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받지 못하면 익명으로 살다 수명을 다한다
호명받는 어른이 되기 위한 10계명:
호명받지 못하면 익명으로 살다 수명을 다한다
계획을 했든 계획에 없었든 우리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모임으로 계획되었던 만남이든 정기적으로 예약되지 않았던 모임이든 사람을 만나는 순간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물어보거나 소원한 관계면 어설픈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의도에 관계없이 쏟아낸다. 함께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상대는 그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초반에는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생각보다 그 이야기가 길어지면 집중력은 급격하게 떨어진다. 자신은 자기주장을 신념을 갖고 자기 경험적 깨달음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펼치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도 단둘이 모인 자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면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은 물론 다음 이야기할 사람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어리석은 발언행위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변에는 생각보다 주제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는 귀를 기울여 들어줄 자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흥분된 마음으로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정말 이런 사람은 일상적 삶에서 가급적 다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어른은 입담의 달인도 있지만 귀명창도 있다.
어른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 짐작(斟酌)하는 사람이다
잘 들어주는 경청이 뭔가를 전달하려는 안간힘보다 어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미덕인 경우가 많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픔과 슬픔이 많다. 내가 모든 걸 체험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나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모를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사람들이 겪어내는 고통의 강도가 도대체 어느 정도 되는지를 실감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오늘의 힘든 삶을 버텨내면서 내일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내려는 노력이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내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는 미지의 세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정해 주는 어른 있으면 좋겠다. 내가 만약 어른이라면 그런 세상이 있다는 사실만 알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쓴 논문으로 세상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처절한 삶의 한 가지 단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초보자면 좋겠다. 절박한 상황에서 느낀 처절함만큼 머리로 아는 앎에 머무르지 않고 몸으로 깨달은 갈급한 각성이나 통찰력만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발 벗고 나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어른이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까지 그 사람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아픔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짐작하는 사람이다.
어른은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못했지만 나보다 힘든 위치에서 온몸으로 사투를 벌이며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힘든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묵과하거나 간과하지 않고 내가 그 위치에 직면했을 때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감내할 수 있을지를 입장 바꿔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찌할 수 없는 곤궁과 난관에 빠져 있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이 겪어본 상처를 내 몸에 아로새기며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모색하고 발 벗고 나서서 내가 할 수 있는 미력한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어른이다.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지만 그래도 과감하게 용기를 내서 뭔가를 하는 사람이 어른의 참다운 모습이다. 어른의 언어는 머릿속에 맴돌던 피상적 생각을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 편집해 내는 가운데 탄생하는 관념의 파편이 아니라 사생결단으로 타자의 아픔을 끌어안고 나도 그 사람이 직면한 고통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온몸으로 체감한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는 언어다.
초보자의 마음으로 배우려고 노력하는 신인이 바로 어른이다
때로는 내 몸으로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불어닥치는 한겨울의 한파를 품은 칼바람이나 폭풍우와 천둥번개를 터뜨리는 예기치 못한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세상의 절박함을 온기 품은 손길로 극복해 보려는 몸부림이나 안간힘은 어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에서 발현되는 숭고한 미덕이다. 지금 나의 앎으로 드러낼 수 없고 간파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을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 관성대로 살아가지 않고 타성에 젖어가는 습관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천박한 언어사용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화살 같은 질문을 던져 탐문하고 심문하는 게 진정한 어른의 사명이자 역할이다. 집요한 질문이 삶의 단편적인 순간을 이어지게 만드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 왜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찼지만 아무도 거기에 항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앞가름 하기에 바쁘기만 한 것일까. 이성복 시인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왜 아무도 아프지 않은 걸까. 질문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안한 심리적 자극을 내 몸속으로 던지지만 낯선 질문을 받는 순간부터 나는 어제와 다른 생각으로 무장,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펼쳐나가려는 비장의 무기를 확보한다.
수직적 위계 관계 속에서 한 번 취직하면 평생 끝까지 가는 시대에 먼저 걸어간 선배들의 경험적 노하우와 인생철학이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하나의 교훈이자 디딤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서 걸어간 사람들이 축적한 업무 노하우나 살아가는 방식은 급격한 기술발달과 AI 시스템의 도입으로 더 이상 차별적 경쟁력이 되기 어려운 시대로 돌변하고 있다. 인생을 앞서 살아본 어른이나 선배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후배도 이제 모두가 초보자의 마음으로 새로운 기술변화가 몰고 오는 업무방식에서 더 낮은 자세로 배우려는 신인의 노력이 요구될 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 스토리도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미지수나 변수의 폭과 깊이는 물론 그들 간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은 과거 그 어느 시대와 비교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달라지고 있다. 먼저 걸어간 어른의 성공방정식은 이제 더 이상 후배들에게 전해줄 삶의 교훈으로 작용하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음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저마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이 다양해지고, 자기 영역에서 나름의 전문성으로 무장하며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연대망에서는 누군가의 전문성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해가 될 수 있다. “전문영역이 다른 호오(好惡)를 중심으로 연대하는 커뮤니티”(송길영, 2024, p.300)라면 자신이 먼저 겪었다는 경험적 깨달음을 일방적으로 전수하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교학상장의 관계 맺음이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호명’되지 않으면 ‘제명’된다: 호명 사회의 십계명
진정한 의미의 어른의 전달력은 과거에 내가 겪어본 경험이나 읽어본 책으로 습득한 정보나 지식을 논리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능력이 아니다.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은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적 깨달음이 탄생한 시대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이것이 다른 상황적 맥락에 적용될 경우 어떤 잠재적 문제점이나 한계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예견하는 힘이며, 다른 대안적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가는 질문을 던져 지금의 정답보다 다른 생각을 잉태하는 길로 이끌어가는 설득 능력에 있다. 내 경험을 기반으로 정답을 제시하거나 확신을 근거로 자기 신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요구하기보다 네가 믿고 있는 신념도 통념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져 새로운 가능성을 탐문하는 여정으로 초대하는 능력이 바로 어른의 전달력이 자리매김해야 될 출발선의 조건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축적한 업무 노하우가 간단한 AI 기술로 대체될 수 있거나 성실하게 꾸준히 지켜온 삶의 규칙이나 원칙, 예를 들면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책을 읽는다는 리추얼 자체로는 호소력을 지닐 수 없다. 근면과 성실로 꾸준히 이어온 업무 방식에서 나만의 작품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다면 소위 말하는 ‘물경력’을 쌓아온 셈이다. 2-30년간 회사생활을 했지만 내세울만한 나만의 독특한 전문성을 축적하지 못하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행정처리 능력을 ‘물경력’이라고 한다. 물경력은 어른으로서 전달할 경력 전문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달한다고 해도 다시 호명되지 못하고 점차 공동체로부터 익명으로 보내다 끝내 제명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태어나서 한 동안을 불분명하거나 불투명한 성명으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구인지, 나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 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자문해 보지만 분명하거나 자명하게 규명되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 이름(성명) 값이 지닌 소중한 의미를 모르고 살다가 점차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욕망이 물결치기 시작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주어진 일, 사회가 정한 기준,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기관이 요구하는 가치관에 맞게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이유가 불분명한 상태로 계속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삶인지를 점차 깨닫기 시작한다. 자기 이름 석자로 자기 존재의 적나라한 경쟁력, 즉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 그 누구에게나 어떤 조직적 보호막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을 넘어 자립할 수 있는 근원적인 동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일부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은인이 된다. 강사는 마찬가지다. 누군가 강사를 불러주기 전에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온몸으로 알리는 무명강사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이 강사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본래 강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주름에 담긴 의미를 이름에 아로새겨 탄생한 콘텐츠로 갈고 닦은 필살기로 승부수를 던지며 명사(名士)를 꿈꾸는 사람이다.
강사는 세상의 누군가로부터 호명되지 않으면 세상에서 제명된다. 어딘가에 소속된 강사가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강사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대중이나 세상은 강사를 호명하지 않을 것이다. 강사가 호명되려면 독특한 경쟁력으로 조명을 받아야 한다. 조명받아야 호명되고 호명되면 강사의 운명도 바뀐다. 강의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하나의 콘텐츠가 아니라 그 강사가 삶의 곡절을 겪으며 언어로 번역해 낸 대체 불가능한 작품이다. 강사의 콘텐츠가 상품이 되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상품을 전달할 강사는 주변에 널려 있다. 내가 하는 강의가 상품이 되는 순간 비슷한 상품을 개발하는 다른 강사와 영원히 무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상품으로써의 강의는 얼마든지 대체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언제 호명될지 기약이 없다. 호명받는 강사가 되려면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작품을 넘어 대체불가능한 명품 콘텐츠를 창조해내야 한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내용이 자기만의 서사를 기반으로 창작되어야 한다.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가 나태를 물리치도록 독려하고,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각오가 바름을 잊지 않도록 경계합니다”(326쪽). 송길영의 《시대예보: 호명사회》에 나오는 말이다. 이름을 걸고 자기 삶을 살아온 사람은 삶의 궤적마다 몸으로 깨우친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 자기만의 고유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로 호명을 받는다. 작가는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자기 관점과 시각으로 해석해 내는 서사가 있다. 자기만의 서사가 있어야 역사로 기록되고, 역사로 기록되어야 만인의 기억에 각인되어 주기적으로 다시 호명된다. 호명되는 사람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경험과 독서를 기반으로 어제와 다른 인간적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깨우침을 부단히 축적한다. 양적 축적이 질적 반전을 일으킨다. 흔적을 축적하는 지루한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AI가 다른 사람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순식간에 창작할 수 없는 피와 눈물과 땀의 합작품이다.
①호명은 지명이자 천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특정한 일의 성격이나 본질을 모색해보고 그 일에 합당한 사람이 도대체 누가 될지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찾아보고 결정하는 규명이자 오로지 이 사람만이 이일을 해낼 수 있다는 증거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자기다움이 자연스럽게 설득되는 증명이다. 호명은 다른 사람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업의 본질에 비추어 밝혀지는 순간이자 이제까지 축적된 작품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증명이 되는 까닭이다.
③호명은 필명이자 서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창작한 작품 속에 담긴 필체를 확인하여 작품세계에 걸맞은 스타일과 컬러를 지칭해서 불러주는 필명이며, 이 작품은 내가 창작한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나의 존재자체를 영원히 기억해 달라는 서명이다. 호명은 그 사람의 특유의 독특한 필명이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순간 부각되는 것이며, 서명이 가미됨으로써 역사적 기록으로도 남게 된다.
④호명은 조명이자 광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의미는 해당 분야의 탁월한 업적과 성취를 남겨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고 받들어 존경받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는 일이다. 나아가 그동안 고생한 경험을 기반으로 창작한 작품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드높여주며 손뼉 쳐주는 광명이자 행방불명이 되지 않는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기록된다는 뜻이다. 내가 개발해서 생긴 대체불가능한 가치로 호명받는 순간 세상은 그 광경을 조명해 주고 나에게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아름답게 기록되는 것이다.
⑤호명은 감명이자 공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전달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전달해서 감동과 감격을 줌으로써 깊은 감명을 받게 하는 일이자 나 혼자만의 감명으로 끝나지 않고 나와 더불어 공동체적 연대망을 구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메시지로 울려 퍼져나가는 공명이다. 공명은 개인적 차원의 감명이 공동체 연대망으로 퍼지는 집단적 공감의 다른 이름이다.
⑥호명은 숙명이자 운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어떤 조건과 환경의 변화가 극심하게 위협한다고 해도 한 사람에게 자명하게 주어진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줌으로써 자신의 숙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판명이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조차도 넘어서라는 언명이다. 숙명도 운명도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의미로 호명되는지에 따라 타고난 숙명과 운명도 자기다움으로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⑦호명은 신명이자 혁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이름값으로 자신의 존재증명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매 순간 받으며 신나게 일을 하며 무대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신명이자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일상이 곧 색다른 성취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혁명의 다른 이름이다. 호명되기 위해서는 우선 신명 나게 일하는 자기만의 업이 존재해야 되고, 그것 자체가 혁명일 때 지속적으로 호명받을 수 있다.
⑧호명은 저명이자 현명(顯名)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의미는 그 사람의 이름값이나 업의 본질에 걸맞은 존경과 격에 맞는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제 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을 전달해 줄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함을 지닌 선견지명(先見之明)한 사람이고 저명하다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준다는 뜻이다. 호명받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저명해져서 부름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물론 역사적으로 남을 만큼 큰 업적으로 세상이 인정하는 공인(公人) 임을 인증한다는 의미다. 호명이 현명(顯名)이 되는 까닭이다.
⑨호명은 성명(姓名, 聲明)이자 생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무리 속에 갇히거나 묻혀서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고 대중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복사본의 인생에서 벗어나 자기다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본명을 불러주는 성명(姓名)이자 어떤 일에 대한 자기의 입장이나 견해 또는 방침 따위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성명(聲明)이기도 하다. 가계(家系)의 이름인 성(姓)과 개인의 이름인 명(名)으로 호명되는 순간을 넘어 자기의 고유한 성명(聲明)을 발표하는 순간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⑩호명은 소명(召命)이자 사명(使命)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사람 이름에 담긴 인생의 올바름을 알아내서 오로지 그 사람이 해야만 되는 일을 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소명이자 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세상을 살아가며 마땅히 수행해야 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표명이다. 소명은 '부름‘이라면 사명은 '보냄'이다. 나는 지식생태학자로서의 소명을 다하며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죽어가는 지식을 살려 삶의 지혜로 되살리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 호명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업의 본질을 소명받는 순간 마땅히 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호명받은 사람은 절대로 변명하지 않고명받는 어른이 되기 위한 10계명:
호명받지 못하면 익명으로 살다 수명을 다한다
계획을 했든 계획에 없었든 우리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모임으로 계획되었든 만남이든 정기적으로 예약되지 않았던 모임이든 사람을 만나는 순간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물어보거나 소원한 관계면 어설픈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의도에 관계없이 쏟아낸다. 함께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상대는 그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초반에는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생각보다 그 이야기가 길어지면 집중력은 급격하게 떨어진다. 자신은 자기주장을 신념을 갖고 자기 경험적 깨달음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오랫동안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펼치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도 단둘이 모인 자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면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은 물론 다음 이야기할 사람에게도 민폐를 끼치는 어리석은 발언행위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변에는 생각보다 주제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는 귀를 기울여 들어줄 자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흥분된 마음으로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정말 이런 사람은 일상적 삶에서 가급적 다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어른은 입담의 달인도 있지만 귀명창도 있다.

어른은 다른 사람 입장에서 짐작(斟酌)하는 사람이다
잘 들어주는 경청이 뭔가를 전달하려는 안간힘보다 어른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미덕인 경우가 많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픔과 슬픔이 많다. 내가 모든 걸 체험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나는 그런 세계가 있다는 걸 모를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사람들이 겪어내는 고통의 강도가 도대체 어느 정도 되는지를 실감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오늘의 힘든 삶을 버텨내면서 내일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내려는 노력이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내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는 미지의 세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인정해 주는 어른 있으면 좋겠다. 내가 만약 어른이라면 그런 세상이 있다는 사실만 알리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쓴 논문으로 세상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처절한 삶의 한 가지 단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보자면 좋겠다. 절박한 상황에서 느낀 처절함만큼 머리로 아는 앎에 머무르지 않고 몸으로 깨달은 갈급한 각성이나 통찰력만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발 벗고 나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사회의 진정한 어른이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까지 그 사람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아픔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짐작하는 사람이다.
어른은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못했지만 나보다 힘든 위치에서 온몸으로 사투를 벌이며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힘든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묵과하거나 간과하지 않고 내가 그 위치에 직면했을 때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감내할 수 있을지를 입장 바꿔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찌할 수 없는 곤궁과 난관에 빠져 있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이 겪어본 상처를 내 몸에 아로새기며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모색하고 발 벗고 나서서 내가 할 수 있는 미력한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어른이다.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지만 그래도 과감하게 용기를 내서 뭔가를 하는 사람이 어른의 참다운 모습니다. 어른의 언어는 머릿속에 맴돌던 피상적 생각을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 편집해 내는 가운데 탄생하는 관념의 파편이 아니라 사생결단으로 타자의 아픔을 끌어안고 나도 그 사람이 직면한 고통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온몸으로 체감한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는 언어다.

초보자의 마음으로 배우려고 노력하는 신인이 바로 어른이다
때로는 내 몸으로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불어닥치는 한겨울의 한파를 품은 칼바람이나 폭풍우와 천둥번개를 터뜨리는 예기치 못한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고 세상의 절박함을 온기 품은 손길로 극복해 보려는 몸부림이나 안간힘은 어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에서 발현되는 숭고한 미덕이다. 지금 나의 앎으로 드러낼 수 없고 간파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을 저마다의 위치에서 자기 본분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 관성대로 살아가지 않고 타성에 젖어가는 습관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천박한 언어사용방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내가 믿고 있는 신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화살 같은 질문을 던져 탐문하고 심문하는 게 진정한 어른의 사명이자 역할이다. 집요한 질문이 삶의 단편적인 순간을 이어지게 만드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 왜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찼지만 아무도 거기에 항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 앞가름 하기에 바쁘기만 한 것일까. 이성복 시인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왜 아무도 아프지 않은 걸까. 질문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안한 심리적 자극을 내 몸속으로 던지지만 낯선 질문을 받는 순간부터 나는 어제와 다른 생각으로 무장,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펼쳐나가려는 비장의 무기를 확보한다.
수직적 위계 관계 속에서 한 번 취직하면 평생 끝까지 가는 시대에 먼저 걸어간 선배들의 경험적 노하우와 인생철학이 뒤를 따르는 후배들에게 하나의 교훈이자 디딤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서 걸어간 사람들이 축적한 업무 노하우나 살아가는 방식은 급격한 기술발달과 AI 시스템의 도입으로 더 이상 차별적 경쟁력이 되기 어려운 시대로 돌변하고 있다. 인생을 앞서 살아본 어른이나 선배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후배도 이제 모두가 초보자의 마음으로 새로운 기술변화가 몰고 오는 업무방식에서 더 낮은 자세로 배우려는 신인의 노력이 요구될 뿐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 스토리도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는 미지수나 변수의 폭과 깊이는 물론 그들 간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은 과거 그 어느 시대와 비교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달라지고 있다. 먼저 걸어간 어른의 성공방정식은 이제 더 이상 후배들에게 전해줄 삶의 교훈으로 작용하지 않는 시대가 되고 있음을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저마다 잘할 수 있는 영역이 다양해지고, 자기 영역에서 나름의 전문성으로 무장하며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연대망에서는 누군가의 전문성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해가 될 수 있다. “전문영역이 다른 호오(好惡)를 중심으로 연대하는 커뮤니티”(송길영, 2024, p.300)라면 자신이 먼저 겪었다는 경험적 깨달음을 일방적으로 전수하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 교학상장의 관계 맺음이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호명’되지 않으면 ‘제명’된다: 호명 사회의 십계명
진정한 의미의 어른의 전달력은 과거에 내가 겪어본 경험이나 읽어본 책으로 습득한 정보나 지식을 논리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능력이 아니다.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은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적 깨달음이 탄생한 시대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이것이 다른 상황적 맥락에 적용될 경우 어떤 잠재적 문제점이나 한계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예견하는 힘이며, 다른 대안적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가는 질문을 던져 지금의 정답보다 다른 생각을 잉태하는 길로 이끌어가는 설득 능력에 있다. 내 경험을 기반으로 정답을 제시하거나 확신을 근거로 자기 신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요구하기보다 네가 믿고 있는 신념도 통념일 수 있음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져 새로운 가능성을 탐문하는 여정으로 초대하는 능력이 바로 어른의 전달력이 자리매김해야 될 출발선의 조건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축적한 업무 노하우가 간단한 AI 기술로 대체될 수 있거나 성실하게 꾸준히 지켜온 삶의 규칙이나 원칙, 예를 들면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책을 읽는다는 리추얼 자체로는 호소력을 지닐 수 없다. 근면과 성실로 꾸준히 이어온 업무 방식에서 나만의 작품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다면 소위 말하는 ‘물경력’을 쌓아온 셈이다. 2-30년간 회사생활을 했지만 내세울만한 나만의 독특한 전문성을 축적하지 못하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행정처리 능력을 ‘물경력’이라고 한다. 물경력은 어른으로서 전달할 경력 전문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달한다고 해도 다시 호명되지 못하고 점차 공동체로부터 익명으로 보내다 끝내 제명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우리는 태어나서 한 동안을 불분명하거나 불투명한 성명으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구인지, 나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일, 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자문해 보지만 분명하거나 자명하게 규명되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 이름(성명) 값이 지닌 소중한 의미를 모르고 살다가 점차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욕망이 물결치기 시작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주어진 일, 사회가 정한 기준,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기관이 요구하는 가치관에 맞게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이유가 불분명한 상태로 계속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삶인지를 점차 깨닫기 시작한다. 자기 이름 석자로 자기 존재의 적나라한 경쟁력, 즉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 그 누구에게나 어떤 조직적 보호막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을 넘어 자립할 수 있는 근원적인 동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의 일부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은인이 된다. 강사는 마찬가지다. 누군가 강사를 불러주기 전에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온몸으로 알리는 무명강사에 불과했지만, 사람들이 강사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 본래 강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주름에 담긴 의미를 이름에 아로새겨 탄생한 콘텐츠로 갈고 닭은 필살기로 승부수를 던지며 명사(名士)를 꿈꾸는 사람이다.
강사는 세상의 누군가로부터 호명되지 않으면 세상에서 제명된다. 어딘가에 소속된 강사가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강사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대중이나 세상은 강사를 호명하지 않을 것이다. 강사가 호명되려면 독특한 경쟁력으로 조명을 받아야 한다. 조명받아야 호명되고 호명되면 강사의 운명도 바뀐다. 강의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하나의 콘텐츠가 아니라 그 강사가 삶의 곡절을 겪으며 언어로 번역해 낸 대체 불가능한 작품이다. 강사의 콘텐츠가 상품이 되면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상품을 전달할 강사는 주변에 널려 있다. 내가 하는 강의가 상품이 되는 순간 비슷한 상품을 개발하는 다른 강사와 영원히 무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상품으로써의 강의는 얼마든지 대체가능하기 때문에 나는 언제 호명될지 기약이 없다. 호명받는 강사가 되려면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작품을 넘어 대체불가능한 명품 콘텐츠를 창조해내야 한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내용이 자기만의 서사를 기반으로 창작되어야 한다.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겠다는 각오가 나태를 물리치도록 독려하고,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각오가 바름을 잊지 않도록 경계합니다”(326쪽). 송길영의 《시대예보: 호명사회》에 나오는 말이다. 이름을 걸고 자기 삶을 살아온 사람은 삶의 궤적마다 몸으로 깨우친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 자기만의 고유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로 호명을 받는다. 작가는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자기 관점과 시각으로 해석해 내는 서사가 있다. 자기만의 서사가 있어야 역사로 기록되고, 역사로 기록되어야 만인의 기억에 각인되어 주기적으로 다시 호명된다. 호명되는 사람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경험과 독서를 기반으로 어제와 다른 인간적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깨우침을 부단히 축적한다. 양적 축적이 질적 반전을 일으킨다. 흔적을 축적하는 지루한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AI가 다른 사람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순식간에 창작할 수 없는 피와 눈물과 땀의 합작품이다.

①호명은 지명이자 천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사람밖에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한 사람을 지정해서 부르는 지명이고, 이 일은 이 사람이 해야 될 수밖에 없다고 세상에 선언하는 천명이다. 지명당하고 천명되는 순간,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이름값에 상응하는 미션을 수행하면 다시 호명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명되려면 두각을 나타내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대미문의 유일한 내가 되어야 하고, 다시 그것이 인정되면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면서 한 사람의 이지미 지는 사회적으로 각인된다.
②호명은 규명이자 증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특정한 일의 성격이니 본질을 찾아보고 그 일에 합당한 사람이 도대체 누가 될지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찾아보도 결정하는 규명이자 오로지 이 사람만이 이일을 해낼 수 있다는 증거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자기다움이 자연스럽게 설득되는 증명이다. 호명은 다른 사람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업의 본질에 비추어 밝혀지는 순간이자 이제까지 축적된 작품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증명이 되는 까닭이다.
③호명은 필명이자 서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창작한 작품 속에 담긴 필체를 확인하여 작품세계에 걸맞은 스타일과 컬러를 지칭해서 불러주는 필명이며, 이 작품은 내가 창작한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나의 존재자체를 영원히 기억해 달라는 서명이다. 호명은 그 사람의 특유의 독특한 필명이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순간 부각되는 것이며, 서명이 가미됨으로써 역사적 기록으로도 남게 된다.

④호명은 조명이자 광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의미는 해당 분야의 탁월한 업적과 성취를 남겨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고 받들어 존경받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는 일이다. 나아가 그동안 고생한 경험을 기반으로 창작한 작품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음을 드높여주며 손뼉 쳐주는 광명이자 행방불명이 되지 않는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기록된다는 뜻이다. 내가 개발해서 생긴 대체불가능한 가치로 호명받는 순간 세상은 그 광경을 조명해 주고 나에게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아름답게 기록되는 것이다.
⑤호명은 감명이자 공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전달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전달해서 감동과 감격을 줌으로써 깊은 감명을 받게 하는 일이자 나 혼자만의 감명으로 끝나지 않고 나와 더불어 공동체적 연대망을 구축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른 메시지로 울려 퍼져나가는 공명이다. 공명은 개인적 차원의 감명이 공동체 연대망으로 퍼지는 집단적 공감의 다른 이름이다.
⑥호명은 숙명이자 운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어떤 조건과 환경의 변화가 극심하게 위협한다고 해도 한 사람에게 자명하게 주어진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내줌으로써 자신의 숙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판명이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조차도 넘어서라는 언명이다. 숙명도 운명도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의미로 호명되는지에 따라 타고난 숙명과 운명도 자기다움으로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

⑦호명은 신명이자 혁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이름값으로 자신의 존재증명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매 순간 받으며 신나게 일을 하며 무대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신명이자 어제와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일상이 곧 색다른 성취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혁명의 다른 이름이다. 호명되기 위해서는 우선 신명 나게 일하는 자기만의 업이 존재해야 되고, 그것 자체가 혁명일 때 지속적으로 호명받을 수 있다.
⑧호명은 저명이자 현명(顯名)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의미는 그 사람의 이름값이나 업의 본질에 걸맞은 존경과 격에 맞는 대우를 해줌으로써 이제 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을 전달해 줄 수 있을 정도로 현명함을 지닌 선견지명(先見之明)한 사람이고 저명하다고 인정해 주고 칭찬해 준다는 뜻이다. 호명받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저명해져서 부름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물론 역사적으로 남을 만큼 큰 업적으로 세상이 인정하는 공인(公人) 임을 인증한다는 의미다. 호명이 현명(顯名)이 되는 까닭이다.
⑨호명은 성명(姓名, 聲明)이자 생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무리 속에 갇히거나 묻혀서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고 대중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복사본의 인생에서 벗어나 자기다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본명을 불러주는 성명(姓名)이자 어떤 일에 대한 자기의 입장이나 견해 또는 방침 따위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성명(聲明)이기도 하다. 가계(家系)의 이름인 성(姓)과 개인의 이름인 명(名)으로 호명되는 순간을 넘어 자기의 고유한 성명(聲明)을 발표하는 순간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⑩호명은 소명(召命)이자 사명(使命)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 사람 이름에 담긴 인생의 올바름을 알아내서 오로지 그 사람이 해야만 되는 일을 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소명이자 한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세상을 살아가며 마땅히 수행해야 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표명이다. 소명은 '부름‘이라면 사명은 '보냄'이다. 나는 지식생태학자로서의 소명을 다하며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죽어가는 지식을 살려 삶의 지혜로 되살리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 호명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업의 본질을 소명받는 순간 마땅히 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호명받은 사람은 절대로 변명하지 않고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호명은 한 사람의 좌우명이 집대성되어 마침내 세상으로 나와 내 성명의 가치를 인정해 주고 호칭해 주며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내가 그 부름에 응답할 때 비로소 일어나는 내 삶의 혁명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서도 나를 구원하는 구명이 호명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하는 시대에도 입신양명(立身揚名)할 수 있는 기반이 바로 호명을 받는 순간 구축된다. 호명받은 사람은 자신의 안위와 행복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호명은 공동체의 발전과 행복을 위해 소명을 받들고 사명을 다하라는 천명이다. 호명받는 순간 자기 업의 본질이나 자기다움이 분명하며 밝혀지며, 작품으로 일궈낸 그동안의 노고가 깊고 은은한 여명으로 남아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총명한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인생의 등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