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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없는 인간에서
벗어나는 10가지 방법

개념 없는 인간에서 벗어나는 10가지 방법


한 사람이 사용하는 개념 수준과 깊이는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을 가늠하는 척도다. 개념이 없으면 뜬구름 잡는 관념에 신념을 추가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 똑같은 의도나 의지라고 할지라도 어떤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지에 따라 전적으로 다르게 그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개념은 개념을 배우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비슷한 개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사유도 미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의 사유를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개념도 남다르게 나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개념도 배우지 않으면 틀에 박힌 사유를 넘어 색다르게 사유할 수 없다. 개념을 익히기 위해서는 개념 포착 노트를 갖고 다니면서 놀라운 사유를 제공해주는 개념을 만나면 메모해놓아야 한다. 나중에 글을 쓸 때 인용할 수 있고 인용해서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 한 층 더 명료해진다. 글이 한 층 더 살아 숨 쉬고 논리적 설명력과 감성적 설득력을 동시에 지닐 수 있다. “개념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창에 서린 성에를 닦아 내는 작업과 비슷하다. 흐릿하고 모호했던 개념이 글을 쓰면서 서서히 명확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p.47).” 윌리엄 진서의 《공부가 되는 글쓰기》에 나오는 말이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개념도 글쓰기를 통해서 분명해지고 유사 개념과 관계도 구조적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책과 사람을 만나면서 습득하는 수많은 개념이 나의 신념이 담긴 개념으로 재탄생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경험한 사실을 개념으로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반복해야 한다. 



개념은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과 함께 익혀야 한다. 맥락 없는 개념은 관념이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 보면 안개라는 단어를 사용한 두 개의 문장이 나온다. 하나는 위대한 선승, 도겐의 말을 인용한 “안갯속을 걷는 사람은 안개에 젖는다(p.106).”이다. 또 다른 문장은 “종이 위에 안개를 올려놓지 마라(p.152)”나는 표현이다. 똑같은 안개라는 단어지만 앞의 안개는 안개에 관해 글을 쓰려면 작가가 안갯속으로 깊이 빠져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뒤의 안개는 저자가 말했듯이 “글쓰기는 안개 싸여 있는 마음에 불을 태우는 행위이다(p.152)."라고 표현한 것처럼 확실하지 않은 생각을 애매모호하게 쓰지 말라는 의미다. 똑같은 안개라는 단어지만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개념은 문맥을 떠나면 숙맥이 될 수 있다. 모호했던 개념을 다양한 수사법, 예를 들면 은유법을 통해서 표현하는 책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간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99쪽). “ 레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아무리 좋은 책을 저자가 썼어도 독자가 그 책을 읽고 심장이 뛰는 감동을 받지 못하면 책은 종이책에 불과하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개념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촉매제를 다양한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개념 있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10가지 방법을 알아본다.



시집을 읽고 시인이 사용하는 단어의 쓰임새를 관찰하라


김승희 시인의 《도미는 도마 위에서》라는 시집에 보면 ‘좌파/우파/허파’라는 시가 있다. “시곗바늘은 12시부터 6시까지는 우파로 돌다가 6시부터 12시까지는 좌파로 돈다. 미친 사람 빼고 시계가 좌파라고, 우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바빠도 벽에 걸린 시계 한번 보고 말해라.” 우리가 생각하는 좌파와 우파를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얻은 영감과 통찰력의 언어로 재정의한 놀라운 시어다. 같은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라는 시가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래도’라는 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섬으로 각색했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에 보면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종의 존재 이유와 종소리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문장이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는 짧은 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재라는 평범한 단어를 이렇게 뜨거운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생명체로 재탄생시키려는 시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평범한 단어 속에 담긴 위대한 의도와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쉽보르스카 시인의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 보면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두 번의 의미를 인생의 의미에 비추어 의미심장하게 건네준다. 한 번 ‘두 번’의 ‘두 번’이 아니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두 번’의 의미를 시를 통해서 배운다.



박용하 시인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시에는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눈과 심장이라는 단어에 갑자기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문장이다. 눈을 보는 시각적인 감각기관으로 생각해오던 우리에게 시인은 눈이 심장과 연결되어 있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정서적 감각기관으로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오은 시인의 ‘풀쑥’이라는 시에는 “속이는 것은/속없는 겉이 하는 일”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주로 마음속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니라 얄팍한 속셈으로 겉이 하는 일이라고 새롭게 정의 내려 준다. 시인은 익숙한 개념을 익숙한 현상에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눈을 키워준다. 시를 읽을수록 무심코 지나친 익숙한 일상이 갑자기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으로 변신한다. 천양희 시인의 ‘관계’라는 시에는 “길은 끝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시작은 시험입니다……. 시험은 삶의 시련입니다.” 시작을 시험으로, 시험은 시련으로 해석하는 일련의 개념 정의와 의미부여서 시작은 비록 시험이고 시련이지만 그런 시작을 하지 않으면 나는 길을 갈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남이 걸어간 길이 아니라 내가 가는 모든 길의 시작은 비록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험이고 시련을 안겨주지만 시련은 결국 새로운 시금석을 마련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 이훤 시인의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시집에는 ‘욕심’을 “네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 되고 싶다”(p.66)로 정의하고 있다.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문장 속의 개념의 의미를 포착하라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는 현자의 개념 정의가 나온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p.35).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 바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매일 만나는 일상이지만 그 속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꿈꾸는 사람이 바로 현자다. 비슷한 맥락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온다.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한다"(201쪽). 그래서 앙드레 지드도 지상의 양식에서 ”시인의 재능,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p.101)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작가에게 자연 삼라만상은 창작의 텃밭이다. 그들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당연한 세계에 시비를 걸면서 창작의 영감을 받는다.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열심히 공부했으나 진짜 현실을 이해 못하는 바보 학자 이야기가 나온다. “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가련한 바보. 전보다 똑똑해진 것은 하나도 없구나!”(p.29). 이 말은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변화시킬 힘은 없는 관념적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아아! 이럴게 연구실에 처박혀 있다가 겨우 휴일에나 세상 구경을 하는데, 그것도 먼발치에서 망원경을 통해 보는 거라면 어찌 설득을 통해 대중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p.43)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도 《월든》에서 일상에서 깨닫는 통찰의 소중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법은 가르치지만,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화학은 공부하되 자기의 빵이 어떻게 구워지는가는 배우지 않으며, 기계학은 배우되 빵을 어떻게 버는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해왕성의 새로운 위성은 발견해내지만, 자기 눈의 티는 보지 못하며 또한 자기가 지금 어떤 악당의 위성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 방울의 식초 안에 사는 괴균(怪菌)들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주위에서 우글거리는 괴물들에게 자신이 잡혀 먹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p.83). 책상에서 공부하는 학문적 탐구와 일상에서 몸으로 깨닫는 통찰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월든》에서 진짜 소중한 공부가 어떤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책상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터득한 지혜는 언어로 가르칠 수 없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는 지혜라는 개념의 본질적 성격을 규명하는 말이 나온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p.206). 이전과 다른 깨달음을 얻으려면 기존의 나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나로 변신을 거듭해야 한다. 헤르만 헤세는 이런 인간의 재탄생 과정을 《데미안》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p.218). 



자기 변신을 거듭하면서 체험적 지혜를 축적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1》에 나오는 문장을 번안 적용해보면 좋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p.11). 지혜를 축적하는 사람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그렇지 않고 남의 지식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나름나름으로 이유가 있다. 톨스토이의 위 문장을 《총균쇠》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이 번안해서 적용하고 있다.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 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p.234). 고전을 읽고 부단히 개념을 습득하는 사람은 모두 엇비슷하고 고전을 읽지 않고 고전을 면치 못하는 사람은 그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고 풀이해서 생각할 수 있다. 개념을 모르면 책을 읽지 못하고 읽지 않으니 개념이 부실해지며, 개념이 부실해지니 책을 읽을 수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처음에 나오는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모르면 책을 읽다가 바로 덮어버릴 수 있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p.9). 쿠바 출신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이란 사람들이 ’나는 ~을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을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 점이 이해가 간다. 고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지금 읽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창피하지만 그 책을 다시 읽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창피하지 않은 게 고전이라는 것이다. 너무 재미있으면서 고전이라는 개념의 본질을 꿰뚫어 본 정의다. 



다양한 분야의 철학자가 말하는 색다른 개념을 익혀라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에서 ‘마지막 단어(Final Vocabulary)’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마지막 단어’란 개인 혹은 집단이 최후까지 의지하는 신념어이자 보통 의식 아래 있다가 삶이 흔들릴 때 표면 위로 솟아올라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결연한 단어다. 철학자는 기존 개념으로 자신의 문제의식이나 해결책을 설명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할 경우 목숨을 걸고 자신만의 고유한 개념을 창조해낸다. 개념은 단순한 단어나 어휘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고뇌했던 사유의 흔적이 담긴 사고의 결정체다. 철학자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품고 있는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개념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사람이다. 철학의 역사는 곧 개념 창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정우의 《개념 뿌리들 1》에 보면 “막연하고 모호했던 경험들이 개념을 통해서 정리가 되고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개념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그냥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유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줍니다(p.18)”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저자는 “사유의 역사는 개념의 역사”(p.27)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미덕을 갖춘 최고 경지의 전문성을 ‘아레테(arete)’라고 지칭하고 이런 미덕을 쌓기 위해 발휘하는 실천적 지혜를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개념을 창조해냈다. 전문가와 전문성의 본질을 생각해볼 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개념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새로운 전문가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하는 전문가는 ‘브리꼴레르’다. ‘브리꼴레르’는 현재 가용한 도구와 지식으로 문제 상황을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통해 해결하는 역발상의 귀재이자 문제 해결사의 전형이다. 브리꼴레르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계획을 세워서 행동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임시 응변력을 발휘해서 주어진 상황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찾아내는 과정에 초점을 두는 사람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진화를 방랑하는 예술가에 비유하는 인지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또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앎의 나무》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예술가와 비슷하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친다. 그가 그렇게 합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떠돌아다니면서 서로 어울리게 연결해 놓은 부분들이나 형태들로부터 온갖 복잡한 형태들이 생겨난다. 여기에는 어떤 계획도 없으며 그거 자연스럽게 표류하는 가운데 생겨났을 뿐이다“(p.135). 브리꼴레르와 방랑하는 예술가의 공통점은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체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을 수용하면서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이다.



전문가는 그래서 책상에서 이성을 발휘해서 지식을 축적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전문가는 몸을 던져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체험적으로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전문성으로 재해석해내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이성을 다르게 정의한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떼이자 목자이다(p.51).” 감각과 정신은 한낱 도구이자 놀잇감(p.52)으로 정의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이성을 작은 이성이라고 명명하고 신체라는 커다란 이성의 명령과 통제를 받는 기관으로 새롭게 신체를 부각한다. 신체적 이성이 그동안 우리가 이성이라고 생각했던 뇌가 발휘하는 이성을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깨달음은 자신의 경험을 이전과 다른 언어로 정의할 때 찾아온다. 언어는 대상을 그림처럼 정확히 그려내는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언어 게임이론’을 발표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언어 사용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책이다. 똑같은 ‘사랑해’라는 말도 사랑이 싹이 트는 시기에 ‘사랑해’라는 말과 사랑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서 권태기에 이르렀을 때 ‘사랑해’라는 말, 그리고 성격차로 인해 헤어지기 일보 직전의 ‘사랑해’라는 말은 전혀 의미를 담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리좀’도 비슷한 개념이다. 나무뿌리가 뻗어나가면서 어떤 나무뿌리와 언제 만날지 모른다. 리좀은 우발적 접촉을 통한 새로운 의미의 생성과정을 지칭하는 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개념과 우연히 충돌해서 또 다른 개념을 잉태하고 출산할 지로는 사전에 알 수 없다. 리좀은 그래서 이전과 동일한 반복 운동을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전과 차이가 나는 반복을 통해 이전과 다른 또 생명체를 낳을 뿐이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등장하는 반복은 그래서 “같음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을 포괄하는 반복”(p.72)이다. 실존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실존적 삶도 결국 이전과 다른  본질을 추구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려는 삶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p.67)”는 말의 의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현존재는 지금 이대로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 가능성이 지향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실존을 추구할 때 비로소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현존재의 본질은 누군가 일방적으로 가르친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존재인 인간이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어제와 다른 삶을 반복하는 가운데 스스로 밝혀내야 되는 숙명적인 과제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스승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주는 자크 랑시에르의 생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무지한 스승》에서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새로운 개념의 스승을 등장시킨다. 가르치는 과목의 내용을 모르면서 학생들에게 해당 내용을 통달하게 만드는 스승은 지식을 가르치지 않고 배우고 싶은 욕망과 의지를 부추기는 스승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승, 즉 무지한 자를 위해 유식한 스승이 설명하는 사람을 랑시에르는 지능의 불평등을 영속화시키는 주범이라고 비판한다. 스승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남경태의 《개념어 사전》, 이정우의 《개념-뿌리들 2》, 철학도해사전, 《들뢰즈 개념어 사전》 등도 모두 철학적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내가 경험하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필요한 소중한 생각의 결정체다.



에세이나 평론집 또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통해 작가 특유의 개념 사용법을 익혀라


작가는 다른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평범한 것을 낯설게 보고 드는 느낌이나 생각을 쓰는 사람이다(참고: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에세이나 수필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주목하지 않는 사물이나 현상을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결과를 쓰는 사람들이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는 “몸으로 체득했기에 그것은 밑바닥 진실이며 마지막 진실이다. 어떤 경우에나 세상의 변화를 꾀하게 하는 힘은 이 마지막 진실에서 온다”(200쪽)는 문장이 나온다. 몸으로 체득한 진실이 밑바닥 진실이며 마지막 진실이고 그런 진실만이 세상의 변화를 꾀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한다. 밑바닥 진실이자 마지막 진실이라는 개념과 만나는 순간 진실에 대한 인식 지평과 깊이가 확산되고 심화되었다. 그리고 진신을 몸으로 체험한 진실만이 진심을 담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그런 진실을 몸으로 체화시킨 사람에게는 믿음이 가고 신뢰가 생긴다. 같은 저자의 《사소한 부탁》에는 ‘문학적 시간’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쪽). 문학적 시간이 역사적 시간이 되고 미학적 시간이자 은혜의 시간으로 번역되면 깨우침으로 시간으로 발전한다는 깨달음이다. 당연한 세상에 의문이 생기는 개인 차원의 문학적 시간이 당대의 사회적 주체와 연동되면 역사적 시간으로 발전하며 그 시간 바로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보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는 미학적 시간이자 덕분에 각성하는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문학적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나고 나서 내 생각을 이전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생긴 것이다. 새로운 깨우침으로 유도하는 미학적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삶을 가치 있고 위대하게 만드는 28가지 질문’이라는 부제목을 갖고 있는 《인생의 발견》에는 기억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저자 나름의 특유한 해석이 나온다. “기억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고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구성요소다. 기억의 폭이 좁을수록 미래를 폭넓고 독창적으로 구상할 가능성도 줄어든다. 기억을 먹여 살리는 방법은 몸을 먹여 살리는 방법만큼 중요하다. 개인의 경험은 부족한 식단이지만 남들에게 습득한, 사실상 살아 있거나 죽은 모든 인류에게서 습득한 간접 기억으로 보완할 수 있다. 기억이 빈약하면 이전에 가본 곳 말고는 앞으로 어디로 갈지를 상상할 수 없다”(pp.174-5).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은 과거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이 부실할수록 미래에 대한 상상력도 부실해질 수 있다는 통찰력은 젤딘이 지닌 작가적 상상력 덕분이다. 일상에서 깨닫는 소소한 각성 체험을 자기만의 개념을 활용하여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와 달리 평론가들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읽고 자기만의 특이한 비평 방식으로 수사력을 동원하여 리뷰를 남기는 작가다.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는 창작을 새롭게 정의 내리고 있다. “창작이라는 것은 본래 왼쪽에서 뛰는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p.189). 왼쪽 심장이 시키는 대로 창작하는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 좌파라고 한다. 창작이라는 개념을 왼쪽 가슴과 연결시켜 사유하는 평론가의 통찰력에서 또 다른 개념적 사유가 시작된다. 같은 저자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는 '슬픔'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p.27). 가장 소중하면서 가장 어려운 배움의 대상이 슬픔이라는 사실, 그 슬픔은 머리로 배울 수 없고 몸으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체험해볼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다. 슬픔을 개념적으로 이해할 때 머리가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체험할 때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은 다르다. 슬픔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슬픔을 체험하는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말의 묘미를 알려주는 책에서 한글의 마력을 배워라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말을 의도적으로 배우지 않는다.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어휘 실력을 늘리려고 의도적으로 공부하는 경우는 많지만 우리말 실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말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말 실력은 물론 나의 생각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고력도 그만큼 떨어진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 편 1, 2》에 보면 방망이와 몽둥이, 마개와 뚜껑, 엉덩이와 궁둥이처럼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우리말의 미묘한 차이를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말인데 그 미묘한 뜻의 차이를 모르고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껍데기’와 ‘껍질’의 차이, ‘마치다’와 ‘끝내다’의 차이를 알 듯 말듯하면서도 그 차이를 의식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번역할 수 없는 말들의 사전’이라는 부제목을 갖고 있는 《한국문화 특수 어휘집》에는 “어디 가세요?”를 영어로 “where are you going?”으로 번역하면 안 되고 “How are you?”로 번역해야 된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말의 “어디 가세요?”는 진짜 어디 가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이 아니라 그냥 안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이라는 사실을 문화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외국인들에게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말이다. 이밖에도 조현용의 《우리말 깨달음 사전》, 《우리말로 깨닫다》, 《우리말 선물》, 《우리말 지혜》는 우리말에 담긴 문화적 특성과 한국인 특유의 의미가 담긴 말의 묘미를 풀어내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에 보면 ‘보다’에 해당하는 말을 안과 밖, 높낮이, 보는 이의 마음가짐, 겉모습을 넘어 속살까지 보는 말을 무려 27가지를 구분해서 설명한다. 예를 들면 내다보다와 들여다보다. 내려다보다와 올려다보다, 돌보다와 쏘아보다, 거들떠보다와 꿰뚫어 보다 등 똑같은 보다가 의미상 차이가 있음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한편 최성우의 《국어의 고수 1, 2, 3》 시리즈는 개발과 계발, 구분과 구별, 기피와 회피, 기획과 계획, 보전과 보존, 애인과 연인, 일절과 일체 등 주로 미묘한 한자어의 차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전이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은 우리가 느끼는 마음 관련 단어의 미묘한 차이점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감정이 한 칸의 방이라면 기분은 한 채의 집이며, 느낌은 한 도시 전체(p.45)라고 그 차이점을 구분한다. 같은 저자의 《시옷의 세계》에서는 '시옷(ㅅ)'으로 시작하는 낱말들이자 '시'에 입힌 '옷'의 세계를 시인의 감수성으로 녹여내고 있다. 우리말에는 유독 한 글자로 된 단어가 많다.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에는 ‘쉬’를 “이 말 한마디로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p.240)”로 정의하고 반대로 ‘쉿’이라는 단어를 “이 말 한마디로 어른은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한다”(p.241)로 정의하고 있다. 



오동환의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은 모두 한 글자로 되어 있다》와 ‘소중한 것은 한 글자로 되어 있다’는 부제목을 갖고 있는 정철의 《한 글자》에는 ‘벗’을 “가리지 않고 내 알몸을 보여주는 사람, 숨기지 않고 내 허물을 보여주는 사람, 감추지 않고 내 눈물을 보여주는 사람, 벗어야 벗이다”(p.109)로 정의하고 있다. 구효서의 《소년은 지나간다》는 스물네 개의 된소리 홑글자 이야기라는 부제목처럼 ‘뻘’부터 ‘끝’까지 된소리가 나는 한 글자로 된 개념에 담긴 작가의 추억을 곁들여 풀이하는 재미난 사전이다. 우리가 평소 쓰는 말, 단어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함께 사색하고 자연스레 철학해보자고 권하는 《낱말의 우주》는 110개의 주제 한자에 담긴 의미를 반추하며 ‘낱말로 철학하기’ 책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글을 처음 익힐 때 하나의 단어를 꾸준히 되뇌고 사용하며, 그 뜻이 세상의 수많은 언어 속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를 살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씩 함께 단어 하나를 두고 충분히 익혀가는 낱말 해설서다.



최종규의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과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은 우리말을 보다 정확하고 아름답게 쓸 수 있도록 안내하는 보석 같은 사전이다.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은 고단하다, 고되다, 고달프다, 괴롭다, 힘들다, 힘겹다, 벅차다, 지치다, 나른하다, 느른하다, 늘어지다, 처지다 등과 같은 비슷한 말 꾸러미들의 용례를 들어 그 차이점을 설명하는 사전이다.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은 “미리 예약했습니다”처럼 예약에는 이미 미리라는 의미가 들어 있고 “가는 도중”은 ‘도중’에 이미 ‘가는’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어서 겹말이라는 점을 다양한 겹말을 소개하면서 언어의 올바른 사용이 중요함을 역설하는 사전이다. 특히 이 사전은 국어사전조차 겹말 풀이로 뜻을 잘 못 풀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아래 단어의 사전풀이를 보자.



제각기: 1. 저마다 각기, 2. 저마다 따로따로

각기: 1. 저마다의 사람이나 사물, 2. 각각 저마다

저마다: 1 각각의 사람이나 사물마다, 2. 각각의 사람이나 사물

각각: 1. 사람이나 물건의 하나하나, 2. 사람이나 물건의 하나하나마다

따로따로: 1. 한데 섞이어가 함께 있지 않고 여럿이 다 각각 떨어져서.


그야말로 뜻풀이가 겹치고 물고 물리는 뒤죽박죽이 아닐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뜻을 물고 물리면서 겹말이 순환되며 정의를 내린다. 도무지 그 뜻을 알 길이 없다. 한편 ‘교정의 숙수가 알뜰살뜰 차려 낸 우리말 움직씨 밥상’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김정선의 《동사의 맛》은 ‘끼치다와 미치다’, ‘날뛰다와 널뛰다’, ‘걷잡다와 겉잡다’, ‘뒤처지다와 뒤처지다’처럼 미묘한 동사의 차이점을 사례를 통해 쉽게 설명하고 있는 동사 활용 사전이다. 동사를 다양하게 알면 그만큼 표현을 역동적으로 실감 나게 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동사의 다양성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감동과 행동의 역동성을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비슷한 개념적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는 유사 동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표현력을 익힌다면 문장을 훨씬 더 살아 움직일 것이다.



개념을 비판적으로 정의하는 사전을 애용하라


개념을 공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개념을 공부하는 한 가지 목적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이 본래의 의미나 의도와 다르게 심지어는 반대되는 의미로 오용되고 있거나 오해되고 있음을 간파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출발점은 상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을 나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재정의하는 순간이다. 예를 들면 바보를 ”나와 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든 사람“으로 정의하는 《통상 관념 사전》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념 정의를 실제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알려주는 사전이다. 바보는 국어사전에 지능이 부족한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지만 《통상 관념 사전》은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바보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국민과 인민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철학적 인민 실용 사전’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어용 사전》은 착취 현실을 은폐하는 조작된 ‘어용 단어’들을 노동자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용어사전이다. 또한 국가주의의 객체로 국가의 지배를 받는 ‘국민’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주체인 ‘인민’의 관점에서 ‘어용 단어’들을 재해석한 철학적 실용 사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악당의 명언》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통념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개념에 숨은 진실이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아이디어란 남의 것 대부분에 내 것 약간이다”(p.175)로 정의한다. 이외수의 《감성사전》과 학생들이 실제 학교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교육적 용어들을 그들에 눈에 비친 관점으로 재정의한 《대한민국 학교 대사전》, 그리고 샐러리맨 입장에서 회사에서 통용되는 수많은 개념들을 컨설턴트 입장에서 재정리한 《회사 개념어 사전》도 직장인들의 회사 생활을 엿볼 수 있는 탐구서다. 



총 120개의 단어에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그 단어에서 꼬리를 물고 파생되는 새로운 생각들을 연쇄 폭발처럼 터뜨리는 정철의 《불법 사전》은 정상을 “땀을 닦는 곳,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땀을 흘리기 위해서라(p.152)”고 정의한다. 《악마의 백과사전》은 샐러리맨을 “자신의 밥그릇을 위해 영혼은 내던진 육탄 용사들”(p.155)이라고 정의한다. 국어사전이나 개론서에 나오는 개념 정의를 나의 체험적 느낌과 깨달음으로 재정의하거나 사회비판적 시각에서 숨겨진 의미를 파헤치는 노력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의 의미를 재개념화 시키는 과정이다. 개념이 이전과 다른 의미로 재개념화 되는 순간 세상은 재개념화 된 개념으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단어가 품고 있는 의도와 의미는 다를 수 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그 언어의 의미는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문제는 단어가 품고 있는 본래의 의도를 왜곡해서 다른 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언어를 통해 특정 이데올로기를 강제로 주입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을 수도 있다. 차별과 비민주적 표현을 담은 단어와 언어 표현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가 은연중 우리의 생각과 관점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는 신지영의 《언어의 줄다리기》는 ‘낡고 차별적인’ 뜻이 강한 언어임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 언어로 쓰이고 있는 우리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이런 점에서 ‘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恨국어사전’이라는 부제목이 붙은 이문영의 《웅크린 말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韓국어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라고 쓰지만, 恨국어는 ‘뼛가루들의 눈물’이라고 읽습니다. 恨국어에서 ‘해고노동자의 호소’가 韓국어에선 ‘불순세력의 떼법’으로 오역됩니다. 한(恨)국어 사전은 ‘표준의 언어’보다 ‘표정 있는 언어’에 주목한다. 한(韓)국어 사전이 표준과 비표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편집할 때, 한(恨)국어 사전은 표준에 외면당한 은어·속어·조어로 한국을 본다”(p.479). 역시 《웅크린 말들》에 나오는 말이다. 표준국어사전이라고 보는 한(韓)국어 사전이 표면적으로 정의한 단어나 개념이 품고 있는 한(恨)을 당사자 입장에서 한(恨)국어 사전에 다시 정의할 때 비로소 그 단어가 사용된 사회 역사적 맥락성의 아픔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언어 그 자체를 표면적으로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단어에 담긴 주관적 신념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념의 역사적 문맥을 같이 읽어낼 때 비로소 그 개념이 왜 어떤 점에서 오용되고 오도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 삶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 한(韓)국어가 언어의 표준을 자임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언어는 한(恨)국어가 된다. 한(韓)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한(恨)국에 산다”(p.7). 이문영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⑦고서 성어나 속담을 의도적으로 활용해라


고사성어(故事成語) 또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상황에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어휘력이 그만큼 풍부한 사람이다(참고: 이동진, 2006, 장기근, 2007, 장연, 2006). 예를 들면 다음 문장에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고사성어가 문장 곳곳에 들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에는 커뮤니케이션 수준에도 많은 차이가 날 수 있다. 성공에 이른 사람들의 공통점은 환골탈태(換骨奪胎)할 정도 대오각성(大悟覺醒)한 다음 고진감래(苦盡甘來)가 주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믿고 우여곡절(迂餘曲折)과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면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하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의 기회를 마련한 사람이다. 그들은 또한 호시우보(虎視牛步)처럼 앞을 예리하게 내다보되 우직하게 행동하면서 초지일관(初志一貫) 뜻을 굽히지 않고 노력하면 일취월장(日就月將)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고사성어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어휘력은 고사성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뜻하는 한자를 같이 배우면 어휘력 신장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우리말의 대부분은 한자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자의 원리를 조금만 터득하면 그것이 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누군가 의사라고 말했는데 그 의사는 다음의 어떤 의사에 해당하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의사(醫師)는 병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사람이고 의사(義士)는 윤봉길 의사처럼 불의에 도전하는 절개 있는 사람이다. 의사(議事)는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회의를 지칭하고 의사소통(意思疏通)에서 의사(意思)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속담사전》이나 《우리말 속담 큰사전》 등을 참고해서 속담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개념 사용력은 물론 복잡한 생각을 단숨에 전달할 수 있는 설득력도 지닐 수 있다. 특정한 상황을 복잡하게 설명하기보다 속담을 통해 말하고 싶은 수많은 생각과 의견을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고 공감되게 표현할 수 있다. 남들 모르게 조용히 선을 베풀 때 사용하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나 “행운과 순경은 길이 계속되지 않는다”를 의미하는 “달도 차면 기운다”라는 속담으로 간단하게 표현하면 말하는 사람의 깊은 속뜻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 수 있다. 속담을 사용해서 의중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면 속담 속에 들어 있는 우리말의 중의적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거리의 간판 이름이나 광고 문구또는 신문이자 잡지의 제목에 주목하라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는 가게 간판 이름을 보고 발길이 멈춘다. ‘가게’는 마음이 ‘가게’ 만드는 곳이다. 그래야 사람을 많이 오게 할 수 있으니까. 홍대에 가면 선술집형 고기 집 ‘肉값하네’가 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비속하게 표현하는 ‘육갑하네’라는 말에 고기 ‘육(肉)’자를 넣어서 고기 값 할 정도로 맛 나는 집임을 알려주는 재치 있는 가게 이름이다. ‘nice to meat you’ 고기 집은 영어의 ‘meet’를 고기를 의미하는 ‘meat’로 바꿔치기해서 패러디한 재미있는 간판집이다. meet와 meat의 단어 의미 차이점을 순식간에 알아보게 만든 네이밍이다. ‘수(秀)컷’, ‘’깎을래. 뽀끌래‘, ‘버르장머리’라는 미용실에서도 우리말의 묘미를 십분 활용하는 단어 사용법을 볼 수 있다. ‘이태리 면사무소’라는 이태리언 전문 음식점, 밤이 짧을 정도로 즐거운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야답법석(夜短法席)’이라는 카페, 정직과 믿음을 파는 ‘바르다 김선생’ 김밥집과 음식 주문 앱인 ‘배달의 민족’, 영화 〈적과의 동침〉을 패러디한 족발집, ‘족과의 동침’도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바꿔서 사용하면서 재미를 선사하는 네이밍이다. 빵집, ‘브레드 피트’(Bread Fit), 만두집 ‘놀랄만두하군’과 ‘만두벌판’, 스키 장비를 빌려주는 ‘이노무스키’, 뼈다귀 해장국 집인 ‘뼈대 있는 집’, 양곱창집 ‘의기양양’, 코스닥을 패러디한 ‘코스닭’, 다큐멘터리를 본 딴 ‘닭큐멘터리’, 그리고 ‘닭터지바고’, 속옷가게 이름‘ 보일랑 말랑’ 등도 가게가 무엇을 파는지를 각인시키는 재치 만점의 가게 이름이다. 가게 이름 속의 순 우리말이나 영어를 섞어서 패러디한 말속에 담겨 있는 적절한 단어 사용법을 익히면 놀랍게 개념이나 어휘력은 물로 문장 속에 녹여서 나만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까지 익힐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광고 카피에서도 우리는 개념의 힘을 습득할 수 있다.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쩌요.” 배달의 민족이 만든 치킨 광고 문구다. 


ACE 침대 광고 카피는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침대는 과학이다”였다. 요즘은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침대는 에이스다”로 바뀌었다. 침대는 가구라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에 통렬한 창조적 파괴를 불러온 카피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개념은 침대라는 보통명사를 과학으로 재개념화시킨 발상이다. 아디다스는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이라는 광고 카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불가능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impossible”에 어퍼스트로피(apostrophe) “’”를 단어 사이에 삽입하면 “I‘m possible”이 된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해석하는 색다른 관점을 배울 수 있는 의미심장한 광고 카피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서 목격하는 단어 사용법을 분석해보면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개념 사용법을 익힐 수 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던지는 명대사를 놓치지 마라


영화는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측면을 제한된 시간 내에 보여주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영화를 보면 삶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등장인물이 겪는 갈등과 화해, 도전과 열정, 꿈과 희망, 좌절과 절망, 음지와 양지, 성공과 실패, 걸림돌과 디딤돌 등 삶의 모든 면이 압축해서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일상에 경종을 울리는 명대사가 들어 있다. 그 명대 사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단어나 개념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들의 개념 파워를 늘릴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인기 절정을 구가하고 있는 그룹 퀸의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던 프레드 머큐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보헤미안 랩소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는 스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전설이 될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프레드 머큐리가 한 말이다. 이 명대사 안에는 스타와 전설의 차이점이 드러나 있다. 스타는 한 때 반짝 빛나고 사라지는 사람이지만 전설은 말 그대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다. “스크린(Screen)은 또한 실제로 하나의 장벽(Screen)이었다. 스크린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차단했다(Screened).”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몽상가들〉에 나오는 대사다. 스크린의 중의적 의미를 잘 표현해준다. 이 문장을 통해서 스크린은 특정한 장면을 보여주는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볼 수 없도록 막는 장벽이나 장애 물로 사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화, 〈리틀포레스토〉에 보면 ‘아주심기’라는 개념이 나온다.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의 '아주심기'는 양파 심기에서 중요한 과정이라고 하는데, 겨울을 겪은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달고 더 단단하다.” ‘아주심기’라는 말은 자연에서 배우는 소중한 삶의 교훈이 들어 있는 말이다. 영화, 〈1987〉에는 “장사꾼은 보이는 곳에 투자하고 사업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 투자하는 거야.” 한병용 역의 유해진이 한 말이다. ‘장사꾼’이라는 개념과 ‘사업가’라는 개념의 차이점을 아주 쉽게 구분해주는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세 얼간이〉라는 영화에 보면 교수님이 기계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하니까 주인공 란초는 자신이 체험적으로 깨달은 기계에 대한 정의를 쉽에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바로 교수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런 식으로 정의를 내릴 거면 예술대나 상대가라고. 바로 옆 학생에게 기계를 다시 정의해보라고 한다. 책에 나오는 교과서적 정의를 그대로 암기해서 말한다. 교수님은 그게 바로 내가 원하던 정의하고 칭찬을 해준다. 우리가 개념을 통해 세상을 색다르게 배우려면 이전과 다른 체험적이고 감성적인 깨달음을 기반으로 내리는 정의를 배워야 한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을 새롭게 환기시켜주거나 유사한 개념 간 차이점을 구분해주는 개념 습득의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사람과의 만남 속에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라.


오랜 친구와의 만남이든 비즈니스 목적으로 만나는 만남이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무심코 주고받는 대화 중에 퍼뜩 스쳐 지나가는 기발한 표현이나 동일한 단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과정을 주의 깊게 들어본다.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고 개념에 신념을 실어서 전달한다. 세대별 사용하는 개념의 다른 의미를 배울 수 있는 방법도 직업별, 연령별, 지역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최신 유행에 민감한 디자이너나 마케터를 만나면 그들은 시대를 읽어내는 동물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최근 트렌드 관련 낯선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그동안 써왔던 개념을 이전과 다르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요즘 소비는 주로 ‘파이 세대’가 대세를 주도한다는 말을 들었다. ‘파이’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밀가루와 버터를 개어 과일, 고기 따위를 넣고 구워서 만드는 서양과자인 ‘애플파이’나 ‘호두파이’가 떠오른다. 또한 수학 시간에 배운 원주율을 나타내는 부호로 ‘π’가 생각난다. 하지만 ‘파이 세대’의 ‘파이’는 그게 아니다. ‘파이 세대’의 ‘파이’는 Personality, Invest in myself, Experience의 첫 글자를 합쳐 만든 ‘PIE’를 의미한다. 즉 파이 세대는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지금 당장의 멋진 체험을 즐기며 사는 세대라는 말이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젊은 층에서 주로 사용하는 신조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예를 들면 ‘엄근진’과 ‘갑분싸’는 무슨 뜻일까. ‘엄근진’은 엄숙, 근엄, 진지의 약자이고 ‘갑분싸’는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는 의미다. '갓띵작'은 '신이 만든 최고의 명작'이고 ‘팬아저’는 팬이 아니어도 저장, ‘인구론’은 인문계 90%가 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화는 색다른 단어들이 오고 가고 개념들이 신념을 전달하는 향연이다. 그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주목하면 개념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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