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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에 몰두하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쓴소리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 자기 계발은 개발소발(남발)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쓴소리: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 자기 계발은 개발소발(남발)에 지나지 않는다


냉정한 자기 성찰과 몸을 던져 실천하면서 체득하는 배움이 동반되지 않는 자기 계발은 ‘남발’에 불과하고, 원하는 방향이나 기대하는 목표대로 자기다움을 창조하지 못하고 ‘불발’로 끝난다. 남을 따라 해서는 남을 따라잡을 수 없고, 남이 걸어간 길에는 나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기는 인생 선배에게 철저하게 따라서 배워야 한다. 법과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 매너나 행동 규범은 누구나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가 존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만의 컬러와 스타일이 어우러지면서 생기는 필살기는 누군가를 따라 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화가는 저마다의 고유한 화풍으로 전대미문의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자기만의 문체로 대체불가능한 작품을 창작한다. 반 고흐처럼 그림을 백날 그려도 반 고흐의 아류작을 벗어날 수 없고, 피카소처럼 흉내 내도 추상화의 피카소 스타일을 능가할 수 없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쓰려고 노력해도 괴테의 문체를 흉내 낼 뿐 자기만의 단독적인 문학작품은 탄생되지 않는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이 자전거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면서 쓴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책이 김훈 작가의 《자전거 여행》과 비교할 수 없다. 



경지에 오르려면 한 분야에 미쳐야 한다.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의미처럼 미쳐야 미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비슷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 적이 있다. 한 때 ‘공부에 미치라’는 책이 봇물처럼 이어지면서 공부열풍이 불다가 지금은 잠잠해졌다.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부터 《20대 공부에 미쳐라》, 《20대 자기 계발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40대 다시 한번 공부에 미쳐라》, 《40대 위대한 공부에 미쳐라》, 그리고 《1년만 공부에 미쳐라》해놓고 《공부하다 죽어라》까지 우리는 공부로 태어나서 공부로 죽기까지 한 사람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여정에 공부는 언제나 성장과 발전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아왔다. 이런 공부의 공통점은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공부다. 공부를 통해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한 공부는 언제나 경쟁상대가 밖에 있다. 남보다 잘하기 위한 공부다. 《논어》에 나오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의 공부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하는 노동으로서의 공부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다움을 찾는 공부, 남보다 잘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전보다 잘하기 위한 공부, 수단으로써의 공부가 아니라 공부 그 자체가 즐거워서 놀이처럼 하는 논어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20대는 달성해야 될 공부가 많아서 미칠 것도 너무 많다. 《20대 자기 계발에 미쳐라》,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열혈 20대 일에 미쳐라》, 《대한민국 인테크에 미쳐라》 《대한민국 20대 열정에 미쳐라》 《대한민국 20대 공모전에 미쳐라》 등 20대는 자기 계발, 재테크, 일, 인테크, 열정, 공모전에 미치다 정말 미치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모자라 30대와 40대를 넘어 50대와 60대에도 여전히 미쳐야 하는 주제나 분야가 넘쳐난다. 예를 들면 《서른 살, 진짜 네 인생에 미쳐라》, 《서른 전에 한 번쯤은 심리학에 미쳐라》와 《40대 다시 건강에 미쳐라》, 그리고 《50대 재테크에 다시 한번 미쳐라》와 《60대 변화와 성장에 미쳐라》가 그런 주제다. 이제 《반 고흐 너도 미쳐라》라고 주장하며 마침내 《미친 생각에 미쳐라》까지 한 때 대한민국은 미쳐라에 미치는 열풍이 불었다. 아무리 불광불급이라고 해도 너무 미쳐야 할 주제가 많아서 미치는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미쳐라 책이 주는 공통적인 메시지는 한 분야에 일정기간 미치기만 하면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있다. 경지에 이르지 못하거나 중도에 포기 또는 실패가 발생하는 이유는 오로지 당신이 그 일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성공이 한 개인의 노력에만 달렸다면 성공을 향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직면하는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도 개인이 뒤집어써야 한다. 당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열심히 노력해서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전보다 더 강력하게 미치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미치다 정말 미칠 지경에 이르러도 더 미치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미친 결과는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미쳐도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게 되자 2010년대 새로운 메시지로 포장된 자기 계발서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괜찮다’ 시리즈 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  때는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불광불급이 모든 사람의 성공 철학이자 지침인 것처럼 강요당하는 삶을 살다가 미치는 인생에 지친 사람들에게 달콤한 위로의 메시지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미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메시지로 포장된 새로운 자기 계발서는 나만 안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많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갖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라고 달콤한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틀려도 괜찮아》, 《혼자여도 괜찮아》, 《이제 시작해도 괜찮아》, 《독특해도 괜찮아》, 《잘 못 해도 괜찮아》, 《있는 그대로 살아도 괜찮아》, 《지금 그대로도 괜찮아》,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아》, 《욕먹어도 괜찮아》, 《못 해도 괜찮아》, 《이혼해도 괜찮아》, 《부족해도 괜찮아, 》, 《미움받아도 괜찮아》, 《부족해도 괜찮아》,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불편해도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까지 무엇을 어떻게 하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슨 결과가 나오든, 누가 뭐라고 하든 다 괜찮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안 괜찮은 일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일침을 가하는 책도 나왔다. 《나 안 괜찮아》. 안 괜찮은 사람에게 아무렇게 해도 괜찮다는 말은 위로가 되는 조언이라기보다 위기를 자초하는 엉뚱한 제언이나 중언부언밖에 되지 않는다. 괜찮다는 위로의 메시지를 남발했지만 그런 책을 읽고 새로운 삶을 출발한 사람은 없다고 하면 지나친 단언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괜찮다는 위로의 메시지로 위기를 극복하고 위기의식으로 이전과 다른 삶을 시작한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자기 계발 독자들은 ‘미쳐라’와 ‘괜찮아’ 사이에서 과연 누구 이야기를 들어야 괜찮을지 스스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언제는 미치라고 해서 미쳤는데, 또 언제는 미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농락당하는 느낌이다. 처방전처럼 제시된 미치는 방법을 참고로 연령대별로, 분야별로 미쳤는데 이제는 미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정말 괜찮은 조언인지 과연 어떤 근거로 믿을 수 있을까. 새뮤얼 스마일스가 《자조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정치나 사회개혁으로는 더 이상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으니 스스로 노력하는 자조(自助)만이 성공을 위한 길인지 여전히 의문스럽다. 끊임없이 미치도록 배우고 다른 사람의 성공 스토리를 읽으면서 자아각성을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감동만 받는다. 다른 사람이 성공적으로 추진해서 빛을 보게 된 몇 가지 방법을 따라서 해보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관성대로 살아간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남의 성공 체험담을 열심히 따라서 배우지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깊은 사유체계를 건축하지 않으니 사고가 종속되고, 생각만 거듭하고 주어진 메시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공부를 하지 않으니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다. 


이 말은 읽기와 쓰기에 변형해서 적용해도 일맥상통한다. 관이불독심망(觀而不讀深罔) 독이불작즉태(讀而不作則殆). “보기만 하고 깊이 읽어내지 않으면 자기 생각으로 깊어지지 않고, 읽기만 하고 자기 생각을 쓰지 않으면 생각이 위태로워진다.” 깊이 읽는 다는 의미는 저자의 텍스트(text), 즉 메시지가 탄생될 수밖에 없는 콘텍스트(context). 즉 상황적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잉태하는 산모이자 텍스트 메시지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저자의 모든 텍스트는 탄생배경과 사연을 품은 특정한 콘텍스트에서 태어난다. 텍스트를 읽어내되 그것이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사연,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그것이 잉태된 콘텍스트에 비추어 해석해 내는 노력이 뒷따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성공 스토리는 공허한 메아리일 수 있다. 아무리 위대한 성과를 냈던 성공 스토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탄생될 수밖에 없는 문맥을 같이 읽어내지 않으면 무리가 따르는 관념적 진리로 전락할 수 있다. 한 분야에 미쳐서 성공한 사람이든, 괜찮다는 위로의 메시지를 던질 만큼 산전수전 경험을 한 사람도 저마다의 특정한 상황적 맥락에서 일리(一理) 있는 교훈을 말하는 것이지, 시공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진리(眞理)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진리(眞理)가 있다면 무리(無理)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칸트의 유명한 명제를 되새겨보자.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여기서 개념은 지성적 사유의 산물인 이론에 해당하고, 직관은 감성적 경험의 결과다. 그래서 이렇게 바꿔 쓸 수 있다. 이론이 없는 경험은 맹목적이라서 위험하고, 경험이 없는 이론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지 않아서 공허하다. 구체적인 경험적 근거가 부실한 사유는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내용이 없어서 공허하고,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이 없으면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그 경험은 일정한 사유체계로 정리되지 않아서 맹목적인 신념에 불과할 수 있다. 남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나의 경험이 미천해서 다른 사람의 이론적 주장이나 체험적 깨달음을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이 부족하면 내 생각을 새롭게 잉태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의 경험이든 주관적 판단기준과 주체적 해석 틀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게 되고, 나의 경험이 깊이와 넓이가 미천하면 다른 사람의 이론적 주장이나 깨달음의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수 있다. 자기만의 이론이 없이 아무리 경험을 많이 쌓아도 경험은 경전이 될 수 없고, 경험에 기반을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론을 추상적으로 배울수록 현실적 설명력이 떨어지는 관념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남이 만들어 놓은 성공 처방전이나 방법적 노하우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문맥 속에서 탄생된 주장이나 신념체계인지도 모른 채 거기에 빠져 살 수밖에 없다. 열심히 배우지만 정작 남의 이론이나 주장을 내 삶에 비추어 반추해 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면서 적용하는 경험적 적용과정이나 실천을 통해 체화시키는 추가적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배움이 반복될수록 심각한 이율배반이 일어난다. 배움이 계속되지만 배움을 통해 각성과 통찰이 수반되지 않고 남의 이론체계에 종속되어 사유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일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논어》의 첫 문장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시작한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않겠는가’로 해석되는 이 문장은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지 않으니 슬프지 않겠는가’로 해석되는 역전현상이 발생한다. 배우되(學) 익히지(習) 않는다는 말은 남의 주장을 열심히 따라가면서 배우지만 자신의 생각으로 재해석하거나 실제 문제 상황에 적용하면서 자기만의 이론으로 재창조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럴 때 필요한 말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절학무우(絶學無憂)다. 배움을 중단하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배움은 분명한 목적의식이나 위기의식이 없는 막무가내식 배움이며, 근본적 성찰과 비판적 조명이 따르지 않는 무조건적 배움이자, 실천적 적용이 따르지 않는 관념적 배움이다. 이런 배움을 끊어야 한 다는 말이 노자의 절학무우가 전하는 의미다.



세상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이나 위기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절치부심 끝에 탄생한 수많은 이론이나 주장이 넘친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는 구체적인 처방전을 비롯해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는 단도직입적 주장도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수 한잔의 청량함을 주듯이 다양한 딜레마 상황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문제는 넘쳐나는 선언적 처방전이나 단도직입적 주장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나 맥락을 간과하거나 무시한 채 그 메시지 자체의 신선함이나 독특함만을 배우기에 바쁘다는 게 일차적 맹점이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내가 처한 상황에서 어떤 의미나 시사점을 갖게 되는지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면서 나의 생각과 경험에 비추어 재해석하며 실제 적용하는 배움과 익힘의 이중주를 연주하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념이나 성공원리를 배웠는데 나의 생각으로 만드는 경험을 해보지 않거나 경험은 했는데 그 경험을 해석해 내는 사유체계가 빈곤할 때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해하며 나를 거듭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만들지 못하는 배움이 반복된다는 게 심각한 문제다. 최고의 성공 처방전이든 경지에 이르는 최상의 방법이나 원리든 한 사람의 외로운 사투 끝에 탄생한 독립적 사유체계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데 관여한 모든 상황적 상호작용의 합작품이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는 성공 방정식은 수학공식처럼 사연이나 배경, 과정이나 이유를 묻지 않고 만고불변의 철칙처럼 배우는 공부를 계속한다.



산에 안전하게 오르거나 내려오는 몇 가지 일반적 지침이나 구체적인 방법은 도움이 되지만 산세나 나의 몸 상태와 내가 지니고 있는 등산 장비와 신발, 그리고 등반에 같이 가는 도반과 당시의 날씨 조건 등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따라서 일리 있는 조언이 될 수도 있고 무리가 따르는 맹목적 제언이 될 수도 있다. 언덕 위에서 한 드럼의 물을 채운 다음 언덕 아래로 쏟아부었을 때 물이 언덕 아래 목적지에 도달하는 최상의 방법은 사전에 처방할 수 없다. 바위나 큰 나무와 같은 장애물을 만나면 휘어져 흘러야 하고, 웅덩이를 만나면 다 채운 다음 나타나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갑자기 깊은 동굴이 나타나면 목적지로 흐르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갈 수도 있고, 낭떠러지기를 만나면 고민할 틈도 없이 몸을 날려 뛰어내려야 한다. 뛰어내리는 도중에 나뭇가지에 걸린 물은 산산이 흩어져 아래로 떨어지기도 전에 공중분해되어 공기 입자로 흡수되어 생명을 마감하기도 한다. 간신히 아래에 도착한 물은 거센 물결에 휘말려 방향감을 잃다가 다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기약도 없이 흘러내려간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나 성공하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삶은 시작하기 전에 완벽하게 준비하고 계획을 세운다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많다.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에서 만나는 우발적 사건과 상황적 조건들이 생각지도 못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내가 온몸으로 밀어낸 결과만큼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가 씨실과 날실로 직조되는 가운데 모두가 배워보고 싶은 성취결과가 부산물로 생긴다. 어떤 경험을 하든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소중한 지침이 되는 경전으로 구축된다. 경전으로 곰비곰비 쌓여가는 경험적 깨달음과 내 어휘 꾸러미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즉 언어의 틈새를 메꿔나가려는 안간힘 속에서 나만의 사유체계 구축의 디딤돌이 되는 자기만의 언어가 탄생한다.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그 경험적 깨달음을 독특한 언어로 어떻게 정리하는지에 따라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각성의 깊이와 넓이는 달라진다. 내가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겪어본 만큼 자기만의 언어로 나만의 사유체계를 구축하고, 세상의 변화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사람은 언제나 남의 좋은 이야기에 끌리는 원심력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중심을 잡고 휘둘리는 바람에 흔들리되 뿌리째 뽑히지 않는 구심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사람은 대체로 이런 사람이다. ‘경험’으로 ‘경전’을 구축하고,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자기만의 언어를 창조하며, 자기만의 언어로 나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세우는 자기만의 이론을 건축하는 사람. 고립된 개인보다 어울림 속에서 진솔한 울림으로 작은 감동을 만들어가는 튼실한 관계 속의 한 인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람. 추상과 관념으로 얼룩진 공허한 담론보다 구체적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비범한 사랑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사람. 시류에 흔들리며 유행 따라 표류하는 나에서 벗어나 어제와 다른 삶을 앎의 터전으로 삼아 자기 생각과 언어로 건축된 자기만의 이론으로 자기답게 살아가는 이유를 증명하는 사람. 세상의 좋은 이야기보다 남루한 삶이지만 내 삶의 중심에서 건져 올린 보잘것없는 교훈이라도 거기서 내 앎을 건축하려고 애쓰는 사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제와 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평범한 보행 속에서도 비범한 보행의 의미를 건져 올려 살만한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 남보다 잘하기 위해 비교하며 비참한 인생을 살기보다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전보다 나아지기 위해 비전을 품고 비상하는 사람.


자괴감 대신에 자신감, 자존심 대신에 자존감, 대체 불가능한 자기 다운 킬러 콘텐츠와 퍼스널 브랜드로 세상에서 자기 이상을 펼쳐나가는 사람. 그럼에도 자기다움이 나만이 쟁취할 수 있는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수단과 전략으로 쓰지 않고 세상을 지금보다 조금이라고 나아지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사람으로 남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취미가 직업이고, 놀이처럼 일하며,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아우르며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 누군가 강제한 규율이나 세상이 정한 규칙이나 가치에 종속되어 끌려가는 삶보다 내 몸이 좋아하는 욕망을 쫓아 살아가되 본능보다 예능을 중시하며 자기 삶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애간장을 녹이는 사람, 앎으로 삶을 재단하고 평가하기보다 삶으로 앎을 만들어가며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으로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사람. 속도와 효율로 물든 능률복음에 지친 삶보다 삶의 밀도가 매 순간 부르는 행복담론에 미친 사람. 내일을 구상하는 계획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선물 같은 나날에 몸을 던져 어제와 다르게 느끼며 사는 사람. 



평범한 사람이 꿈꾸는 비범한 이상(理想)에서 그럴만한 이유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만나 어제와 다른 삶을 살아가며 작은 소망으로 대망의 꿈을 이루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많아지기를 꿈꾸며 다른 사람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사람. 거창한 꿈과 원대한 비전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일상에서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서도 언제나 살아있음의 경이로운 기적으로 온몸으로 느끼며 매 순간을 삶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간직하려고 몸을 던지는 사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래를 담보로 현실의 구차함을 버티고 견디기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던져주는 소중한 삶의 의미를 만끽하는 사람. 지나간 과거를 붙잡 고 후회하는 시간보다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현재를 그 어디에도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주어진 시간의 두께를 두껍게 만드며 의미를 창조하는 사람. 자기주장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마음을 열고 타인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 언제나 입장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를 삶의 철학으로 삼고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사랑하며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밤잠을 안 자고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사람. 


법대로 안 되면 법을 어기는 편법이나 불법을 자행하기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행동하며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나 만의 삶의 방도를 찾아 나서기 위해 방법 개발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정상에 올라갔다고 자만하지 않고 밑바닥을 기고 있다고 좌절하지 않으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곡선적 삶 속에서도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엿보는 사람. 겉으로 드러난 사실보다 사실 속에 담긴 진실의 의미를 캐내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 사람. 내가 갖고 있는 전문성도 나를 직간접적으로 도와준 수많은 배경 덕분에 잠시 전경으로 드러난 사회적 합작품이라고 믿고 자신을 전경으로 만들어준 배경에게 고마워하는 사람. 생각지도 못한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에도 나 대신 누군가 어두운 곳에서 힘들고 복잡한 일을 대신해준 덕분에 지금 내가 이런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왼손과 오른손 외에 늘 겸손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자세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 띄워주며 인정해 주고 축하해 주는 사람. 다른 사람의 성공을 마치 자신이 성공한 것처럼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 주며 성공하기까지의 여정에 쏟은 노고와 정성과 헌신을 알아주고 칭찬해 주는 사람.



결국 사람은 삶이 만든 예술작품이다. 사람은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본 삶의 깊이와 넓이만큼 글을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글도 읽어낼 수 있다. 어제와 다르게 살아본 만큼 어제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어제와 다른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내 삶의 깊이와 넓이를 능가하거나 범위를 벗어나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일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그대로 따라 할수록 내 삶은 꼬이고 나의 길을 걸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다. 세상의 좋은 이야기에 유혹당할수록 세상을 밝혀나가는 나의 이야기는 실종된다. 남의 이야기에 귀가 열릴수록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말문은 막힌다. 이럴 때 나와 내 삶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순간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남의 성공스토리에 열광하며 침을 흘리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남의 좋은 이야기를 배우는 길을 과감하게 끊고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험난한 공부여정에 몸을 던져야 할 시기다. 내 몸을 관통하지 않는 세상의 좋은 이야기는 나의 신념으로 장착될 수 없다. 왜 나는 내 일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며 땀을 흘리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남이 만든 정보의 바다에 떠내려가고 있을까?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성공 스토리에 한 눈이 팔려서 세상을 온전이 나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일까?  거친 파도가 밀려와도 피하지 않고 뒤집어쓰고, 밀려가는 파도에도 몸을 맡겨 함께 휘둘리되 뿌리째 뽑히지 않는 위력을 더불어 살아가는 당신과 함께 공부하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당신의 동참을 촉구하면서 용기(容器, container)도 깨뜨리는 당신의 용기(勇氣, courage)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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