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은 배달(配達)이나 닦달이 아니라 숙달(熟達)이나 창달(暢達)이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가 제시하는
어른의 전달력에 대한 10가지 은유적 사유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가 생각하는 어른의 전달력이란 무엇일까? 단순한 메시지 전달이나 일방적 강의가 아니라 감동적인 깨달음의 향연이 존재하고 의미가 심장에 꽂혀 의미심장해지는 어른의 전달력은 무엇이 어떤 점에서 다를까? 유영만 교수가 생각하는 전달이란 메시지의 단순한 배달이나 닦달이 아니라 깊은 내공으로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주는 숙달이나 창달이다. 생태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만이 전달할 수 있는 독창적인 메시지를 10가지 상징적 배움의 대포, 메타포에 비추어 정리해봤다.
전달은 배달(配達)이나 닦달이 아니라 숙달(熟達)이나 창달(暢達)이다
①어른의 전달력은 숲길(forest trail) 안내자다
②어른의 전달력은 흐르는 강물(flowing river)이다
③어른의 전달력은 안갯속 등대(lighthouse in fog)다
④어른의 전달력은 씨앗터(苗板, seedbed)이다
⑤어른의 전달력은 낯선 창문(window)이다
⑥어른의 전달력은 오솔길(narrow path)이다
⑦어른의 전달력은 퇴비 더미(compost pile)다
⑧어른의 전달력은 생채기(scratch)다
⑨어른의 전달력은 거울(mirror)이다.
⑩어른의 전달력은 거미줄(spider)이다
①어른의 전달력은 숲길(forest trail) 안내자다
어른의 전달력은 왜 ‘숲길’인가? ‘숲길’은 빠르고 곧은 길이 아니다. 구불구불하고 변화무쌍하며 자연을 해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지만 독립된 생명체로서의 저마다의 길을 걷는 자를 초대하는 조용한 길이다. 어른의 전달력도 마찬가지다. 정답을 강요하거나 끌고 가는 힘이 아니라, 학습자가 자기 걸음으로 사유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조용한 동행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에서 ‘길’을 단순한 경로가 아니라 존재와 사유의 방식으로 보았다. “길은 사유 그 자체다.”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길을 걷는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어른은 지식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과 사유의 길을 함께 걷는 동행자다. 숲길처럼, 지식은 천천히, 조용히, 자연 속에서 열린다. 어른은 ‘답을 알려주는 지도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숲길 안내자’다. 숲길 안내자는 무위자연과 도(道)의 철학을 강조하는 도가사상과도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숲길은 자연의 결을 따라 만든 길이다. 이는 도가(道家) 철학, 특히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道)’는 억지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흐름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강요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청중이 스스로 길을 느끼고 따라가도록 돕는 ‘무위자연(無爲自然)’적 방식이어야한다. 지도하지 않고 인도하고, 가르치지 않고 깨닫게 한다.
숲길은 일방적인 길이 아닌, 함께 걸으며 만들어지는 길이며, 매번 걸을 때마다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느껴지는 길이다. 어른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길을 나도 걸어봤어. 너도 네 속도로 걸어봐.” 어른은 앞서 걷는 자가 아니라, 옆에서 함께 걷는 동행자다. 숲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성과 다층성을 보유한 은유적 의미의 집결체다. 수많은 생명들이 공존하고,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어디가 끝인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철학과 연결된다. 지식을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다르게 해석되고, 흐르며, 다양하게 구성되는 네트워크로 본다. 숲길 안내자처럼 어른의 전달력도 단순한 정답이 아니라 복잡한 맥락을 이해하고 감각하게 만드는 안내여야 한다. 숲길에서는 조용히 기다려야 하고, 멈춰 서기도 하며, 함께 주변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것이 존중의 교육, 경청의 전달이다. 숲길 안내자는 목적지에 이르는 빠른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아니라 숲 길을 걷는 '과정'에서 만나는 색다른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이다.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삶을 함께 걸으며 의미를 만드는 동행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답을 주지 않고 길을 열어준다.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며 강요하지 않는다. 함께 걷고, 함께 멈추며, 함께 바라본다. 복잡한 세계를 함께 감각하고 질문한다. 정해진 지식이 아닌 존재를 만나며 의미를 그 길 위에서 만들어 나아간다.
②어른의 전달력은 흐르는 강물(flowing river)이다
강물은 멈추지 않고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강물은 장애물을 만나면 불평불만을 털어놓지 않고 수용하고 인정하거나 돌아서 우회로를 선택한다. 강물은 흐르면서 다른 지류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조건 없이 받아주며 궁극적인 목적지인 바다로 흘러간다. 강물은 단순히 물이 고여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르며, 다양한 지형을 지나며, 다른 존재(들판, 숲, 인간, 동물)를 살리고 변화시키며, 자신도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진화한다. 어른의 전달력도 마찬가지로, 고정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며 타인과 관계를 맺고, 새롭게 의미를 생성하는 역동적 힘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라고 한 것처럼 지식과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속에 존재한다. 어른의 전달력도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다. 경험은 하루하루 다르고, 전달되는 의미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강처럼, 지식은 흐르고 다시 구성된다. 들뢰즈 & 가타리(Deleuze & Guattari)의 《천 개의 고원》에 따르면 인간의 앎을 고정된 ‘주체’로 보지 않고,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깨우침의 산물로 본다. 그들에 따르면 지식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고정된 교훈이 아니라, 다양한 변수들의 관계 안에서 리좀처럼 퍼지고 부단히 생성되는 흐름이다.
강물은 처음에는 좁은 개울이지만, 점차 넓어지고 깊어지며 수많은 지류와 만나 하나의 복잡한 생태계를 만든다. 어른의 전달력도 고정된 시점에서 정체된 지식을 단순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시간 속에서 쌓여온 흐름이고, 다른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새로운 배움의 길을 형성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정이다. 강물은 주변의 비, 눈, 샘물 등 다양한 요소를 수용하면서 더 깊고 넓어지듯이 어른의 전달력은 고정된 물통이 아니라, 대화와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한다는 철학적 인식이다. 강은 주변에 생명을 주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한다. 철학적으로는 이것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윤리와 무한》에서 말하는 지식의 윤리성과 연결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본다. 어른의 전달력은 단지 정보 전달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 윤리적 책임을 갖는 행위다. 강처럼, 어른은 연결자이며 다른 생명을 살리는 존재다. 강물은 바위를 피하고, 때로는 굽이치며, 때로는 떨어지기도 하며 자신의 흐름을 탄력적이면서도 유연하게 이어간다. 강물이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강물의 존재이유와 방식이 달라지듯이 어른의 전달력은 이러한 상황적 맥락에 맞게 적확한 말과 행동으로 유연하게 대응하는 지혜를 포함한다. 즉, 어른의 전달력은 고집스럽게 한 번 설정한 자기주장을 알고리즘터럼 외골수로 주장하지 않고, 필요할 때 멈추고, 돌아가며, 다시 흐를 줄 아는 능력이다.
③어른의 전달력은 안갯속 등대(lighthouse in fog)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물론 현재부터 미래로 향하는 삶 역시 불확실성과 혼돈 속에서 방향을 찾아가려는 저마다의 발버둥이자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시대일수록 단언하거나 확신을 근간으로 단도직입적 주장을 하는 전달도 필요하다. 하지만 의미의 사각지대나 딜레마 상황이 일상이 되는 세계에서는 분명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며 함께 생각하며 고민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지는 전달이 임팩트가 더 높아질 수 있다. 저마다 놓인 상황이 다르고 고민하는 사안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걸 해결하는 문제가 놓인 상황도 복잡하고 모호하며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확실한 근거나 기반을 찾아가려고 하고 딜레마 상황에서도 전대미문의 질문을 던져 벗어나고 싶은 근본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불확실성, 모호함, 복잡성을 상징하는 안갯속에서 청자도 자기만의 선입견, 배경지식, 감정의 안갯속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을 때일수록 전달자 역시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확신하며 자기 생각을 직설적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아런 점에서 핵심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어둠과 안갯속에서 길을 비추는 행위와 같다.
안갯속 등대는 객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설명’하지 않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가기 위한 최소한의 ‘방향’을 제시한다. 등대가 배를 움직이지 않는다. 등대는 단지 빛을 비출 뿐, 그 빛을 어떻게 해석하고 나아갈지는 수신자의 몫이다.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전달자는 등대를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에 비추어 전달하지만, 그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청자의 자율성에 달려 있다. 이는 현상학적 해석학(Hermeneutics), 특히 가다머(Gadamer)가 말한 해석의 주체성과 연결된다. 핵심 메시지는 논리적 설명이 아닌 등대의 '불빛'처럼 다가온다. 진정한 핵심 메시지는 때로 논리로 설명되기보다, 직관과 통찰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안갯속에서 등대 불빛은 정확히 어디를 비추는지는 모호하지만, 그 빛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방향의 단서가 된다. 이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도(道)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도교적 인식론과 닿아 있다. 등대는 크지 않고, 소리치지 않지만 존재 자체로 큰 신호와 상징이 된다. 핵심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짧고 조용한 한마디가 평생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④어른의 전달력은 씨앗터(苗板, seedbed)이다
씨앗터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기 위해 흙을 고르고 다듬어 준비한 땅입이다. 씨앗터는 손질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못자리 사이를 떼어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놓은 구역이다. 진정한 의미의 전달은 정답을 심는 것이 아니라 씨앗터에 질문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지식도 다른 사람의 지식을 무조건 외우는 게 아니라 지식의 씨앗을 나의 씨앗터에 뿌려서 싹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키워 지식의 열매를 맺게 만드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결과다. 전달을 통해 내 몸에 심어진 지식의 씨앗은 숱한 경험의 장면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질문의 씨앗을 뿌리는 힘이며, 다른 존재가 자라날 수 있도록 ‘준비된 공간’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한다. 어른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사유와 성장이 시작될 수 있는 '밭'을 만드는 존재다. 정답은 어른이 전달하는 게 아니라, 낯선 생각이 잉태되는 질문의 씨앗을 뿌려주면 거기서 자기만의 고유한 해답이 자란다. 질문은 낯선 사유를 시작하게 하지만, 답은 사유를 멈추고 그 틀 안에 가둔다. 지식을 심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진정한 전달력의 원천이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도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경험의 재구성이며 질문은 사고를 확장하게 만드는 핵심 도구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도 《차이와 반복》에서 인간은 고정된 명사적 실체가 아니라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며 ‘되는(becoming)’ 역동적 동사이며, 고정된 답이 아닌 끊임없는 차이와 생성 속에서 진정한 앎이 발생한다고 했다. “지식의 씨앗이 내 몸에서 자란다”는 표현은 지식이 단순한 정보가 아닌 경험과 삶 속에서 체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메를로퐁티도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지각과 존재의 중심. 지식은 몸과 삶을 통해 ‘살아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어른의 전달력은 추상적인 지식을 관념적으로 설명하는데에서 나오지 않고 우여곡절의 삶에서 우러난 실천적이고 체화된 지혜로 느껴지는 대체불가능한 설득력에서 나온다. 어른은 경험이라는 토양을 가지고 있고 이야기와 언어라는 도구를 가지고 있으며 존재를 성찰할 수 있는 감정적·존재론적 성숙을 갖추었고 다른 존재를 위한 배려의 공간을 만들 책임을 지닌 존재다. 어른의 전달력은 ‘권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다름과 차이를 깊이 인정하고 수용하며 환대(hospitality)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저마다의 질문이 자랄 수 있도록 씨앗터전을 일궈주는 힘이다.
⑤어른의 전달력은 낯선 창문(window)이다
창문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이자,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viewpoint)이다. 창문은 내면세계와 외부 현실 사이를 연결하거나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문이기 때문에 창문을 바꾸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도 바뀐다. 어른의 전달력은 무언가를 이전과 다르게 '깨닫는' 순간, 빛처럼 들어오는 인식의 틈새를 열어주며 고정관념이나 통념에 갇혀 있던 종래의 인식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의 해방을 북돋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창문은 인식의 해방을 열어주는 새로운 관문이기도 하지만 고정된 틀에 의해 제한된 시야를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완전히 보여주지 못하는 인식의 왜곡이 일어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인식의 왜곡에서 벗어나 인식의 해방으로 이르는 탐문이 시작되는 촉발점이 되려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체득되는 능력이다. 창문은 미지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상징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미지의 세계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호기심을 늘리고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전달의 핵심은 늘 보던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데 있다. 똑같은 것, 익숙한 것을 늘 봤다고 생각하지만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이다. 익숙했던 개념들을 돌리고 헹구고, 새로운 감각으로 꺼내놓는 세탁기처럼 전달력은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빅토르 시클롭스키는 문학의 역할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닮았다. 어른의 전달력은 익숙한 말을 낯설게 전하는, 즉 낯설게 하기에서 빛을 발한다. 어른들은 삶을 오래 살았기에, 타성에 젖어있거나 진부한 말들 속에 새로운 시선을 넣어 전달하려 한다. 즉, "너도 알겠지?"라는 방식이 아니라, "한 번 다르게 생각해 봐"라는 방식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당연함을 부정하고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그래서 어른의 말은 ‘이상한’게 아니라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창문이다. 늘 바라보던 창문으로 밖의 세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창문으로 이제까지 바라보았던 세상을 색다르게 바라보려는 관점의 전환이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하려는 노력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책에서 배운 앎보다 삶에서 우러난 깨달음이기에,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종종 이해하기 어렵거나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건 단순히 지식의 차이가 아니라 ‘겪어본 경험의 깊이와 넓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어른은 전달력은 직접 말하기보다 비유나 유추, 새로운 개념이나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쉽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사유체계로 건축된 문장으로 표현되는 겨우도 있다. 어른의 전달력은 “낯선 창문”처럼 처음엔 잘 안 보이지만, 그 창문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닌 삶의 통찰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⑥어른의 전달력은 오솔길(narrow path)이다
전통적인 교육패러다임에 따르면 학습자는 사전에 정해진 철도나 고속도로를 따라 목적지에 가급적 빠르게 도착해야 한다. 철도를 달리는 기차를 학교에 비유하면 학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움직여야 한다. 목적지도 딱 한 군데 결정되어 있다. 한편 학교를 고속도로에 비유하면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점은 철도와 동일하나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는 점이 다르다. 철도와 도로를 지배하는 학교 패러다임은 속도와 효율이 핵심원리로 작용한다. 반면 학교를 오솔길에 비유하면 속도와 효율은 중요하지 않다. 오솔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남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얼마든지 개척해서 갈 수 있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사색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철도와 도로가 지향하는 교육 패러다임은 원인과 결과가 단선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직선형 패러다임이다. 투입하는 요소가 결정되면 결과는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오솔길 패러다임은 언제 어디서 어떤 낯선 마주침을 겪을지 예측할 수 없다. 목적지도 가는 도중에 바뀔 수도 있다. 빠르게 직선으로 달려가서 목표를 달성하는 효율적인 패러다임은 무의미하다. 오솔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학습자라면 가급적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삼라만상이 모두 스승이다.
오솔길에서는 누가 선생이고 학생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모두가 스승이고 배우는 사람이다. 나에게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 깨우침을 주는 모든 것은 다 스승이다. 정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려는 철도와 도로 패러다임에 비해 오솔길 패러다임은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서 우연히 깨닫는 부산물에 더 의미심장한 교육적 시사점이 있음을 인정한다.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비효율적인 탐색과 시도이자 탐험과 도전의 과정이다. 고속도로는 목적지에만 관심이 있지만, 오솔길은 풍경을 함께 본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른의 전달력은 지식을 ‘빨리’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함께 걷는 그 과정에서의 감정, 기억, 깨달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철도는 정해진 시간표가 있지만, 오솔길은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마주친다. 어른의 전달력은 정형화된 공식이나 매뉴얼을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유기적이고 임기응변적인 대처능력이다. 오솔길은 때때로 끊기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며, 길을 잃기도 한다. 예측불허의 변수와 만나는 불확실성이 언제나 존재한다. 어른의 전달력도 완벽하지 않다. 전달과정에서 일어나는 돌발변수를 만나 슬기롭게 극복해야 되고 예기치 못한 변수나 미지수를 만나도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가운데 발현되는 자연스러운 내공이다. 무엇보다도 오솔길은 지도에 없는 길이다. 지도에 없는 길을 걸어가다 길을 잃어버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다른 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책에 없는 지혜, 살아온 삶에서만 나오는 비정형의 메시지 파워다.
⑦어른의 전달력은 퇴비 더미(compost pile)다
퇴비는 처음엔 쓸모없는 음식물 쓰레기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명을 키우는 토양이 된다. 어른이 전달하는 메시지도 처음엔 낡은 경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새로운 생각을 자라게 하는 힘이 숨어 있다. 퇴비 더미 속에는 썩은 것, 깨진 것, 버려진 것이 들어가지만, 결국 거기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어른의 전달력은 버려진 생각, 실패한 경험, 쓸모없어 보이는 지식도 전달하는 과정에서 비판적으로 해체되고,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될 때 더욱 빛나는 능력이다. 어른의 전달력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과거의 실패와 고통을 가감 없이 담아, 그것이 자양분이 되도록 하는 과정이다. 퇴비는 시간이 필요하다. 급히 만들면 악취가 나고, 천천히 숙성되면 향기로운 흙이 된다. 어른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숙성된 경험의 결과다. 퇴비가 하나의 재료가 아니라, 다양한 유기물이 섞여 있을 때 더 가치가 높듯이 어른의 전달력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이 다양한 삶의 층위와 뒤섞일수록 깨달음의 깊이가 생긴다. 퇴비는 흙을 풍요롭게 하지만, 그 자체가 중심이 되지는 않듯이 어른의 전달력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음 세대가 더 잘 자라도록 조용히 돕는 과정에서 선한 영향력이 생긴다.
좋은 퇴비에는 미생물과 벌레들이 산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조용히 일하면서 다른 생명체의 거름으로 변화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어른의 지혜도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기억, 실수, 실패와 좌절, 절망과 우울함이 만들어가는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상호의존적 관계가 쌓여 형성된다. 퇴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더러워 보이지만, 그 더러움은 다른 씨앗에게는 소중한 생명력의 원천이다. 어른의 말도 때로 무겁고 불편하지만, 그 속에서 진짜 성장의 재료가 나온다. 퇴비는 자연의 ‘재활용’이다. 버려지는 것을 새롭게 순환시키는 필수적인 재생의 과정이자 선순환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그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삶의 지혜를 다시 의미 있는 형태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대체불가능한 영향력이 발생한다. 좋은 농부는 비료보다 퇴비를 신뢰한다. 자연이 만든 영양분은 더 오래 지속된다. 마찬가지로 어른의 전달력의 밑바탕이 되는 경험은 이론보다 깊고, 오래가는 지혜를 만든다. 퇴비는 자신을 태워 다른 생명을 자라게 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자신의 고통과 실패를 숨기지 않고 거기서 배운 소중한 통찰과 교훈을 주장함으로써, 타인의 성장을 돕는 생태적 희생이다.
⑧어른의 전달력은 생채기(scratch)다
어른의 상처(傷處)는 몸의 도처(到處)에 있다. 정처(定處) 없이 떠 돌 때는 부처가 던져주는 인연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나 혼자라고 생각했고 슬픔과 아픔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 방황 끝에 찾은 익숙한 근처(近處)라 안심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딪힘, 느닷없는 마주침으로 다시 상처(傷處) 하나 생겼다. 어제 생긴 상처에 미처 대처(對處)하기도 전에 오늘 또 다른 상처가 온몸을 휘감는다. 상처받은 삶을 온몸으로 그리며 그림 속에 아픈 과거를 송두리째 드러낸 화가, 프리다 칼로의 '상처받은 사슴'을 보면 섬뜩한 기분이 들다가도 저 사슴이 바로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라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위안도 받는다. 상처가 외로운 아픔이지만 겉으로 드러내 놓고 공감할 때 설명할 수 없는 공명(共鳴)의 장이 마련된다. 어른의 전달력이 그렇다. 저마다 겪은 인생의 아픔과 슬픔을 힘들게 전달하면서 독백하지만 그 메시지는 누군가 들어주면 자신도 모르게 위안을 받고 희망과 용기를 얻기도 한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메시지는 전달하기 쉽지 않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지옥으로 생각되는 타자의 눈이 두려워서이고 발가벗긴 나의 모습을 뒷수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처의 깊이가 내 삶의 깊이가 될 때까지 참고 견디며 의도적으로 지우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시궁창이라는 상황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삶의 현장보다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내 생각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살아가면서 받은 상처를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멀쩡한 생각에 시비를 걸어 생채기를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내 생각은 각성하고 다시 태어나며 청중에게는 상처 위에 앎을 만드는 단초가 된다.
생채기로 이해되는 어른의 전달력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에 나오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이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감정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스투디움의 세계로 보인다. 달리 보이는 것 없이 늘 세상과 일상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다가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했던 세계가 다르게 보이면서 불편한 문제의식을 잉태한다. 푼크툼의 세계로 보이게 만든 낯선 개념을 습득해서 그저 그렇게 보였던 세계가 다른 자극으로 나에게 각인되면서 깊은 앎의 상처가 만들어진다. 어른의 전달력은 푼크툼의 자극처럼 한순간의 충격처럼 스치지만, 기존의 앎에 깊은 상처로 오래도록 남아 깊은 성찰을 유도한다. 생채기는 회복되면서 새로운 살결을 만들 듯, 어른의 전달력은 어느 순간 깊은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내면에서 새로운 자아와 인식이 자라나게 만드는 자양강장제다. 생채기로 파인 푼크툼의 흔적은 피부에 남지만, 푼크툼의 자극으로 생긴 앎의 상처는 마음에 얼룩과 무늬를 만든다. 어른의 전달력은 푼크툼처럼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기존 앎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자극이 순식간에 달려와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리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를 일으킨다.
⑨어른의 전달력은 거울(mirror)이다.
우리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아를 인식한다. 어른의 말과 행동은 타인에게 자기를 비추게 하는 '심리적 거울' 역할을 한다. 심리적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보여주되 판단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은 깨달은 지혜를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나 거울을 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만드는 데 있다. 어른의 전달력은 특정한 주장에 대한 판단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 판단의 조건을 비춰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할을 발휘해야 될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어른은 형식적인 말의 논리보다 어른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삶의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 자체를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는 바깥에 있는 걸 가르쳐서 알게 되는 산물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Maieutics)처럼 질문과 대화로 상대 안의 진실을 비춰주는 ‘철학적 거울’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화려한 표현과 현란한 언어로 전달하는 수사력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 위치와 살아가고 있는 참자아를 반성하고 성찰하게 만들어는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을 발견하게 만들어주는 반사면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뭔가를 직접 지시하거나 가르치지 않고 다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면을 바라보게 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정답을 일방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다양한 질문을 거울에 비추어 반추해 보며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는 해답을 던져준다. 정답은 다른 답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지만 해답은 듣는 사람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일리 있는 답이 될 수 있음을 열어놓는다. 정답은 직선으로 방법을 지시하지만 해답은 곡선으로 방향을 넌지시 암시해 준다. 정답은 주로 충고해 주고 묘안을 강요하지만 해답은 질문을 던져 스스로 대안을 모색하는 통로를 열어준다. 어른의 전달력은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의미가 특정한 맥락 속에서 다르게 전달되는 이유를 깨닫게 하는 데 투자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직접적 명령과 지시보다, 자기 삶의 언어와 행동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간접적인 우회로를 열어 ‘보여주는’ 거울이다. 어른은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비추며 배우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에 입담의 달인이기보다 귀담아 들어주는 경청의 귀재다. 어른이 전달하는 진리는 고정된 실체나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반사되는 흐름이자 동사이기에 언제 어디서 누구를 대상으로 전달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반영되는 ‘열린 거울’이다.
⑩어른의 전달력은 거미줄(spider)이다
어른의 전달력이 함의하는 핵심적인 특징은 분절된 학문 간의 연결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지식 창출하는 경쟁력이다. 지식생태학처럼 지식과 생태학을 융합, 새로운 학문분야를 탄생시키고 지식생태학적 관점에서 즐거운 학습을 촉진하고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는 방법을 핵심 메시지로 전달할 때 청중은 참신하고 독창적인 전달력을 느낄 것이다. 어른의 전달력이 거미줄이라는 의미는 어떤 현상이나 과정을 설명할 때 다양한 분과학문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보다 전체적이고 입체적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다. 거미가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를 사냥하듯, 어른의 전달력도 통합적인 다양한 분과학문의 네트워크 위에서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깨우침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식을 창조하는 색다른 방법을 구상하다, 지식이라는 개념이 산부인과의사를 우발적으로 만나 지식산부인과의사를 탄생시키듯 특정한 개념이 또 다른 개념과 우발적으로 만나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과정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이라고 불렀다. 우연한 접속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또 다른 결과를 부단히 창조하는 과정이 바로 리좀이다. 리좀은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항상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을 의미한다. 리좀은 체계성과 계획성보다 우연성과 무목적성을 선호한다. 리좀은 정해진 구조나 위계를 따라가지 않는다. 나무뿌리가 어디로 뻗어가서 또 다른 나무뿌리와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른의 전달력도 하나의 중심에서 지식을 '내려주는' 위계적 방식이 아니라, 여러 분야, 경험, 관점이 얽혀 거미줄처럼 형성되는 수평적 네트워크 구조다. 리좀은 복수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가질 수 있고,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어른의 전달력도 지식의 위계적 구조를 강조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험, 감각, 감정이 기존 이론과 우발적으로 만나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거미물 구조에서 위력이 나타난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따르면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과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이다. ‘나처럼 해봐 형 교육’은 가르치는 전문가의 전문성이 배우는 비전문가의 기준이자 정답이. 전문가가 지니고 있는 전문성을 비전문가는 그대로 따라서 모방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전문가는 비전문가에게 어떻게 전문가의 전문성을 습득할 것인지를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 실무적 지침이 들어있는 매뉴얼을 제시하고 그대로 따라 할 것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서 ‘나와 함께 해보자 형 교육’은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에게 그대로 모방할 수 있는 노하우가 아니라고 규정한니다. 나아가 전문가의 전문성은 전문가가 비전문가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서 습득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전문가의 전문성은 비전문가가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상적으로 지향해야 될 기준이나 표준이 되지 못한다. 머리를 맞대고 스승과 제자가 복잡한 난국을 돌파할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리저리 실험하고 모색하면 주어진 난관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일방적 가르침으로 우발점 깨우침이 발생하지 않는다. 우발적 마주침이 색다른 각성이 동반되는 깨우침을 낳는다. 어른의 전달력은 일발적 전달(transmission)이 아닌 생성(becoming)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다양한 개념이 우발적으로 만나 새로운 개념을 무한히 생성하는 리좀처럼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를 전달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함께 탐색하면서 우연한 창발의 바다를 항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