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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단 한 번만이라도
어른이 되어본 적이 있나요?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단 한 가지 기준, 너무 간단해서 충격?

당신은 단 한 번만이라도 어른이 되어본 적이 있나요?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단 한 가지 기준, 너무 간단해서 충격?


영화 남한산성에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명대사가 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 분)이 남긴 말이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라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 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라는 충언을 전하면서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하겠다는 치욕을 견디면 살 수 있다는 명분을 담은 글이다. 하지만 글은 글로써 끝나지 않고 길로 연결된다. 아이든 어른이든 그들에게 글은 역시 길이다. 아이와 어른의 글에는 저마다 살아온 길이 있고, 살아갈 길도 있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길도 있다. 글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자 길이다. 글과 길, 그리고 삶은 하나다. 사람은 살아가는 삶대로 글을 쓰고 쓴 글대로 길을 만들어 걸어간다. 그래서 그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보이고 삶이 보인다. 글과 길과 삶은 따로 노는 객체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 삼위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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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글이고 길이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그 사람이 말하는 메시지는 그 사람의 삶이 농축된 결정체다. 삶을 담은 메시지를 긁으면 글이 되고 그리면 그림이 되며, 목소리로 담아내면 노래가 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게 진짜 나다운 삶인지를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겪은 스토리가 바로 창작의 원료가 된다. 모든 예술가는 자기 삶을 재료로 예술적 창작을 한다. 그들에게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 창작의 기본은 기법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창작하는 사람의 삶이 만들어간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살아가는 삶대로 메시지를 만들고 스토리를 쌓아나간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이켜 반성하고 현재의 삶을 살아가며 오래된 미래를 내다본다. 이에 반해 아이들의 삶에는 아이들의 세계가 반영되어 있고 그 반영된 흔적으로 생기는 글에도 자기만의 생각이 담긴다. 아이와 어른, 모두 자기들이 구축하는 삶 속에서 저마다의 스토리를 남기고 누군가에게 전달하며 의사소통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 차이가 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만들어간다.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든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생각은 결국 자기가 겪은 삶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신영복의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에 나오는 말이다. 글은 테크닉을 연마해서 쓴 산물이 아니다. 글쓰기는 내 생각을 녹여내는 사고의 과정이다. 내 생각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글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군가의 삶이 결론으로 생긴 결과물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이 된다. 특히 우리 사회의 어른은 자기 생각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가며 그 삶의 결론으로 생긴 경험적 깨달음을 정리해서 후세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내가 쓴 글은 내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나의 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에 나오는 글이다.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이는 이유다.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무관하게 글을 쓸 수 있고, 삶과 다르게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글은 독자와 공감하기 어렵고 감동을 주기도 어렵다. 글과 삶은 하나다. 진정한 어른은 글을 잘 쓰고 누군가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 어제와 다르게 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까닭이다. 삶이 바뀌지 않고서는 글도 바뀌지 않는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 자기다운 색깔이 드러나는 글, 살아온 삶을 담아내는 글쓰기와 말하기가 진짜 글이고 영혼이 담긴 전달이다. 모든 어른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면 자기 삶으로 생긴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 글을 쓰고 전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전달에 실패하면 실패를 전달하는 것이다. 왜 실패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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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언제나 많은 영감을 주는 우치다 타츠루의 《곤란한 성숙》에는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점에 관한 놀라운 통찰이 담겨있다. 이 책을 예전에 읽었는데 우연히 다시 책을 펴보면서 당시에 읽으며 영감 받았던 두 사람의 차이를 구분하는 쉽지만 강력한 메시지가 있는 주장을 반추해보려고 한다. 우선 사람이 태어나서 해야 되는 세 가지 일, 즉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각각을 영어로 표현하면 should(당위), would like(희망), can(가능)이라는 조동사의 차이로 구분된다. 우치다 타츠루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어린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른이다. 그렇다면 왜 당위와 희망 사항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린이고, 가능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른 일가? 한 마디로 말하면 당위와 희망 사항 중심, 즉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타인의 동의나 승인 없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개인적인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타인의 승인이나 참여 없이 결정할 수 없는 공공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일 중에서 앞의 두 가지 일, 즉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어린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의미도 같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야 한다’, ‘나는 오늘 3시간 책을 읽어야 한다’, ‘나는 오늘 새벽 운동을 해야 한다’ 등과 같은 당위론적 주장은 혼자 결심하고 행동하면 되는 일이다. 그 일을 하지 않아도 자기반성 여부와 관계없이 타자의 비판이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개인의 양심 차원에서 죄책감을 느낄 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하고 싶은 일’, 예를 들면 ‘나는 저녁에 떡볶이를 먹고 싶다’, ‘나는 오늘 친구를 만나고 싶다’, ‘나는 갑자기 제주도에 가고 싶다’ 등과 같은 개인의 희망사항도 혼자 판단하고 행동에 옮기면 된다. 개인의 희망 사항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겨서 말을 건네도 상대방의 반응은 ‘아 그렇습니까?’ 정도에 지칠 뿐 그것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타자가 욕망하는 사항에 대해 왈가왈부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처럼 ‘해야 한다’는 당위가 ‘자기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달성하는 것’이고, ‘하고 싶다’는 희망이 지향하는 방향은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충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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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타자의 요청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에 반해서 ‘할 수 있다’는 가능은 내가 어떤 능력을 보유하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나의 능력을 누군가 필요로 하고 그것이 결핍되어 사람이 요구할 때 나의 능력은 비로소 쓸모가 생기는 것이다. 타자의 기대가 없는 곳에서 나의 능력은 혼자 할 수 있지만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필요성이 요구, 기대나 갈망, 결핍이나 결여가 먼저 있고 그걸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앞의 두 가지 당위와 희망하는 일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지닌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휘되는 자기 완결적인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은 타자 지향적인 차원에서 비로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일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선은 바로 자기 완결적인 일에 몰두하느냐 아니면 타자 지향적인 공적인 일에 몰입하느냐의 차이에 놓여 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한다’ 또는 ‘아침 6시에 일어나고 싶다’는 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침 6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듣는 사람이 없으면 무의미한 독백에 지나지 않는 이유다.


‘… 을 할 수 있다’는 가능의 말은 그 행위를 요청하는 타자가 없으면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을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어린이와 어른의 근본적인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어린이는 주어진 상황과 관계없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혼잣말로 중얼거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의 일, 즉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는 철저하게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사회의 필요나 요청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언어화되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우치다 타츠루는 말한다. 첫째, 타자가 있어야 한다. 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의 능력도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둘째, 타자의 결여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사항이 있어야 한다. 그냥 타자가 결핍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뭔가 부족해도 그것이 채워지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면 나의 능력은 역시 무용지물이 된다. 셋째, 타자의 결여를 충족시킬 사람이 나라고 존재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타자의 결여가 존재하고 그것이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어도 그 결여를 충족시킬 적확한 능력을 내가 갖고 있지 않고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면 이 역시 무용지물이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는 인간과 인간이 인간적으로 만나는 인간의 사회가 시작된다.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이 자기의 당위와 욕망만 갈구할 때, 그 사회에는 어른은 없고 어린이만 살아가는 미성숙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어른이 존재하는 사회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람직한 사회다. 어른이 존재하는 사회라야 어린이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소외된 곳에서 불안함과 더불어 살아가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 나의 존재는 이런 타자와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 그리고 이유가 드러나는 법이다. 나도 힘든 상황에서 결여나 결핍을 참고 견디면서 살아는 타자를 가슴으로 느낄 때 내가 갖고 있는 보잘것없는 능력도 비로소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면서 빛을 발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먼저 있고,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순서가 거꾸로다. 먼저가 타자가 불안한 고립과 불확실한 미래 상황과 직면해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 있고,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손길을 내밀어 줄 때, 비로소 어른은 존재 이유가 드러나는 법이다. 결여나 결핍이 먼저 있고, 나의 등장은 나중이라는 게 우치다 타츠루의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적인 주장이자 메시지다. 사회 곳곳에서 저마다 다른 입장과 상황에서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타자의 부름이 먼저 있고,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절묘하게 연결될 때, 비로소 나의 할 수 있는 능력은 빛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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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어른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을 깨달은 사람이다


2천 편의 러시아 민화를 수집 분석해서 쓴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 형태론》에 보면 모든 민화가 31개의 설화 구조가 기능별로 나눠져 있고 7종류의 등장인물로 구성되어 있는 주장을 만날 수 있다. 7가지 등장인물에는 주인공 (hero), 악당(villain), 후원자(doner), 조력자(helper), 공주나 찾아내어야 할 것,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princess or prize, and her father), 파견자(dispatcher), 그리고 가짜 주인공(false hero)이다. 31가지 민화가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는 약간의 차이와 변형이 있지만 가족의 누눈가가 사라지든지 어떤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시작되는 공통점이다. 사라진 가족을 찾기 위해 남은 가족들은 안간힘을 쓰며 비탄에 잠겨 있는 가운데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주인공이다. 우치다 타츠루가 《곤란한 성숙》에서 말하는 결여나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어른의 역할과 일맥상통한다. 주인공의 등장과 더불어 후원자나 조력자의 마법과 같은 도움을 받아 수렁에 빠진 가족의 위험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면으로 절정에 달하면서 서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민화의 서사 구조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결핍이나 결여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타자를 만났을 때 망설이지 말고 발 벗고 나서서 간청에 응할 때 비로소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은 타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공동체의 소중한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기본 조건이 되는 셈이다.


《곤란한 성숙》의 책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성숙은 곤란한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는 순간을 일정 기간 반복하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게 생긴다. 성숙에 이르는 길은 지름길도 매뉴얼도 가이드라인도 없다. 성숙에 이르는 효율적인 처방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치타 타츠루는 자신의 책에서 성숙은 곧 몸에 익은 경험치나 실천지의 깊이와 두께에 비례한다고 말한다. “인생을 하루하루 담담하게 보내는 사이에 자식으로, 친구로, 배우자로, 부모로 각자의 처지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상처를 주고받으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몸에 익은 경험지, 실천지의 깊이와 두께가 곧 성숙‘일 것입니다”(13쪽). 성숙을 뒤집으면 숙성이 된다. 성숙에 이루는 유일한 길은 숙성을 통과하는 일이다. 숙성을 효율적으로 완성하는 처방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참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흐름을 각인시키는 일뿐이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숙하는 길도 숙성을 통과하는 길 밖에 없다.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추진하던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나 나의 능력으로 뭔가를 함으로써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어린아이는 어른으로 변신하는 성숙의 길에 접어든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불안감은 늘 엄습하고 불편함은 친구처럼 상존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에 나아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견디는 일이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견딤의 결이다. 견딤의 길이가 쓰임의 크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타자를 위해 적기에 할 수 있을 때 하나의 공동체를 조성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어른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나보다 힘겨운 위치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는 사람을 보고도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은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내 삶의 중심에 위치한 나머지 우연히 마주친 곤란에 빠진 사람을 목격하고도 지나치는 사람은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의 또 다른 유형이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적확한 상황에서 해낼 때 존재가치 빛나는 법이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언제나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다른 책, 《어른이 된다는 것》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어른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정의한다. “‘어른’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것을 알고 있고 자기 혼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 이미 할 수 있는 것에는 가치가 없고 진실로 가치가 있는 것은 외부에서 타자로부터 도래한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말한다. 바꿔 말하면 ‘나는 ---을 할 있다’는 형태로 자기 한정하는 것이 ‘아이’이고, ‘나는 ---을 할 수 없다’는 형태로 자기 한정하는 것이 어른인 것이다”(246쪽). 이제 어른은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어서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누군가의 결핍을 충족시켜 주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서 밖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제와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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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어른은 ‘할 수 없는 일’을 자각하고 부단히 배우는 배우다


내가 아는 것도 틀릴 수도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작은 도움밖에 줄 수 없어서 더 자세를 낮추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기존 경험이나 지식에 안주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자세를 낮추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배워서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경험적 통찰력이나 지혜도 사실 시대에 뒤떨어지는 통념이나 상식에 불과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진정한 가치 있는 것, 그리고 진짜 배우고 얻어야 할 것들은 내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깥에 있는 다른 사람(타자)과의 관계나 경험에서 온다는 걸 겸손하게 인정한다는 의미다. 자기 틀에 갇히지 않고, 언제든 남에게 배우고 흡수할 준비가 된 열린 마음을 갖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게 배우려는 자세가 어른이 지니고 있어야 할 가장 소중한 미덕이나 덕목이다. 반면에 ‘아이’ 같은 사람은 “나 뭐든지 할 수 있어!”, “나는 모르는 거 빼고 다 알아!” 그러니 맡겨만 주면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성과를 낼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걸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의 능력을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한정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아이 같은 어른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어른은 “아, 이건 내가 잘 몰라서 내 힘으로 잘할 수 없는 일이네!” 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이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부족함이나 결핍된 부분을 밖에서 도움을 받아 배워보려는 자세를 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자기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성장을 위한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어른은 분명히 숙지하고 있다. 결국 우치다 타츠루 교수의 핵심 메시지는 자신이 할 있다고 너무 자만하거나 완벽하다고 착각하지 말고,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타인과의 관계나 연대로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팀 프로젝트 할 때도 “제가 이 분야는 경험이 부족해서 이 부분은 김대리님께 배우고 싶어요.”, “제 생각은 여기까지인데, 다른 분들은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실 것 같아요. 도움 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전문성과 도움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취하는 순간에만 새로운 배움의 세계가 열린다. 어른은 현재 지니고 있는 경험적 지혜만으로는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턱 없이 부족하니 배움의 문을 열고 부단히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경험으로 부단히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어른은 없고 어른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진행형의 어른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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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와 ‘전달해야만 되는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어른의 전달력도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과 같은 네 가지 범주에 비추어 ‘전달해야 할 메시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 ‘전달할 수 없는 메시지’로 구분해서 논의해 볼 수 있다. ‘전달해야 할 메시지’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청중의 관심과 현재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전달해야 될 의무적인 메시지만 전달하면 된다.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오늘 이런 메시지를 전달 ‘해야 한다’는 당위가 ‘자기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달성하는 것’이고, 오늘은 이런 메시지를 전달 ‘하고 싶다’는 희망이 지향하는 방향은 ‘자기의 욕망을 스스로 충족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결여나 결핍이 먼저 있고,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때, 어른의 전달력은 힘을 받기 시작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그냥 내뱉고 싶은 말, 혹은 사회가 “이건 해야 해!”라고 강요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읊는 게 아니라, 진짜 내 것이 되어서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 어른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어른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부단히 바깥세계의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른의 전달력’은 현재 갖고 있는 경험적 지혜로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자신도 역시 모르고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서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말을 잘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책임감, 진정성, 그리고 무엇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겸손한 지혜가 메시지에 녹아들어서 청중에게 삶을 되돌아보고 내다보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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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전달은 어른 아이가 주로 사용하는 안하무인형 전달이다. 이건 대개 ‘힙해 보이고 싶어서’, ‘튀고 싶어서’, '내 주장을 펼치고 싶어서 ‘ 하는 전달이다. 그냥 어느 순간 욕망을 자극하는 외부적 자극에 대한 즉흥적 반응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떠오를 때가 많다. 전달자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중심으로 디자인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반응이 생각보다 없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자신이 겪어본 이 야이기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메시지가 청중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지를 사전에 염두에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고 싶은 매시지는 많은 데 그중에서 정말 청중들의 지금 관심과 사정에 따라 어떤 메시지를 더 중시해서 전달해야 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쏟아낸다. 하고 싶은 메시지만 쏟아내는 전달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직접 경험해보지도 않았거나 검증되지 않는 정보를 자신의 취향과 선호도에 따라 무작위로 편집,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직접 해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 화려한 수식어와 현란한 구호를 외치지만, 구체적인 현실적 대안이나 깊이 있는 통찰이 없어 듣는 이에게 공허함을 주는 경우가 많다. 최신 트렌드라면 무조건 따라가야 할 취향이라고 판단, 맹목적으로 쫓아가며, 본인이 직접 검증하지 않은 정보나 의견을 마치 정답인 양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둘째, ‘해야 할 일’만 하는 전달은 ‘해야 할 메시지’만 전달하는 미숙한 전달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해야 건강에 좋다와 같은 당위론적 이야기는 누가 결정한 규칙이나 습관인지는 모른다. 당위론적 주장은 누군가 좋다고 하니까 나도 해야 된다는 식으로 전달하는 스타일이다. 이건 ‘원칙적으로 옳으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하니까’, '누군가로부터 하라고 지시받았으니까 ‘ 하는 그냥 해야 된다고 말하는 메시지 전달이다. 맞는 이야기이고 옳은 이야기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공감을 얻기 힘들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당위론적 도덕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에서 ‘선(good)과 악(evil)’, 그리고 ‘좋은 것(good)과 나쁜 것(bad)’을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 ‘선과 악’은 우리가 주어인 모럴(moral, 도덕)이고, ‘좋고 나쁜 것’은 내가 주어로 작용하는 에틱(ethics, 윤리)이다. ‘선과 악’은 나의 선호에 관계없이 사회가 이미 그렇게 해야 된다고 강제로 정한 규범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되는 집단적인 떼거리의 도덕이다. 반면에 ‘좋음과 나쁨’은 내가 주어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과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정되는 나의 윤리적 행동지침이다. ‘선과 악’은 사회에서 강제로 정한 보편적 규범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되는 힘의 원천은 종교적 규율이나 사회적 관습과 같은 외부적 권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좋음과 나쁨’은 철저하게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나의 입장과 철학적 신념에 따라 결정된다. ‘선과 악’은 남이 정해놓은 규칙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노예의 인생이고, ‘좋음과 나쁨’을 따라가는 사람은 내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며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다. ‘해야 할 메시지’만 전달하는 미숙한 전달은 주어가 내가 아니라 언제나 그들이기에 나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이야기가 없다. 전달할수록 전달에 실패하고 실패할수록 실패를 전달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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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어른은 ‘전달할 수 없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셋째,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를 하는 전달하는 초보 어른의 전달력이다. 어른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할 수 없는 게 더 많다는 걸 깨닫고 그걸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빠질 수 있어서 초보 어른의 전달력이다. 본인이 실제로 경험하고 체화한 것, 깊이 고민하고 탐구해서 얻은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이 현재 청중이 겪고 있는 결여나 결핍 상태를 충족시켜 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전달이 시작된다. 듣는 사람은 메시지에 진정성과 무게감을 느끼고, “아, 저 사람 이야기라면 믿을 수 있겠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지혜가 녹아 있어서 해당 분야의 결여를 느끼는 청중에게도 도움이 되는 메시지 전달이다. 젊은 시절 온갖 실패와 좌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일어선 사업가가 자신의 고난과 극복 과정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연설. “난 이만큼 힘든 일을 겪었지만, 이겨낼 수 있었다. 여러분도 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녹아 있어서, 청중에게 강력한 용기와 영감을 준다. 후배가 막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단순히 이론을 나열하거나 “열심히 해!”라고 말하는 대신, 자신의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하면 되더라”, “이건 네가 이러이러한 부분을 놓쳐서 그래”라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경우. 실제로 ‘할 수 있는’ 조언을 해주기에 후배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전달할 수 없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진정한 어른의 전달력이다. 내가 갖고 있는 전문성도 극히 제한된 분야의 깊이 있는 전문성이라 한 걸음만 옆으로 옮겨도 내가 모르는 분야의 전문성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어른이 전달하는 메시지다. 어른은 과거에 했었고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대단해서 사실 못하는 게 없다고 자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어른은 “아, 이건 내가 아직 잘 모르네.”, “이 분야는 내 전문이 아니야.”, 그래서 이런 일은 누군가와 함께 하면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배우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자기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뇌가 딱 빈 공간을 감지하고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려는 본능적인 학습욕망이 생긴다. 우치다 타츠루가 언급했듯이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은 외부에서 타자로부터 도래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나마 이 정도의 깨달음을 갖게 된 것도 늘 부족하고 모자라서 미완성을 채우려는 안간힘 덕분이라고 고백한다. 외부의 타자에게서 배운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나마 누군가를 위해 내가 하는 일로 도움을 주기 위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 사는 일 나를 위해 사는 삶이/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어야 한다.” 이문재 시인의 ‘밤의 각오’라는 시 구절처럼 진정한 어른의 전달력은 할 수 없는 게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듣는 청중에게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선물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못한다’는 인정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 있는 자기 객관화다. 결론적으로, ‘나는 뭘 할 수 없다’고 당당히 인정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키고 타인과 연결하며, 더욱 현명하고 평온한 삶을 위한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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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어른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과정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사람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해도 걸림돌에 넘어진 운이 나쁜 사례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혀 기존 사고를 바꿀 수 있는 디딤돌로 생각한다.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해서 놀라긴 했지만 그 놀람으로 인해 기존의 생각의 틀 밖에서 뜻밖의 사고를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다. 어른의 전달은 바로 이런 삶의 지혜가 깨우침과 가르침의 원료로 사용되는 활동을 자기 일이자 삶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일어나는 어른들의 삶의 일부다. 사고 당하는 난처한 상황에서도 그 일이 자신이 이해와 설명의 틀을 한 단계 성장시켜주는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 때문에 어른은 어른다움으로 아름다움의 미덕을 쌓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어른은 그 미덕을 발판삼아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지만 다른 사람에게 선물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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