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변덕스럽게 흔들리고 있습니까, 변화를 통해 뒤흔들고 있습니까?
나를 휘어잡는 본질적 욕망의 물줄기, 코나투스
당신은 변덕스럽게 흔들리고 있습니까, 변화를 통해 뒤흔들고 있습니까?
흔히 노력이라고 번역되는 코나투스(conatus)는 ‘노력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comor’에서 유래된 명사다. 코나투스는 단순한 노력을 넘어선다. 코나투스는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관성이자 욕망대로 살아가려는 노력'이다. 이때 노력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마주침은 증대시키고, 슬픔을 주는 마주침은 가능한 줄이려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을 통해 내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역량을 증대시키려는 힘은 끈질기게 유지하고, 나의 역량을 감퇴시키려는 힘은 끊어보려는 본능적 힘을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코나투스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이지만 의도적 노력을 통해서 유지하려는 욕망이라기보다 모든 존재가 지닌 선천적 경향성 즉 본성에서 유래된 일종의 필연적인 존재 법칙이다. 여기서 노력은 사물이 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기보다 그 사물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법칙에 따라 관성적으로 움직인다는 의미다.
코나투스는 의식적 노력으로 일어나는 욕망이라기보다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본질적 욕망이다. 코나투스는 모든 존재가 지금 상태를 유지하고 본성대로 살아가려는 선천적인 경향성이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려는 관성을 갖고 있다. 바위처럼 정지해 있는 사물은 정지하려는 본성을 갖고 계속 지금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강물은 계속 흐름을 유지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바람은 여기서 저기로 지나가려고 하고, 비는 구름 속에서 탈출, 땅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그릇은 뭔가를 담아서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안의 내용물을 보존하려는 힘을 지니고 있다. 폭포는 아래로 떨어지려고 하고 컵 안의 물은 컵 안에 머무르려는 관성을 갖고 있다. 만약 바람이나 강물 또는 폭포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면 바람과 강물의 코나투스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바위가 계속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쓴다면 세상은 엄청난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모든 존재는 단지 있는 그대로 계속 존재하려는 관성도 갖고 있지만, 지금보다 나은 완전한 상태를 향해 노력하려는 본성도 갖고 있다. 코나투스는 자기 존재를 지속하려는 관성뿐만 아니라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확장하려는 경향성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만으로는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고 뭔가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저마다 다른 코나투스를 지닌 존재는 부족하거나 결여된 부분을 보완하거나 채워서 보다 완전한 존재로 거듭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코나투스는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마주침은 더 강화시키려고 하고, 자기 보존에 위협적으로 작용하는 마주침에 대해서는 저항하려는 본성을 지닌다. 결국 저마다의 코나투스를 지니고 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 가치를 위협하는 방해요인은 가급적 줄이고 자기 존재 가치를 드높이는 마주침은 더 강화시켜 명랑하고 기쁜 삶을 살아가려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 존재를 존속시키려는 욕망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요인은 제거하거나 파괴하고, 존재를 보전하는 데 유익한 에너지는 유지하려는 노력이나 능력과 직결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실존을 지속시키려는 근원적인 욕망이다. 자기 보존의 욕망인 ‘코나투스’가 실현되면 기쁨이라는 감정이 찾아오고 자기 보존의 욕망이 막히면 슬픔이라는 감정이 찾아온다. ‘코나투스’는 가급적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주는 욕망을 추구하며 자기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본능적 욕망이다. 우리가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도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코나투스’를 찾아내서 그걸 더 강화시키는 공부를 하면서 자기다움을 강화시키는 욕망탐구 여정이다. 자신이 하면 즐겁고 신나서 ‘코나투스’가 더욱 증진되는 길을 찾아간다. 나를 살아있게 만들고 나를 유지시켜 주고 어제와 다르게 발전시키려는 본성도 코나투스다. 코나투스가 위축되면 슬픈 감정이 생기고 우울해지며, 반대로 코나투스가 증진되면 기쁜 감정이 생기고 명랑한 삶이 펼쳐진다. 코나투스는 그래서 존재의 기쁨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존재의 슬픔을 유발하는 경향은 멈추려고 노력한다.
사회가 정한 옳고 그른 도덕적 판단기준이나 가치를 따라가며 슬프고 우울한 삶을 살기보다 나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마주침을 통해 기쁨을 배가시키는 삶을 살아가라는 게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기쁨을 맛보기보다 다른 사람의 코나투스를 흉내 내고 따라가면서 불행한 삶을 반복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본성을 추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성공해서 돈을 벌었거나 경지에 오른 비법이나 인사이트에 중독되는 타성에 젖어 살고 있다. 그 많은 성공비법을 인스타나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서 매 순간 반복해서 공부해도 우리는 기쁜 감정이 흘러넘치기보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 살고 있을까. 나를 기쁨의 정서로 심장 뛰게 만드는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에 이끌려 공사다망하게 살아가면서 다 망하는 지름길로 접어들고 있다.
사물을 비롯해 사람은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 부단히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코나투스를 유지할 수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코나투스와 접촉하면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누군가를 만나면 코나투스가 위축되어 슬픔이 앞을 가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코나투스가 증진되어 기쁨이 흘러넘친다. 나와 마주치면 코나투스가 위축될지 증진될지는 앉아서 이해할 수 없다. 마주쳐봐야 코나투스의 감소와 증진여부를 알 수 있다. 어떤 우발적 마주침 속에서 폭증하는 코나투스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몸속을 파고들며 전율하는 기쁨을 선물로 가져다준다. 마치 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만나는 마주침 속에서 일어나는 코나투스 덕분에 본능적 욕망의 물줄기가 당분간 멈출 기세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이가 피클로 변하듯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는 다른 사람의 욕망을 쫒는 과정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변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변덕’은 언제나 세상의 흐름에 흔들리는 나를 뒤흔들지만 ‘변화’는 내가 세상의 흐름을 뒤흔드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코나투스가 다르면 코나투스를 보존하고 증진하려는 노력도 달라진다. 나에게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마주침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퇴되는 마주침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기 보존 욕망인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독특한 자기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타자의 욕망을 추종하면서 변덕스럽게 뒤흔들리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변덕스러운 추종자의 삶이 남기는 부산물은 침이지만 변화를 추구하는 추월자의 삶이 흘리는 부산물은 땀이다. 세상은 침 흘리는 변덕스러운 사람보다 땀 흘리며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대체불가능한 단독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세상의 욕망에 흔들리는 변덕스러운 삶은 나의 코나투스가 감소하는 슬프고 우울한 삶이고, 나의 본능적 욕망을 따라 변화를 추구하는 삶은 나의 코나투스가 증가하는 기쁘고 명랑한 삶이다. 다른 사람의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나의 욕망대로 살아가며 뒤흔들려면 나를 존속시키려는 코나투스대로 살아야 한다.
대체불가능하고 복제 불가능한 아우라(Aura)는 저마다의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과정에서 아주 강렬하게 사람을 전율하게 만드는 에너지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말하는 아우라가 상실되거나 실종되는 이유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대량으로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은 각자만의 고유한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실체가 지니고 있는 코나투스로 대체가 불가능하다. 코나투스를 잃어버리면 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체 불가능한 코나투스를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아우라가 느껴지는 이유다. 내가 지닌 고유한 코나투스를 누군가의 코나투스로 무한정 복제가 가능하거나 대체가능하다면 나만의 유일무이한 단독성(singularity)은 사라진다. 우리는 태어날 때 그 누구와도 비교불가능하고 대체불가능한 원본의 아우라를 띄고 태어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본질을 지속하려는 본능적 욕망이 있는데 바깥 세계의 자극,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성공논리를 따라가고 성공한 사람이 제시하는 각종 비법이나 인사이트를 무작정 추종하면서 나의 본질적 욕망이 희석되거나 퇴색됨으로써 원본의 본질적 아우라를 상실하고 복사본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