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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상처이자 문신이다

나는 언어로 오염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언어는 상처이자 문신이다

나는 언어로 오염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276쪽).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말이다. 살이 느끼는 감촉과 그것이 뇌에 전달되는 감각은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에 가까울 때가 많다. 생각은 이리저리 배회하며 적확한 느낌에 맞는 언어를 찾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본다.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141쪽). 역시 김훈의 《자전거 여행 2》에 나오는 말이다. 같은 책에 이런 말도 나온다. “사유는 몸으로 드러나고 몸은 사유의 집이다”(231쪽). 몸으로 느낀 감각적 체험이 언어를 매개로 표현되는 순간, 애초에 몸이 느낀 감각은 타자에게 극히 일부만 지각될 뿐이다.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은 지금 바로 느낀다. 가슴으로 지금 다가오는 느낌은 내일 머리로 전달된다. 몸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가장 정직한 감각이며 그건 속일 수도 없다. 언어적 정교함과 정확함을 아무리 개발해도 몸으로 느낀 감각적 체험은 여전히 몸속에서만 맴돌다 언어로 포착될 수 있는 감정만 외부로 표출될 뿐이다.     



2012년에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참가한 적이 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을 뚫고 하루 40km를 제한된 시간 내에 완주하는 죽음의 레이스다. 하지만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는 이문재 시인처럼, 사막은 나에게 모래사막이라기보다 사유의 사막이었다.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리쬐는 혹독한 폭염과 달아오른 사막이 내뿜은 모래 열기 사이에서 걷다가 뛰기를 반복하는 나를 무엇으로 설명하랴. 흘러내리는 땀방울,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 극에 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무슨 이유로 지금 여기를 달리고 있는 것일까. 한발 한발 모래사막을 밟고 지나가는 나는 짓누르는 배낭과 어깨가 만나는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시원함으로 버텨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표현 자체를 거부하는, 광활한 사막이 주는 적막한 고요함과 뼈와 살을 저미는 사막 레이스의 고통스러운 쾌감을 무슨 수로 설명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맛보게 하랴! 작렬하는 태양과 타오르는 모래사장 사이로 스치는 바람을 타고 달리며 온몸으로 퍼지는 육신의 고통과 함께 하는 사막 레이스는 사투 끝에 스며드는 오르가슴이다. 논리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서 머리로는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다. 전달하는 사람이 사투하는 과정에서 온몸이 촉수가 되어 감각적으로 느낀 느낌은 언어적 매개 수단을 통해 전환되고 번역될 때 많은 부분이 실종된다. 언어가 맥락 정보를 아무리 표현한다고 해도 그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느낀 몸의 반응은 여전히 몸 구석구석에 각인되어 숨죽이고 있다.     



“사막은 사람에게 행동하라 가르친다… 생존을 위한 안간힘일 뿐이다. 사막 같은 극한의 땅 위에 서면 누구나 일상을 뛰어넘는 사색과 결단을 하게 되고 마침내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사막은 책 따윈 버리고 대신 땅을 읽으라 한다. 사막에 당도하지 못한 자들만이 책을 읽는 것이다…땅 읽기에 비하면 책 읽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235쪽)." 이희인의 《여행자의 독서》에 나오는 말이다. 사막에 관한 책을 읽고 이성적으로 사막을 이해하는 노력보다 사막을 직접 밟아보면서 모래와 모래 사이도 느껴보고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너머에서 떠오르는 일출과 그 너머로 다시 넘어가는 일몰 장면을 직접 보는 것은 책으로 보는 것과 천지차이다. 보는 것과 가 보는 것, 그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앉아서 보고 상상하는 일과 직접 가서 몸으로 부딪혀 보는 체험 사이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p.39).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말이다. 맨발로 뜨거운 모래를 밟으면서 느끼는 전율하는 감각은 그런 체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관념으로 다가오는 추상적 표현일 뿐이다.      



《바보의 벽》이라는 책을 지은 요로 다케시에 따르면 현실적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고급 정보를 뇌에 입력해도 이를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한다. 그는 이런 원리를 y=ax라는 공식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a는 현실의 무게 또는 체험이고 x는 뇌에 입력되는 모든 정보다. 예를 들으면 아기를 낳아보지 못한(a) 남성들에게 한 여성이 산통 체험을 이야기(x)해도 남성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산통 체험이 없는 남성들은 여성의 고통을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체험해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언어 선택과 사용도 남다르다. 체험이 없이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공부한 사람의 언어는 생기가 없고 건조하다. 반면에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다양한 체험을 해본 사람은 비록 사용하는 언어가 고급스럽지 않지만 진실한 마음과 땀의 언어가 그대로 살아 숨 쉰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몸과 사유를 연결시켜서 글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리듬이다. 나는 이 리듬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리듬은 살아 있는 생명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 리듬은 비논리적인 것이고 오직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작곡을 생각한다.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악보이다(60쪽).”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몸속의 리듬은 몸으로 깨달은 각성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운율이다. 언어 이전의 체험적 각성이 언어로 매개되어 겉으로 표현될 때 한계는 있지만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적확한 언어를 여전히 땀 흘려 찾는 것이다.   


  

몸을 쓰며 흘린 땀의 농도는 앉아서 시기하며 흘린 침의 당도를 능가한다. 땀 흘리는 열정이 침 흘리는 열광을 이기는 이유다. 열정은 내 일에 몰입하면서 부산물로 땀이 흐르는 고군분투다. 열광은 남의 일에 발광하면서 침이 흐르는 광란이다. 땀 흘리는 열정의 언어와 침 흘리는 열광의 언어는 차원이 다르다. 땀 흘린 뒤의 풀어내는 열정적 언어에는 그야말로 뜨거운 에너지가 흐르고 결연한 용기와 그 사람 특유의 철학이 담겨 있다. 반면에 남의 일에 발광하면서 흘리는 침의 언어는 열정의 도가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연과 사유가 담겨 있지만 내 일보다 남의 일에 빠져서 그 사람의 마력에 이끌려 끌려가는 사람의 언어다. 침 흘리는 사람의 언어에는 주체의 에너지가 없고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지 않다. 심금을 울리는 언어는 침으로 생기지 않고 땀의 얼룩에 담긴 처절함과 간절함이 만든다. 그런 언어가 가슴으로 전해질 때 몸이 반응한다. 하지만 몸으로 체험하면서 깨달은 각성이나 교훈을 글로 옮기는 사람의 언어와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배운 사람이 깨달은 앎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언어 사이에도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몸으로 깨달은 각성 체험을 적확한 언어를 선정해 표현하는 고달픔이 신체적 감각을 담아내는 언어를 발달시킨다. 체험적 각성이 언어로 매개되는 순간 여전히 한계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적 지식으로 설명하는 논리적 언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땀 흘리는 노동의 대가로 감동의 눈물이 흐른다. 힘들게 땀 흘리며 일하다 어느 순간 눈물이 나기도 한다. 모든 땀은 눈물을 머금고 있다. 노동하는 자신을 생각하며 복받쳐 울기도 한다. 땀 흘려 얻은 성취의 뒤안길에 꽈리를 틀고 있는 서러움 때문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앉아서 침을 흘리지 않고 스스로 고난의 전장(戰場)에 몸을 던져 땀을 흘린다. 피가 땀을 만나면 피땀이 되고 피가 눈물을 만나면 피눈물이 된다. 땀 흘리는 고통을 넘어 피땀을 흘리고 눈물겨운 고생을 넘어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은 피땀 흘려 있는 힘을 다해 노력했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피눈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되는 현실이다. 피눈물 나는 고통과 피땀 흘리는 고생은 인생의 영원한 스승이다. 하지만 그 스승도 가끔은 수많은 현실의 제자를 저버리는 요즘 눈물과 땀의 존재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땀은 감동의 눈물을 머금어야 되지만 피땀은 피눈물을 잉태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언어적 표현은 피땀과 피눈물을 흘린 대가로 얻은 체험적 깨달음의 언어다. 몸으로 깨달은 신체언어는 관념적 추상과 피상적 장식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 느낌을 최대한 적확한 언어를 찾아 표현할 뿐이다.      


몸으로 깨달은 신체 언어는 상대방에게 잘 전해진다. 반면에 머리로 깨달은 입의 언어는 논리적으로 치밀하고 정교하더라도 잘 전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차이는 바로 하나뿐입니다. ‘전해지는 언어’에는 ‘전하고 싶다’는 발언자의 절박함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에게, 가능하면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는 필사적인 마음이 언어를 움직입니다. 뜻하지도 않은 곳까지 언어가 닿도록 합니다(303-304쪽).” 우치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전해진 것은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를 전달하고 싶다는 열의입니다. 그것은 뇌가 아니라 피부로 느껴졌습니다(305쪽).” 땀을 흘리면 몸으로 깨달은 사람의 언어에는 치열한 열정이 숨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언어로 쓰인 글을 읽으면 절박함과 간절함이 묻어난다. 반면에 잘 ‘전해지지 않는 언어’는 전달하는 사람의 권위가 자랑하듯 듣는 사람을 논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지성으로 깨달은 지혜라는 우월감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논리적 설명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타자를 배려하는 언어보다 일정한 전문성을 갖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언어가 지배적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타자의 삶을 반영하는 공감의 언어라기보다 자기 분야의 전문성을 자랑하는 관념적 언어가 많다. “지금 우리 주변에 오고 가는 언어의 대다수는 전해지는 언어‘가 아닙니다. ’평가를 받으려는 언어‘도 아닙니다. 단지 ’나를 존경하라‘고 명령하는 언어입니다. ‘내게 존경을 표하라.’ 그것뿐입니다(305-306쪽).” 우치다 다쓰루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존경은 상대방의 삶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가 사용한 언어대로 앎과 삶이 맞물려 돌아갈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미덕이다.     



한 사람의 생각을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와 그 언어에 담고 있는 연상의 세계를 알아보면 된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 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65쪽).” 신영복의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에 나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막걸리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파전, 비오는  날, 등산 등이 떠오르면 그 사람의 막걸리에 대한 사상의 깊이와 넓이는 비 오는 날 파전으로 막걸리를 마셔봤거나 등산 후에 마신 막걸리를 벗어나 심화되고나 확장될 가능성이 없다. 막걸리에 대한 연상력은 막걸리와 관련된 체험의 깊이와 넓이에 비례한다. 언어는 또 다른 언어와 만나면서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시키거나 확장시킨다. 언어와 체험이 만날 때 색다른 개념적 사유와 상상력이 촉발되는 이유다.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260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진부해졌다는 것은 내 삶도 그에 못지않게 진부해졌다는 것이다. 언어와 삶 이전에 언어는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외국어로는 아는 것만 말할 수 있지만 모국어로는 알지 못하는 것도 말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은 도구적 기호에 그치지 않는다(144쪽).” 황현산의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나 매체를 넘어선다. 언어는 삶 자체이며 사고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특수한 상황에서 얻은 체험적 깨달음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언어적 용법에 따라 선택하는 행위일까요? 언어는 한 사회가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한 사회적 약속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체험적 언어도 엄밀히 말하면 그 체험이 일어난 공동체의 언어다. 내가 체험하기 이전부터 언어는 존재해왔다. 어떤 언어로 나의 독특한 체험을 표현할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이미 규정된 공동체의 언어적 용법을 따라서 선택될 뿐이다. 예를 들면 어떤 놀이를 할 때 하면 안 되는 규칙이 그 놀이를 하는 공동체의 규약에 따라 다르듯이, 언어는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인식된다.  “인간의 경험은 언어를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언어적 조종을 받는다. 어떤 환경, 즉 언어적 가상현실이 인간을 지배하는가 하면 해방하기도 한다. 즉 언어는 인간을 조종하는 리모컨이다(40쪽).” 지바 마사야의 《공부의 철학》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언어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 생각을 지배하는 리모컨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특정 환경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해당 공동체에서 비로소 나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바 마사야는 계속해서 같은 책에서 언어 습득이란 결국 환경의 동조를 받는 일이라고 한다. “언어는 환경의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당위, 즉 코드 안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언어 습득이란 환경의 코드를 세뇌당하는 일이다. 언어를 습득하면 동시에 특정 환경의 동조를 강요당하게 되어 있다. 언어의 의미는 환경의 코드 속에 있다(35쪽).”    


 

내가 무의식 중에 사용한 언어 선택은 이미 내가 해당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언어 코드의 의미를 내 신체에 무의식적으로 각인시켜온 덕분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고 그들이 특정 언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암묵적으로 배운 결과 나 역시 그런 언어적 문법과 코드에 길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지바 마사야는 “언어는 타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우리 몸에 새겨졌다. 언어란 상처다. 언어의 형태가 우리 몸에 새겨졌다, 그것은 문신”(126쪽)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사고는 결국 다른 사람의 언어,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언어적 코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언어적 사고다. 언어적 사고는 다른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반복해서 흉내 내면서 습득한 타자의 사고다. 새로운 언어가 내 몸으로 들어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 위에 핀 꽃이 언어적 사고다. 언어적 사고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이전과 다른 사고를 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가는 사고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내가 만든 언어가 아니기에 그 언어로 사고하는 나는 타자의 사고로 움직이는 나다. 타자들이 합의한 언어적 문법과 코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나의 사고는 타자로부터 사고의 기본 방향을 설정당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것은 책상이라고 하자고 합의한 것이며, 저것은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노을이라고 명명한 것을 나도 사용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그것을 그때 사용해야 되는지를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들의 합의로 정해진 것을 나는 따라서 사용할 뿐이다. 그래서 나의 모든 사고는 항상 특정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언어적 필터를 통과하면서 형성된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언어로 오염된 현실 속에서 내 몸이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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