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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드리는 기분 나쁜 조언

자기 계발서적을 읽고 철학자 들뢰즈가 고심 끝에 내뱉는 쓴 소리

공허한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철학자 들뢰즈가 드리는 기분 나쁜 조언


자기 계발에 관한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여전히 자기 계발 책도 쓰는 작가로서 자기 계발의 소중한 가치도 있음을 여전히 인정하지만 가려진 비밀도 있다. 그 비밀에는 자기 계발의 태생적 한계나 문제점이 숨어 있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드러내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이제까지 자기 계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될 이상적인 목적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거기에 이르는 최상의 방법을 처방적으로 제시해 주는 수많은 책을 읽어왔다. 이렇게 하면 나처럼 부자가 되거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하는 책이 주로 자기 계발서의 역할이나 존재이유다. 마치 플라톤 이래로 고대 중세나 근대 철학이 줄기차게 추구해 온 이상적인 목적지나 궁극적인 본질인 이데아를 상정해 놓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알려준 것처럼, 자기 계발서도 성공이나 부자가 되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전파해 왔다. 자기 계발을 통해서 우리가 도달해야 될 목적지에 변하지 않는 진리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저마다의 가능성을 품고 성공이라는 목적지의 이미지도 다를 뿐만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길도 저마다의 차이가 존재한다. 앞서 성공한 사람을 그대로 따라서 노력한다고 그 사람처럼 동일하게 성공하지 못한다. 모든 성공은 성공에 이르는 수많은 변수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회적 합작품이다.



동일한 꽃이지만 저마다의 차이를 지니고 있는 다른 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 왔던 자기 계발을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에게 물어보면 동일성의 패러다임이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이란 예를 들면 개, 돼지, 소, 고양이, 양, 호랑이의 개별적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동물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개나 돼지가 동물이라는 범주에 묶이는 순간 개나 돼지의 개별적 고유한 특성은 다 무시되고 만다. 개나 돼지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순간 개나 돼지의 종자별 고유한 특성은 부각되지 못하고 개나 돼지라는 동일성의 범주로 획일화된다. 또 하나 예를 들면 학교에 다니는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는 순간 이들은 모두가 동일한 목표를 달성해야 되는 사람이 된다. 모든 학생은 저마다의 차이를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나 잠재성의 인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목표를 달성해야 되는 학생으로 규정되는 순간, 학생마다 고유한 차이는 동일한 목표달성 기준에 의해 무시된다.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주변의 수많은 꽃들도 어제 만난 꽃이 오늘도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제와 다른 꽃으로 차이를 드러내면서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꽃이라는 동일성의 범주에 묶어버리고 꽃마다 다른 차이를 없애버리는 오류를 반복해서 범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동일성의 패러다임으로 손가락을 평가하면 다섯 손가락 중에서 오로지 어느 한 손가락만 뛰어난 재능을 갖고 나머지 손가락은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차별 대우를 받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들이 하루는 모여서 저마다 자기 자랑을 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엄지: 내가 힘이 제일 세다는 거 너희들도 알지?

검지: 나는 뭐든지 지시를 잘한다는 거 너희들도 알지?

중지: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제일 키 큰 거 알지?

약지: 결혼반지 낄 때 내 손가락에 끼운다는 거 알지?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이 조용히 말했다.

“야!, 너희들 내가 없으면 병신이라는 거 알지?


손가락마다 갖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나 장점 또는 재능을 무시하고 손가락이라는 이름으로 획일화시켜 버리거나 한 가지 평가기준으로 손가락의 재능을 평가한다면 손가락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은 이처럼 차이를 제거하거나 무시하고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이나 이상에 비추어 모든 차리를 제거하거나 삭제해 버린다. 차이는 생산력의 원천이 아니라 표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거나 제거해서 혼란을 막아야 할 부정적인 요소다.



틀린 그림은 없고 오로지 다른 그림만 존재한다


자기 계발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성공에 이르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시공간을 초월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성공의 법칙이나 원리를 따라가면 그 어떤 사람도 반드시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성공에 이르는 길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에 따르는 자기 계발은 성공에 이르는 보편타당한 단 한 가지 최적의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처방된 성공방정식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노력을 전개하는지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루앙 대성당’을 그린 인상파 화가 모네는 ‘루앙 대성당’을 대상으로 다른 관점과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다르게 그렸다. 동일성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는 자기 계발은 누군가 그린 ‘루앙 대성당’에 본질이자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될 가장 궁극적인 이데아인 셈이다. 하지만 모네가 ‘루앙 대성당’을 이전과 다른 관점과 시각,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그렸듯이 우리가 성공하는 목적지를 상상할 때도 각각 다른 이미지로 부각되는데, 그 어떤 이미지가 가장 이상적인 이데아라고 말할 수 없다. 이상적인 본질은 없다. 다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앙 대성당’의 본질이나 이데아는 없다. 다만 그리는 사람의 기분이나 관점, 시각이나 시간, 목적이나 접근방법이나 도구에 따라 다 다를 뿐이다. 모네가 다른 관점과 시각에 따라 다르게 그린 루앙 대성당의 다양한 모습을 띠는 그림은 틀린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으로 다르다. 색감도 다르고 채도나 명도도 다르고 성당의 모습도 다 다르다. 모네가 루앙 성당의 본질이나 이상적인 모습을 염두에 두고 그렸다면 단 한 장의 그림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모네는 시시 시각각 다르게 변화하는 루앙 성당의 모습을 그렸을 뿐이다. 루앙 성당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언제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그리는지에 따라서 무한한 차이를 드러내는 그림이 계속 창작될 수 있다. 다른 성당의 모습은 어떤 기준에 비추어 평가하고 판단하는지에 따라서 틀린 그림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를 뿐이다. 저마다의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따라가면 그 길이 바로 주어진 상황에서 일리에 이르는 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자기 계발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는 성공의 목적지에 대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다를 수밖에 없다. 대성당에 대한 그림 중에서 어떤 그림이 성당의 본질을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낸 그림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나 판단 근거는 없다. 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틀린 그림은 없고 오로지 다른 그림만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성당에 대한 그림은 존재하지 않게 때문이다.



차이는 추상적 개념으로 가려진 현실세계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저항이


마찬가지 맥락에서 성공에 이르는 가장 완벽한 한 가지 정답은 없다. 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와중에 다양한 변수들이 그 당시의 상황적 맥락에 맞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우발적 마주침 끝에 비로소 성공에 이른 경우다.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주장하는 핵심 메시지에 따르면 반복을 통해서 동일성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전과 다른 차이다. 기존의 자기 계발서에 따르면 이미 성공했거나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이 자기처럼 동일하게 반복하면 동일성을 반복하는 당신은 반드시 성공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일성을 반복할수록 톱니바퀴에서 대량 양산되는 공산품처럼 차별적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 획일화되고 평준화된 표준 상풍 밖에 만들어내지 못한다. 앤디 워홀이 마릴린 몬로나 모택동, 그리고 깡통 수프를 차이를 반복하면서 그렸기 때문에 저마다 차이가 드러나는 다양한 마릴린 몬로, 모택동, 그리고 깡통 수프 이미지가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다. 누군가 그린 마릴린 몬로 모택동, 그리고 깡통 그림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되는 이상적인 본질이나 이데아가 아니다. 단 하나의 이상적인 이지미가 본질이나 이데아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뿐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릴린 몬로를 그릴 수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멋진 모택동을 그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깡통 수프는 다른 사람과 굳이 동일할 필요가 없다.


들뢰즈가 이처럼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자는 의도라기보다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자는 의미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김필영, 2024). 예를 들면 사과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획일화시켜 사과를 매일 보면 사과마다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원천 봉쇄된다. 모네가 루앙성당의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의 차이에 주목했던 것처럼 사과도 한입 먹어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최대한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사과를 바라보며 사과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는 그리기를 할 때 사과는 단 하나의 이상적인 추상적 개념으로 존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사과를 진짜로 본 게 아니에요. 사과라는 것을 정말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싶어서, 대화하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로 보는 거예요.” 이창동 감독의 <시>에 나오는 대사다. 사과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나 편견은 물론 사과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포섭되는 순간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과의 구체성은 거세되고 동일한 사과만 무한 반복된다. 볼 때마다 저마다의 차이를 드러내며 사과의 진면목은 매번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묘사할 경우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차이를 포착하지 못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이르는 길만이 진리를 찾아가는 유일한 여정이며 나머지 현실 세계에 보이는 모든 모습이나 이미지는 가상이나 환상일 뿐이다. 차이는 추상적 개념으로 범주화된 세계에 가려진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일종의 저항이다.  



나무형 자기 계발을 반복할수록 자기는 사라진


지금의 나와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할 때 차이는 무한 반복되면서 그 반복이 마침내 반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낯선 환경이나 사물과의 마주침을 통해 깨우침을 얻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우리들의 사유를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나무(tree) 또는 수목형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리좀(rhizome) 형 또는 뿌리줄기형 사고다. 나무형 사고방식은 세계의 중심에는 변하지 않는 근본이 있고, 근본으로부터 모든 것이 뻗어 나와 이루어지는 위계적 사고방식이다. 반면에 리좀은 뿌리줄기처럼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언제 어디서 어떤 뿌리줄기와 만날 수 없는 수평적 연결과 우발적 접속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다. 나무형 사고방식이 중심과 변방 또는 주변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관계에서 언제나 상하 또는 주종관계로 어딘가에 종속되는 사고를 강조한다. 이에 반해 리좀형 사고는 출발과 끝, 중앙과 주변이 구분되지 않고 언제나 낯선 타자와 부단히 접속하면서 일어나는 우발적 마주침과 이를 기반으로 새롭게 재탄생되는 과정을 강조한다. 나무형 사고방식이 영원 불변하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본질은 이미 정해져 있고 오로지 발견되기만을 기다린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리좀형 사고방식은 본질은 본래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접속하는 관계에 따라 부단히 변화된다고 가정한다. 나무형 사고방식과 리좀형 사고방식에 각각 자기 계발 방식을 대입해도 동일한 차이를 드러낸다.


나무형 자기 계발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중심에 두고 그 중심에서 또 다른 존재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성장해 나가는 노력이다. 가장 이상적인 자기 계발방식이 중앙에 존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롤모델과 동일한 모습으로 변화를 거듭하는 노력이 바로 나무형 자기 계발이다. 나무형 자기 계발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 중앙에 자리를 잡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수행했던 방식이 성공방정식이니까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성공은 보장된다고 주장한다. 나무형 자기 계발은 성공한 사람이 가장 중앙에 자리 잡은 다음 그 사람을 본받으려고 동일성을 반복하는 수직적 위계구조의 산물이다. 나무형 자기 계발은 누가 성공한 사람인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된 사람은 누구인지를 존재론적으로 물어본다. 그래서 그 사람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 계발을 반복하면 언젠가 그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 된다는 가정을 갖고 있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가 반복해서 돌아가면서 불량률이 거의 없는 완벽한 동일한 제품을 대량양산하듯, 누군가 한 사람의 이상적인 성공모델이 제시되면 누구나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에 몸을 싣고 동일한 노력을 반복한다. 그렇게 하면 이상적인 성공모델처럼 자신도 될 수 있다는 가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성공한 사람이나 부자가 된 사람의 모습도 천차만별이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단 한 가지 최고의 방법이나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형 자기 계발이 반복될수록 차이는 양산되지 않고 자기는 실종된다.



낯선 사건과의 우발적 마주침이 깨우침을 낳는


같음의 세계는 다름과 차이를 제거한 추상화된 관념적 세계에 불과하다. 현실은 다름과 차이의 텃밭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차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무한 변신의 세계다. 예를 들면 남들처럼 성공한 싶은 A라는 사람이 이미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B를 만나 B처럼 살고 싶은 A가 되는 것은 동일성을 반복하는 ‘나무형 자기 계발’인 셈이다. 하지만 성공을 꿈꾸는 A가 이미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B를 만나 어제의 A와 다른 A'이 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성공한 C를 만나 A''이 되는 여정을 따라가는 자기 계발이 바로 차이를 생성하는 ‘리좀형 자기 계발’이다. ‘리좀형 자기 계발’은 독립적 개체의 무한한 노력보다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존재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리좀은 나무가 땅속에서 줄기를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땅속줄기는 언제 어디서 어떤 뿌리와 접속할지 전혀 알 수 없다. 존재의 본질은 그래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접속하는지에 따라 다른 존재로 부단히 거듭난다. 자기 계발을 통해 변신을 거듭하는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이 이데아처럼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접속하는지에 따라 부단히 모습을 바꿔나갈 뿐이다. 마치 종이의 본질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종이에 문제가 진술되고 정답을 요구하면 시험지가 되고, 자신이 원하는 해답을 마음대로 쓰면 편지지가 되는 것처럼 존재의 본질은 그 자체로 이미 결정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와 어떤 방식으로 접속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단히 차이를 반복할 뿐이다.


만약 부단히 자기 계발을 모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하지 못하고 남들과 동일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면, 이런 자기 계발은 진정한 의미의 자아창조나 재서술을 통한 자기 변신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한 마디로 어제와 다른 차이를 만들지 못하는 자기 계발을 반복할수록 자아는 재창조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동일한 사람으로 바뀌어가는 동일성의 패러다임에 갇히게 된다. 같음을 반복해서 생산하는 자기 계발은 들뢰즈에 따르면 반복의 이유를 상실한 노력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따르면 오로지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는 주장이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같음의 범주로 묶어버릴 수 없는 저마다의 고유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즉 같음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 같음을 반복할 수 없다.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에 따르면 같음이 반복되면 기호가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기호는 낯선 마주침으로 생기는 해석되지 않는 의미다. 우연한 마주침으로 생기는 낯선 기호는 우리로 하여금 이전과 다른 해석을 요구하며, 해석과정에서 낯선 생각이 잉태된다. 들뢰즈가 말하는 낯선 환경과의 우발적 마주침이 바로 사건이다. 사건은 결국 같음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 생산하는 비자발적 산물이다. 대체 불가능하며 반복이 불가능한 사건은 언제나 낯선 기호를 내뿜는다. 그 기호는 언제나 차이를 품고 있다.



욕망을 추구하는 자기 계발만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는다


지금까지 책을 100권 가까이 쓰거나 번역했지만 책 쓰기라는 추상적 범주로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을 다 표준화시켜 한 권의 매뉴얼로 만들 수 없다. 똑같은 서적이나 도서라는 추상적 개념에도 불구하고 서적이나 도서에 담긴 저자의 문제의식, 독자에게 전해주고 싶은 핵심 메시지, 책을 쓰는 과정에서 생각하며 느끼고 깨달은 교훈, 책을 쓰면서 만났던 장애물이나 난관, 그리고 그걸 극복하면서 마침내 한 권의 책을 탈고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움은 모두 다르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을 내는 저술은 쓰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호를 내뿜는 사건이다. 동일한 사건을 반복할 수 없듯이 동일한 책 쓰기는 반복되지 않는다. 오로지 어제와 다른 책 쓰기의 차이가 반복될 뿐이다. 앤디 워홀이 마릴린 몬로나 모택동이라는 동일한 인물을 반복해서 그렸지만 그릴 때마다 미묘한 차이를 가져오는 것도 마찬가지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우리는 영원히 같음을 반복할 수 없다. 현실의 본래 모습은 모두 ‘차이 그 자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게 들뢰즈의 주장이다. 그 차이 그 자체를 드러내는 노력이 바로 반복이다. 반복해서 특정 인물을 그리다 보면 미묘한 차이가 발생하고, 반복해서 책을 쓰다 보면 쓸 때마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과정은 다 다름과 차이를 드러낸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말하는 반복도 사실 차이가 드러나는 반복이다. 책 쓰기고 동일한 생각과 느낌, 동일한 프로세스를 따라가면서 낯선 기호를 생산하지 않는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100여 권의 책을 쓰면서 여전히 지치지 않고 다음 책 쓰기를 구상하는 원동력도 사실은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반복에서 나오는 마주침과 깨우침의 이중주곡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쓰는 이유나 쓸 수 있는 원동력에는 ‘욕구’와 ‘욕망’의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자기만의 이론을 추구하는 사람은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이론 개발자가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이론 개발자다. 《성숙, 레비나스와의 시간》을 낸 박동섭 독립연구자에 따르면 욕구는 본래 있어야 할 것이 없어서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상태인 반면, 욕망은 결핍된 것을 채워도 이제껏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상태다. 욕구는 무엇이 부족한 지 알기 때문에 그 부족하거나 결핍된 부분만 채우면 욕구는 충족된다. 하지만 욕망은 무엇인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려는 의지가 꺾이지 않는 감정이다. 욕구를 기반으로 자기 계발이나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은 현재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 다음 이상적인 미래 상태와 격차를 분석, 무엇이 어느 정도 부족한지를 파악하고 나면 그 간극에 존재하는 격차를 메꾸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충족되는 순간 자기 계발이나 이론개발 활동은 거기서 멈춘다. 결핍된 욕구가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을 기반으로 자기 계발을 하거나 자기만의 이론을 개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깨달은 감각적 깨달음이지만 그 순간의 느낌과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적확한 언어가 여전히 부족하거나 부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언어를 벼리고 벼려서 어느 정도 만족하는 순간에 잠시 자기 계발이나 이론 개발활동을 멈출 뿐이다. 욕구가 이미 존재하지만 내가 현재 갖고 있지 않는 결핍을 메꾸려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욕망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것을 추구하는 감정이기에 설혹 그것이 어느 순간 발견되었거나 충족되었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전보다 더 강렬한 열망과 갈망으로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욕망으로서의 자기 계발이나 자기만의 이론 계발활동이 영원한 미완성인 까닭이다.



욕망은 낯선 마주침을 통해 낯선 연결을 시도하려는 생산적인 출발점이다


이처럼 욕구는 결핍된 부분을 충족하면 없어지지만 욕망은 추구해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앎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에 기반을 둔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주장하는 욕망의 위력은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아니라 뭔가 충만하고 싶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량이다. 욕망이 꿈틀거리는다는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낯선 타자와 접속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나로 거듭나려는 창조적인 자기 변신의 원동력이 작동한다는 의미다. 욕구가 남과 비교하며 시기와 질투를 부르는 동일성을 추구하지만 욕망은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서 다름과 차이를 반복하려는 감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말하는 욕망은 새로운 타자와 마주치거나 이전과 다른 연결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생산적인 출발점이자 긍정적인 촉발점이다. 지금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어제와 다른 낯선 타자와 접속해서 새로운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재탄생시키려는 근원적인 동력이 욕망이다. 욕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계발은 언제나 바깥세상의 누군가와 비교해서 내가 부족하거나 결핍된 부분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 뒤따르는 과정이다. 욕망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계발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차이의 무한 반복이다.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는 순간 미지의 세계를 향하는 탐구여정은 끝이 나고 자기 성장 엔진도 거기서 멈춘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충족의 문제가 아니라 충만의 정도에 따르는 자기 판단의 문제다.


슬픔을 주는 관계는 끊고 기쁨을 주려는 관계는 이어가려는, 즉 자기 본성을 발전시켜 자기 존재를 더 강화하려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긍정적인 힘을 발견한 것이다. 어떤 외부적 압력이 가해져도 자신의 본성을 지켜내려는 안간힘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코나투스다. 니체는 스피노자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비판하고 그걸 넘어서려고 했다. 니체는 오히려 모든 개체는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넘어서려고 몸부림을 친다고 한다. ‘발버둥 치며 오늘의 나와 다른 새로운 나로 부단히 성장하려는 의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저기로 가려는 상승작용의 의지를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정의한다. 어떤 일을 하면 힘이 솟아나지만 어떤 일을 하면 있었던 힘도 줄어들 정도로 하기 싫은 게 있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는 내가 하면 행복한 에너지가 샘솟는 에너지다. 나는 낯선 책을 읽고 뇌에 충격을 주는 깨우침을 얻을 때, 그리고 그런 깨우침으로 내가 겪은 경험적 통찰력을 날 선 언어로 벼리는 과정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힘을 느낀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코나투스, 니체식으로 말하면 힘에의 의지를 느끼는 순간이며, 들뢰즈와 가타리식으로 말하면 긍정적 욕망이 생산적인 창조의 힘으로 작용하는 순간이다.



다중체는 낯선 환경과 마주치면서 생긴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가 직조된 정체성이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나 니체의 힘에의 의지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끌어올려 새로운 나로 거듭나려는 근본적인 힘이 바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생산하는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욕망이다. 사람은 낯선 사건과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려는 욕망의 힘을 믿는다. 어제 접속했던 대상과 다른 대상과 어제와 다르게 접속하고 마주치면서 새로운 관계가 부단히 생성된다. 이때 낯선 환경과 마주치면서 생기는 사건은 어제와 다른 배치를 낳는다. 여기서 말하는 배치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아장스망(agencement)이다. 아장스망은 영어로 배치(arrangement)를 의미한다. 아장스망이 바뀌면서 나의 마주침도 바뀐다. 아장스망을 바꾸지 않으면 사유도 고정관념의 틀 속으로 들어가 낮잠을 잘 것이다. 아장스망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축구를 즐겨하던 어린 시절 맨발로 축구를 하다가 어느 날 새운동화를 신도 운동장을 누비면서 내가 만난 아장스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장스망이 바뀌면서 신체적으로 감각하는 경험적 주름이 바뀐다. 달리기를 평지에서 오랫동안 했던 사람은 자신의 몸, 특히 발바닥이 평지와 만나는 아장스망을 반복해서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평지에서 달리는 주름이 몸에 아로새겨진다. 어느 날 갑자기 사하라 사막 같은 곳에서 달리기 경주를 시작하는 순간 내 몸과 사막이 만나는 아장스망이 바뀌면서 내 몸이 사막과 만나서 생기는 새로운 주름이 형성된다. 그 순간 마주침의 깨달음도 달라진다. 들뢰즈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많은(multiple) 주름(pli)이 계속 몸에 축적되면 다중체(multiplicity)가 만들어진다고 본다. 결국 한 개인의 정체성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환경과 마주치면서 어떤 주름을 만들고 축적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논리다.


어떤 분야든지 경지에 이른 사람이나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사람은 특정한 상황에서 다양한 대상과 마주치면서 우발적 사건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사건이 방출하는 무수한 낯선 기호를 해석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에 축적되는 주름이 일정 시점 후에 이름값을 하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면서 배우고 싶은 롤모델이다. 한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도 그 사람이 온몸으로 낯선 아장스망 속에서 생기는 고유한 주름이 다양한 방식으로 겹겹이 쌓이면서 형성된 다중체의 산물이다. 이런 다중체는 사람마다 다 다르기에 그걸 그대로 모방해서는 대체불가능한 나다움을 창조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다중체 속에 담긴 인간적 고뇌와 문제의식, 그걸 풀어내기 위해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며 만나는 우발적 사건은 사건 당사자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반복할 수 없다. 상황이 바뀌고 그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이 다른 목적으로 추진하면서 만나는 사건에서 방출되는 기호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자기 계발을 통해 성공에 이르는 길과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기 계발서들은 저마다 다른 개인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구겨 넣으려는 동일성의 철학에 따라 성공한 사람, 부자, 주식 투자로 돈을 많이 번 사람, 역경을 뒤집어 경력으로 만든 사람 등 성공한 사람으로 규정, 그들이 노력했던 방식을 동일하게 따를 것을 요구한다. 성공을 했거나 주식투자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다 저마다의 독특한 상황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해서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반복은 잠재성이나 가능성을 반복해서 단독적인 작품을 완성하려는 안간힘이다


유씨 집안의 씨앗으로 세상에 뿌려졌지만 수많은 접속과 접촉을 통해 유영만이라는 인간은 다른 인간과 대체 불가능한 단독적인 개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그동안 우연히 접속했거나 접촉했던 만남으로 생긴 무수한 주름으로 어제와 다르게 부단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동사적 존재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 영원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제와 다르게 다른 존재와 접속하거나 접촉하면서 늘 변신을 거듭하며 의미를 생산하는 대체불가능한 인간이다. 세상에는 배워야 할 사람은 많지만 그 사람의 배움과 나의 배움은 맥락이 다르고, 낯선 환경과 마주치면서 바뀌는 아장스망에 따라 내 몸에 각인되는 주름의 얼룩과 무늬도 다르다. 내가 겪는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일반화시켜 배움을 줄 수 있는 보편적인 처방전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마주치면서 생기는 사건과 그 사건이 방출하는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해석과정에서 생기는 낯선 생각도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마주친 경험, 마주친 사건, 시건이 품고 있는 기호의 의미, 의미 해석 과정에서 생기는 다양한 주름은 대체 불가능한 ‘단독적인’(singular) 깨우침의 흔적이 축적되어 생긴다. 여기서 ‘단독적인’ 존재라는 말은 유일무이한 존재라서 비교 자체를 거부하며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는 오로지 딱 한 사람밖에 없는 존재다. 예를 들어 책을 한 권 썼는데 같은 종류의 자기 계발서지만 다른 책일 때 ‘특수한(particular)’ 책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단독적인 책은 세상의 그 어떤 자기 계발서와 비교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책이다. 특수한 책은 얼마든지 다른 책과 교환이 가능하지만 단독적인 책은 교환 자체가 불가능한 딱 한 권의 책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의 진정한 의미는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의 성공방정식을 모방하면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잠재성이나 가능성을 반복해서 대체불가능한 단독적인 작품을 완성하려는 안간힘이다. 모든 인간은 잠재적 가능성 면에서 태생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삶의 색깔대로 살아내기만 하면 저절로 색달라지고 결과적으로 남달라 지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자신만의 작품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반복한 결과 비로소 탄생되는 예술품이다. 피카소가 반고흐를 모방하지 않고, 괴테가 톨스토이를 흉내 내지 않으며, 들뢰즈가 니체를 모방하되 한 차원 다른 창작으로 승화시킨다. 저마다의 컬러와 스타일로 단독적인 작품을 창작할 때 사람들은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모든 존재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다양체다. 지금까지는 몰랐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탄생되는 의미 속에서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은 낯선 타자와 부단히 접속하면서 또 다른 변신을 거듭하며 언제나 또 다른 가능성과 잠재성을 잉태할 것이다. 낯선 타자와 마주치며 지속적으로 바뀌는 아장스망이 기존의 삶을 지배했던 규칙을 완전히 새롭게 재편하면서 어제와 다른 다중체로 거듭날 것이다. 아장스망을 의도적으로 바꾸면서도 동시에 낯선 타자와 우연한 마주침의 차이를 반복함으써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의 잠재성과 가능성은 또 다른 우발적 사건 속에서 의미를 발굴하는 여행을 반복할 것이다. 오늘과 다른 내일의 차이는 반복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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