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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수전 경험도 반전시키는 성장 방정식과 성장이론

그릇된 산전수전 경험도 반전시키는 성장 방정식과 자기만의 성장이론

     

자기 삶을 능가하는 이론을 만들 수 없다. 자기 삶을 능가하는 책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듯이 내 삶의 기반으로 하지 않는 이론은 개발할 수 없다. 내 생각도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으로 생긴 산물이다. 하지만 내 경험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면 편견과 선입견의 한계에 빠질 수 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세계에서 다른 경험을 한 사람이 쓴 책에 접속하거나 직접 그런 사람을 만나 인간관계를 맺어보는 것이다. 결국 나의 경험적 기반 위에 다른 사람의 다른 삶이나 다른 사람이 쓴 책을 통해 나의 경험적 깨달음을 주체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사유체계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고유한 성장이론이 만들어질 수 있다.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읽는 책들이 나를 말해준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어떤 공간에서 해보는 경험, 그리고 내가 읽는 책을 물어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구축하는 자기만의 이론 역시 그 사람이 겪어본 경험과 읽는 책과 만나는 사람의 합작품이다. 한 사람의 삶이 인간적이고 지적인 마주침과 버무려질 때 나만의 생각이 잉태된 새로운 깨우침의 이론이 개발된다. 자기만의 성장이론(y)은 e(experience in environment, 특정 환경에서의 경험), r(reading, 주체적 책 읽기), r(relationship, 인간관계)를 t(thinking, 비판적 또는 과학적 사고과정), 즉 생각의 용광로에서 경험적 깨달음을 적확한 l(language,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과정에서 백련강(百鍊剛)처럼 태어난다. 여기서 분모에 위치한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 경험과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를 통해 깨달은 깨우침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적확한 언어로 벼리고 단순하게 표현하느지에 따라 깨우침의 의미와 가치는 배가된다. 즉 언어로 표현하는 분모값이 작을수록 분자값이 커지면서 자기만의 성장이론의 가치도 덩달아 올라가는 방정식이다.



경험은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경전이다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내가 어제와 다르게 살아본 만큼만 생각도 어제와 다르게 잉태된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경험은 특정 환경에서 겪어내는 경험이다. 즉 상황적 맥락성이 거세된 경험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배움도 약할 뿐만 아니라 왜곡되거나 오용될 수 있다. 누군가 성공한 경험은 그 사람이 직면한 특정한 상황적 맥락에서 다양한 변수나 조건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는 환경적 경험이다. 한 사람이 겪어낸 경험은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일반화시켜 적용하거나 반복해서 겪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이루어낸 성공 스토리나 부자가 된 성취경험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괴 조건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인지를 함께 알고 있을 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교훈이 될 수 있다. 성공은 한 개인의 외로운 노력이나 불굴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특정 환경에서 개인의 재능이나 적성이 역동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탄생된 사회적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다른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로 변신을 거듭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제와 오늘을 살아내는 자기만의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내가 사유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결정한다. 내가 몸으로 겪어보지 않는 사건과 사고는 나의 사고 기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겪어보지 않는 사물은 내 몸을 관통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상상력도 미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막걸리 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를 말하라고 하면 비 오는 날, 파전과 함께 그리고 등산 다녀와서 마신 경험을 연상한다. 막걸리를 비 오는 날 또는 등산 다녀와서 파전과 함께 마셔본 경험밖에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막걸리와 경험해 본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없다. 막걸리에 대한 나의 상상력은 막걸리를 내 몸으로 겪어본 경험의 깊이와 넓이를 능가할 수 없다.


막걸리에 대한 다른 상상력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막걸리를 이전과 다르게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마시지 않고 새벽에 빈속에 마셔서 출근하지 못한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은 세계 최초로 막걸리와 새벽을 연결시켜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글을 쓸 수 있다. 두 번째 막걸리에 대한 연상세계를 바꾸는 방법은 막걸리를 이전과 다르게 마셔 본 경험이 기록된 책과 접속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이론을 어제와 다르게 구축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아가며 겪는 경험의 한계를 깨우치는 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내가 모든 걸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르게 살아가면서 겪은 체험적 깨달음이 기록된 책을 읽어야 한다. 남의 책에 접속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어리석음에 빠져 살아갈 수 있다.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지적 자극제가 바로 다른 사람이 쓴 책이다. 내 전공영역에 관한 다른 책도 읽어야 하지만 전공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다른 분야의 책에 의도적으로 나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나는 어제와 다른 지적 자극을 받을 가능성이 줄어들고 그만큼 내 생각에 갇혀 살 수 있다.



독서는 오이가 피클로 바뀌는 비가역적 변화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필요조건이 독다. 나의 경험은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경전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경험이 업데이트되지 않거나 내가 겪은 경험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는 별도의 노력을 전개하지 않으면 나 역시 나의 경험의 덫에 걸려 좌정관천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내가 겪어낸 경험적 흔적과 얼룩이 나의 성장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무늬로 직조된다. 내가 겪어봤다고 해서 그 경험은 언제나 진리이자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서 겪어봐야 되는 전형은 아니다. 나의 경험이나 경험적 깨달음으로 얻은 깨우침의 무늬도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오염된 의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의 편파성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자신의 사유체계를 증축하는 사람이 쓴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책은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다른 관점과 논리로 다르게 생각한 흔적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매개체다.


책은 새로운 길로 인도하는 창(window)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창을 이전과 다른 곳에 설치해야 이전과 다른 세상을 내다보는 통로가 열린다. 내가 만약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직도 평택과 송탄 유흥가에서 내일이 없는 오늘을 방황하면서 방탕하고 있을 것이다. 운명적인 책과의 만남,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을 만나고 나서 공고생도 사범고시에 합격하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한 줄기 빛을 준 은인이 바로 책이었다. 책이 나에게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창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책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지금과 다른 창을 선물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세계도 얼마든지 있음을 알려주는 데 있다. 독서는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내다보는 관점이자 누구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가장 먼저 걸어가게 만든다. 내가 책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읽은 책만큼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의 숫자도 늘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보다 더 많은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책을 통해서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나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던 창을 사랑하고 그 창이 안내해 준 미지의 길을 사랑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과 관점으로 주체적인 해석을 하지 않아도 위험해질 수 있다. 남의 생각에 종속되어 사고의 식민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나를 새로운 창문으로 인도해 어제와 다른 세상이 있음을 충분히 알려주지만 그 창문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결국 나의 관점과 시각이 결정한다.



만약 내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 생각이 이렇게 미천한지 모르고 천방지축 살았을 것이다. 책은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경험을 하면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과 접속하게 만드는 매개체다. 그런 책을 읽어봐야 내 생각이 얼마나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 갇혀 사는지 반성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책은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거울이다. 나의 존재는 존재 자체의 발버둥 치며 변신하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이 다행히 무너지는 사건을 경험했다. 운명적인 책과의 만남,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감옥이라는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한겨울 서릿발 같은 냉철한 사색의 명증함을 추구하며 세계의 움직임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닐 수 있는지 경이로운 사유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관계없는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관계가 결정한다는 위대한 깨달음은 그 후 나의 사상적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내가 책을 쓰는 이유는 지금 우리 생각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만들어준 결론이다. 내 생각을 바꾸려면 다르게 살아가는 삶과 접속해 봐야 지금 나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반성하기 위해 책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부단히 성찰하는 삶을 사랑한다.


독서는 오이가 피클로 변하듯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난다. 책을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책을 읽기 전에는 오이였지만 책을 읽고 나면 피클로 바뀐다. 오이가 피클로 바뀔 수 있지만 피클은 다시 원상태인 오이로 돌아갈 수 없다. 독서가 피클인 이유는 읽기 전에 오이였지만 읽은 후에는 피클로 바뀌기 때문이다. 읽기 전의 상태로 원상복귀가 불가능한 위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바로 독서다. 독서는 그만큼 사고방식의 혁명이 일어나는 위험한 행위다. 독서가 피클이 되는 변화는 내가 책을 읽었다기보다 책이 나를 집어삼킨 경우다. 책에 내가 빨려 들어갔지만 내 삶을 책이 어루만져주고 내가 겪은 경험이 이런 의미라고 깨우쳐준다. 그렇게 책에 빠져서 읽은 다음 다시 책에서 빠져나와 주체적인 나의 생각으로 저자의 의도와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내 삶에 비추어 부단히 성찰하는 활동이 이어질 때 책은 단순히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키는 외부적 자극제를 넘어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반성하고 재해석하는 놀라운 지적 자양분으로 자리매김한다. 책을 안 읽는 사람보다 책만 읽는 사람, 남의 책에 빠져서 자기 생각 없이 다독하는 사람은 책이 내 삶의 오염된 생각을 해독하기보다 그 책에 중독되는 과정을 촉진하는 독소로 작용한다. 책이 알려주는 길도 결국 책을 쓴 저자의 경험적 산물일 뿐이다. 저자가 걸어본 길은 나에게 한 가지 길일 수 있는 가능성이지만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남의 길일뿐이다. 책 읽기의 완성은 마지막 장을 넘길 때가 아니라 책의 메시지대로 살아보면서 내 몸으로 겪어보며 느끼는 체험적 각성에 밑줄을 칠 때다. 그래서 책은 머리로 생각하며 읽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는 실천하며 몸으로 겪어보며 읽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양면거울이다


나는 내가 만난 사람들과 함께 만든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인간은 독립된 공간에서 사투 끝에 완성되는 혼자만의 성취결과가 아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사회적 합작품이다. 나는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진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환경의 합작품이다. 인간관계가 인간을 만든다. 문제는 살아가면서 미래 어떤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지금 여기서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말이다. 미래라는 타자, 어떤 미래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면서 타자라는 선물을 들고 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점은 내가 어떤 타자를 만나든 나는 타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나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내가 만약 어떤 타자도 만나지 않고, 자주 가는 곳은 언제나 정해져 있으며,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같은 분야의 책만 반복해서 읽는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타자가 지옥이라면 나의 미래는 타자를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옥처럼 느껴지는 타자도 만날 수 있지만 무한한 깨달음을 주는 타자도 있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의 높이를 결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의 성장 높이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높이가 결정한다. 존재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고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관계를 포기하고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성장하는 높이를 추구하면 바람에 휘말려 줄기가 꺾인다. 어깨동무하는 잔디가 자기 욕심으로 높이 자라면 잔디 깎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베인다. 나는 혼자 성장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실력도 나 혼자 발휘하는 독립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주고받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102). 신영복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관계가 낳은 역사적 산물이 인간인 이유다. 인간은 독립적 공간에서 혼자 노력해서 탄생한 개체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아무런 내왕이 없는 '순수한 개인'이란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소설 속에나 있는 것이며, 천재란 그것이 어느 개인이나 순간의 독창이 아니라 오랜 중지(衆智)의 집성이며 협동의 결정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264쪽).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인간과 그 사람과 만난 공간, 그리고 함께 보낸 시간의 합작품이다.


사람이 경험을 하면서 깨달은 깨우침의 흔적도 책이지만 한 사람 자체도 이미 책 한 권을 넘어선다. “'사람'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삶'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사람의 준 말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경영하는 일의 70%가 사람과의 일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일입니다”(296쪽). 신영복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의 준말이 삶이라면 그 삶에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은 삶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그 사람 특유의 책으로 완성되어 간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의 사회역사적 합작품이 되는 이유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인 이유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관계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 존재는 관계의 부산물이다. 존재인 인간은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과 다른 나로 내일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의 관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관계라는 양면 거울은 타인에 대한 경종이자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며 성찰이다. 자신의 신념도 통념일 수 있으며 가치판단의 근거나 기준도 관성적으로 고착화된 고장 난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때문에 끊임없이 양면 거울에 비추어 반추해 보고 성찰하는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사람 앞에서 나 역시 이런 사람이 아닌지도 양면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비판적 사고 없는 경험은 위험하다

     

경험과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의 삼각축이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원료로 쓰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녹여내는 나만의 관점과 시각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생각이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머리로 하는 관념적 생각보다 몸이 움직여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물음표를 던져 재고해조는 비판적 사고에 가깝다. 누군가가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무조건 따라가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겪어보고 내 몸에 좋은 느낌을 받는지 나쁜 느낌을 받는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각성과 일맥상통한다. 이 시점에서 니체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에서 ‘우리’나 ‘그들’이 주어로 작용하는 선(good)과 악(evil)의 도덕(moral)을 넘어서 나에게  좋고(good) 나쁜(bad) 윤리(ethics)를 따르는 삶이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 ‘그들’이 주어진 도덕은 언제나 이렇게 사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더라는 형식으로 구전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누군가 어떤 의도로 정한 것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왜 그것이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도덕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고 따를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언제나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따르고 언제나 나 아닌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노예의 삶이다. 이렇게 자신의 주체적 판단과 적극적 의지에 따르는 주인의 삶이 아니라 소위 “~해야 한다더라”의 삶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주인인 삶, 소문으로서의 삶, 소문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무리의 삶이고 패거리의 삶입니다”(95쪽). 이진경의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해야 하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이 정한 도덕은 특정한 사회나 집단이 정해서 맹목적으로 따라야 할 노예의 불문율을 의미하고 내가 판단하고 따르는 윤리는 선과 악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주인의 미덕이다.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마디로 세상이 정한 도덕을 따르는 노예의 삶을 살지 말고 내가 정한 좋고 나쁨의 윤리를 따르는 주인의 삶을 살자는 이야기다. 사회가 정해놓은 도덕적 불문율이기에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도덕과는 다르게 윤리는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주인의 도덕이다. 누군가 S 대학을 가야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정한 명문 대학이고 거기를 가면 좋은 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가 정한 규범이나 판단 기준을 무조건 따라가는 삶은 노예의 삶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 S대학이 왜 좋은 대학인가? 좋은 대학에는 누가 가야 된다고 한 거지? 좋은 대학에 가면 왜 밥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보장된 것인지? 내가 생각하는 좋은 대학은 사회가 정한 기준이 아니라 내가 가면 나의 적성과 재능을 살려주는 대학이라서 나에게 좋은 대학이다. 사회가 정한 선한 대학이 아니라 내가 정한 좋은 대학일 때 나는 나의 기준을 기반으로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주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주로 하지 마라는 말로 규정되는 선과 악의 문제는 이유를 묻지 않고 무조건 지키지 않으면 계율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이유 없이 지켜야 할 계율이기에 지키면 선이고 지키지 않으면 악이 된다. 하지만 이런 선악을 따르는 도덕은 나에게 좋고 나쁜지는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냥 지켜야 되는 계율이기에 무조건 지킬 뿐입니다. 하지만 좋고 나쁨의 문제는 나의 능력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작용하는지를 나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 결정됩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나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일은 좋은 일이고 코나투스를 떨어뜨리는 일은 나쁜 일이다. 내 존재가 살아 움직이려고 힘을 쓰는 방향으로 기쁨을 주는 일이나 만남은 지속하고 그렇지 않고 나에게 슬픔이나 부정적 에너지를 주는 만남이나 일은 나쁜 일이기에 그만두라는 게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주장하는 메시지다. 선악은 누구나 따라야 할 계율이기에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칙이다. 반면에 좋고 나쁨의 문제는 개인별로 살아가는 상황이 다르고 선호하는 가치관도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단독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좋지 않은 일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갖는다는 의미는 니체가 말하는 선과 악의 사회적 기준보다 자기에게 좋고 나쁜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윤리적 정언명령을 따른다는 의미다.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는 내 신체가 직감적으로 안다. 신체성이 몸의 경험으로 생긴 산물이라면 몸이 좋다고 느끼는 기쁨과 나쁘다고 느끼는 슬픔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반화시킬 수 없다. 상황에 따라 그리고 그 상황에서 몸으로 느끼는 개별적 감정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보편적 명제로 대신할 수 없는 구체적인 단독적인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이런 점에서 다른 사람에게도 일반화시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담론이 아니라 오로지 내 몸으로 겪어낸 안간힘이나 몸부림의 산물이며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애쓰기의 성취물이다. 좋고 나쁨의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몸이 겪어보는 신체성에 있다. 남이 좋다고 한 걸 내가 직접 겪어보면 좋지 않을 수 있고, 남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오히려 나에게 좋은 기쁨으로 와닿을 수도 있다.  좋고 나쁨은 관념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가 개입되는 육체적 감정의 문제다. 내가 직접 해봐야 나에게 좋은 욕망인지 나쁜 욕망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욕망의 지향성이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는 내 머리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몸이 판단할 문제라는 게 스피노자나 니체의 공통된 철학적 신념이다.



자기만의 사고로 걸러지지 않는 경험은 맹목이다


어둠이 빛을 잉태하고 있듯이 음지에서 힘겨운 삶을 버텨내고 있는 사람은 몸속 어딘가에 양지를 잉태하고 있다. 음지 속에서 겪는 시련과 역경의 끝에 파국을 알리는 절망적인 신호보다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깨우침의 선물이 하늘을 찌를 듯 한 기세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보나 진전의 성과를 가져다준다. 그럴수록 자기 경험이 독단에 기반한 편파적 신념이나 갈등하는 의견이나 주장과도 타협을 거부하는 외로운 고집으로 흐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는 개방적 신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자기주장만 옳다는 불굴의 의지는 가급적 잠시 괄호 안에 집어넣고 주장의 신뢰성이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경험으로 해석하는 다른 사람의 삶과 책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내 생각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색다른 깨달음의 사유가 집을 짓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개인적인 믿음으로 치부하지 않겠다는 정열, 다시 말해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에서도 진짜라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80쪽). 사에키 유타카의 《인지과학 혁명》에 나오는 말이다. 몸을 던져 깨달은 신념은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자기 고유의 철학과 열정의 산물이다. 적어도 그것은 흔들리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나를 올곧게 나의 길로 걸어가게 만드는 열정이자 정열이다. 그때 비로소 시류에 따라 흔들리던 생각도 점차 중심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아무리 자기 경험으로 건져 올린 자기만의 언어와 이론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그것은 한 사람의 편견의 산물이며 또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바라보면 문제나 한계 투성이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배우는 사람의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격변하는 시기일수록 수많은 이론들이 득세하면서 저마다의 주장으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평가한다. 그 이론들에는 저마다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이 스며들어 있어서 어떤 사연과 배경으로 이론구축을 시작했으며 무엇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한 절박한 목적의식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고 흔들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의 개념과 이론적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 구축한 사유의 식민지에 종속되어 평생을 남들의 사유에 물들어 살아간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자자의 관점을 재해석하는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아무리 책을 읽고 낯선 사람을 만나도도 남의 생각에 물들어 내 생각을 다르게 잉태시킬 수 없다. 깊은 주체적 사고 없는 경험이나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로 깨닫는 각성은 맹목일 수 있다.



자기만의 관점을 갖고 있지 않으면 남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미 누군가가 옳다고 믿는 통념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따라간다. S대학을 가야 성공한다는 통념이 모든 학부모들의 자녀교육관을 지배한다. 왜 S대학을 가야 성공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어보면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더라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은 S대학을 가야 S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S기업에 취업하냐고 물어보면 S기업에 취업해야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말한다. 월급을 많이 받아서 뭐에 쓰려고 하는지 물어보면 돈이 많으면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마음대로 소비해서 무엇을 얻고 싶은 지 물어보면 소비욕망이 충족되어 행복해질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럼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내 맘대로 소비하는 삶을 사는 거라고 대답한다. 그런 삶을 누가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했냐고 물어보면  누군가 “그랬다고 한다더라”라고 대답한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든 게 지금까지 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과거에는 항상 끝났던 곳에 이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생겼다”(11-12쪽).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은 지금까지 경험으로 마주친 고유한 깨우침과 인간관계로부터 배운 뉘우침, 다양한 분야의 책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이 숙성되어 생긴 자기만의 사유체계다. 그런 사유체계가 굳건하게 건축된 사람일수록 자기만의 성장이론으로 자기 신념과 주장을 담아낼 수 있다. 릴케가 말하는 깊은 내면은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이자 똑같은 세상도 다르게 번역하고 해석해서 다르게 표현하는 자기만의 언어가 생겼다는 증거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타성과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함에 시비를 걸고 근본과 근원을 따져보는 물어봄이며, 이전과는 다른 물음을 던져 베일에 가려진 이면을 드러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상념의 날개를 펼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통해 몸으로 다가오는 느낌에 반응하며 색다른 대안을 찾으려는 안간힘이자 이론을 건축하는 모든 실천적 활동 속에서 일어나는 성찰적 자기반성이다. 구체적으로 낯선 환경과의 체험적 마주침, 어제와 다른 사람과의 인간적 마주침, 색다른 책과의 지적 마주침이 어제와 다른 깨우침의 선물을 가져다준다. 그 깨우침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가 삶에서 얻은 깨우침이 기존 사유체계에 어떻게 접목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부각되는 이론적 시사점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사고할 때 주체적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과 기반이 생긴다. 주체적 사유는 이후에서 별도의 장(?장)에서 언급할 관찰, 고찰, 통찰, 성찰의 과정을 선순환하면서 자료를 정보로,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전환시키는 관찰과 과학적 사고과정의 합작품이자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의 수단매체를 선정, 실험하고 모색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배움과 익힘의 과정이기도 하다.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직접 경험하고, 어제와 다른 책을 읽고, 이전과 다른 사람 만나서 깨달은 교훈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개발되는 성취물이다. 아무리 색다른 경험을 하고 경이로운 책을 읽고 놀라운 사람을 만나 어제와 다른 깨우침을 얻었어도 그걸 어제와 다른 언어로 서술하거나 설명할 언어가 부실하거나 부재하다면 깨우침은 몸속에서 침잠된 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잘 것이다. 자아를 어제와 다르게 서술하는 언어가 필요한 이유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ironist)가 되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언어 사용방식에서 벗어나 어제와 다른 언어로 자아를 제서술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틀에 박힌 언어적 점성을 깨부수고 어제와 다른 메타포를 사용하여 자신을 재서술하는 아이러니스트는 기존의 문법을 파기하고 자기만의 언어 사용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이전과 다르게 만들어 나가는 시인이나 소설가와 같은 사람을 지칭한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 따르면 자신의 삶이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상식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삶을 이전과 다른 언어로 재서술하려고 발버둥 치며 안간힘을 쓰는 사람을 아이러니스트라고 한다. 아이러니스트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살거나 다른 사람의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으며 깨달은 삶을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벼리고 벼리면서 끊임없이 자아를 재창조하려는 사람이다.



타인이 개발한 이론은 타인의 경험적 해석틀에 비추어 그 사람 특유의 언어로 번역한 사유체계의 산물이다. 그 이론이 아무리 탁월하고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방식이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경험적 맥락에서 일리 있는 주장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그 누구의 삶으로도 대체불가능한 저마다의 고유한 삶을 살아간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으로 대체가 불가능한 구체적이고 단독적인 삶이다. 그 어떤 언어로도 포착되지 않는 그 사람 특유의 고유한 삶의 색깔과 스타일이 스며들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삶으로 일반화시킬 수 없다. 어떤 사람의 성공 스토리나 이론은 그것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고유한 문제의식과 상황적 맥락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의 이론에 담긴 입장은 그 이론이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처지가 만든 산물이다. 처지에 따라 다른 입장을 담고 있는 이론은 저마다의 주장으로 자기 색깔과 스타일을 드러낼 뿐이다. 처지가 없는 이론은 공허한 관념적 건축물이다. 자기 몸이 직접 개입되고 관여되어 땀과 눈물이 범벅된 특정한 공간에 담인 신체성의 시간이 처참한 지경에도 불구하고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이론을 생산하는 기반이 되는 이유다. 자기만의 이론은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이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이 쓴 책을 만나 자기만의 언어로 재해석되면서 탄생되는 영원한 미완성 작품이다. 경험적 깨달음을 얼마나 적확한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지에 따라 내가 겪어본 신체적 각성이 새로운 언어라는 생각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타성에 젖은 언어일수록 탄성을 자아내기 어렵다.


자기만의 이론을 AI에게 부탁해서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AI는 다른 사람의 문제의식에 기반한 문장을 빌려와서 주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효율을 자랑한다. 자기만의 언어로 창조한 자기만의 주장이 담긴 이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주장 중에서 필요한 문장만 골라 즉석에서 편집한 머리의 언어이자 관념의 언어다. AI는 인공지능이기에 지성을 발휘할 수 없다. 지능은 논리적 추론 통해 이해타산을 따져가며 계산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지성은 지능을 능가한다. 지성은 손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는 측은지심이자 그 아픔으로 치유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살신성인의 미덕이다. 완결된 알고리듬의 논리 속에서 최상의 답을 찾아 나서는 지능과는 지성은 달리 불확실성 속에서 미래 상황을 예측하고 주변 상황을 맥락적으로 사유하는 비판적 성찰능력이다. AI가 사용하는 언어는 자신의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속에서 체득하는 신체성의 경험이 거세된 머리의 언어다. 반면에 인간지성이 사용하는 언어는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난국을 돌파하며 몸으로 겪어낸 구체적인 신체성의 경험적 흔적과 얼룩을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면서 탄생되는 몸의 언어다. 머리에서 맴도는 머리의 언어보다 심장에 꽂히는 몸의 언어가 자기만의 성장이론 개발에 필요한 까닭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신발을 바꿔신고 역지사지로 생각하는 측은지심으로 몸을 던져 겪어내는 언어는 여전히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언어다. 열길 물속은 AI가 과학적 사유와 측정 기술로 깊이를 알아낼 수 있지만 한 길 사람 속은 과학기술로 탐구할 수 없는 인문학적 헤아림의 깊이로 느껴질 뿐이다.



뿌리가 깊어야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 


라캉에 따르면 내가 욕망하는 것은 나의 본래적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라고 한다. 선과 악의 기준에 따라 살다 보면 주인의식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기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언제나 곁눈질하는 삶을 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노예의 인생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욕망의 주체인 나는 주체적으로 자신을 욕망하기보다, 그 사회가 공유하는 욕망의 가치에 휘둘리게 된다. 이 욕망은 오롯한 나의 욕망이 아니기에 아무리 추구해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으로 남는다. 내 몸이 욕망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가치판단 기준에 맞춰 살아가다 보면 무엇인 내 몸에 좋고 나쁜 지조차도 잊고 살아가는 순간이 찾아온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저마다의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는 성공보장 담론을 사회 곳곳에 뿌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그걸 따라가는 욕망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공자도 이런 욕망과 유혹의 물결에 저항하면서 비로소 자기 주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순간을 논어(語)에서`불혹(不惑)'이라고 했다. 타자의 가치관에 미혹되기보다 주체적 가치관을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공자(孔子)는 논어(語)에서`불혹(不惑)'이라 했다. 불혹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모색하고 추구하는 진정한 `나'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일에 몰두할 때 비로소 생기는 삶의 지혜다. 불혹의 시점이 되었다고 해서 어떤 시련이나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외부적 힘에 의해 흔들려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무한정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 나를 흔드는 뿌리가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주체인 `나의 욕망'에 있다는 점이 불혹 이전과 구분된다.


삶이 평탄하지 않은 만큼, 세상에 뒤흔들리며 방황하고 표류한 만큼 경험으로 깨우친 삶의 무늬는 아름답다. 경험의 뜨거운 깨달음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양적 축적이 질적 반전을 일으키는 지점을 만나 주역에 나오는 사자성어, 물극필반物極必反)이 말해주는 것처럼 산전수전의 경험이 역전을 일으키고 마침내 반전이 시작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산전수전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경험과 슬픔을 주는 경험을 알아차리게 만든다. 경험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경전이 아니고서는 흔들리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는 기반이 될 수 없다. 애쓴 만큼 쓸 수 있는 글이 나오는 법이고, 그 글 속에서 자기만의 신념을 담아내는 문장이 파란을 일으키는 감동의 보고가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에 따라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깨달음이 담긴 문장을 건축할 수 있다. 고난을 겪으며 몸을 관통한 흔적을 붙잡고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품이 살갗을 파고들고 폐부를 찌른다.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작가의 작품은 저마다의 삶의 결이 다르고 컬러가 독특하며 자기만의 스타일로 고유한 작품성을 드러낸다. 스스로 이단의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며 76세 자살로 한 생을 마감한 이지(李贄)의 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다. 그가 쓴 세 권의 책 《분서(焚書) I》과 《분서(焚書) II》, 그리고 《속 분서(焚書)》와 그에 대한 평전을 읽다 보면 자신이 겪어낸 고통체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산전수전이 낳은 삶의 결론이다


그에 따르면 찬란한 무늬로 그려지는 글은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내면에 쌓인 감정의 응어리들과 고심을 거듭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을 사색탐험의 산물이다. “세상에서 정말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은 모두 처음부터 문장을 짓는 것에 뜻이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형용하지 못할 수많은 괴이한 일이 있고, 그의 목구멍 사이에 토해내고 싶지만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어,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정경을 보고 감정이 일고 어떤 사물이 눈에 들어와 느낌이 생기면, 남의 술잔을 빼앗아 자기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에 뿌려 씻어내고 마음속의 불공평함을 호소하여 기이한 것을 찾는 사람을 천년만년 감동시킨다. 그의 글은 옥을 뿜고 구슬을 내뱉는듯하고, 은하수가 빛을 발하면서 맴돌아 하늘에 찬란한 무늬를 만드는 듯하다. 마침내 스스로도 대단하게 여겨서 발광하여 크게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니,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다. 차라리 이를 보거나 듣는 사람이 격분하여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글을 쓴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게 할지언정, 차만 끝내 명산(名山)에 감추거나 물이나 불속에 던져 사장시킬 수는 없다…….”(290-291쪽). 옌리에산·주지엔구오의 《이탁오 평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산전수전의 경험과 마주침을 재료로 삼아 나에게 인간적 자극을 주는 사람과의 마주침은 물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쓴 책과의 마주침으로 받은 지적 자극이 내 생각의 용광로에서 서로 뒤섞이면서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가운데 탄생한 융복합적 산물이다. 경험의 깊이가 미천할 경우 자기만의 이론은 자기만의 아집으로 전락할 수 있거나 공허한 관념적 담론으로 허공을 떠다닐 수 있다. 어제와 다르게 경험하지 않고 기존 경험에 안주하는 순간, 경험은 깨달음의 경전으로 작용하지 않고 색다른 발상이나 연상을 발목 잡는 장본인으로 바뀐다. 어제와 다른 책을 읽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내 경험이 바뀌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책으로 받은 인간적 자극과 지적 자극을 해석할 수 있는 경험적 프레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재료나 기반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만약 책과 사람을 어제와 다르게 읽고 만나 깨닫는 깨우침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어내는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심화되고 확산되지 않는다면 사람이나 책과의 마주침은 깨우침으로 축적되지 못한다. 경험(e)이 제로에 가까워질수록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r=reading) 다른 사람을 만나고(r=relationship), 생각(t=thinking)이 깊어져도 경험 곱하기 읽기 곱하기 인간관계 곱하기 생각(e x r² x t)은 e가 제로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뒤에 변수가 아무리 높아져도 결괏값 y, 즉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그만큼 경험은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경전이다. 경전의 깊이와 넓이가 자기만의 성장이론이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경험은 결국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보험이다. 경험과 독서와 인간관계가 생각의 용광로 속에서 뜨겁게 단련되면서 적확한 언어로 벼리는 가운데 치열한 돌파구를 찾아갈 대안을 모색하고 이전과 다른 관점과 시각을 바탕으로 색다른 성장이론을 건축하는 과정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성장원칙이나 원리가 집대성된 근본적인 관점이자 접근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좌우명이나 인생관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좌우명(座右銘, motto)은 흐트러지는 삶을 바로 잡고 나태해지려는 정신에 정문일침의 충고나 조언을 주면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만든 저마다의 슬로건이나 표어같은 문장이다. 예를 들면 존 데이비슨 록펠러의 “성공하려면 귀는 열고 입은 닫아라”나  나폴레온 힐의 “때로는 한 순간의 결정이 인생을 바꾼다”와 같은 주장이 좌우명이다. 평상시에 언어유희를 담은 좌우명을 만들어 강의할 때 사용하는 좌우명도 있다. 법대로 안 되면 방법을 개발하라. 흔들려봐야 뒤흔들 수 있다. 무리하면 마무리가 안 된다. 이러한 좌우명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자신의 인생철학이나 가치관을 담은 문장이다. 좌우명과 다르게 인생론은 톨스토이의 인생론, 세네카의 인생론,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처럼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여러 가지 분야별로 담은 논점이다. 좌우명이 한 두 문장에 담긴 잠언이나 금언, 다른 사람에게는 명언처럼 보이는 짧은 주장이지만 인생론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강이나 행복, 직업이나 일, 인간관계나 죽음 등에 대해 평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나 철학을 자유롭게 집대성해놓은 경전과도 같은 지침 모음집이다. 


이에 반해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체득한 깨우침을 자기만의 적확한 언어로 번역, 왜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나 근본적인 원리가 담긴 이유있는 관점이자 접근이다. 자기만의 성장 이론은 오랜 시간의 경험적 통찰을 기반으로 규칙이나 원칙, 법칙이나 원리를 정립하는 가운데 자기 중심의 확고한 신념과 철학을 기반으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위한 나침반이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좌우명이나 인생론에는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나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기만의 인생이론에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근거, 왜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경험적 통찰력을 기반으로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근본적 원리나 이치가 담겨 있다. 결국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경험의 텃밭에서 경전을 일궈내는 가운데 독서와 인간관계로 나의 경험적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깨닫는 깨우침의 얼룩과 무늬를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과정에서 탄생되는 이론이다. 자기만의 이론적 깊이와 넓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좌우한다. 여기에 독서와 인간관계로 체득하는 깨달음의 깊이와 넓이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적확한 언어로 벼리는 지난한 과정을 통과할 때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근거나 행동 규범을 갖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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