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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과 체험이 마주치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탄생한다

개념 변경으로 다시 태어나는 10가지 성장 체험 이야기(1부)

개념으로 체험을 해석해내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탄생한다:

개념 변경으로 다시 태어나는 10가지 성장 체험 이야기(1부)      


사람은 그가 만나는 인간과 시간과 그리고 공간의 합작품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을 만나 저마다의 인성을 지닌 인간으로 거듭난다. 인간(人間)은 말 그대로 사람(人)과 사람(人) 사이(間)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깨달음의 언어를 습득한다. 아무리 다채로운 체험을 했던 사람을 만나도 그가 했던 체험을 적확한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공감대도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그가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이 보낸 시간의 산물이다. 나아가 인간은 누구와 어디서(공간)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누구와 어디서 어떤 경험, 특히 삶에 방향 전환을 이루는 성장 체험을 했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생각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상응하는 개념적 사유가 생기면서 놀라운 각성이 일어난다. 성장 체험은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변화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성장 체험은 한 인간이 이전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거듭나는 방향 전환이 일어난 각성 사건이다. “각성 사건은 목적과 운명적으로 조우하는 경험이자 자신의 소명에 대한 체험이다(윤정구, 2018, 139쪽).” 각성 사건은 한 사람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으며 다시 태어나는 제2의 탄생과정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은 세상에 태어난 날과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알게 된 날이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나로 하여금 왜 살아야 하는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 수많은 성장 체험과 그에 상응하는 개념 변경 덕분에 오늘의 내가 탄생한 것이다. 성장 체험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게 경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에 대해 당신이 실제로 뭘 했는가가 체험이다.”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에게 그 경험은 창작의 원동력으로 발아되지만 누군가에게 그 경험은 그냥 지나고 나면 생각나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는다. 똑같은 경험을 했어도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과거의 기억이나 추억으로 떠오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깊은 체험적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창작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이 없다면 그것은 생각나지도 않는 관념의 파편으로 모래알처럼 산만하게 떠돌아다니는 잡다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삶은 다른 말로 하면 사건과 사고의 합작품이다. 사건은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고 사고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사건에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연과 배경이 담겨 있고 사고(事故)에는 남다른 사고(思考)를 낳는 원산지 역할을 한다.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의 사연과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깨달음의 합작품이 결국 한 사람의 사고 혁명을 일으키는 운동력이 된다. 사건을 일으키고 사고를 당해본 체험이 적확한 개념을 만나면 자기만의 신념이 탄생한다. 복잡했던 현상과 그것을 응시하는 생각도 개념 없이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포착할 수 없다.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했어도 그걸 정리하고 구조화시킬 수 있는 개념이 없으면 경험은 그냥 지나가는 하나의 추억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겪은 다양한 경험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이 생기면 경험은 새로운 각성사건으로 기억되면서 내 몸에 각인되는 체험적 지혜로 재구조화된다.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런 경험을 어떤 개념으로 포착해서 체험적 지혜로 정리했는지에 따라서 성장체험은 성숙한 인격과 품격을 만들어가는 결정체로 작용한다. 내가 경험했던 그 사건이 나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왜 그것이 그때 일어났으며 그 사건으로부터 내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사고 역시 마찬가지다. 뜻하지 않게 일어났지만 전화위복의 기회, 반면교사로서 배울 수 있는 각성 포인트는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질문을 던질 때 사건과 사고가 던져주는 시사점을 본질과 핵심을 포착할 개념이 탄생된다. 그 순간이 바로 나만의 신념이 잉태되는 소중한 순간이다. 이처럼 개념은 질문을 먹고 자란다. 질문이 따르지 않는 사건과 사고(事故)는 사고(思考)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한 사람은 인간과 공간과 시간이 만들어가는 합작품이라는 생각은 철학자 질 들뢰즈가 《디알로그》에 말하는 아장스망(agencement)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아장스망은 영어의 배치(arrangement)와 상응하는 말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살아간다. 시골에서 자라다 서울로 옮겨와서 살면서 시골에서 만났던 익숙한 환경이 주는 배치와 전혀 다른 배치를 서울에서 만난다. 어제의 나와 다른 나는 어제와 다른 내가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과의 접촉에서 태어난다. 이전과 다른 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낯선 배치로 나를 노출시켜야 한다. 수많은 기존의 유와 유의 낯선 배치로 나는 이전과 다른 나로 거듭 생성되는 존재다. 예를 들면 나는 어린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다. 유영만-운동장-축구공으로 배치되었던 삶에서 학교를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로 옮기면서 이전에서 접촉할 수 없었던 낯선 배치가 나를 한 동안 낯선 이방인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낯선 환경과의 부단한 접촉으로 생기는 낯선 배치가 나로 하여금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아장스망으로 생기는 것이 바로 다중체(multiplicity)다. 다중체는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라는 뜻이다. 배치가 바뀌면 이전에 없었던 흔적이나 주름이 내 몸에 생긴다. 축구선수로 활동했을 때 나는 박지성 선수처럼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잘 다루는 주름, 즉 정신 상태와 신체 근육이 생겼다. 하지만 박지성 선수를 갑자기 운동장이 아닌 수영장, 축구공이 아인 수구 공으로 바꿔 수구 선수로 탈바꿈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박지성 선수는 수구선수로 축적한 주름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물에서 하는 수구선수로서 낯선 배치가 주는 아장스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낯선 배치가 나에게 주는 이전과 다른 접촉은 내 몸이 갖고 있지 않는 다른 주름을 선사해준다. 낯설었던 배치가 점차 익숙해지면서 이에 상응하는 주름도 생긴다. 나는 이전과 다른 나로 다시 생성된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공간 속의 다양한 배치로 인해 이전과 다른 주름을 만들어가면서 다중체로서의 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이전과 다른 체험적 지혜를 얻게 된다. 체험적 지혜를 얻었다는 말은 몸으로 깨달은 교훈을 개념으로 포착해서 이전과 다르게 정리했다는 의미다. 아무리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어도 그걸 적확한 개념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경험은 지혜로 전환되지 않고 흘러가는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이다.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다른 체험적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색다른 개념화 능력을 습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한 사람의 성장과 성숙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사건과 사고를 개념화시킨 결과다. 체험적 깨달음이 개념적 표현능력과 만날 때 비약적으로 일어난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깨닫는 과정은 결국 체험이 적절한 개념을 만나 놀라움을 표현하는 과정이다. 철학사의 발전이 개념창의 역사이듯 한 사람의 역사도 개념창조와 개념변경의 역사다. 내가 몰랐던 개념으로 나의 성장체험을 재해석해내거나 내가 생각했던 개념과 다른 의미로 기존 개념을 재개념화하는 순간 인간의 사고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성장 체험 1: 야성은 야생에서 자란다     


내가 어린 시절 주로 보낸 공간은 자연이다. 책상이 있는 교실보다 일상에서 놀이하는 시간이 오늘의 내가 생태학적 상상력의 소중함을 알게 만들어준 역사적 계기가 된 셈이다. 자연이라는 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간이 가져다준 체험적 흔적이 내 몸에 각인되어 자연환경에 익숙한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이 말은 목표를 갖고 남보다 빠르게 성취하기 위해 경쟁하지 않는다. 다 저마다의 속도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간다. 때로는 치열한 경쟁을 하지만 그것은 생존 본능일 뿐이다. 남보다 잘하기 위해서 전개하는 사투가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유영만의 청춘경영》에서 나는 “남보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전보다 잘하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어제의 나와 비교할 때 오늘의 나는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지를 성찰해볼 수 있다. 그러나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나다움을 찾아가는 자기 발견과 자기 변신의 과정이 되지 못하고 열등감에 휩싸이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반면에 비교의 대상을 내 안에 둘 경우 자신의 재능을 찾아 비전으로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재능은 내가 하면 재미있는 능력이다.     

 


오리와 토끼, 그리고 참새가 동물학교에 입학했다고 가정해보자. 동물학교의 첫날 교과목은 수영하기다. 수영은 오리가 제일 잘한다. 그런데 토끼는 선천적으로 수영을 할 수 없는 동물이다. 토끼가 오리의 재능인 수영하는 능력을 따라잡기 위해서 토끼 엄마가 토끼를 데리고 괌으로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그래도 토끼는 수영을 오리처럼 잘할 수 없다. 둘째 날 교과목은 눈 오는 날 산등성이 올라가는 등산이다. 산등성이 올라가는 교과목을 배우는 동안에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은 오리다. 이번에는 오리가 토끼와 비교해서 토끼처럼 등산을 잘하기 위해 알래스카로 전지훈련을 다녀왔다. 오리는 뼈를 깎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지만 남은 것은 찢어진 물갈퀴, 동상에 걸린 발, 관절염이나 디스크에 걸린 질병밖에 없다. 마지막 날 교과목은 노래하기다. 노래는 참새가 제일 잘한다. 물론 오리도 노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토끼는 전혀 노래를 못한다. 노래를 못하는 토끼를 데려다 성대 수술을 해도 토끼의 재능은 노래하기로 살아나지 못한다. 토끼는 수영할 필요가 없고 오리는 산등성이를 올라갈 필요가 없으며, 참새는 노래를 하지 않고도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잘하면 되는 능력을 개발, 신나게 하다 보면 그게 재능이 되는 삶, 그 재능을 살려 즐겁게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삶이 아닐까.     


자연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살아간다. 스트레스를 받은(stressed) 뒤집으면 디저트(desserts)가 된다. 적당한 정도의 스트레스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내성이다. 내성 없이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낼 수 없다. 자연에서 배운 체험적 교훈은 나에게 새로운 개념 변경의 깨달음을 선물로 주었다. 이때 이루어진 개념 변경은 남보다‘에서 ’전보다‘로의 전환이다. 남과 비교하는 언어에서 전보다 잘하는 비전으로의 언어적 전환이다. 비교에서 비전으로의 개념적 전환은 삶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다. 비교는 주로 다른 학생과의 성적 비교다. 성적에는 나의 적성이 없다. 성적을 뒤집어야 적성이 보인다. 직성을 찾아가는 삶이 바로 자신의 비전을 찾아가는 심장 뛰는 삶이다. 적성을 찾아가며 비전을 추구하는 삶, 그런 삶 속에서 내가 하면 재미있는 능력, 재능을 찾을 수 있다. 단순한 재치나 재주가 아니라 재능을 찾아야 그것으로 기능을 넘어 예술적 능력, 예능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체험적으로 깨달은 교훈을 어떤 개념으로 포착해서 정리하는지에 따라 체험은 지식을 넘어 지혜로운 통찰력의 원료로 쓰이기 시작한다. 야성 없는 지성은 지겨울 정도로 지루하고, 지성 없는 야성은 위험천만한 야만이다. 야성과 지성이 만날 때 틀에 박힌 사유에서 벗어나 색다른 생각이 임신되고 창조가 시작된다.     


성장 체험 2: 상상력은 체험적 상상력이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수도 전기 공고였다. 이 학교는 대학 입학을 위한 수능 준비를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당시 한국전력공사가 설립, 전액 장학금과 기숙사비, 그리고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특성과 공고였다. 학교생활이 주로 이론과목을 짧게 배우고 실습을 통해 기능을 연마하는 학교였다. 기능사 합격을 위한 전기용접 기능사 2급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데 일과다. 하루 종일 보내는 공간이 용접 실습실이었다. 주로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면 용접을 돌려가면서 하는 그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3천 도가 넘은 뜨거운 온도와 싸우면서 한 여름에 용접을 하는 것은 거의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일에 버금갈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열기와 함께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다. 짧은 용접 실습이 끝나면 다시 동료에게 자리를 양보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에 한자 3천 자를 쓰면서 기다리고 성문 종합 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번갈아 보면서 지루한 시간을 달랬다. 덕분에 한자를 많이 알아서 일기 쓸 때도 한자어를 섞어 쓰는 습관을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런 습관이 한자어로 된 어휘력을 기르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갈 수 있었던 원동력도 도저히 책을 볼 수 없는 공간에서 책을 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노력했다. 이질적 철판을 붙여 녹이는 용접 체험은 나에게 이질적 지식을 붙이는 지식 용접의 지혜를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은인이었다.    

 


용접 실습을 통해 실력을 연마하는 이유가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수능에 합격하듯, 실업계 고등학교는 정해진 분야의 기능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고된 훈련을 거듭하는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도전했던 전기용접 기능사 2급 자격증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이라는 좌절 체험을 맛보았다. 전기 용접기술의 핵심은 온도조절이다. 용접봉을 녹여 이질적 철판을 붙여야 하는 난도 높은 시험이다. 늘 쓰던 용접기 대신에 시험 장소에 처음 만난 용접기로 시험을 본다는 것이 무리다. 물론 고도의 숙련된 기능이라면 어떤 난관도 이겨내고 주어진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역부족이었다. 용접봉을 잘 못 녹여서 철판에 구멍이 뚫어진 것이다. 어차피 시험 합격은 물 건너간 것이다. 순간 엉뚱한 오기가 발동했다. 시험에 떨어진 거 철판에 구멍이나 크게 뚫어보자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철판만 생각하면 보름달이 연상된다. 철판과 보름달은 연결될 공통점이 없다. 그럼에도 철판을 생각하면 보름달이 연상되는 이유는 내가 직접 철판에 보름달을 뚫어본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를 떠올리면 바로 연상되는 것은 그 단어와 결부된 그 사람의 체험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면서 깨달은 체험적 지혜의 역사적 산물이다.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생각은 그 사람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삶을 바꾸지 않고 독립적 공간에서 사람을 대상으로 생각을 바꾸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교육적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의 뿌리는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삶의 현장에 있다. 신영복 유고집, 《손잡고 더불어: 신영복과의 대화》에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은 자기 삶의 결론(p.244)”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까지의 내 삶의 결과가 내 생각으로 축적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모든 사람의 삶의 결론이다.      


용접 실패를 통해서 얻은 개념적 통찰은 체험적 상상력이라야 창조로 연결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체험적 상상력일 때 공상이나 허상, 망상이나 몽상 환상이나 허상으로 흐르지 않고 구체적인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돌파력이나 불굴의 의지와 만난다. 신영복 유고집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에 보면 사상과 연상 관계에 대한 의미심장한 통찰이 나온다.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 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 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p.65). 용접과 철판의 연상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막걸리와 연상되는 단어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막걸리와 연결된 사람들의 사상을 알 수 있다. 막걸리 하면 연상되는 단어와 결부된 연상이 막걸리에 대한 글쓰기 능력과 수준을 결정한다. 막걸리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비 오는 날, 파전, 김치, 주전자 등 밖에 연상되지 않는다. 글쓰기나 발상이 아니라 연상이라는 개념 변경도 용접공의 실패 체험에서 얻은 지혜다. 막걸리에 관한 글이 틀에 박혀 있는 이유는 막걸리와 관련된 체험과 언어가 틀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막걸리에 관한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막걸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새로운 단어나 이미지가 연상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막걸리를 다르게 마셔보는 체험을 해보거나 막걸리에 관한 색다른 사유를 촉진하는 글을 읽어본 간접경험이 있어야 한다. 체험 없는 상상은 쓸모없는 공상이나 몽상이고, 상상 없는 체험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체증이다.   

  

성장 체험 3: 어떤 책은 운명을 바꾼다     


고둥학교는 나에게 무조건 졸업하고 취업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졸업만 취업이 보장되는 특성화 공고 덕분에 졸업 후 나는 평택화력 발전소로 발령을 받아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들뢰즈의 아장스망에 따르면 발전소 근무는 나에게 낯선 배치 속에서 또 다른 마주침을 경험하는 낯선 환경이었다. 우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특이한 근무방식이 생체리듬을 잡아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오후에 퇴근하는 근무, 오후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근무, 밤늦게 출근해서 밤을 새운 다음 아침에 퇴근하는 근무 방식을 각각 3일 일하고 무조건 하루 쉬는 4조 3교대 근무방식이었다. 발전소 재직 시절 우연히 읽게 된 책,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고시 체험생 수기집에서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공고생의 사범시험에 합격한 수기집을 읽고 인생역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보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다짐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던 즈음 나에게 막연한 꿈이었지만 기대할 수 있는 미래가 생겼다. 고시 체험생 수기집을 읽기 전의 일상은 회색빛 청춘으로 살아가는 암울한 하루의 반복이었다. 주로 쓰는 언어는 반복되는 음주와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낙담과 좌절감이 전해주는 부정의 언어였다.      


독서는 피클이다. 오이가 피클이 될 수 있지만 피클은 다시 오이가 될 수 없는 이치다. 독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나는 혁명적인 체험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오이였지만 책을 읽고 나면 피클로 바뀐다. 독서를 피클에 비유하는 사유가 바로 메타포, 즉 은유적 수사의 위력이다. 은유는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닮은 점이 있음을 찾아내는 사유법이다. 독서와 피클도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독서도 사람의 생각을 물들이고 피클도 오이가 물든 결과다. 책을 읽기 전과 후가 혁명적으로 다르듯이 오이와 피클 사이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차이를 보여준다. 독서를 피클에 비유하는 사유는 체험적 변화의 혁명적인 차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독서와 비교함으로써 독서의 위력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독서와 피클은 겉으로 보기에는 닮은 점이 없는 두 개의 단어다. 하지만 유심히 관찰해보면 독서와 피클은 공통점이 있다. 오이가 절여져서 피클이 된 것처럼 독서는 멀쩡한 생각을 저자의 생각으로 절인다. 피클이 되면 절인 맛의 고유한 맛이 있듯이 독서도 읽기 전의 상태와 비교해볼 때 사유는 깊이에서 나오는 심오한 의미를 숙성시킨다. 이처럼 책은 책은 위험하다. 책은 책을 읽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위험한 매개물이다.  



나의 운명을 바꾼 한 권의 책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안 읽었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우연히 만난 책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책이 제시한 생각과 스토리를 읽고 한 사람은 위험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도 책에 나와 있는 사람처럼 혁명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책은 더 이상 종이 책이 아니라 한 사람의 꿈길을 재촉하는 위험한 등불이다. 책과 눈이 ‘맞는’ 순간은 심장이 ‘멎는’ 순간이다. 책과 사랑에 빠진 계기는 우연히 그 책과 눈이 맞았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나에게 그 책이 다가온 것은 우연이다. 우연히 만난 책이지만 필연을 낳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책과 숙명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70-71쪽).“ 우찌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 남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우연히 만난 그 책과 눈이 맞아서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p.35-36).”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에 나오는 말이다. 위기의식이 있었던 나에게 책은 스펀지처럼 빨려 들었다. 이때 추천도서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읽고 인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책을 누군가에 추천해준다고 똑같이 감동받을 수 있을까? 위기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책도 책으로 읽히지 않는다. 책 이전에 위기의식이 먼저다. 위기의식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배움의 천국이다.     



성장 체험 4: 한 순간의 선택이 한 평생을 좌우한다      


꿈 깨야 꿈꿀 수 있다. 꿈을 머리로 꾸면 꿈에 머물지만 몸으로 꾸면 실현된다. 고시 체험생 수기집을 읽고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꿈을 향한 여정은 과연 나의 욕망이 작동한 결과일까, 아니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 것일까. 누군가에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공부는 오래가지 못한다. 보여주기 위한 공부는 노동으로 하는 공부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논어》에 보면 보여주기 위한 공부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고 하고 자신이 좋아서 하는 놀이로서의 공부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한다. 고시 공부는 내가 좋아서 시작한 공부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 싫어서 탈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다. 당연히 위인지학의 공부였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잘못된 꿈으로 가는 열차를 탄 것이다. 불온한 꿈을 품고 시작한 공부는 마침내 종착역을 만나 종지부를 찍는다. 



각성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고뇌를 거듭하다 마침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다. 갑자기 이루어진 결단은 사실 갑자기 내린 결정이 아니다. 해당 사안을 끌어안고 깊은 고뇌를 거듭하다 더 이상 생각만 하다가 아무것도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생각을 멈추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해서 다시 고시 공부하기 위해 책을 잡았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집중이 안 되고 고시공부를 하는 과정 자체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길이 진정 내가 가고 싶은 길인지 되물어보았다. 과연 나는 고시 공부를 해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그저 공고생이 사법고시 합격한 스토리를 읽고 감동받은 나머지 나도 그렇게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결단의 칼을 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시공부는 나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였다. 나를 발견하기 위한 탐구과정이 아니라 타인에게 고시 합격이라는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위장과 치장의 과정이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결단의 순간은 순간적으로 내려야 한다. 너무 오랫동안 검토를 거듭하면 검토의 결과는 또 다른 검토를 반복하게 된다. 검토하고 적극 검토하다 실기(失機)하는 경우가 생긴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들어진다. 결단 없는 고민은  빈민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고민 없는 결단은 극단의 원흉이 될 수 있다. 순간적인 결단을 내리고 고시 공부 여정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인 사건을 감행했다. 꿈으로 시작한 여정에서 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꿈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역사적 사건을 스스로 저지른 것이다.     


달밤에 책을 쌓아놓고 기름을 부은 다음 불을 질렀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감행한 것이다. 그 길로 읽고 싶은 책을 새벽까지 읽기 시작했다.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책 덕분에 결단의 칼을 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책 덕분에 다시 내가 하면 재미있는 일을 찾는 또 다른 계기를 마련했다. 어린 시절에는 수렵, 어로, 채취, 농경 생활하면서 야생에서 노느냐고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청춘시절에는 술로 회색빛 시간을 보내느냐고 책과 만날 시간이 없었다. 고시공부를 하는 동안 읽고 싶은 책은 거의 읽지 못하고 주어진 고시 수험도서만 읽다 보니 사고가 갇히고 자유로운 발상에 장애가 생기는 듯했다.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진짜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우선 교육공학 전공 관련 책을 깊이 있게 읽어나갔다. 관련 개념은 다른 책을 참고 읽어서 보충했고, 교육학 관련 기반 지식을 쌓기 위해 교육학 기본 도서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학과 철학 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특히 과학철학 공부는 나에게 인식론적 관심을 촉발시켜 주었고 앎에 이르는 방법론적 결단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렇게 공부한 철학이 훗날 대학원 시절은 물론 지금까지도 공부하는 기반과 기초를 세워주었다. 사회학적 관심은 비판적 의문과 분석을 위한 기본기를 단련시켜 주었고 여타 사회과학적 탐구는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성장 체험 5: 지식산부인과 의사도 의사다      


익숙한 개념(지식) 과 개념(산부인과 의사)의 낯선 만남으로 지식산부인과 의사라는 색다른 의사가 탄생한다. 지식이라는 개념과 산부인과 의사라는 개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익숙한 개념이 만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낯선 개념, 예를 들면 지식산부인과 의사가 탄생한다. 색다른 개념은 기존 개념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조합하거나 기존 개념의 의미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할 때 탄생된다. 지식과 산부인과 개념의 낯선 조합 덕분에 지식 임신이나 지식 잉태, 지식 출산, 지식 자연분만 유도법, 지식 낙태 수술방 지법 등과 같은 금시초문의 색다른 개념을 근간으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창조할 수 있는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일으키는 한 가지 방법은 익숙한 개념의 낯선 조합이다. 따로 떨어져 있는 개념은 본래 개념이 품고 있는 의미 안에서만 생각을 일으키지만 색다른 개념적 조합은 전대미문의 생각을 잉태한다. 지식산부인과 의사는 산부인과 의사의 기본 철학을 따른다. 예를 들면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려면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듯이 건강한 지식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조건으로 충족되어야 할 사항들이 있다.     

 


건강한 아이는 부부의 건강은 물론 부부가 살아가는 환경적 여건과 문화적 특성, 그리고 건전한 인간관계와 먹는 음식 등이 지배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건강한 지식을 창조하려면 지식이 출생할 수 있는 최적의 학습 환경과 학습 주체의 재미와 의미가 동시에 충족되는 즐거운 학습활동이 지속적으로 모색될 필요가 있다. 건강한 지식은 지식창조 주체의 즐거운 학습활동에서 비롯된다. 즉 즐거운 학습이 건강한 지식을 낳는 출발점이다. 즐거운 학습은 언제 일어나는가? 내가 하면 재미있는 공부를 하면서 불현듯 다가오는 놀라운 각성 체험, 예상 밖의 사건이나 문제와 직면했을 때 다양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문제 해결의 단서를 잡아 일사천리로 놀라운 성취감을 맛보았을 때 즐거운 학습이 일어난다. 지식산부인과 의사는 건강한 지식의 임신이나 잉태를 위한 조건이나 방법에서부터 건강한 지식을 출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진단하며 처방하는 융합형 의사다. 지식산부인과 의사는 지식을 마치 공장에서 생산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서구의 지식 경영학적 접근에 대한 반론과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창조한 신개념이다. 색다른 지식은 익숙한 개념의 낯선 융합에서 탄생된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창안한 데페이즈망 기법이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중첩으로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듯 익숙한 개념의 낯선 마주침으로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색다른 개념이 창조된다.     


트위터 자기소개란에 나는 대학교수이자 작가이자 지식산부인과 의사라고 명시해놨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한 의사가 내 프로필을 보고 의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의사라고 했더니 전공분야가 뭐냐고 물어봐서 지식산부인과 의사라고 대답했더니 의사 자격증이 있냐고 되물어봤다. 우선 물어보는 조짐과 자세에 비추어 볼 때 지금 나에게 의사냐고 물어보는 이 사람은 개념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지식창조 과정에 대한 색다른 생각을 임신하기 위해서 익숙한 단어의 낯선 조합으로 창조한 개념이 바로 지식산부인과 의사다. 그런데 나보고 의사냐고 물어보는 자세나 의사 자격증이 있냐고 시비 거는 조짐이 개념이 없는 전문가로 보였다. 내가 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해서 진료행위를 한 적도 없는데 나보고 의사 자격증이 없으면 의사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시종일관 따지듯 나를 개념 없는 인간으로 몰아붙였다. 그래서 색채의 마술사, 샤갈은 마술사 자격증이 있느냐, 윤봉길 의사는 의사냐고 물어봤더니 나하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안을 인정하지 않는 밖은 중심이 될 수 없는 변방이고, 밖으로 향하지 않는 안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이다. 지식산부인과 의사는 실제로 병원에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진료행위를 하지 않는다. 지식산부인과 의사도 의사로 인정해주는 산부인과 의사의 미덕이 더불어 발전하는 상생의 미덕을 낳을 수 있다. 산부인과 의사가 자신들만의 내부적 소통에 골몰하면서 지식산부인과 의사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밖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불안한 폐쇄 공동체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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