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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 산전수전 경험이 만든 명불허전의 영향력

어른의 전달력,

산전수전(山戰水戰)의 경험이 만든 명불허전(名不虛傳)의 영향력이다


전달의 힘은 전달내용과 방법이전에 전달자의 실천적 경험에서 나온다. 경험의 깊이와 넓이만큼 전달할 수 있다. 내 삶을 능가하는 전달력을 기술적으로 배운다고 해도 전달과정에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전달은 살아온 삶, 살아가는 삶, 살아내고 싶은 삶만큼의 내용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의 깊이와 넓이가 내 삶의 깊이와 넓이에 비례한다. 내 삶을 능가하는 글을 읽거나 쓸 수 없듯이 내 삶을 능가는 전달은 불가능하다. 전달은 이런 점에서 기법이나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전달력을 드높이기 위한 1차 전제 조건은 어제와 다르게 살아가는 삶이다. 즉 경험의 깊이와 넓이만큼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물론 경험한 것만큼 그대로 다 전달할 수 없다. 언어적 번역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색다른 경험을 했어도 그 경험을 적확한 언어로 벼리지 않으면 경험은 한 순간의 이벤트로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될 것이다. 어른의 전달력을 드높이기 위해 3단계를 거쳐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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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대 어른의 전달력 y=ax

진통의 아픔과 현실의 무게, 그리고 전달의 무력함


《바보의 벽》이라는 책을 쓴 요로다케시가 구안해 낸 뇌의 일차방정식이 y=ax다. 여기서 y는 뇌 속에서 처리된 결과 나타난 반응을 지칭하며, a는 현실의 무게 계수, 그리고 x는 뇌 속에 입력된 정보를 지칭한다. 이 공식에 따르면 뇌 속에 정보가 입력되어서 나타나는 반응의 강도의 차이는 입력되는 정보가 갖는 현실의 무게를 정보를 입수하는 입력주체가 어느 정도 강하게 느끼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뇌에 아무리 좋은 정보(x)가 입력되어도 그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경험적 깊이와 넓이(a)가 없으면 뇌 속에서 일어나는 깨우침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내가 경험한 깊이와 넓이만큼 뇌로 입력되는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결정한다. 경험이 없는 사람이 전달하는 방법이나 기법을 배워서 청중을 감동시키에는 역부족이다. 인공지능처럼 땀을 흘리며 자신이 직접 겪어본 이야기 없으면 감동을 주기 어렵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확률적 연결가능성과 논리적 패턴에 따라 생성하는 인공지능의 글을 읽고 감탄사는 연발하지만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까닭이다. 인공지능은 짧은 시간에 인간의 기대를 넘어서는 글을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보여주지만 눈물겨운 현실적 경험의 무게가 없기 때문에 감탄사는 나오지만 감동적이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는다.


현실의 무게감이 없으면 전달력은 무기력해진다


산고시 겪는 진통의 아픔을 어느 정도 입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설명을 듣는 사람이 산통경험이 없는 남자라면 입으로 설명되는 진통의 강도를 느낄 수 있을까? 설명을 듣는 사람이 산고의 진통을 겪어 본 결혼한 여성의 경우와 산고의 진통을 겪어보지 못한 여성들이나 특히 남성들의 경우 느끼는 진통의 아픔 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듣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정보와 그들이 겪어본 경험에 따라서 동일한 정보라고 할지라도 뇌가 받아들여서 처리하는 강도가 달라지며 그 결과 출력되는 y값의 본질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남자에게 출산 비디오테이프는 현실의 무게가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뇌 속에 입력된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그 정보를 해석하는 반응의 강도 역시 '0'에 가깝다. 어떤 경우에는 현실의 무게 계수가 부정적으로 작용하여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있고 긍정적으로 작용해서 ‘플러스(+)’값이 나올 수도 있다. ‘마이너스(-)’로 나오는 경우는 부정적 경험의 축적으로 편향적 시각이 생겨서 어떤 경험적 교훈이나 깨달음에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역기능이나 폐, 단점이나 꼬투리만 지적해서 경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경우다.


현실무게의 계수가 ‘0’이 되거나 ‘플러스(+)' 또는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한대로 상정될 수도 있다. 자기 경험만이 최고의 경험이자 내가 경험으로 터득한 깨달음이 진리이자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면서 체득하는 인생의 지혜라고 절대적으로 믿는 경우다. 이럴 경우 a는 교주의 설교나 성서의 말씀 등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원리로 작동한다. 다른 사람의 경험적 지혜는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인정하고 무시하거나 간과한다. y=ax라는 공식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때는 a가 제로이거나 무한대인 경우다. 이럴 경우 개선의 여지는 희박해 보인다. 현실의 무게가 제로일 경우 모든 사회생활을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된다. 내 몸을 관통하며 수많은 정보가 지나가지만 그걸 붙잡고 의미를 부여할 내 안의 경험적 해석의 틀이 없기 때 무이다. 반면에 현실의 무게가 무한대일 경우 절대 진리를 지나치게 신봉한 나머지 극단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테러와 폭력으로 일관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려는 행동을 일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현실의 무게가 제로인 경우와 무한대인 경우 모두 공히 쌍방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하며 일방적 주입이나 주장 또는 그것의 일방적 수용으로 일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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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벽을 넘어서는 방법,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좌우한다


경험해 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언어 선택과 사용도 남다르다. 경험이 없이 책상에서 관념적으로 공부한 사람의 언어는 생기가 없고 건조하다. 반면에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본 사람은 비록 사용하는 언어가 고급스럽지 않지만 진실한 마음과 땀의 언어가 그대로 살아 숨 쉰다. ”나는 글을 몸으로 쓴다.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지 못한다. 연필을 쥔 손아귀와 손목과 어깨에 사유의 힘이 작동되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몸과 사유를 연결시켜서 글로 옮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리듬이다. 나는 이 리듬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 리듬은 살아 있는 생명 속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 리듬은 비논리적인 것이고 오직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작곡을 생각한다. 글은 몸속의 리듬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악보이다(60쪽).”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몸속의 리듬은 몸으로 깨달은 각성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운율이다.


바보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어른의 전달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경험이 0에 가까워지는 경우, 아무리 좋은 정보가 뇌에 입력되어도 이걸 해석할 수 없을 때 어른의 전달력도 0에 가까워진다. 세상의 좋은 정보가 넘쳐나도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방관자로 살아가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무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둘째, 자신의 경험을 진리 판단의 유일한 근거로 생각하는 경험의 절대화가 발생하는 경우다. 이때 생기는 어른의 전달력은 자기가 경험한 것만이 진리이고 그 이외의 것은 자기 편의주의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극도의 자만과 교만에 사로잡힐 수 있다. 자기 경험에 갇혀 사는 좌정관천의 전달력은 다른 세계를 살아보지 않는 이상 치유하기 어려운 질병이다. 셋째, 경험으로 생기는 현실무게값이 ‘마이너스(-)’로 상정되는 경우다. 이럴 때 생기는 어른의 전달력은 어떤 경험적 깨달음도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경험도 억화 심정이나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문제나 한계점만 지적하고 폄하시키는 부정적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이다. 경험은 경전이지만 그건 당신의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근거 없는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사람이 발휘하는 어른의 전달력은 전달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빼앗아 실패를 전달하는 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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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세대 어른의 전달력, y=er2,

체인지(體仁智)로 체인지(change) 하는 어른의 전달력


1세대 어른의 전달력이 지니고 있는 문제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는 우선 내가 겪은 경험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해야 할 모든 영역 중에서 극히 일부에만 해당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겸허한 자세다. 더 나아가 내가 경험적으로 깨달은 지혜도 어떤 상황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편견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모든 걸 다 경험할 수 없으니 나의 경험으로 생긴 신념도 언제든지 통념이나 고정관념으로 바뀔 수도 있음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나의 입장도 수시로 수정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자세가 더 큰 깨달음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이때 필요한 명언이 있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준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어떤 공간에서 해보는 경험, 그리고 내가 읽는 책을 물어보면 된다. 오늘날의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해본 경험, 내가 읽었던 책들이 만든 것이다. 내 안에는 사람을 만나서 생긴 인간적 깨우침, 직접 부딪히며 얻은 경험적 깨우침, 독서를 통해서 깨달은 지적 깨우침이 살아 숨 쉰다.


체인지(體認知)에서 체인지(體仁知)로 바뀐 까닭은?


직접 경험만으로 뇌에 입력되는 정보를 해석하는, 1세대 어른의 전달력을 표현하는 y=ax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대안으로 y=er2이라는 공식을 구상한 것이다. 여기서는 ‘e’는 ‘경험’을 뜻하는 ‘experience’, r2에서 첫 번째 ‘r’은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relationship’이고 두 번째 ‘r’은 ‘독서’를 의미하는 ‘reading’이다. 괴테가 말한 명언에 비추어 재정리하면 네 곁에 있는 사람이 인간관계(relationship), 네가 자주 가는 곳이 경험(experience), 네가 책을 읽는 독서(reading)에 해당된다. 괴테가 명언에서 강조한 세 가지 측면을 다른 말로 바꾸면 네가 자주 가면서 겪은 경험은 체(體), 네 곁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는 인(仁), 네가 읽는 책으로 생기는 깨달음을 지(智)에 대입할 수 있다. 체인지(體仁智)는 영어의 change와 발음이 똑같다는 생각으로 만든 말이 체(體), 인(仁), 지(智)를 갖춘 인재만이 나를 비롯해서 세상을 체인지(change)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체(體), 인(仁), 지(智)를 갖춘 인재만이 나는 물론 세상을 체인지(change)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아 《체인지(體仁智)》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본래 체인지(體仁智)는 체인지(體認知)였다. 유영만의 체인지(體認知)라는 제목으로 전자신문에 2012년 1월 9일부터 주 5회 칼럼을 5년 동안 500회 쓴 적이 있다. 세 가지 한자를 붙여서 만든 조어, 체인지(體認知)는 변화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change와 발음이 똑같다는 문제의식으로 만들었던 한자 조합의 신조어다. 진정한 변화라면 직접 체험(體)해보고 깨달(認)았을 때 남는 지식(知)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러다 체인지(體認知)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한자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없어서, 그동안 쓴 글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는 데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즉 체(體)와 인(認), 체(體)와 지(知)는 구분되지만 인(認)과 지(知)는 구분이 되지 않고 인지(認知)처럼 하나의 단어로 묶이기 때문이다. 체(體)는 몸이지만 인지(認知)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채서 머릿속에 각인하는 과정이다. 즉 인지는 몸으로 체험한 생각을 머리로 정리하면서 탄생하는 앎이다. 그래서 체인지(體認知)의 ‘인(認)’을 다른 글자로 바꾸려고 고민하다가 어질 인(仁)을 만나게 되었다. 체인지(體認知)의 ‘인(認)’이 개인이 깨달은 ‘앎(knowing)’을 강조하는 반면 체인지(體仁知)의 ‘인(仁)’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줄 아는 관계 차원의 공감 능력을 강조한다. 깨달음이 개인차원에 머무르는 체인지(體認知)와 인간관계로 확산하면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체인지(體仁知)에 주목해서 체인지(體認知)의 인(認)을 인(仁)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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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體認知)에서 체인지(體仁知)로 바뀐 까닭은?


무엇보다도 체인지(體仁知)의 인(仁)을 통해서 강조하려는 것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의 지혜다. 체험적 고통으로 깨달은 앎과 느낌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같이 아파하고 위로해 주는 능력이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고 창조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며 치유해 주기 위해서다. 타인의 아픔을 긍휼히 여기는 측은지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체인지(體認知)의 ‘인(認)’을 체인지(體仁知)의 ‘인(仁)’으로 바꾼 것이다. 체인지(體認知)는 체험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면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체험적 깨달음이 축적되어야 함을 강조한 개념이라면 체인지(體仁知)는 체험해 봐야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는 인(仁)을 강조한 개념이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바뀐다. 오늘의 나(人間)는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맺은 인간관계(人間關係)의 산물이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사회역사적 산물이다. 나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내가 만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관계처럼 관계론적 사회작용의 결과 탄생한다. 관계가 존재를 결정하는 까닭이다.


이제 체인지(體仁知)는 한 단계 더 발전해서 체인지(體仁智)로 변신을 시도했다. 체인지(體仁知)와 체인지(體仁智)의 근본적인 차이는 지능과 지식을 넘어서는 지성과 지혜의 차이다. 체인지(體仁知)의 지식도 체험적 느낌으로 체득하는 지혜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지능과 지식보다 지성과 지혜를 강조하는 이유는 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학습을 능가하는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이나 딥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웬만한 지식과 지능은 인공지능이 순식간에 대체할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머신러닝이나 딥러닝을 하며 인간이 수십 년간 공부하면서 축적한 지식과 그런 지식을 개발하는 지능을 순식간에 대체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물음과 함께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많은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고 싶었다. 특히 인공지능이라는 화두가 갑자기 우리 곁으로 다가오면서 근본적인 변화의 실상과 충격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 시점이다. 그래서 지능, 지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성, 지혜의 본질과 성격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전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싹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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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體仁智)는 책상공부의 산물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본 경험적 산물이다


《체인지(體仁智)》에서는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키워드로 체험體, 공감仁, 지혜智를 다룬다. 이 세 가지 키워드는 하나의 결과를 향한 시작과 끝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험의 추동력이 ‘몸(體)’은 극한의 고통과 역경 속에서 자신의 한계와 맞서 싸워야 얻을 수 있는 강렬하고, 굳건한 경험적 깨달음이다. ‘공감(仁)’은 강렬한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지는 마음이다. ‘지혜(智)’는 경험적 깨달음과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실천하며 탄생하는 살아 있는 지혜다. 따라서 세상과 분리된 평면적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다져진 진짜 지혜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현재는 통합과 융합의 시대이고, 이것과 저것을 엮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통합적 인재를 필요로 한다. 남다른 상상력과 지혜는 남다른 경험과 공감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스스로의 삶을 남다르게 개척하고 싶다면, ‘체인지’를 갖춰야 되는 이유다. 어른의 전달력은 체인지(體仁智)의 지혜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듣는 사람의 삶의 체인지(change)하는 과정이다. 그 출발점이 몸의 경험이고, 겪어본 경험이 있어야 가슴으로 다가오는 공감 능력이 생기며, 결론적으로 머릿속에서 정리된 최종 산물이 지혜(智惠)다. 지혜는 책상 공부의 결과가 아니라 몸으로 겪어본 경험적 산물이다. 경험적 산물인 지혜가 듣는 사람의 혜안과 안목을 높여줄 수 있는 어른의 전달력의 정수다.


체인지(體仁智)가 지향하는 어른의 전달력도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만이 다른 사람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마주침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경험적 깨달음도 틀릴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과의 인간적 마주침이나 다른 책과의 지적 마주침을 통해서 어제와 다른 깨우침을 통해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체인지(體仁智)가 지향하는 어른의 전달력도 여전히 한계는 있다. 아무리 색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며 경계를 넘나드는 독서를 해도 비판적 사고를 통해 낯선 언어로 벼리지 않으면, 즉 언어가 타성에 젖어 있으면 색다른 경험과 인간적 마주침과 독서를 통해 깨달은 색다른 앎도 무용지물에 가깝다. 타성에 젖은 사유와 언어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이 추가로 이어지지 않으면 여전히 내가 겪은 경험과 관계와 독서의 틀에 갇힐 수 있다. 물론 경험의 한계를 인간적 마주침과 지적 마주침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은 열릴 수 있다. 하지만 경험과 인간관계, 그리고 독서로 얻은 깨우침도 비판적 사유로 걸러내며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벼리고 벼리며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는 전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또 다른 한계나 벽에 부딪힐 수 있다. 한계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모색해야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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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세대 어른의 전달력, y=er2t/l,

코나투스로 완성되는 어른의 전달력


3세대 어른의 전달력(y)은 e(experience in environment, 특정 환경에서의 경험), r(reading, 주체적 책 읽기), r(relationship, 인간관계), t(thinking, 비판적 또는 과학적 사고 과정), l(language, 언어)로 수식화될 수 있다. 3세대 어른의 전달력은 《코나투스》라는 책에서 일생이론을 구축하는 방정식으로 언급된 바 있다. 여기서 분자에 위치한 경험과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를 통해 깨달은 깨우침에 대한 비판적으로 사고는 많을수록 좋다. 분모의 언어는 간단하고 명료할수록 전체 값이 커진다. 언어로 구성된 분모가 작아질수록 분자의 비중이 커지면서 어른의 전달력의 가치도 더불어 올라가는 방정식이다. 문제는 1세대와 2세대 어른의 전달력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경험(e)이 제로에 가까워질수록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r=reading) 다른 사람을 만나고(r=relationship), 생각(t=thinking)이 깊어져도 총량은 늘지 않는다. 나머지 변수가 아무리 높아져도 결괏값 y, 즉 어른의 전달력이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그만큼 경험은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는 핵심 변수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해 왔다. 이는 거꾸로 축적된 경험이 많은 사람이야말로 전달력을 높이는데 유리하다는 뜻이다.


어른의 전달력(y)은 e(experience in environment, 특정 환경에서의 경험), r(reading, 주체적 책 읽기), r(relationship, 인간관계)를 t(thinking, 비판적 또는 과학적 사고과정), 즉 생각의 용광로에서 경험적 깨달음을 적확한 l(language,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과정에서 백련강(百鍊剛)처럼 태어난다. 여기서 분모에 위치한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 경험과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를 통해 깨달은 깨우침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적확한 언어로 벼리고 단순하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깨우침의 의미와 가치는 배가된다. 즉 언어로 표현하는 분모값이 작을수록 분자값이 커지면서 어른의 전달력의 가치도 덩달아 올라가는 방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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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기 위한 경전이다


대체가 불가능한 전달력이 살아 움직이려면 경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경험적 깨달음의 산물을 모방하거나 복사본으로 전락하는 학습에서 탈피해야 한다. 대체가 불가능한 전달력은 계획적이고 단속적인 체험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어제의 경험이 오늘의 경험과 연결되면서 연속적인 깨달음이 축적되면서 자기만의 서사나 이야기를 창조해야 한다. 체험은 단속적이어서 어제의 체험이 오늘의 체험과 연결되어 깨달음이 축적되지 않는다. 체험은 계획적이어서 계획적이지 않은 우발적 마주침에서 새로운 깨우침으로 축적되지 못한다. 이에 반해 경험은 우발적이고 연속적이다. 어제와 다른 창발적 마주침이 새로운 깨우침으로 축적되어 오늘의 경험을 통해 성찰하고 배우며 내일의 경험과 연결된다. 내가 삶의 주도권을 쥐고 내 몸이 직접 겪어보는 우발적인 경험이 반복되어야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서사가 탄생하고 서사가 있어야 그 사람 고유의 역사로 기록된다. 삶은 계획된 대로 풀리지 않는 미지수와 변수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하면서 예측불허의 불확실한 세계로 매일같이 다르게 구성된다.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내가 몸으로 겪어보지 않는 사건과 사고는 나의 사고 기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가 겪어보지 않는 사물은 내 몸을 관통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상상력도 미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막걸리 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를 말하라고 하면 비 오는 날, 파전과 함께 그리고 등산 다녀와서 마신 경험을 연상한다. 막걸리를 비 오는 날 또는 등산 다녀와서 파전과 함께 마셔본 경험밖에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막걸리와 경험해 본 것 이상을 전달할 수 없다. 막걸리에 대한 나의 상상력은 막걸리를 내 몸으로 겪어본 경험의 깊이와 넓이를 능가할 수 없다. 막걸리에 대한 다른 상상력을 발동시켜 이전과 다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막걸리를 이전과 다르게 마셔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마시지 않고 새벽에 빈속에 마셔서 출근하지 못한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은 세계 최초로 막걸리와 새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을 발동시켜 전혀 다른 강연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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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어른의 전달력을 배가시키는 또 다른 자극제다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필요조건이 독서다. 경험은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기 위한 경전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경험이 업데이트되지 않거나 내가 겪은 경험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는 별도의 노력을 전개하지 않으면 나 역시 나의 경험의 덫에 걸려 좌정관천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내가 겪어낸 경험적 흔적과 얼룩이 어른의 전달력을 신장시키는 과정에서 무늬로 직조된다. 내가 겪어봤다고 해서 그 경험은 언제나 진리이자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서 겪어봐야 되는 전형은 아니다. 나의 경험이나 경험적 깨달음으로 얻은 깨우침의 무늬도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오염된 의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의 편파성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자신의 사유체계를 증축하는 사람이 쓴 책을 읽어보는 것이다. 책은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했어도 다른 관점과 논리로 다르게 생각한 흔적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매개체다. 경험적 자극과 더불어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의 흔적이 담겨 있는 책을 읽음으로써 지적 자극을 받는 간접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 어른의 전달력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넘어서 다른 자극을 받을 때 타성에 젖지 않고 탄성이 일어나면서 지금까지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감탄사가 연발되는 감동이 밀려온다.


독서는 오이가 피클로 변하듯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난다. 책을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책을 읽기 전에는 오이였지만 책을 읽고 나면 피클로 바뀐다. 오이가 피클로 바뀔 수 있지만 피클은 다시 원상태인 오이로 돌아갈 수 없다. 독서가 피클인 이유는 읽기 전에는 오이였지만 읽은 후에는 피클로 바뀌기 때문이다. 읽기 전의 상태로 원상복귀가 불가능한 위험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바로 독서다. 독서는 그만큼 사고방식의 혁명이 일어나는 위험한 행위다. 독서가 피클이 되는 변화는 내가 책을 읽었다기보다 책이 나를 집어삼킨 경우다. 책에 내가 빨려 들어갔지만 내 삶을 책이 어루만져주고 내가 겪은 경험이 이런 의미라고 깨우쳐준다. 그렇게 책에 빠져서 읽은 다음 다시 책에서 빠져나와 주체적인 나의 생각으로 저자의 의도와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내 삶에 비추어 부단히 성찰하는 활동이 이어질 때 책은 단순히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키는 외부적 자극제를 넘어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반성하고 재해석하는 놀라운 지적 자양분으로 자리매김한다. 모든 텍스트는 콘텍스트의 산물이다. 사람은 저마의 사연과 배경이 스며들어 있는 콘텍스트에서 몸으로 겪어본 희로애락을 버무려 씨줄과 날줄로 직조해 낸다. 특정한 콘텍스트에서 탄생된 텍스를 자기 경험에 비추어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자기 지식으로 재창조하는 독서를 하는 인간만이 이전과 다른 문제의식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텍스트를 창작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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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는 어른의 전달력을 반성하게 만드는 양면거울이다


사람이 경험을 하면서 깨달은 깨우침의 흔적도 책이지만 한 사람 자체도 이미 책 한 권을 넘어선다. “'사람'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삶'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사람의 준 말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경영하는 일의 70%가 사람과의 일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삶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일입니다”(296쪽). 신영복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의 준말이 삶이라면 그 삶에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은 삶의 얼룩과 무늬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그 사람 특유의 책으로 완성되어 간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 오늘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맺어온 인간관계의 사회역사적 합작품이 되는 이유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인 이유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관계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 존재는 관계의 부산물이다. 존재인 인간은 그 인간이 만들어가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과 다른 나로 내일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의 관계를 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관계라는 양면 거울은 타인에 대한 경종이자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이며 성찰이다. 자신의 신념도 통념일 수 있으며 가치판단의 근거나 기준도 관성적으로 고착화된 고장 난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때문에 끊임없이 양면 거울에 비추어 반추해 보고 성찰하는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사람 앞에서 나 역시 이런 사람이 아닌지도 양면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86-87쪽).”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 나오는 말이다. 미래라는 타자, 어떤 미래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면서 타자라는 선물을 들고 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분명한 점은 내가 어떤 타자를 만나든 나는 타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나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내가 만약 어떤 타자도 만나지 않고, 자주 가는 곳은 언제나 정해져 있으며,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같은 분야의 책만 반복해서 읽는다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타자가 지옥이라면 나의 미래는 타자를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옥처럼 느껴지는 타자도 만날 수 있지만 무한한 깨달음을 주는 타자도 있다. 인간관계의 깊이가 어른의 전달력으로 자극을 줄 수 있는 깨우침의 깊이를 결정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의 성장 높이는 내가 맺는 인간관계의 높이가 결정한다. 존재가 관계를 결정하지 않고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 나는 혼자 성장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나의 실력도 나 혼자 발휘하는 독립적 역량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주고받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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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고로 걸러지지 않는 경험은 위험하다


경험과 독서, 그리고 인간관계의 삼각축이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는 원료로 쓰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를 녹여내는 나만의 관점과 시각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생각이 통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머리로 하는 관념적 생각보다 몸이 움직여 느끼는 감각적 깨달음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물음표를 던져 재고해조는 비판적 사고에 가깝다. 누군가가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무조건 따라가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겪어보고 내 몸에 좋은 느낌을 받는지 나쁜 느낌을 받는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각성과 일맥상통한다. 이 시점에서 니체가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에서 ‘우리’나 ‘그들’이 주어로 작용하는 선(good)과 악(evil)의 도덕(moral)을 넘어서 나에게 좋고(good) 나쁜(bad) 윤리(ethics)를 따르는 삶이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 ‘그들’이 주어진 도덕은 언제나 이렇게 사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더라는 형식으로 구전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누군가 어떤 의도로 정한 것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왜 그것이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도덕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고 따를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나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언제나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따르고 언제나 나 아닌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노예의 삶이다. 이렇게 자신의 주체적 판단과 적극적 의지에 따르는 주인의 삶이 아니라 소위 “~해야 한다더라”의 삶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주인인 삶, 소문으로서의 삶, 소문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무리의 삶이고 패거리의 삶입니다”(95쪽). 이진경의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해야 하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타성과 고정관념에 젖어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함에 시비를 걸고 근본과 근원을 따져보는 물어봄이며, 이전과는 다른 물음을 던져 베일에 가려진 이면을 드러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상념의 날개를 펼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통해 몸으로 다가오는 느낌에 반응하며 색다른 대안을 찾으려는 안간힘이자 어른의 전달력을 개발하는 모든 실천적 활동 속에서 일어나는 성찰적 자기반성이다. 자기 경험이 독단에 기반한 편파적 신념이나 갈등하는 의견이나 주장과도 타협을 거부하는 외로운 고집으로 흐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는 개방적 신념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자기주장만 옳다는 불굴의 의지는 가급적 잠시 괄호 안에 집어넣고 주장의 신뢰성이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경험으로 해석하는 다른 사람의 삶과 책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내 생각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색다른 깨달음의 사유가 집을 짓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개인적인 믿음으로 치부하지 않겠다는 정열, 다시 말해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에서도 진짜라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80쪽). 사에키 유타카의 《인지과학 혁명》에 나오는 말이다. 몸을 던져 깨달은 신념은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자기 고유의 철학과 열정의 산물이다. 적어도 그것은 흔들리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나를 올곧게 나의 길로 걸어가게 만드는 열정이자 정열이다. 그때 비로소 시류에 따라 흔들리던 생각도 점차 중심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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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언어는 체중이 실린 몸의 언어다


자기만의 언어는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했거나 의도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거나 의도했던 일을 통해 변화를 추진하는 사건을 일으켰을 때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몸의 반응을 적확한 언어로 담아내려고 애쓰는 가운데 탄생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자신이 경험하는 가운데 가졌던 생각이나 느낌을 상상하면서 그 상황에 걸맞은 단어를 찾아 골똘히 고민하는 과정에서 낯선 개념이 잉태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만의 언어는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틀에 박힌 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자기 몸으로 겪으면서 느낀 감정이나 생각의 흔적을 이전과 다르게 표현하려는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힘겹게 출현한다. 이런 점에서 “말은 이론적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운전이나 수영처럼 행위에 속하며 행위 속에서 습득”(p.305)하는 즉, “말은 신체위에서 가시화되는 행동”(p.305)이다. 서동욱의 《타자철학》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는 두뇌 속의 생각을 관념적으로 편집하는 와중에 신체적 경험과 무관하게 생물학적으로 처리-가공된 산물이 아니다. 특히 자기만의 언어는 자신이 몸으로 겪은 단독적인 경험을 그 경험이 발생한 상황적 맥락성을 배경으로 사유하는 가운데 경작되는 애쓰기의 산물이다. 언어는 개념적 의미를 전달하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신체적 경험을 결부시키는 몸의 반응이다. 어떤 문장을 읽으면 머리로 이해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이면서 그 문장을 쓰는 작가의 몸이 경험하는 감각적 체험이나 깨달음의 느낌을 내 몸도 고스란히 느끼는 까닭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관념적 사유의 산물로 탄생하는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경험적 고통이나 상처, 성취의 즐거움이나 좌절의 아픔을 담아내려고 애쓰는 가운데 비로소 모습을 보여주는 몸의 언어다.


자기만의 언어는 특정 공간이나 상황에서 직면했던 난제를 해결하거나 딜레마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치부심할 때 기존 언어로는 지금 난국을 돌파하는 대안이 구상이 안 될 때 지금의 고민을 풀어낸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새로운 언어를 벼를 때 탄생된다. 그때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내가 벼른 언어에는 나의 치열한 고민과 깊이 파고들었던 생각의 깊이가 고스란히 무게가 실린다. 순간 고민하는 시간은 두꺼워지고 단어의 무게가 무거워지면서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다. 언어를 벼르는 시간은 SNS에서 정보가 흐르는 것처럼 얄팍하지 않고 단어의 의미를 반추하며 되새김질을 반복하는 시간이라 두꺼워진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의미가 멈춰 서서 곱씹어보는 시간이다. 자기만의 언어에는 이렇게 시간의 두께가 만들어는 의미의 중력이 실린다. 자기만의 언어는 한 인간이 특정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의 합작품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인간적 고뇌, 공간적 의미, 시간적 추억이 만들어내는 삼중주의 작품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겪은 경험을 특유의 문제의식으로 녹여내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만들어내는 사투의 산물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직접 경험하고, 어제와 다른 책을 읽고, 이전과 다른 사람 만나서 깨달은 교훈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개발되는 성취물이다. 아무리 색다른 경험을 하고 경이로운 책을 읽고 놀라운 사람을 만나 어제와 다른 깨우침을 얻었어도 그걸 어제와 다른 언어로 서술하거나 설명할 언어가 부실하거나 부재하다면 깨우침은 몸속에서 침잠된 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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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산전수전이 낳은 삶의 결론이다


스스로 이단의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며 76세 자살로 한 생을 마감한 이지(李贄)의 원래 이름은 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다. 그가 쓴 세 권의 책 《분서(焚書) I》과 《분서(焚書) II》, 그리고 《속 분서(焚書)》와 그에 대한 평전을 읽다 보면 자신이 겪어낸 고통체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찬란한 무늬로 그려지는 글은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내면에 쌓인 감정의 응어리들과 고심을 거듭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을 사색탐험의 산물이다. “세상에서 정말 문장을 잘 짓는 사람은 모두 처음부터 문장을 짓는 것에 뜻이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형용하지 못할 수많은 괴이한 일이 있고, 그의 목구멍 사이에 토해내고 싶지만 감히 토해내지 못하는 수많은 것이 있어, 이것이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형세가 되는 것이다. 일단 어떤 정경을 보고 감정이 일고 어떤 사물이 눈에 들어와 느낌이 생기면, 남의 술잔을 빼앗아 자기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에 뿌려 씻어내고 마음속의 불공평함을 호소하여 기이한 것을 찾는 사람을 천년만년 감동시킨다. 그의 글은 옥을 뿜고 구슬을 내뱉는듯하고, 은하수가 빛을 발하면서 맴돌아 하늘에 찬란한 무늬를 만드는 듯하다. 마침내 스스로도 대단하게 여겨서 발광하여 크게 소리치며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니,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다. 차라리 이를 보거나 듣는 사람이 격분하여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글을 쓴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게 할지언정, 차만 끝내 명산(名山)에 감추거나 물이나 불속에 던져 사장시킬 수는 없다…….”(290-291쪽). 옌리에산·주지엔구오의 《이탁오 평전》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어른의 전달력은 산전수전의 경험과 마주침을 재료로 삼아 나에게 인간적 자극을 주는 사람과의 마주침은 물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쓴 책과의 마주침으로 받은 지적 자극이 내 생각의 용광로에서 서로 뒤섞이면서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가운데 탄생한 융복합적 산물이다. 전달되는 메시지는 “옥을 뿜고 구슬을 내뱉는듯하고, 은하수가 빛을 발하면서 맴돌아 하늘에 찬란한 무늬를 만드는” 것처럼 일생일대의 깨달음의 전율이 온몸을 휘감으며 감동의 파고가 오랫동안 장중하면서도 심장박동을 가속화시키는 리듬으로 울려 퍼진다. 결국 가장 이상적인 어른의 전달력은 책과 사람책을 읽으며 겪어낸 자기만의 경험적 서사를 낯선 생각으로 녹여내는 과정에서 날 선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그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원본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는 코나투스 전달력이다. 코나투스는 대체불가능한 원본의 자부심과 세상을 뒤흔들고 싶은 욕망으로 색다르게 살아가며 저절로 남달라 지는 가장 나답게 살아갈 때 빛나는 명불허전의 고유한 자기다움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지도를 따라가고 다른 원본(原本)과 비교하며 자기 계발을 할수록 자기가 계발되지 않는 전달력으로 복사본만 대량 양산하며 결국 복사본(複寫本)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즉 복사(複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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