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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는 ‘단서’를 남긴다

‘단어’는 ‘단서’를 남긴다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포함하고 있다. 《단어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쓴 제임스 W 페니베이커의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저마다의 ‘단어 사용 스타일’을 갖고 살아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언어 지문’을 남긴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 사용 방식을 분석해보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총합이다(19쪽).”라는 문장에 담겨 있다.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대변해준다. 저자는 나아가 단어는 한 사람의 심리상태를 비춰주는 거울이자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도구도 될 수 있다고 한다. 거울로서의 단어는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분석해보면 내 생각이나 의도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도구로서의 단어는 단어 사용을 바꿈으로써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도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단어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욕망이 담겨 있다. 예를 들면 지도자 위치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나’보다는 ‘너’ 또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영어 표현에서 동사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거짓말을 자주 하는 편이라고 한다. 뭔가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정직한 사람은 한 문장에 자신이 직접 했던 행동을 간단한 동사로 표현한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고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싶은 사람은 애매한 행동을 담고 있는 다양한 동사를 사용해서 자신의 입장을 교묘하게 감춘다.     



저자의 말대로 단어는 우리를 보여주는 ‘광고판’이자 나의 행동과 생각의 ‘잔여물’이다. 품격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어휘력 수준이 높다. 여기서 어휘력 수준이 높다는 말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안 쓰는 어려운 말을 쓴다는 의미보다 같은 우리말이라도 상황에 적절한 개념을 선택해서 맛깔스럽게 사용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속담이나 사자성어를 섞어 사용하면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의미를 함축해서 사용하거나 적절한 시어나 문장을 인용해서 표현한다. “나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지만 시행착오(試行錯誤)를 통해 오히려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있는 복차지계(覆車之戒)의 교훈을 깨달았다.”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대화를 나누려면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그리고 복차지계라는 사자성어가 지니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알 수도 없고 소통은커녕 소통할 기획조차 상실한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앞잡이’를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길잡이’로 착각하지 않는다. 나아가 어휘력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는 사람은 발생하지도 않은 미래의 특정 상황을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마음을 태우는 ‘걱정’과 걱정하는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마음인 ‘고민’과 구분해서 사용한다(이석현, 《단어를 디자인하라》 참고). 그만큼 어휘는 그 사람의 교양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의식하든 무의식적이든 사용하는 어휘의 수준을 보면 그 사람의 교양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다.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확실 품격이 있어 보인다. 다양한 책을 읽고 최신 언어에 둔감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이슈를 건드리는 핵심 용어에도 눈이 밝다.    

  


한 시대가 사용하는 단어에는 그 시대 정서를 알 수 있는 단서를 품고 있다. 특히 특정 시대에 특정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는 의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감정이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사는 안녕한가요?’라는 조선일보 기사에 보면 ‘더’, ‘가장’, ‘잘’, ‘너무’와 같은 부사는 60여 년 사이에 사용빈도가 높아졌지만 상대적으로 ‘퍽’, ‘짐짓’, ‘무릇’ 같은 부드러운 부사는 사용빈도가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부드러운 부사도 감정 표현을 극도로 세게 표현하려는 부사 사용빈도가 급증하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먹고사는 형편이 좋지 않아 졌다는 반증이다. 특히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복잡해지는 인간관계와 그 속에서 받는 감정적 격화는 사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날이 갈수록 경쟁은 극심해지고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은 가중되면서 자기 목소리를 보다 강하게 전달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분출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감정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부드럽고 정중한 부사보다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려는 욕구가 자신도 모르게 언어에 담기는 것이다. 극심한 사회변화가 주는 충격과 심리적 불안감의 가중은 사람들의 언어 사용에도 과장된 표현을 선호하게 만드는 장본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참기름집’이라는 말은 ‘순참기름집’으로 언어적 표현의 강도를 높이다가 가짜 ‘순참기름집’이 늘어나면서 ‘진짜순참기름집’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런데 ‘진짜순참기름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니까 자신만이 ‘진짜순참기름집’임을 보여주기 위해 ‘원조진짜순참기름집’으로 한 단계 더 표현의 강도를 높였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원조진짜순참기름집’이 늘어나면서 진짜 ‘원조진짜순참기름집’은 자기뿐임을 강조하기 위해 ‘100%원조진짜순참기름집’이 등장한 것이다. 참기름집 앞에 붙어 있는 무수한 수식어는 단어의 거품이다. 단어의 과장표현은 그만큼 그 시대가 평범하면 손해 볼 수 있다는 생각과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보여주는 증표다. 단어는 시대적 정서를 담고 있는 단서다.     



특정한 사람이 쓰는 특정한 언어를 만나는 것은 일종의 강렬한 정신적 체험이자 버거운 육체적 체험이다(참고: 윤여일, 2012). 한 사람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담긴 어떤 단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고뇌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정신적 산물이다. 단순한 감정의 파장을 넘어 깊은 감동의 물결로 다가오는 단어가 있는가 하면 화려한 관념적 사유보다 처절한 사투 끝에 건져 올린 결기의 단어도 있다. 예를 들면 유영만의 체인지(體仁智)라는 단어에는 관념적 지식의 무력함을 지적하고 체험적 지혜의 소중함을 일깨우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를 포함해서 세상을 바꾸는 지혜(智)는 내가 직접 체험(體)해보며 타자의 입장에서 공감(仁)할 때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단어나 개념은 단순히 고뇌의 산물을 엿볼 수 있는 정신적 산물을 넘어선다. 체인지(體仁智)라는 단어는 누구나 알고 있는 세 가지 한자어를 조합해서 만들었지만 관념적 지식의 무력함을 몸소 체험한 결과 세상을 변화(change)시킬 수 있는 지혜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우여곡절 끝에 몸으로 깨달은 체화(體化)의 흔적이다. 체인지라는 단어는 익숙한 한자어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기존 단어로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과 새로운 인식 지평을 열어가려는 간절한 소망의 산물이다. 체인지는 그래서 책상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서 만들어낸 정신적 산물을 넘어서 몸으로 현장에서 깨달은 욱체적 고통의 산물이다. 어떤 단어를 만난다는 것은 따라서 그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의 피눈물을 만나는 것이며, 기존 단어로 문제 현상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절규를 듣는 일이며, 몸소 체험하며 현장을 누비던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 단어에는 그 사람의 고뇌의 단서가 숨어 있다.      



학생들의 논문을 보면 그 학생이 주로 사용하는 단어가 눈에 띄게 드러난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상응하는 최근 트렌드 관련 전공 용어는 물론이고, 해당 논문에서 주제와 관련된 핵심 개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논문은 단어의 논리적 배열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은 또 다른 문장과 연결된다. 본래 그렇게 쓸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단어는 또 다른 단어를 불러온다. 그런 단어의 연결이 문장으로 완성되며, 완성된 문장은 또 다른 문장을 불러온다. 앞 문장으로 근간으로 뭔가를 주장하고 싶은 욕망은 ‘따라서’ 접속사를 쓰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따라가지 않는다. 자신의 주관을 토대로 어떤 입장을 드러내고 싶으면 주장하면 된다. 하지만 주장하기에는 아직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거나 자신감이 없을 때 ‘~인 것 같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능동태 문장보다 수동태 문장을 주로 쓰는 것도 자신의 주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보다 그럴 것으로 추정된다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주장의 선명성을 감추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I BELIEVED THAT...이라고 하지 않고 IT IS BELIEVED THAT이라고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자신감의 부족이며, 연구자의 주관이 끼어들 수 있는 여유를 두지 않는 것이다. 또한 ‘It is supposed that’와 같이 다른 말을 동원하여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추정된다는 말은 정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려우나 비슷한 다른 연구결과에 미루어 짐작해볼 때 연구자가 결론지으려는 주장이 맞을 것 같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표현을 들 수 있다. 이전 주장과의 차이점은 내가 믿는 것과 다른 사람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의 차이다. 예를 들면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 A couple of other guys think so too.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듯이..." --> “나 말고도 몇 명 더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 말의 다른 숨은 뜻은 “사실은 나하고 지도 교수하고 이렇게 믿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믿어 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김흥식의 《우리말은 능동태다》라는 책에 보면 우리말과 영어의 차이,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영어식 사고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우리말에는 우리의 민족적 특성을 대변해줄 뿐만 아니라 문화적 특성을 드러낸다. 우리말과 영어의 가장 큰 차이는 우리말에는 수동태가 없다는 점이다. 수동태가 없다는 이야기는 우리말은 반드시 사람이 주어라는 생각이고 사람만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주어가 생략되어도 당연히 사람이 주인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주어가 없어도 되는 우리말에 주어가 등장하면서 우리말의 소멸을 가져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예를 들면 “소리 좀 지르지 마!”라고 하면 될 것을 “넌 소리 좀 지르지 마”라고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사람만이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에 굳이 사람이 주어일 때는 주어를 생략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말에 담긴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영어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도 주어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숨어 있다. 예를 들면 “남다른 여유가 느껴지는 출근길”은 영어식 수동태 표현이다. 남다르게 여유를 느끼는 주체는 사람일 뿐이다. 사람이 주어로 등장하지 않고 남다른 여유가 주어로 등장하니 여유가 주체적 행위를 할 수 없어서 수동태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말이 다 영어식 표현으로 우리말의 능동태를 파괴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수동태에서 사람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고 주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켜본다. 한 마디로 수동태 문장에는 주객이 전도되어 말하는 사람의 주관적인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주체가 수동적으로 숨어 있다. 우리말에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능동태를 사용하지 않고 수동태 문장을 사용해서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다는 의미는 지금 사안이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이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단어에는 단서가 들어있지만 문장에는 더 나아가 글 쓰는 사람의 주관과 주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물증(物證)이 들어있다.     



하지만 우리말에는 이중적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에 드러내서 상대방이 알아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묘한 표현이 유독 많다. ‘번역할 수 없는 말들의 사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한국문화 특수 어휘집》에 따르면 한국말은 그 낱말이 쓰이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벗어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특히 한국말은 문법적 규칙만으로는 단어의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맥락 의존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들이 많다. 단어와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의 의미는 단순히 단어의 의미의 합이 아니다. 예를 들면 “뭐 이런 걸 다 주십니까. 괜찮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인사를 한다고 바로 “그래요? 그럼 알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인사말에 담긴 진짜 화자의 의도를 잘 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선물을 주면 너무 좋아서 넙죽 받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예의에 어긋나거나 전후좌우 상황을 잘 못 판단하는 답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양하는 듯한 인사말에는 “주신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을게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사양하는 말의 진의는 진심이 아닌 경우가 많다. 부모님에게 어떤 호의를 베풀면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뭘 이런 걸 다! 괜찮다. 나는 신경 쓰지 마라.”는 말을 듣고 진짜로 신경 쓰지 않으면 부모님은 속으로 속이 상하거나 원망할 것이다. 사양한다는 의미는 겉으로는 그렇지만 속으로는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주의해서 그 의미를 맥락에 비추어 파악하지 않으면 단어에 담긴 단서를 잘 못 파악할 수도 있다. 



《문화를 넘어서》라는 저서를 쓴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우리말처럼 함축적인 언어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문화를 고맥락 문화(high context culture)라고 하고 직설적이고 분명하게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저맥락 문화(low context culture)라고 한다. 진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우회적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우리말의 단서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에 따라 단어나 문장에 담긴 단서 파악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잘 못된 단서를 잡아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일상적으로 사용한 단어는 물론 가수가 부르는 노래 가사에도 가수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거나 당대의 트렌드를 심리적으로 담아낸다. 《단어의 사생활》을 쓴 제임스 W. 페니베이커는 비틀스의 노래 가사를 분석해서 그들의 전반기 활동과 후반기 활동의 특징을 밝혀내기도 했다. 활동을 시작한 지 4년까지 비틀스는 주로 노래 가사에 낙관주의, 분노, 성적인 요소로 자신들의 노래하는 마음을 담아냈다. 생각은 단순하고 자아도취적인 동시에 먼 미래보다는 지금 여기 당장 이곳에 초점이 모아졌다. 하지만 비틀스 그룹이 해체되기 몇 해전에는 그룹의 복잡한 심정이 가사에도 그대로 흔적으로 남겼다. 한참 활동할 때보다 노래 가사가 복잡한 심리적 감정을 드러냈고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반영되었다. 지위가 낮을 경우 자주 사용하는 ‘나’라는 단어는 전반기의 14%에 비해 7% 정도로 머물렀다. 가사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코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의 당시의 심리적 상태를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노래 가사를 잘 음미해보면 그 당시 사람의 심리적 코드를 읽어낼 수 있고 가수들의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는 이유다.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 독일의 언어철학자 훔볼트의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현실을 규정한다는 말이다. 내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내가 바라보는 현실도 달라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부정적이고 우울한 언어를 주로 사용하면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그 세상 한 복판에서 버둥거리며 살아가는 나 역시 기분이 우울하다는 의미다. 언어는 나아가 한 개인의 심리상태를 넘어서 시대적 상황에 통용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언어는 한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시대의 역사적 현실이나 실상을 담아낸다. 《어휘 늘리는 법》을 쓴 박일환에 따르면 언어는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을 지시하는 기호를 넘어서 사회나 문화, 역사나 종교적 신념을 반영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근로자라는 말 대신에 노동자라는 단어가 자주 쓰이고 학부형이라는 말은 학부모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이런 언어적 대체현상은 단순히 시대가 바뀌어서 말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단어에 대한 관념, 즉 개념적 선호도의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념이 담긴 상징적 기호체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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