘어서 세상에 의미 있는 무엇을 만드는 활동(making)을 통해 후세에 남겨두고 싶어서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확인받기 위해 제작하는 일이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고 생명의 유한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재료를 기반으로 뭔가를 만들어보려는 제작이나 창작 욕구를 기반으로 살아가려는 꿈이 있다. 작업은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쟁취하려는 노동과 달리 자신의 고유함을 세상에 드러내고 후세에 남기는 ‘생활’을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만들어 ‘사용’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학문적 탐구나 예술적 창작활동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적인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노동과 달리 작업은 인공적인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음으써 나와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만날 수 있는 공적 세계를 열어가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작업이 먹고사는 노동의 한계를 넘어섰지만 제작활동 자체는 세계와 단절된 공간에서 뭔가 유용한 대상을 창작할 목적을 지닌 채 외롭게 이루어지는 장인의 고립된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한계를 지닌다. 먹고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이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유용한 인공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와의 연계를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독립적인 노동이나 작업을 통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역학이 만들어가는 관계망 속에서 움직인다. 한나 아렌트가 이 시점에서 고민한 화두는 인간이 평생 누리고 살아야 할 ‘좋은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인지를 근본적으로 물어보는 일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좋은 삶’이란 먹고사는 생존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독특성이나 탁월성을 자기만의 말과 행위를 통하여 타인에게 드러냄으로써 새로움과 새로움이 소통하며 서로 배우고 공존하는 것과 관계된 활동양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action)’란 사회적 동물인 사람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독특한 차이와 고유한 개성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이 지닌 색다름과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관계지향 활동을 말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주장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정치적인 활동이나 각종 시민단체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미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실존적 활동이다. 한나 아렌트는 행위라는 개념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이루어지던 공동의 정치적 활동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적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노동이나 작업과 다르게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말과 행위는 다른 사람을 전제로 펼쳐지는 관계적 사건이다.
독립적 자기 계발의 신화는 이제 신화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한나 아렌트의 철학을 이어받고 있는 독일의 철학자 마스켈라인(Masschelein)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이처럼 자기다움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말과 행위를 통해 타자와 함께 존재하는 ‘사이 존재’다. 모든 존재는 탄생하는 순간 나의 다름과 전혀 다른 낯선 타자들과의 관계성 속으로 들어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주인공이다. 만약 인간에게 이런 말과 행위가 없다면, 즉 저마다의 인간의 고유함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말이나 나와 다른 타자와 부단히 상호작용하면서 의미를 주고받는 실존적 행위가 없다면 한나 아렌트는 “세계에 대해서 죽은 삶”이라고 여겼다. 소비재를 생산하는 ‘노동’과 뭔가 제작해서 사물을 만드는 고립된 ‘작업’과 다르게 ‘행위’는 나와 다른 생각으로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과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 구축과정이다. 이러한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행위하는 ‘사이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낯선 마주침을 통해 어제와 다른 나로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며 재탄생되는 존재다.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인 인간은 고유한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만의 언어사용과 행위를 통해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행위하는 사이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쌓은 모든 전문성도 고립된 노동이나 작업의 산물이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는 다른 사람과의 부단한 만남을 통해 생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을 ‘노동’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 쌓은 전문성을 통해 먹고살기 위한 생존차원의 지식과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지속성이나 영속성을 띄지 못하고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사는 데 급급해진다. ‘작업’으로 자기 계발을 바라보는 사람은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 후세를 위해 뭔가를 남기려는 의미 있는 창작활동을 전개한다. 자기 삶을 불멸화시키기 위해 예술작품이나 저작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경우가 작업으로서의 자기 계발이다. 하지만 작업 역시 세상과 단절된 고립된 공간에서 자기다움을 드러내려는 작품활동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미덕보다 자기다움의 독창성을 알리는데 급급할 것이다. ‘작업’으로서의 자기 계발을 통해 체득되는 전문성은 자신의 외로운 노력을 통해 생기는 개별적 인간의 독립적 산물이다. 뭔가 일어나지 않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원은 주로 한 사람의 개인적 의지나 능력 부족으로 돌린다. 일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한 개인의 게으름이나 나태하고 안이한 자세와 태도로 귀속시킨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유혹해 온 많은 자기 계발 노력은 주로 ‘작업’으로서의 자기 계발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성취한 결과는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외로운 노동이나 자기다움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독립적 작업의 산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전문성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 관여되는 수많은 변수들의 우발적 마주침이나 다양한 사람들과의 생각지도 못한 만남의 과정에서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이점이 바로 ‘행위’로서 바라보는 자기 계발의 접근이다. 모든 성취는 연기설에 따르면 수많은 인연의 합작품이다. 세상은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복잡한 인연의 세계가 연결되어 돌아가는 연기(緣起)의 세계다. 한 가지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단선적 인과관계로 사회현상은 설명되지도 않고 오히려 설명하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세상은 왜곡되고 오해될 뿐이다. 세상은 복잡한 원인과 조건이 예측할 수 없는 관계를 맺어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복잡계 천국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전문성은 진공관에서 한 개인의 독립적이고 고립된 노력을 통해서 형성된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전문성은 당사자는 물론 나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직간접적인 모든 다른 행위자와의 부단한 만남과 충돌로 빚어지는 사회-역사적 합작품이다. 나아가 전문성은 독립적 실체나 정체된 명사로서의 완성품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부단히 만들어내는 역동적 과정이나 동사로서의 미완성 작품일 뿐이다. 이제 독립적 노력을 촉구해서 뭔가를 성취하라고 동기를 부여하는 자기 계발의 신화는 이제 신화 속으로 보내야 한다.
당신은 단 한 번만이라도 어른이 되어본 적이 있나요?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한 가지 기준을 알고 있나요?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부분의 어른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쉽게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의 수준 차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생각의 수준 차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혹자는 생각의 깊이와 넓이의 차이라고 대답한다. 어린이는 아무래도 보고 듣고 경험한 이력이 별로 없으니 생각의 깊이와 넓이도 어른에 비해 미천하고 시야가 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지만 어른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게 차이점의 핵심에 해당한다.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의 깊이와 넓이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복합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조급하게 우왕좌왕하느냐 아니면 문제의 본질이나 사안을 다각적으로 생각하면서 최상의 대안을 모색하느냐의 차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다 맞는 말이지만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 작업, 행위에 비추어 볼 때 자기중심적으로 일하는 노동하는 인간과 작업하는 인간이 어린이에 가까울 확률이 높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 다운 언어를 표현하며 행위하는 인간이 어른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곤란한 성숙》이라는 책을 쓰는 우치다 타츠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어린이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우치다 타츠루의 《곤란한 성숙》에는 우선 사람이 태어나서 해야 되는 세 가지 일, 즉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각각을 영어로 표현하면 should(당위), would like(희망), can(가능)이라는 조동사의 차이로 구분된다. 당위, 희망, 가능은 한나 아렌트가 인간적 삶의 조건으로 내세운 노동, 작업,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어쩔 수 없이 필수적으로 해야 되는 노동은 당위적인 일이고, 자신의 고유함을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하는 작업은 해보고 싶은 희망에 해당되며, 타자와의 부단한 소통과 행위를 통해 관계 속에서 공동체를 구축하는 행위는 가능과 각각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우치다 타츠루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어린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른이다. 그렇다면 왜 당위와 희망 사항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린이고, 가능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른 일가? 한 마디로 말하면 당위와 희망 사항 중심, 즉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타인의 동의나 승인 없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개인적인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타인의 승인이나 참여 없이 결정할 수 없는 공공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일 중에서 앞의 두 가지 일, 즉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어린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의미도 같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 ‘나는 오늘 3시간 책을 읽어야 한다’, ‘나는 오늘 새벽 운동을 해야 한다’ 등과 같은 당위론적 주장은 혼자 결심하고 행동하면 되는 일이다. 그 일을 하지 않아도 자기반성 여부와 관계없이 타자의 비판이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개인의 양심 차원에서 죄책감을 느낄 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하고 싶은 일’, 예를 들면 ‘나는 저녁에 떡볶이를 먹고 싶다’, ‘나는 오늘 친구를 만나고 싶다’, ‘나는 갑자기 제주도에 가고 싶다’ 등과 같은 개인의 희망사항도 혼자 판단하고 행동에 옮기면 된다. 개인의 희망 사항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서 말을 건네도 상대방의 반응은 ‘아 그렇습니까?’ 정도에 지칠 뿐 그것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타자가 욕망하는 사항에 대해 왈가왈부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처럼 ‘해야 한다’는 당위가 ‘자기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달성하는 것’이고, ‘하고 싶다’는 희망이 지향하는 바는 지향하는 방향은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충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주장한다.
어른은 타자의 요청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에 반해서 ‘할 수 있다’는 가능은 내가 어떤 능력을 보유하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나의 능력을 누군가 필요로 하고 그것이 결핍되어 사람이 요구할 때 나의 능력은 비로소 쓸모가 생기는 것이다. 타자의 기대가 없는 곳에서 나의 능력은 혼자 할 수 있지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필요성이 요구, 기대나 갈망, 결핍이나 결여가 먼저 있고 그걸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앞의 두 가지 당위와 희망하는 일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지닌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휘되는 자기 완결적인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은 타자 지향적인 차원에서 비로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일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선은 바로 자기 완결적인 일에 몰두하느냐 아니면 타자 지향적인 공적인 일에 몰입하느냐의 차이에 놓여 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한다’ 또는 ‘아침 6시에 일어나고 싶다’는 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침 6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듣는 사람이 없으면 무의미한 독백에 지나지 않는 이유다.
‘… 을 할 수 있다’는 가능의 말은 그 행위를 요청하는 타자가 없으면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을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어린이와 어른의 근본적인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어린이는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혼잣말로 중얼거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의 일, 즉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는 철저하게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사회의 필요나 요청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언어화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말한다. 첫째, 타자가 있어야 한다. 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의 능력도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둘째, 타자의 결여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사항이 있어야 한다. 그냥 타자가 결핍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뭔가 부족해도 그것이 채워지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면 나의 능력은 역시 무용지물이 된다. 셋째, 타자의 결여를 충족시킬 사람이 나라고 존재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타자의 결여가 존재하고 그것이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어도 그 결여를 충족시킬 적확한 능력을 내가 갖고 있지 않고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면 이 역시 무용지물이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는 인간과 인간이 인간적으로 만나는 인간의 사회가 시작된다.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자기의 당위와 욕망만 갈구할 때, 그 사회에는 어른은 없고 어린이만 살아가는 미성숙한 사회다.
어른이 존재하는 사회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람직한 사회다. 어른이 존재하는 사회라야 어린이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소외된 곳에서 불안함과 더불어 살아가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 나의 존재는 이런 타자와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이유가 드러나는 법이다. 나도 힘든 상황에서 결여나 결핍을 참고 견디면서 살아는 타자를 가슴으로 느낄 때 내가 갖고 있는 보잘것없는 능력도 비로소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면서 빛을 발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먼저 있고,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순서가 거꾸로다. 먼저가 타자가 불안한 고립과 불확실한 미래 상황과 직면해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 있고,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손길을 내밀어 줄 때, 비로소 어른은 존재 이유가 드러나는 법이다. 결여나 결핍이 먼저 있고, 나의 등장은 나중이라는 게 우치다 타츠루의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적인 주장이자 메시지다. 사회 곳곳에서 저마다 다른 입장과 상황에서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타자의 부름이 먼저 있고,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절묘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나의 할 수 있는 능력은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도움의 손길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
2천 편의 러시아 민화를 수집 분석해서 쓴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 형태론》에 보면 모든 민화가 31개의 설화 구조가 기능별로 나눠져 있고 7종류의 등장인물로 구성되어 있는 주장을 만날 수 있다. 7가지 등장인물에는 주인공 (hero), 악당(villain), 후원자(doner), 조력자(helper), 공주나 찾아내어야 할 것,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princess or prize, and her father), 파견자(dispatcher), 그리고 가짜 주인공(false hero)이다. 31가지 민화가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는 약간의 차이와 변형이 있지만 가족의 누눈가가 사라지든지 어떤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시작되는 공통점이다. 사라진 가족을 찾기 위해 남은 가족들은 안간힘을 쓰며 비탄에 잠겨 있는 가운데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주인공이다. 우치다 타츠루가 《곤란한 성숙》에서 말하는 결여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른의 역할과 일맥상통한다. 주인공의 등장과 더불어 후원자나 조력자의 마법과 같은 도움을 받아 수렁에 빠진 가족의 위험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면으로 절정에 달하면서 서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민화의 서사 구조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결핍이나 결여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타자를 만났을 때 망설이지 말고 발 벗고 나서서 간청에 응할 때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은 타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공동체의 소중한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기본 조건이 되는 셈이다.
《곤란한 성숙》의 책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성숙은 곤란한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는 순간을 일정 기간 반복하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생긴다. 성숙에 이르는 길은 지름길도 매뉴얼도 가이드라인도 없다. 성숙에 이르는 효율적인 처방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치타 타츠루는 자신의 책에서 성숙은 곧 몸에 익은 경험 지나 실천지의 깊이와 두께에 비례한다고 말한다. “인생을 하루하루 담담하게 보내는 사이에 자식으로, 친구로, 배우자로, 부모로 각자의 처지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주고받으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몸에 익은 경험지, 실천지의 깊이와 두께가 곧 성숙‘일 것입니다”(13쪽). 성숙을 뒤집으면 숙성이 된다. 성숙에 이루는 유일한 길은 숙성을 통과하는 일이다. 숙성을 효율적으로 완성하는 처방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참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흐름을 각인시키는 일뿐이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숙하는 길도 숙성을 통과하는 길 밖에 없다. 내가 ’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진하던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나 나의 능력으로 뭔가를 함으로써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어린아이는 어른으로 변신하는 성숙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불안감은 늘 엄습하고 불편함은 친구처럼 상존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에 나아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견디는 일이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견딤의 결이다. 견딤의 길이가 쓰임의 크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타자를 위해 적기에 할 수 있을 때 하나의 공동체를 조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나보다 힘겨운 위치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는 사람을 보고도 ‘나는 오늘 ’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은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내 삶의 중심에 위치한 나머지 우연히 마주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목격하고도 지나치는 사람은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의 또 다른 유형이다. 나는 내가 ’ 해야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적확한 상황에서 해낼 때 존재가치 빛나는 법이다. 나 역시 평범한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고 세상의 모든 결여나 결핍 상황을 해소하거나 충족시켜 줄 만능의 능력자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극히 한정적이다. 다만 나 역시 다른 타자와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관계 맺음을 통제하고 조율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꾸준히 깨달아 갈 뿐이다. 내가 맺은 관계 덕분에 내가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은 나의 밖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나 또한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 속의 존재일 뿐이다. 도움의 손길을 줄 수도 있고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도 있는 따뜻한 관계가 단순한 접속으로 연결된 경계를 넘어 따뜻한 연대로 나아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물이 가장 낮은 바다로 모여 하늘로 솟아올라 수증기로 변신하는 희망의 연대를 이루듯 우리도 낮은 곳으로 임하여 따뜻한 손길을 주고받을 때, 나의 능력은 개인의 재능 수준을 넘어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을 가늠하는 한계도 능가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