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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말들의 풍경,
잃어버린 삶의 풍경

언어를 잃어버리면 언어로 표현하는 삶도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말들의 풍경, 잃어버린 삶의 풍경:

언어를 잃어버리면 언어로 표현하는 삶도 잃어버린다!     


한국 사람이면서 아름다운 한글을 모르고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배우려고 하지 않았기에 평소 대화를 할 때 사용하지 않고 글을 쓸 때도 몰라서 못 쓰는 경우가 많아진다. 알고 사용하면 생각이나 느낌을 더욱 풍부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ebs 지식채널 e에서 방송된 ‘잃어버린 말들의 풍경’에 나오는 순 우리말, 특히 가을날의 정취를 한껏 표현하는 다양한 우리말을 토대로 깊어가는 가을의 풍경을 묘사해보려고 한다. 여기에 동원된 빨간 글씨로 된 단어의 뜻을 과연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봄부터 한여름까지 폭염과 천둥번개 맞고 비바람에 몸을 맡기며 가을로 향한 모든 생명체는 그간의 노력을 자축하면서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머루 덤불에는 까만 머루 알이 조랑조랑 수없이 열려 있었다. 따사롭게 내리쬐던 9월의 햇빛이 이울고, 먼 산이 그늘에 덮여 가고 있을 때 10월의 가을은 한결 스산해지기 시작했다. 10월의 조석날씨는 곧 겨울을 불러올 것처럼 따스한 우주의 기운이 점차 이울어가면서 비록 더웠던 한여름의 따뜻한 시간을 흐놀았다. 가을 들판의 어구에는 황금색으로 입맛을 돋우는 감과 포도송이가 드레드레 늘어져 익어간다. 드레드레는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이나 포도송이처럼 욕심이나 심술 따위가 많은 모양을 지칭하기도 한다. 과수원의 사과나 배도 마찬가지다. 봄과 여름을 지나오는 동안 너무 많은 욕심으로 꽃을 피운 대로 결실을 맺어서 사과나 배가 드레드레 매달려 결국 가지가 꺾이는 경우도 있다. 가을에는 야생에서 자라면서 자연이 준 선물도 잊을 수 없다. 머루랑 다래도 다래다래 매달린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온 천지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극치이자 배움의 천국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야생화도 가을의 멋스러움을 뽐내는데 톡톡한 한 몫을 한다.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저마다의 위치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다보록다보록하게 피어있다. 옥수수는 수염을 겉으로 드러내고 늘어뜨리면서 저마다의 빛깔을 잃어가지만 다보록다보록하게 수확의 계절임을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가을이 되면 갓 수확한 찹쌀로 차린 햅쌀밥에 함치르르 윤기가 흐르는 것만 보아도 입안에 침이 돌기 시작한다. 한여름의 햇살에 비하면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가을 햇살은 활짝 핀 꽃잎에서 함치르르 윤기가 흐르도록 만들어주는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비가 그친 다음 햇볕에 반사된 꽃잎은 그 자체가 함치르르하다. 그럼에도 가을은 바람이 불면 허우룩한 모습을 띠면서 하염없이 흩날리는 소리의 풍경이 거룩하다. 빛나는 결실의 계절이지만 그 이면에는 허전하고 서운한 모습을 애써 감추면서 만추의 가을을 성찰하는 모습도 공존한다. 저마다의 삶에서 생긴 그림자이고 얼룩이자 흔적이지만 허우룩한 모습에서 우리 모두는 미래의 언젠가 거룩한 무늬를 창조해내는 예술가다. 사계절 다 마찬가지겠지만 가을에는 자연 삼라만상이 아름다움을 뽐내는 배움의 터전이 아닐 수 없다. 빛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해 봄부터 가을까지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순환하는 계절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유독 가을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에서 조락하는 가을의 쓸쓸함을 느낄 수 있다. 스치는 바람에도 안간힘을 다해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퍼르퍼르 버둥거리며 떨고 있다. 눈을 돌려 들판을 바라보면 가을의 대명사 갈대숲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건들건들 불지만 작은 바람에도 건들건들 흔들리는 갈대를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가을의 낭만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간간이 부는 가는 바람에도 길가의 코스모스는 한들한들 흔들린다. 코스모스는 이름처럼 우주의 질서를 상징하듯 형형색색으로 길옆에 늘어서 가을의 정취를 한껏 드높이며 스치는 바람에도 한들한들 몸을 흔들며 지나가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길가의 코스모스가 보여주는 만추의 낭만은 정처 없이 나풋나풋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노라면 갑자기 덧없는 삶의 무상함에 그 맛을 더한다. 불타는 단풍으로 가을의 마지막 길목을 장관으로 만드는 나무들은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가지 끝에 달고 있는 나뭇잎을 나풋나풋 떨어뜨려내고 있다. 꽃이 지고 난 나뭇가지에는 옅푸른 새 잎들이 나풋나풋 솟아났었던 그 나뭇잎이 이제는 겨울을 준비하면서 나풋나풋 몸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생명의 이중성을 생각해본다. 몇 안 되는 단풍을 달고 있는 나무 가지가 이따금씩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낭창낭창 흔들리다. 그러다 떨어진 낙엽은 바닥을 훑는 바람에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달막달막하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살수 없다, 느닷없이 불어 닥치는 바람에 따라 정처 없이 떠돌다가 잠시 안착한 자리에서 달막달막 가벼운 춤을 춘다. 지금 느끼는 안락함도 잠시뿐, 흩날리는 바람에 또 어딘가로 날아간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낙엽의 목적지는 자신도 모른다. 지금 있는 이 순간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바람 덕분에 달막달막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가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할 뿐이다. 나는 이미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이방인일 뿐이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르는 불안한 삶의 연속이다.  

   

시나브로 불어온 흘레바람에 나뭇잎은 맥을 못 추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어느 순간 먹구름으로 뒤덮이는 하늘에서 순식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호숫가에 토도독토도독 떨어지며 장엄한 교향곡을 연주한다. 후두두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제 온 세상을 빗소리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눈은 때가 되면 녹는 것처럼 모든 소나기도 때가 되면 옅은 가랑비로 바뀌거나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뚝 그친다. 소나기가 지나가자 마당에 널린 화분마다 빗물이 가랑가랑 고였다. 장독단지에 거꾸로 씌워진 뚜껑에도 가득찬 물이 차란차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사이 개울물은 성난 파도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개울로 모인 빗물은 제법 많이 모여 둑을 흥덩흥덩 넘칠 정도로 거센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높은 강둑을 흐르는 물과는 다르게 계곡에서 좁은 도랑으로 흘러드는 물은 여흘여흘 흐르며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가을을 데려가는 듯 했다.    

  


비온 뒤 가을을 만끽하려는 생명체의 요동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은 파동을 일으키게 만든다.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고 뒤돌아서며 다시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니 마음이 다소 느즈러지기 시작했다. 한바탕의 소나기가 그친 후 주변에는 저마다의 얼룩과 무늬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거미줄에 송알송알 맺힌 빗방울은 떨어질 듯 말 듯 하면서 간신히 매달려있다. 세찬 소나기도 견뎌낸 거미줄 한 쪽 끝에서 거미는 다시 자신이 쳐놓은 그물을 흔들어 긴장 강도를 점검한다. 비가 갠 뒤 나뭇가지를 타고 한 마리의 풀벌레가 는지럭는지럭 기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쏟아진 소나기를 용케 피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옆 나무에는 휘어진 가지를 타고 한 마리의 장구벌레가 곰실곰실 기어오르고 있었다. 소나기가 몰고 온 비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뚝 서 있는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한 마리의 송충이를 발견했다. 솔잎을 배부르게 먹은 송충이 한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서 아래로 앙금쌀쌀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비온 뒤 앞산을 바라보니 불타는 단풍은 기세를 잃고 계곡 사이로 감실감실 무지개 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직전의  짙게 깔린 긴장감과 비오는 도중에 모든 생명체들이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남으려는 끈질김도 고요하게 퍼지는 아늑함으로 이내 헤실헤실 풀어졌다.      


거리마다 떨어진 낙엽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도 땅바닥에 찬 기운으로 엎드려 있는 낙엽을 밟아보니 가을을 깨단하는 저마다의 아쉬운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흘러갈지를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깊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계절의 시작을 맞이한다. 녹음이 우거졌던 한 여름의 열기가 꺾이면서 짙푸르렀던 잎사귀도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단풍은 오래가지 못하고 줄기로부터 공급받는 물이 끊기면서 서서히 말라 나뭇가지에서 시드럭부드럭 떨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정기를 자랑하다 불타는 단풍으로 열기를 자랑했던 나뭇잎이 시드럭부드럭 말라비틀어지고 있지만 낙엽에게는 또 하나의 희망이 있다. 바로 자신을 떨어뜨려낸 나무에게 썩어서 거름이 되는 것이다. 시드럭부드럭 떨어져나가는 나뭇잎에서 자연 에너지가 순환하는 오묘한 진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스산한 가을바람은 마지막 남은 잎사귀마저 흔들어 떨어뜨린다. 그런 바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겨울로 가는 찬바람을 견딘 나뭇잎 사이로 날아가던 풍선이 걸렸다. 아이가 나뭇가지에 걸린 풍선을 잡으려고 강동강동 뛰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순식간에 달아난 계절과 소리와 풍경을 절묘하게 표현하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어느 사이 우리들 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칼 베듯 지나가는 가을처럼 뇌리 속에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우리말로 담아내는 우리들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째서 내가 여태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말을 깨단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틀에 박힌 말만을 반복하고 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이 우리 곁을 떠나가기 이전에 낱말 하나씩 붙잡고 그 의미가 전해주는 풍경의 아름다움에 더 젖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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