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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은 머리에서 나오지만
감동은 주로 가슴에서 나온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밝히려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살아가는 이치를 이해하는 이상이다


“어떤 혼돈을 대함에 있어 이치를 이론보다 저능한 것으로 보고 이론에만 치중할 경우 굉장히 낭패에 직면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점이다. 이론은 이치라는 분자의 분모이다. 이론이 이치를 나눈 결과가 클수록 그것은 곧 이론의 값어치가 된다. 이치를 지키지 않는 이론은 더러운 당쟁이 되기 쉽다”(338쪽). 이응준의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에 나오는 말이다. ‘이치/이론’에서 분자값이 작고 분모값이 클수록 주어진 수식의 값어치가 커진다. 보다 많은 이치를 적은 이론으로 설명할수록 이론의 값어치는 커진다는 말이다.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가 이치다. 이런 이치를 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면 이론은 무용지물이거나 오히려 이치를 왜곡하거나 탈색 또는 오해를 부르는 장본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모든 이론은 삶의 이치를 적확하게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때 그 위력이나 파급력이 증가할 수 있다. 원리(原理)는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이치(理致)를 의미한다면 이론은 다시 원리라는 분자의 분모가 되는 셈이다. 즉, 사물의 본질을 깊이 살펴보는 이해에서 나온 원리를 잘 설명할수록 이론적 가치는 커지는 셈이다. 이치에 어긋나거나 부합되지 못하는 이론은 주로 관념적 이론이다. 평범한 일상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관찰하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기존 이론으로 참고로 급조한 이론일 때 이치에 어긋나거나 부합하지 못하는 사이비 이론이 양산된다.



이응준 작가가 제안한 ‘이치/이론’을 다른 관점에서 정교화시키면 ‘이해/이치=이론’으로 공식화시켜 볼 수 있다. 일상의 ‘이치’나 원리를 얼마나 ‘이해’하는지에 따라서 이론적 파워가 달라진다. 이치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정도나 수준이 높을수록 이론이 추구하는 이상은 물론 그 이론적 깊이와 넓이도 심화되고 확산된다. 예를 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주장을 근간으로 독서이론을 개발했다고 가정하자. 일본의 우치다 타츠루 작가는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서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 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쪽).”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 말을 독서로 바꿔 쓰기를 하면 “책을 읽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 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로 바뀐다. 기존 독서이론에 따르면 책을 읽지 않는 습관은 게을러서 생긴 나태의 성과다. 이걸 뒤집으면 새로운 독서이론이 탄생한다. 즉 독서를 하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산물이 아니라 근면의 성과다. 책을 읽지 않는 습관이 생긴 이치를 근면과 나태 개념에 비추어 전혀 다른 방향과 각도로 조합하면 책을 왜 안  읽고 있는지를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탄생한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밝히려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데이터 고기로 사육당하는 디지털 동굴에서 빠져나와 세상의 충동적인 정보에 종속된 삶과 결별하고, 자기 존재 이유 또는 내가 살아가는 목적을 밝히려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디지털 동굴은 남들이 가공한 데이터 고기만 먹고 사육당하는 디지털 우리였다. 그 우리에서 벗어나는 길이 급선무다. 남의 정보에 농락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는 서사(narrative)가 필요하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결국 자신이 겪어본 스토리를 일정한 플롯으로 구조화시켜 장편의 서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땀과 눈물의 합작품이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수집, 플롯으로 구조화시켜 나만의 서사를 만들어내려는 집요한 탐구와 끈질긴 의미채굴과 의미부여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파편화된 시간과 정보의 원심력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자기만의 이야기와 서사로 구성되는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밖에서 나를 자극하고 유혹하는 정보에 이끌리지 않고 자기중심을 잡고 세파를 건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런 점에서 “이야기는 가령 존재에 관절을 삽입하는 것과 같다. 그럼으로써 삶의 방향과 지지를 제공한다”(134쪽). 육신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생산하는 이야기는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는 자기만의 이유, 즉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기쁨과 슬픔이 씨실과 날실로 직조되어 탄생된다.



“이론이 이야기인 경우에만 그 이론이 열정(Passion) 일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이 때문에 사유할 수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열정을, 즉 열정이 담긴(Passionierte)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09쪽). 인공지능은 땀을 흘리지 않는다. 100% 남의 이야기를 편집하거나 그걸 기반으로 자기 이야기처럼 만들어낼 뿐이다. 남의 정보에 충동적으로 종속된 체험을 반복하는 한 자기 몸을 던져 땀을 흘리며 겪어낸 서사를 만들 시간이 없다. 늘 남의 이야기에 침을 흘릴 뿐, 자신의 피땀과 눈물이 밴 자기만의 스토리와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평생을 남이 만든 디지털 정보고속도로에 속도전을 펼치다 목숨을 빼앗기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내 몸으로 겪어내는 눈물과 땀의 합작품이다. 나의 신체성이 개입되어 만들어지는 열정적인 서사가 자기만의 성장이론을 구축하는 가장 감동적인 자극제이자 촉진제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자기에게만 통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고집불통의 자가당착적 이론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세상의 언어를 재개념화 시키거나 들끓는 문제의식을 기존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할 때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표현하는 안간힘 속에서 나오는 단독적인 이론(singular theory)이다. 단독적인 이론은 오로지 그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이론이다. 단독적인 이론의 탄생 근거는 단독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단독적인 문제의식이다. 단독적인 이론은 신체성이 삶의 구체성과 만나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비로소 탄생한 이론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가슴에서 나오는 감동의 산물이다


“이야기는 심층적 이완을 가능케 함으로써, 그리고 근원적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치유의 효과를 발휘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목소리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영혼을 어루만지고, 결합을 강화하고, 지지를 보낸다”(112쪽).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야기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정보에 담긴 순간적인 충동적 자극과 욕망에서 벗어나 일정 시간을 머무르며 서로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집중에서 체중이 실린 경청 자세를 갖추고 상대방이 겪은 삶의 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반응해 주고 공감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단순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정보나 스토리만 나열해서는 역부족이다. 정보가 제공하는 충동적 체험이 남긴 흔적보다 본인이 직접 몸으로 겪어본 경험적 교훈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 깨달음의 향연이 펼쳐지는 장편의 서사로 연결될 때 이걸 듣는 사람은 깊은 감동을 느낀다. 인공지능은 남의 이야기를 편집해서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 수 있지만 자신이 직접 겪어본 경험적 깨달음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는 이유다. 감탄은 주로 머리에서 나오지만 감동은 주로 가슴에서 나온다. 논리적으로 편집한 작품은 감탄을 자아내지만 경험적으로 겪어본 이야기는 가슴에 와닿아서 감동적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지금까지 살아본 세계 또는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바라보고 해석하는 전환점이자 자신을 중심에 두고 구심력으로 살아가려는 근본적 결단이다. “이론은 무엇이 여기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존재하고-혹은 존재해야 하고-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원천적, 근원적 결단인 것이다. 이론은 고도로 선택적인 서사이며, “전인미답의 지대”를 헤치며 열어가는 구별의 숲길이다“(91쪽).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에 나오는 말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이 경전으로서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내가 몸으로 겪어본 삶에서 나의 눈물과 땀이 얼룩져 탄생하는 서사의 무늬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서사와 구별하는 숲길을 만드는 기반이며 누구도 걸어가지 않는 길을 걸어가게 만드는 근원적 결단을 촉구하는 까닭이다. 자기만의 서사로 구축되는 자기만의 성장이론이라야 성장규칙이나 원칙, 성장법칙이나 성장원리가 왜 그렇게 맞물려 그런 주장과 메시지를 던 지는를 알 수 있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이 왜 이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지는 그 이론이 탄생한 문맥과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이 없다는 것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경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해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문제의식 없이도 외부적 명령에 따라 작동한다. 인간은 지능으로 지식을 창조하는 수준을 넘어 지성으로 지혜를 창조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지휘할 수 있다. 



자기만의 성장이론은 영원한 미완성 작품이기에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이론적 비판과 공격을 감당해야 되는 위태로운 처지에서 불안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눈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아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줄기 난폭한 바람이 천국으로부터 불어와 그의 날개에 와 부딪치고, 이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이 난폭한 바람이 천사를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린 미래로 날려 보내고, 그동안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125쪽).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어둔 과거를 살아본 경험은 과거 속에서 파국을 연상하지만 그 파국 속에서도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한 줄기 난폭한 바람을 만나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몸을 던지는 과감한 행동이 나를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런 폭풍은 계획된 작품이 아니라 우연히 나에게 날아든 뜻밖의 선물이다. 이런 폭풍우가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어제와 다른 경험과 사람과 책을 만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엄습하는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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