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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에 담긴 '깨뜨림'의 얼룩과 '깨달음'의 무늬

작가는 생각의 씨앗을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발아시키는 문장건축노동자다

작가는 생각의 씨앗을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발아시키는 문장건축노동자다:

100권에 담긴 '깨뜨림'의 얼룩과 '깨달음'의 무늬가 궁금하다

     


나에게 삶은 글이고 글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다. 내가 살아온 삶, 살아가는 삶만큼 나는 삶을 원료로 글을 쓸 수 있다. 때문에 나에게 글을 통해 만들어가는 책 쓰기는 어제보다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삶과 일치한다. 다른 글을 쓰고 싶으면 다르게 사는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사건과 사고가 많을수록 사고를 바꾸는 글짓기가 가능한 까닭이다. 밋밋한 삶은 밋밋한 글을 양산하고 절치부심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괴로운 인생을 살아본 사람은 그만큼 심금을 울리는 앓음다운 문장을 건축할 수 있다. 익숙한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삶은 머리를 쓰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 사는 게 불편하지 않으면 뇌는 평상시대로 정상적인 방식으로 머리를 굴린다. 그럴수록 머리는 비어 간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머리로 생각한 글감을 언어로 번역하는 정신노동이 아니라 고단한 삶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처절한 육체노동이다. 한두 편의 글은 정신노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두 권도 아니고 백여 권을 쓰거나 번역했다면 그건 체력의 산물이다. 체력이 뒷받침되는 뇌력이 발휘하는 괴력에 가깝다. 몸을 쓰지 않으면 글도 써지지 않는다. 몸 쓰는 일이 애쓰는 일이고 애쓰는 일이 글 쓰는 일이다. 



고통은 당사자가 온몸으로 겪어내는 아픔의 무게다


글은 경험과 상상력이 융합되면서 적확한 언어를 만났을 때 비로소 탄생하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경험은 깊고 풍부한 데 그걸 다른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는 내공이 부족하거나 적확한 언어로 벼리지 못하면 파란만장한 경험은 파란을 일으키는 문장으로 탄생되지 않는다. 일상의 경험이 상상력을 만나야 비상한다. 상상력은 머리가 만들어낸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 몸이 움직여 만들어낸 경험적 산물이다. 몸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은 현실 문제를 해결한 가능성이 없는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환상에 불과하다. 책 쓰기는 어제와 다르게 고통받은 경험이 상상력의 용광로에서 녹아드는 과정에서 운 좋게 앓음다운 언어를 만나는 순간 시작되는 글짓기의 지루한 반복이 낳은 부산물이다. 힘들고 어려운 고통이 온몸을 휘감을 때 사람은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한다. 어제와 다르게 살아간 삶만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신체적 움직임이 바뀐 만큼 지적 자극도 바뀌고 생각도 더불어 바뀌는 법이다. 외상으로 받은 고통의 강도가 내상의 밀도를 결정한다. “고통은 새로운 것의 산파이자 완전히 다른 것의 조산자다”(60쪽). 한병철의 《고통 없는 사회》에 나오는 말이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작가의 고통이 없으면 독자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잉태하는 산파가 될 수 없으며, 이전과 다른 생각의 출산을 도와주는 조산자가 되기 어렵다. 자주 경계를 넘어서는 고통과 낯선 마주침이 있어야 새로운 깨우침이 출산되는 까닭이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삶만큼 몸으로 겪어낸 산전수전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글이 나온다.


겪어본 삶만큼 다른 세계를 느낄 수 있고 살아본 삶만큼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다. 글과 글쓰기는 결국 기법과 기교로 포장되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깊이와 넓이만큼 깊고 넓게 읽고 쓸 수 있는 고뇌와 고백의 문제다. 어제와 다르게 글을 읽거나 쓰고 싶으면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어제와 다른 삶만큼 어제와 다르게 읽고 쓸 수 있다. 예컨대 니체 책이 안 읽히고 어려운 까닭과 니체처럼 글을 못쓰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니체처럼 살아본 경험, 니체처럼 극심한 고통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살의 문제다. 살갗을 파고들며 엄습하는 고통은 언어를 거부한다. 고통은 오로지 당사자가 온몸으로 겪어낼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아픔의 무게다. 그 아픔의 무게를 잴 저울도 없을뿐더러 타자에게 전달할 언어도 부실하거나 부재하다. 그럼에도 완벽하거나 완전하지는 않지만 몸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미로를 방황하는 아픔의 깊이를 헤아리려는 몸부림이 내 글쓰기의 뿌리이자 기둥이다. 저마다의 삶이 펼쳐가는 심오한 의미를 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소장 사전에 들어 있는 미숙한 단어로 번역하려는 온전한 몸부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척박한 현실을 차갑지만 따듯한 온기로 데워진 진실로 바꾸기는 불가능하다.



걸작이나 대작도 졸작에서 시작한다


나의 책 쓰기 여정은 부족한 지식을 습득해서 알리는 채움과 전달의 과정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의미와 존재이유를 찾아 나를 세우는 자아 재창조의 과정이다. 앎은 상처 위에 핀 아픔의 열매다. 고정관념이 깨지고 통념이 무너지면서 비명도 질러보지만 대책 없이 부서진 상처의 텃밭에 또 다른 앎의 씨앗이 발아를 위해 용틀임을 한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14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아픔 속에서 어제와 다른 인식의 수단과 만날 수 있고 앎을 향한 욕망을 낚아챌 수 있는 적확한 낚싯바늘을 벼릴 수 있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는 순간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의 경적이 세월의 흐름을 추월할 때에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어슬렁거리며 어제 읽었던 책을 반추하며 유유자적하는 산책자였다. 나 역시 언제나 비슷한 삼라만상을 매일 경험하면서도 다른 감촉으로 상상력을 잉태한 다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력의 촉수가 포착한 다른 문장을 아무 때나 휘갈겨본다. 멋도 모르고 1995년 출산한 국내 최초의 학습조직 관련 책, 《지식경제 시대의 학습조직》은 알량한 앎으로 복잡한 현실을 재단하려는 무모한 뇌세포의 반항이자 항거였다. 환경변화 속도보다 빠르거나 최소한 같은 속도로 학습하지 않으면 조직은 흥망성쇠의 순환을 순간적으로 정지당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주관은 거의 없고 손님들의 관점으로 포장되고 위장되다 이름 모를 골목에서 객사(客死)한 처녀작이었다. 졸작이었지만 그래도 출간을 이어지게 만든 시험작이자 걸작을 향한 출발적이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박사학위를 받으며 단련한 전공의 알 수 없는 깊이로 몇 권의 전공서적을 출간하면서 책을 쓰는 겉맛과 가장된 멋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2007년도 《용기》라는 책을 쓰기 전까지는 기업교육과 인재육성, 학습자 감동을 부르는 교육공학 관련 전공 서적을 30-40여 권 쓰거나 번역했다. 그 와중에 대학원 시절 영어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역하면서 영어 단어에 적합한 적확한 우리말을 사금에서 순금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듯 치열하게 고민하며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번역서 출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핑》, 《에너지 버스》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번역서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저서보다 역서를 출간하는 게 더 어려웠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에 맞는 해석과 해설을 곁들이는 번역이라 거의 제2의 창작이나 다름없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나에게 책을 쓰는 출발점 중의 하나는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는 우발적 마주침이다.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하는 계량적 지식과 시스템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경영이 만난 지식경영(Knowledge Management)은 김건모 노래 제목처럼 잘못된 만남이었다. 지식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과 분리 독립시켜 정보처럼 지식관리 시스템에 저장했다가 불특정 다수가 빛의 속도로 공유할 수 없다. 엄마의 김치 담그는 노하우는 손맛의 차이다. 그 손맛은 엄마와 함께 장기간 비효율적인 합숙훈련을 통해 전수받을 수 있다. 기술을 통해 엄마의 손맛을 빛의 속도로 공유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작품은 땀에 젖은 몸으로 밝혀낸 어둠 속의 출구다 


책을 쓸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뼈저린 각성과 함께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우발적 마주침으로 느닷없이 다가온다. 책을 쓰면서 가봤던 곳보다 가봐야 할 미지의 세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호기심과 불안감이 합작, 무지의 공포에 흔들리는 나를 끝없이 유혹한다.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호기심을 품고 문제의식으로 자라나는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에 이어진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찾는 자기가 눈앞에 나타나듯, 질문으로 개척한 낯선 관문이 나의 지적 탐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까지 쓴 모든 책은 모두 하나의 질문에 대한 집요한 공부의 산물이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글을 쓸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내가 살아온 삶만큼 어제의 삶과 다른 질문을 잉태할 수 있다. 겪어본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질문의 깊이와 넓이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이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100권의 책을 쓰게 만들었을까. 책을 쓰려는 마음이 잉태되기 전부터 정체를 모르는 질문이 안갯속을 헤매다 맑은 대낮에 선명한 문제의식을 품고 땅으로 내려올 때마다 희망이 보이다 절망이 급습한다. 곤란한 질문을 파고들며 과거의 문제의식이 낳은 해결책과 결별을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괴로움 속에서 확신을 흔들리고 도피처로 피신한 관념의 파편들은 절치부심하며 신념의 부름을 기다린다. 답이라고 생각했던 진리는 이제 무리 속으로 미끄러져갈 때 다시 일리 있는 주장으로 무장하기 위해 괴롭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또 다른 탐구여행을 떠난다. 


익숙한 질문이나 쉬운 질문은 답을 빨리 찾아내지만 그 질문으로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공부를 시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낯선 질문을 던지면 설혹 답을 쉽게 찾아내지 못하고 미궁에 빠진다고 해도 그 질문 덕분에 부단한 탐구를 통해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공부가 새롭게 시작되기도 한다. 좋은 질문은 몰랐던 걸 새롭게 깨닫게 해주기도 하지만 알고 있거나 믿었던 신념도 통념일 수 있음을 깨우쳐준다. 관념이나 이념으로 품고 있는 문제의식은 살아내려는 현실의 고뇌를 정화시키지 못한다. 어제와 다른 실천만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난제가 풀리는 돌파구가 마련되고 극한의 한계와 경계 속에서도 뛰어넘을 수 있는 혜안이 생긴다. 지금까지 쓴 책은 적당한 관문을 찾지 못하고 질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문제의식들이 저마다의 실마리를 잡고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하며 뭔가가 안 되는 ‘이유’보다 뭔가를 붙잡고 ‘이해’하려는 간절한 바람과 절실한 시도가 땀에 젖은 몸으로 밝혀낸 어둠 속의 출구다. 질문이 멈추지 않는 한 책에 담아내려는 메시지는 언제나 새로운 이미지를 잉태하고 습관이나 관습의 덫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시작을 살아있는 동안 반복할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살아내려는 능동성과 살아지려는 수동성의 흔적이 기록으로 남겨진다. 모든 순간의 삶을 결정적인 순간으로 담아내려는 상상력이 의지를 만나면서 내 삶을 추동시키는 돌파력으로 거듭난다.



책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시대적 담론이 만드는 이중주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지식과 생태학의 우발적 만남으로 탄생한 책이 바로 2006년도 《지식생태학》이라는 책이다. 지식은 과연 기술적 도움이나 시스템을 기반으로 빛의 속도로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객체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제기는 지식에 대한 생태학적 상상력과 접근논리를 구상하게 만들었다. 《지식생태학》 책은 2018년 개정증보판을 넘어 새로운 버전의 《지식생태학: 생태학, 죽은 지식을 깨우다》 책을 제자들과 공저로 다시 내면서 생태계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고유한 생존방식과 원리를 지식의 창조와 공유 및 소멸과정에 접목하려는 학문적 융합을 시도한 것이다.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는 책은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나무의 생존 및 성장 방식과 원리에 비추어 생태학적 교훈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 보려도 시도다. 우발적 마주침은 지식생태학자와 시인의 만남으로 《곡선이 이긴다》 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 이 책은 어느 날 홍대 근처에 저녁과 반주를 하는 와중에 한 시대의 흐름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곡선을 화두로 지식생태학자는 자연과 인간의 곡선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시인은 곡선에 관한 시를 쓰자는 전격합의로 세상에 낳은 자식이다. 그 후 《곡선으로 승부하라》는 책으로 다시 개정 증보되어 또 다른 곡선적 행복론을 주장하며 재탄생되었다. 한 권의 책이 탄생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저자의 문제의식은 물론 당시의 시대적 담론이 배경으로 담긴다. 곡선이 직선으로 바뀌면서 불행한 인간적 삶의 단초를 발견하고 자연이 품은 곡선에서 행복한 삶의 원형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만나 화두가 곡선이었다.


책은 역발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경제위기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빙하기로 생각하고 성장과 목표를 중심으로 올라가는 성공중심의 패러다임에 대한 반론으로 잘 내려가는 사람이 진짜 성공하는 사람이라는 주장을 담은 《내려가는 연습》이 한 가지 사례다. 이 책은 《끈기보다 끊기》라는 책으로 개정 증보되어 진짜 성공과 행복은 끈기의 산물이 아니라 끊기의 부산물이라는 시대적 담론에 반론을 다시 한번 제기한 작품이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 전문가와 전문성의 역기능과 폐해도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문제의식으로 고민하다 맥가이버 드라마 주인공의 위기탈출방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쓴 책이 《브리꼴레르》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유에서 얻은 브리꼴레르는 현재 가용한 자원을 활용, 임기응변력을 발휘하여 주어진 문제상황을 탈출하는 역발상의 전형이자 융합형 인재의 롤모델이다. 관념적 지식으로 현장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책상 지식인(NBook Smart)보다 실전에서 몸으로 체득한 야전형 전문가(Street Smart)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전문가상으로 설정, 우리 사회의 전문가 문제를 해결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책은 또한 발상의 전환이나 지금까지 익숙하게 알던 개념이나 원리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탄생되는 창작이다. 곡선의 물음표가 품은 상상력으로 직선의 느낌표를 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상상력으로 시작해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한 다음, 그걸 현실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창조가 일어난다는 《상상하여 창조하라》가 바로 이런 재해석의 산물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워 보이는 모든 창작물은 이미 존재하는 기존의 유(有)를 다른 유(有)와 뒤섞어서 새롭게 창조되는 편집의 산물일 뿐이다. 책은 저자의 문제의식만으로 써지지 않는다. 출판사 편집자를 포함, 누군가의 낯선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기존 자료를 정리하는 가운데 독자들에게 공감되는 책이 출간되기도 한다. 2007년도에 출간 《용기》라는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출판사 편집자가 나의 이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필자 중에 내가 적임자라고 판단해서 출간제안을 받고 그때부터 내 삶의 여정을 용기라는 키워드로 되돌아보며 파란만장한 삶의 역사를 재정리해보는 소중한 배움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책 쓰기는 기획을 하고 컨셉을 정한 다음 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쓰기 전의 생각보다 더 의미심장한 배움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정리가 되는 공부과정이다. 완벽한 계획과 준비를 한 다음 쓰기보다는 우선 쓰기 시작하면서 초기 컨셉의 불확실함과 미비함을 다듬어나가는 과정에서 뜻밖의 책이 탄생되기도 한다. 



책은 감각의 고통이 토해낸 얼룩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언어의 임시거처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시름을 희석시켜 샛별을 위한 아침을 매일 준비했음에도 숱한 작별과 이별에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는다. 작별이나 이별보다 더 슬픈 결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간직한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들이 품은 의미를 선별하며 문장을 건축해 보지만 여전히 언어는 하늘을 날며 허공에 펀치를 날릴 뿐이다. 어두워야 읽히는 낮에 쓴 문장들, 여전히 난해한 상형문자로 건축되어 있는 해독의 대상이라 스스로 좌절을 밥먹듯이 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축조한 지혜의 보고에서 며칠 밤 지새우면 세상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는 어설픈 희망을 가져보면서 꾸역꾸역 쓰고 또 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때마다 어둠의 이불을 박차고 세상밖으로 몸을 던져 하늘의 명령에도 불복하지 않고 구름이 안내하는 길로 총총걸음 내디뎌본 적이 얼마나 될까. 서녘하늘에 노을이 잠길 무렵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용기로 두려운 불확실성 앞에 오늘도 어제와 다른 한 문장을 쓰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 한 사람이 한평생 한 권의 책을 내기도 쉽지 않은데 100권의 책을 내기에는 평범한 노력을 넘어 뭔가 비범한 저자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 앞에 정작 나는 할 말이 없다. 밥먹듯이 책을 읽고 밥먹듯이 글을 지으며 애쓰는 노력을 거듭하는 가운데 책이 한 권 두 권 나오는 흔적을 축적해서 기적에 가까운 다산(多産)에 이르게 되었다.


글 쓰기에는 원형(原型)도 전형(典型)도 없다. 오로지 자기만의 글쓰기 ‘전통’을 만들어가기 위해 어제와 다른 ‘진통’만 반복하다 이따금 작은 반전을 일으킬 뿐이다. 글쓰기는 오로지 외상으로 겪은 사건과 사고의 흔적을 더듬어 내상에 맺힌 얼룩을 담아낼 적확한 언어를 찾거나 창조해서 무늬로 직조하는 과정일 뿐이다. 수많은 단어가 낮은 포복 자세로 잠복근무 중인 사전을 뒤적이다 내 마음속에 이는 감정의 물결에 맞는 어떤 단어를 포착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고뇌를 거듭하던 단상이 기존 개념에 나만의 신념이라는 양념을 추가, 기존과 다른 의미로 재개념화를 끊임없이 시도한다. 오감각이 춤을 추며 몸 안으로 파고든 느낌과 생각은 언제나 언어 앞에서 절치부심하다 기존 언어사용방식과 이별하고 타성에 젖어 고루한 사고방식과 결별을 선언한다.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간신히 한 문장에 저마다의 생각의 옷을 입고 단어들이 배열되고 배치된다. 때로는 거짓말의 힘으로 삶의 위기 속에서도 위로의 한 마디 찾으려고 끝도 없는 언어 찾아 삼만리 여행을 떠나지만 언제나 돌아올 때는 빈수레에 하소연만 가득 실린다. 어제보다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글쓰기 방법을 연마하는 게 아니라 어제보다 더 아프게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픔의 밑바닥에서 기어오르려는 절망의 밥을 먹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 되는 엄살을 몸살로 겪으며 배운다. 내가 쓰는 글은 모두 감각의 고통이 토해낸 얼룩이고 길 잃은 언어가 방황을 거듭하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임시거처다.



책은 과거의 경험을 먹고 자라는 추억의 재생산 기지다 


처음으로 내가 살아온 지난 시절의 역경을 경력으로 뒤집어 만든 책이 부끄러운 《청춘경영》이다. 장문의 프롤로그에 내가 살아온 우여곡절과 절치부심한 삶의 고비마다 몸으로 느끼고 깨달은 교훈을 파노라마 방식으로 보여준 덕분에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적인 리뷰나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도 있고 내가 거둔 작은 결실을 포장해서 그것이 하나의 보편적인 성공 비법인양 과장한 흔적도 없지 않음을 고백한다. 과거는 돌이켜 생각할수록 희화되고 위장되어 하나의 사실적 산물에 지나지 않은 사소한 성과를 지나치게 미화시켜 버리는 오류의 온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없었던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쓴 거짓 증언이나 담론은 없다. 지나간 과거가 자꾸 현재로 소환되는 까닭은 과거에 축적한 경험의 흔적이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 직간접적으로도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상상력에도 중요한 밑거름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부실한 사람은 미래도 부실한 이유다. 책은 내가 겪어본 경험 속에 자라는 추억을 먹고 자란다.



지금까지 쓴 책은 대부분 나의 실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이나 교훈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다. 사하라 사막 울트라 마라톤 도전 경험으로 쓴 《울고 싶을 땐 사하라로 떠나라》, 한 해를 정리하면서 나를 괴롭힌 손절 대상 인간관계 경험으로 쓴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자전거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면서 몸으로 느낀 감각적 각성을 에세이 형태로 쓴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라는 책은 모두 책상보다 일상, 머리보다 가슴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생각하며 정리한 경험적 산물이다. 가장 최근 쓴 책 중의 하나인 《2분의 1》은 그동안 다양한 책을 쓰면서 깨달은 점을 집대성, “후반전이 반전”이라는 콘셉트로 인생반전을 일으키는 절반의 철학을 새롭게 정립해서 쓴 책이다. 산만하게 퍼져 있는 생각의 파편을 주워 모아 한 시대의 획을 긋는 담론으로 자리 잡으려면 논리적 구조로 엮어서 하나의 사유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방에 산재하는 다양한 생각을 구슬을 꿰듯이 하나의 프레임과 구조로 엮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람의 인식과 관심에 따라 내 생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지금 내 수준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철학자도 있다. 그 많은 철학자 중에 유독 나의 인식지평과 깊이를 심화시켜 준 12명의 철학자를 불러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나답게 살아가는 삶인지를 묻고 그 답을 찾아 나서는 철학여행을 산물이 바로 《아이러니스트》다. ebs 방송에서 20명의 철학자를 한 사람씩 소환해서 그들이 지금 우리들의 삶에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강의를 한 녹취록으로 쓴 책이다.



지금까지의 작품은 언어광부가 쓴 선입견과 편견의 종합선물센트다

     

책을 쓰면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언제나 가보지 않은 위험한 미지의 길이고, 어떤 풍경으로 그려내도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그림자이며, 여전히 어제와 다른 영감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젖은 우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쓴 작품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겪는 아픔과 슬픔이 씨줄로 날줄로 직조된 얼룩과 무늬의 합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저마다 순간이 겪어내는 삶의 절규로 둔갑해서 밝혀지지 않은 의미가 꽈리를 틀고 잠복근무 중이다. 비바람을 등지고 안간힘을 써가며 흔적을 축적하는 쓰기의 여정에는 간신히 켜진 성냥불을 밝혀보려고 애쓰다 꺼져버린 배경의 어둠이 지난 생의 고달픔을 절망으로 잉태하고 있다. 폭설에 새겨진 아쉬운 발자국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지워져도 새벽 찬이슬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를 지키는 족적도 나에게는 글감을 자극하는 위대한 족적이다. 누가 입을지도 모르는 생각의 옷을 입은 언어들이 동맥을 타고 흐를 때 나의 촉수는 피로써 울분을 토하며 얼룩을 무늬로 만드는 언어적 기적이라는 선물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에 바람을 타고 지나가던 서글픈 소식들이 가지가지 사연으로 매달려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영감은 언제나 불안하지만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탐험을 멈추지 않는다. 얼마나 외로운 사연 많이 품었으면 무거움을 참지 못하고 구름은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비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을 얼마나 많이 맞이했던가.


깊어가는 밤을 붙잡고 몇 자 적어보지만 문장 속의 관념적 언어는 바닷가에 객사(客死)한 모래알이고, 땡 빛에 힘없이 죽어가는 들국화의 쪼그라듦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전히 구체적 맥락성을 품지 못하고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넘나들기 일쑤다. 몇 글자 적어보았지만 그 문장 역시 타성에 젖은 낙엽의 편안한 체념만도 못하다는 불안한 깨달음에 정신은 언제나 불안의 바다에서 파도에게 부서지기 일쑤다. 오늘은 혹시 생각지도 못한 영감이 선물로 다가올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전율하면서도 기꺼이 기록을 거부하는 비애 한 권의 서글픔이 엄습할 때면 쓰는 목적도 상실한 채 주변을 얼마나 서성거렸을까. 읽고 쓰다가 불현 듯 다가오는 깨달음의 전율은 한 두 문장으로 압축되거나 요약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성으로 폐부를 파고든 꺠달음의 무늬는 양극단의 스펙트럼에서 언제나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다 어느 한쪽으로 쏠린 편견과 선입견의 종합선물 세트다. 매순간 흐르는 느낌과 머물러 쉬고 있는 한 조각 단상을 버무려 한 줄이라도 쓰려는 나는 처절함과 처연함 사이에서 처참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의미의 지층을 깨부수는 언어광부였는지도 모른다.



적확한 언어를 만나지 못한 글감은 영감이 아니라 떨어진 감에 불과하다

     

언어광부는 주 5일 근무를 하지 않고 일 년 365일 언제나 잠복 근무하다 그분이 다가오는 순간, 벌떡 일어나 어제와 다른 언어를 채굴한다. 글 감옥에서 강제적으로 압박을 받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영감이 글감으로 나에게 달려와도 적확한 언어를 만나지 못하면 글감은 떨어진 감에 불과하다. 전자신문 칼럼을 2년 동안 주 5회 쓰면서 마감에 시달리는 고통을 넘어 고초를 겪은 흔적이 축적되니까 500회의 칼럼을 쓰게 되었다. 매일 마감에 시달리는 압박감에서 탈출하기 위해 주말에 연구실에 출근해 2주 분량의 10회분 칼럼을 한꺼번에 쓰는 비법을 개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2주는 너무 빨리 다가왔다. 칼럼을 매일 쓰다 보니까 온 세상을 다 칼럼의 재료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문의 헤드라인 제목, 지나가다 만난 특이한 간판 이름, 친구와 대화하다 떠오른 아이디어, 책을 읽다 만난 좋은 문장 등 일상의 모든 곳이 상상력이 자라는 텃밭이었다. 그 결과 탄생된 책이 《생각지도 못한 생각지도》와 《체인지(體仁智)》다. 신문은 물론 월간 잡지에 20여 회 이상 꾸준히 칼럼보다 긴 글을 연재하는 방법도 책으로 엮는 소중한 방법 중의 하나다. 《삶을 질문하라》는 암중모색(暗中摸索)이라는 사자성어를 문중모색(問中摸索)으로 바꿔, 생각의 파문을 일으키는 질문을 던져놓고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는 이슈를 논의하며 풀어쓴 책이다. 


책은 근원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통용되는 방법이나 기법 또는 비법에 관한 실용적 팁을 제시하는 책이 과연 얼마나 효용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우리가 일생 동안 공부를 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공부하고 싶어서 쓴 책이 《공부는 망치다》다. 진짜 공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책상에서 하는 정신노동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생각을 잉태하기 위해 어제와 몸으로 부딪히며 깨우침을 얻는 육체노동이다. 공부에 대한 신화적 사고방식을 깨부수고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기 위한 축제로서의 인생공부가 필요한 이유와 그 방법을 인문학적으로 탐색한 책이다. 공부에 대한 문제의식을 비롯해 어제와 다른 눈으로 시대적 흐름과 현장의 아우성을 관찰하고 경청할 때마다 다가오는 무거운 숙제 중의 하나가 언어문제다. 어제와 다른 언어로 나의 문제의식을 벼리지 않으면 언어가 나를 버린다. 글과 말을 매개로 내 생각을 표현하며 책을 쓰고 강연하는 사람에게 가장 근본적인 경쟁력은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오랫동안의 문제의식을 풀어보고 싶어서 비교적 오랜 기간 언어 공부를 해서 탄생한 책이 《언어를 디자인하라》다. 똑같은 생각도 어떤 언어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느냐에 따라 색다른 생각을 촉발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의미의 강도를 높이고 설득력은 물론 내 주장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이해도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의 언어사용방식을 바꾸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고 구체적인 언어 수준향상 방법으로 다양한 사전도 제시한 책이다. 100권을 쓰면서 완성한 작품에는 모두 저마다의 다른 언어로 다르게 표현하기 위한 안간힘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다급함과 갈급함이 아직도 잠재되어 있다. 언어적 관성과 점성에서 벗어나 낯선 생각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어제와 다른 날 선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과정을 무한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타성에 젖은 언어가 비로소 미소를 띠면서 탄성을 자아내는 감동의 언어로 탈바꿈한다.



모든 이론은 진저리가 만든 잠정적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언어가 타성에 젖어갈 때 작가의 문제의식은 무뎌져간다. 작가가 빠질 수 있는 더 심각한 타성의 늪은 틀에 박힌 질문을 던지는 습관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p.159).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에 나오는 말이다. 작가가 작가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던 때부터다. 작가로서 변신을 거듭하지 않고 정체성의 위기가 시작되는 순간은 쓸 글이 없을 때가 아니라 어떤 글을 왜 써야 되는지에 대한 질문할 충동이 없어지는 시점이다. 질문이 틀에 박히면 글도 틀에 박혀 뜻밖의 사유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전대미문의 질문이 이전과 다른 글쓰기의 관문을 열어간다. 흔들리는 갈대가 온몸으로 바람의 언어를 번역하듯, 낯선 관문이 열리는 순간 몸이 느끼는 감각의 제국은 통제능력을 상실하고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기분이나 느낌, 감정과 정서가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아름다움으로 귀화하려는 발버둥으로 바뀌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상상력의 촉수와 감각의 손길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김소연 시인의 《마음 사전》에 따르면 ‘설렘’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리는 첫눈이고, ‘야속함’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고, ‘애틋함’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릴까 봐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참혹’은 뼈와 뼈 사이에 내린 폭우로 인한 참사다. 설렘의 순간을 맞이해서 속삭이는 언어의 나지막한 흥분을 들을 수 있었고, 야속한 감정에도 너저분한 현실의 이면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애틋한 느낌에도 안타까운 순간을 마다하지 않고 의연하지만 홀연한 외로움으로 삭혀버렸고, 참혹한 아픔에도 처참한 샛길로 빠지지 않고 참사를 모면하기 위해 처절하게 혹한의 추위를 견뎌낸 고단한 여정이 오늘의 작은 작품을 이어서 쓰게 만들었다. 


이전 책은 다음에 나오는 책에 의해 용도폐기를 반복하는 장례식의 산물이다. 미국의 경영철학자 피터 드러커에게 “당신이 쓴 책 중에 제일 좋은 책은 무엇이냐?”라고 물어보았다.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다음에 나올 책”이라고 대답했다. 책에 담인 생각이나 관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이전 책에 담긴 삶은 그때까지 내가 살아본 결론을 담아낸 책이다. 결론은 그때까지 내가 살아본 삶의 주관적 신념과 관점의 산물이다. 결론은 고정된 상태로 정체되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절대 진리가 아니다. 결론은 몸이 움직여 겪어보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생긴 지금 여기서의 반론에 불과하다. 반론은 변론을 거듭하는 가운데 또 다른 결론으로 대체되는 운명을 통해 일생동안 여러 번의 장례식을 치른다. 결론적으로 생긴 이론적 입장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이론 창조자의 문제의식이 몸부림치는 가운데 탄생되는 상황적 일리다. 상황적 일리라 함은 상황이 바뀌면 일리 있는 이론이 아니라 무리가 따르는 기론(奇論)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쓴 책은 내가 신인으로 거듭나면서 어제와 다르게 직면하는 운명적 갈림길에서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넘어서려는 진저리의 산물이다. 그래서 모든 이론은 진저리가 만든 잠정적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책은 나의 삶에 대한 해석이자 독자의 주관으로 해석한 주석(註釋)이다


소설가 이청준은 《예언자》에서 “작가는 지배하기 위해 쓴다”(129쪽)고 했다. 하지만 작가는 늘 현실의 패배자가 되어야 “영원한 신인, 영원한 삶의 순례자로서 언제나 새로운 고행 앞에 다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318쪽)을 받아들이며 고행을 거듭하는 작가의 글쓰기가 이어진다고 했다. 나의 의지와 능력으로 지배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현실은 늘 나를 패배자의 굴레를 덮어씌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처럼 지배와 패배, 순응과 저항, 인정과 부정, 절망과 희망이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롤러코스터를 끝도 없이 오르내리는 진통을 위안 삼아 무의미의 쓰나미를 온몸으로 항거하며 백지의 공포 위에서 오늘도 사투를 이어간다. 고행 없이 글쓰기는 한 발자국도 진행되지 않는다. 100권의 책은 100번의 저마다 다른 고행이 남긴 상처를 어제와 다르게 해석하며 생긴 앎의 상처다. 동일한 경험도 관점이나 시점 또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경험에 대한 색다른 해석으로 불현듯 다가오는 영감이 경험보다 중요한 글감이 되는 까닭이다. 진정한 공부는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바꾸는 정신노동의 혁명이라기보다 편견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몸으로 겪어본 경험의 흔적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육체노동의 고달픔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몸으로 겪어본 고통 자체를 사전에 나와 있는 단어에 기대어 타성에 젖어들지 않고 내가 겪어본 감정으로 기존 언어를 채색해서 생각의 씨앗을 다시 발아시키는 문장건축노동자다. 문장건축에 필요한 사유체계의 재료는 어제와 다른 고행 앞에서 현실의 패배자로 살아본 경험에 대한 재해석이다.


수많은 책을 쓰면서 의도했던 한 가지는 이렇게 하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비법을 알려주기보다 이런 방법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방법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만고불변의 비법이 아니다. 내가 창안해 낸 방법도 목표달성 속도를 빠르게 만들거나 목적지까지 가는 거리를 ‘단축’시킨다기보다 그것이 지금의 내 삶에 던져주는 ‘함축’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나의 입장으로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게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둔다. ‘거리 단축’의 노하우보다 ‘의미 함축’의 근거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다. 내가 영위하는 삶에 비추어 걸어가던 길을 멈춰 서서 방향을 점검하고 목적지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새겨보는 계기를 마련할 때 책은 독자가 살아가는 삶의 맥락에서 재탄생된다. 나는 나 혼자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의 존재의 의미와 이유가 밝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책도 독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와 가치가 발견되고 증명된다. 내가 쓴 책은 나의 삶에 대한 나의 해석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독자의 삶으로 해석되는 주석(註釋)이다. 기정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사실 속에서도 현실이 품고 있는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마침내 사실이 진실로 전환되는 진심 어린 노력이 다름 아닌 책을 통해 증명해보고 싶었던 애쓰기다.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깨달음을 주는 책도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같은 책이라도 다시 한번 써보고 싶을 정도로 끌리는 책도 아직 쓰이지 않았다. 아마 그런 책을 썼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인생 책은 여전히 쓰이지 않고 대기 중일 것이다. 비록 영속적이지 않고 잠정적 일리로 작용하는 진리라고 할지라도 책상머리에서 요리조리 생각해 낸 소갈머리의 산물이 아니라 진절머리가 끄트머리의 위기를 극복하며 이리저리 산통을 겪으며 출산한 자식이다. 진리라는 전통은 일리라는 미완성 신념이 끝도 없이 위협하는 공격에 견디는 순간까지만 유지되는 진통의 역사적 산물이다. 진리는 진저리가 낳은 자식인 까닭이다. 내가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이 나을 읽었다고 고백하는 책을 아직도 쓰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고백하며, 101권째 책으로 출간예정인 《인생이 시답지 않아서》라는 시집이 그런 책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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