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始作)하지 않으면 시작(詩作)도 되지 않습니다
유영만의 낯선 시작(詩作), 새로운 시작(始作)을 알리는 까닭은?
시작(始作)하지 않으면 시작(詩作)도 되지 않습니다
시름으로 뒤척이는 서글플 저녁 바다
서러움보다 먼저 다가와 되감기는 새벽안개
버티다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끊기지 않는 인연
빈 잔에 갇힌 사연, 달빛에 녹아드는 까닭은?
절망의 뒤안길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리다
우연히 마주친 몇 개의 단어가 웅성거리더니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뀐 채 건축된 한 문장,
그 사이로 무수한 그리움과 회한의 강이 흐르는 까닭은?
소소했던 당연함에 물음표가 달라붙어
사소한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느낌표를 찾아
버려진 말을 찾아 모아 저마다의 비밀을 밝혀보지만
상식을 뒤덮은 몰상식은 여전히 식상함을 배반하는 까닭은?
고백했는데 자백이라고 우기는 바람,
최선의 바다에서 최고라고 유영하다
최악의 선택이라고 우기는 허기진 파도에게
식지 않은 식빵을 건네주며 달래 보지만
무심결에 부서진 밀가루의 사연에 주목하는 까닭은?
타성과 관성에 젖은 언어를 세탁,
옥상 빨랫줄에 매달려 바람을 맞이하지만
배반당한 언어는 반항의 깃발을 내리지 않고
어둠의 그림자를 짓밟으며 새벽을 잉태하는 까닭은?
산문으로 시를 쓰는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말하는 작가를 만나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불확실성의 시간이 급습,
어떤 시 쓰려는 마흔의 마음이
절반의 나이 속으로 들어간 까닭은?
어둠의 이불을 덮고 뒤척이며 기다리다
새벽이슬이 먼동의 체온에 녹아내려도
이미 정해진 쓰임새를 거부하고
명사를 동사로 바꾸어 미끄러지는 의미를 붙잡는 까닭은?
기약이 없는 이별이 매일 같이 반복되고
가망이 없는 미래가 무겁게 앞을 가려도
멈춤은 미덕이 되지 않음을 믿으려는 발버둥,
결코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질문이
고독의 임계점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려는 까닭은?
눈여겨보지 않는 비루한 인생의 뒷골목,
아무도 듣지 않는 비틀거리는 중얼거림
일요일 오후 햇살에서 월요일을 걱정하는 부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당치도 않은 미래를 함부로 염탐한 까닭은?
올려놓은 무게에 눈금이 흔들리는 저울의 운명,
서릿발에 박혀버려 동사한 시의 차가운 마지막,
숱한 넘어짐과 자빠짐으로 생긴 만남의 얼룩,
이 모든 절망의 언어를 희망의 단어로 바꾸려는 까닭은?
성공담에 젖어 담에 걸린 사람들의 허망,
실패담에 짓눌려도 담을 넘어서려는 야망,
먹이를 잡아먹는 짧은 순간의 긴 기다림의 축적,
그 순간에도 시를 놓지 않고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까닭은?
바람에 흔들리며 스스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없는 갈대의 설움,
마침표를 찍고도 끝났음을 모르는 문장의 아쉬움,
쌓인 눈 속의 고독으로 파고드는 햇빛의 야속함,
그 사이에서 시인은 여전히 갈 길을 몰라 떨고 있는 까닭은?
느닷없이 다가오는 저마다의 끈질긴 내력들,
벼랑 끝의 절박함에서도 낭떠러지 기를 굽어보려는 몸부림,
밤잠을 설치면서도 언제 급습할지 모르는 영감의 야속함,
새벽안개 걷히기 전에도 저릿저릿하게 시심이 꿈틀거리는 까닭은?
하기 싫을 때도, 써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어도
오늘도 빚으로 쌓여만 가는 대출받은 언어에서
우울함의 그림자에서 빛나는 자아를 찾아내고
존재를 증명하는 엄중한 자세를 잃지 않는 까닭은?
무의미의 텃밭에서도 의미를 채굴하려는 불길,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암담한 언어의 막막함,
고뇌의 빗장을 열어도 나오지 않는 문장의 비장함,
먼산을 바라보며 그분을 기다려도 결코 다가오지 않는 까닭은?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고
시인(詩人)이 될 수 없음을 시인(是認)했으면서도
능력이 없음을 고통스럽게 수용한 후 내린 결론,
산문으로 시를 써도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준 까닭은?
얼떨결에 실수하고 지나치고
무심결에 소중함을 흘려보냈어도
바람결처럼 눈감아 주고
아침결처럼 영롱함을 잃지 않는 사람
잔물결처럼 작은 파장을 몸으로 간직하고
나뭇결처럼 흔들려도 자기 길을 가며
비단결처럼 얼룩에서 무늬를 직조하는 사람,
미심결에 놓여도 마음을 다잡고
엉겁결에 말실수를 해도
금물결처럼 따듯하게 체온을 높여주는 사람
기승전결(起承轉結) 한결같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잠결에 잠꼬대를 하고
복잡한 사안을 척결하지 못해도
물결처럼 유연하게 흐르며
모두가 그리워하는 마음속의 시로 귀결시키는 사람
흠결이 보여도
동결하거나 미결하지 않고
부결보다 선결로 처리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듬직한 사람
다수결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소수 의견에 귀 기울이며
대결하는 갈등 상황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존중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시인(詩人)이 될 수 없음을 시인(是認)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