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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언제나 유보되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지성은 결론을 유보하고 더 나은 대안을 탐색하는 지적 인내심이다

결론은 언제나 유보되는 영원한 미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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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결론을 유보하고 더 나은 대안을 탐색하는 지적 인내심이다


결론을 내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고 결론이 나지 않는 미완성 상태를 참고 견디는 인내심에서 지성이 폭발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소통하는 신체》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을 견디는 능력이 지성”(245쪽)이라고 말한다. 쉽게 결론을 내리려는 움직임이 보이면 일부러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막는 게 진정한 어른의 전달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의 전달력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지성을 개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전 세계 인구의 0.2% 미만인데도 불구하고,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약 22%를 차지한다는 놀라운 통계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학 분야에서 유대인의 비율이 가장 높고(41%), 그다음으로 물리학과 의학(26~28%), 화학(17~19%), 문학(11~13%), 평화상(8%) 순이다. 유대인이 노벨상을 많이 타는 비결 중의 한 가지는 상대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답을 절대로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허를 찌르는 뜻밖의 질문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유대인의 질문습관을 따로 있다. 바로 당신이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지를 물어보는 반문을 수시로 던지면서 질문에 대한 질문으로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유대인 독특한 습관이다. 어느 지점에 안주하면서 대화의 종지부를 찍고 결론을 내려는 안이한 자세가 보이면 가차 없이 뒤흔드는 다른 대안적 질문을 던져 결론을 끊임없이 유보시킨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하는 방향은 언제나 결론이 미결상태로 남아 있으면서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열린 결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게 만드는 길이다. 어른의 전달력의 가치는 얼마나 명료하게 메시지를 가공, 청중이 알아듣기 쉽게 편집해서 가급적 완벽한 이해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어른의 전달력은 오늘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의 미완결성을 파고들어 내일은 다른 결론이 도출되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놓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메시지는 이상적인 경지에 이른 정체된 이미지라기보다 앞으로 얼마든지 다른 결론을 품고 다가올 수 있는 동사로의 이미지다.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그 순간 영화는 관객의 머릿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영화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명언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한 가지 정답을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청중에게 답을 주는 강의는 강의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는 강의는 강의가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그 순간 강의는 청중의 머릿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감동적인 강연이 끝났을 때 그동안 고민했던 화두의 단서를 잡았다고 확신에 찬 소감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확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강연의 의미를 자기 방식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의미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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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마침표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욕망의 물음표다


강의가 모두 끝났어도 청중의 머릿속에 여전히 “그럼 나는?”이라는 질문이나, “강사가 던져준 화두가 담고 있는 함의나 시사점이 내 삶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이 여전히 머릿속을 휘젓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인상이 깊고 감동적인 전달력이 아닐까? 미완의 여백이 바로 듣는 이의 능동적인 참여와 진짜 이해를 이끌어내는 문으로 유도하는 출발점이 된다. 강의의 끝에서 청중의 질문이 시작되는, 끄트머리에서 새로운 사유가 작동하게 만드는 어른의 전달력은 늘 어제보다 나은 결론을 맺기 위해 완벽한 결론으로 전달의 끝을 장식하지 않는다. 어른의 전달력은 때로는 완벽한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나 ‘여운’을 남기는 것이 더 강력한 여운으로 남는다. “또 다른 결론이 생길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두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여백에서 피어나는 진짜 이해의 꽃이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이라면 주역(周易)의 마지막 괘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주역 64괘의 맨 마지막 괘가 바로 ‘화수미제(火水未濟)’ 괘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해결되지 못한 사건을 ‘미제 사건’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미제’라는 단어는 한문으로 미제(未濟)다. 주역의 마지막 화수미제에서 미제(未濟)는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미완의 상태를 의미하는 괘이다. 괘사(卦辭)는 “어린 여우가 물을 건너다 꼬리를 적신다(小狐흘濟 濡其尾)”는 의미다. 강을 잘 건넜으면 꼬리를 적시지 않고 건넜어야 하는 데 잘 못 건너서 꼬리가 물에 젖은 것이다.


주역의 마지막 괘가 왜 완성되지 않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 ‘미완성’이라는 뜻으로 끝을 맺지 못하고 끝맺는 것일까. 완성해서 끝내면 거기서 끝이다. 하지만 끝났는데 완성되지 못했으니 다시 어제와 다르게 시작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어떤 일을 최선을 다 해서 완성했으니 여기서 끝맺는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끝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를 부여하면 미래의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어제와 다른 출발을 맞이할 수 있다. 마치 우주가 여전히 팽창하고 있듯이, 오늘 나의 관점과 인식으로 받아들인 이해도 내일은 오늘과 다른 이해의 지평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셈이다. 성공이나 완성이 아니고 다시 한번 시도해야 한다는 미완의 의미를 여지에 두고 있다. 다 채우지 않고 여지를 남겨 두어야만 다음 시작할 때 새로운 다짐과 결의로 미완의 영역을 채워보려는 욕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더 잘 전달하고 싶은 욕망도 영원한 미완성이다. 어제보다 전반적으로 청중의 반응이 좋고 감동적인 전달이었다는 피드백을 받았어도 어른의 전달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제와 다르게 전달해서 또 다르게 감동을 주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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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호기심의 물음표를 가슴에 심어주는 예술이다


드라마 <미생(未生)>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본래 미생이란 바둑에서 완생(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과 달리, 독립된 두 눈이 없어 곧 죽을 운명이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돌을 가리킨다. 바둑판에서 미생인 돌의 운명은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 다음 수에 따라 살아날 수도 있는 돌을 의미한다. 인생을 살면서 완성을 향해 노력의 강도를 높이면서 자강불식(自彊不息)하지만, 원하는 상태의 완성으로 끝나지 않고 늘 부족하거나 미완의 결핍된 영역을 남겨놓고 마감한다. 비록 완전한 인생, 완생(完生)하지 못하고 아직 살아남을 여지가 남아있는 상태지만 바로 그 미생이기에, 상대방에게는 수를 두어 공략할 여지가 남아있고, 나에게는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수를 찾아 완생을 도모할 여지가 남아있다. 모든 것이 확정된 완생보다 때로는 미생은 상황에 따라 이전과 다른 전략을 활용해서 구사회생할 가능성이 있다. 드라마 <미생(未生)>의 주인공 장그래처럼, 아직 자신의 역할을 완전히 해내지 못하고 성장 중인 ‘미생‘의 인생을 살지만, 미생이기에 오늘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어제와 다르게 한계에 도전하며 도약을 꿈꾼다. 미완성은 노력하다 채우지 못하고 포기해서 생긴 산물이 아니라 내일 오늘과 다르게 노력해서 다른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완성을 연기해서 생긴 성과다.


바둑의 미생처럼, 모든 결론을 단정 짓지 않고 미완의 여백을 남겨둠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다음 수를 두어보게, 스스로 자신의 '완생'을 찾아보게 이끌어주는 전략을 써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른의 전달력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완벽하게 넘겨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듣는 이의 마음속에 작은 '물음표' 하나를 심어두는 예술이댜. 그 물음표가 또 다른 탐구심을 자극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서게 하며, 결국은 영원히 완성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완성'시켜가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고 미지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여정이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하는 삶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가공해서 다르게 생각할 여지없이 정확하게 전달해서 듣는 사람도 전달자의 의도대로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면 바람직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완벽하게 설명하고, 완벽하게 이해시키는 것을 '전달력'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다르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열어놓는 것도 전달력의 또 다른 의미이자 가치라고 볼 수 있다. 학습자료를 제공할 때 완제품으로 가공해서 학습자에게 전달하면 학습자는 주어진 학습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학습자가 참여해서 의미를 가공해서 완성해야 될 여백을 두고 반구조화(semi-structured)시켜 전달하면 학습자가 주체적으로 관여해서 미완성된 의미 영역을 파고들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공하거나 다의적 의미를 갖고 있어서 주어진 상황과 해석자의 의도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놓는 방식도 일리가 있는 전달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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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은 복잡해야 한다?


정신분석 철학자, 라캉이 말하듯, 내가 당신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은 바꿔 말해 ’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완전히 제거되었거나 원천 차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강의를 들어보려고 노력하면서 많은 내용이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었지만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있어서 오늘 강의의 결론은 이거라고 단언해서 말할 수 없는 여지가 남아 있을 때, 또 다른 희망의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어제와 다르게 인식의 깊이와 지평을 열어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론을 맺었지만 맺은 결론 속에도 여전히 모르는 게 누군가에게는 눈에 띌 수도 있다. 알 수 없지만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미지의 결론을 모르는 상태로 묵혀 두었다가 미래의 언젠가 다시 꺼내보다 그 의미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정체가 밝혀질 수도 있다. 뭔지 알 수 없는 게 나타나면 모른다 치고 넘어가는 능력은 다른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 지성의 고유한 특징이다. 눈앞에 보이는 뭔가가 있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기계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정확한 실체의 의미를 밝혀내지 않으면 한 걸음도 앞으로 가지 않는 게 기계다. 하지만 인간은 누군가의 강의를 듣고 있는데 모르는 말이 나오면 그걸 붙잡고 그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 강의 듣는 걸 포기하고 사투를 벌이지 않는다. 그냥 괄호로 쳐놓고 지나간 다음 나중에 되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그런 의미였구나라고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전달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가급적 많이 남겨두는 것도 좋은 전략 중의 하나다.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라도 문제지만 하나의 메시지 속에 담긴 숨은 의미가 없는, 즉 너무도 명약관화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하나도 없는 경우도 문제다.


전달자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때, 청중을 완벽하게 '이해시켰다'라고 착각하는 순간, 듣는 이의 마음속에는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르게 생각할 기회’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시선이 오래 머무는 가운데 생기는 앎이 사물을 황폐화시키는 것처럼 완벽한 이해를 추구하다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역기능을 초래할 수도 있다. 마치 주역의 화수미제처럼, 완벽하게 끝맺지 않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탐구하며 해석할 여백을 듣는 이에게 선물할 때, 전달은 물리적으로 끝났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미완성에 담긴 의미를 심리적으로 생각하면서 진정한 사유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미완성인 상태로 결론이 끝난다는 의미는 전달자가 던져준 화두가 완성되지 못하고 뭔가 더 채워야 할 미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전달자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가 복잡해서 상황적 맥락에 따라 같은 말인데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치다 타쯔루의 《소통하는 신체》에 등장하는 복잡과 단순의 의미를 비교해 보면 결론을 유보시켜 놓고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쓰이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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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도래할 미지의 의미를 맞이하는 겸손한 호기심이다


“‘복잡’이란 단적으로 다른 것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상황을 일컫는다. 이를 테면 ‘크다’와 ‘작다’가 같은 낱말로 표현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그때 식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복잡한 것이다……한편 단순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잘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47쪽).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화두는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그 안에 너무 많은 의미나 경우가 숨어 있어서 명확하게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다. 예를 들면 ‘배’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보면 “나 배고파 죽겠다”는 말의 배와 “저기 배 한 척이 지나간다”는 말의 배는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다. 앞의 배는 인간의 신체 기관 중의 하나인 배를 의미하고 뒤의 배는 사람이나 화물을 실어 나는 교통수단 배다. “이 배는 당도가 왜 이렇게 높을까? 의 배는 과일을 의미하고 ”내가 너보다 두 배는 빨리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걸 “에서 배는 곱하기 배를 의미한다. 똑같은 ‘배’라는 소리인데, 배라는 말이 사용되는 상황적 문맥에 따라 다른 '것'들을 지칭한다. 듣는 사람이 동일한 ‘배’지만 ”지금 말하는 배는 무슨 ‘배’를 말하는 거지? “ 하면서 맥락적 의미를 판별해야 하니까 그 상황 자체가 복잡하다. 같은 이름이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배의 의미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잠시 의미 파악을 유보시킨 채 전달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반해 단순해진다는 건, 아마도 겉모습이나 세부사항은 다르더라도, 어떤 본질적인 특성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공유하고 있어서 하나의 이름으로 묶었을 때 오히려 이해가 더 명확해지는 경우를 말한다. 단순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예를 들면 ‘사랑’라는 단어가 상황적 맥락에서 같은 이름으로 쓰여도 다른 이름을 갖게 되는 경우다. 부모님을 아끼는 사랑, 친구에게 느끼는 사랑, 연인에게 드러나는 사랑, 반려견에 대한 사랑, 심지어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사랑을 보면 같은 사랑이지만 서로 다른 사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랑'은 형태도 다르고 깊이도 다르고 대상도 다르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우리가 겪어내는 모든 감정을 뭉뚱그려 ‘사랑’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다른 것’들 속에 내재된 공통적인 ‘긍정적이고 깊은 연결 감정’이라는 본질을 쉽게 이해하게 된다. 만약 모든 사랑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훨씬 더 많은 개념을 배워야 해서 오히려 복잡해질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사랑'이라는 단어로 모든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범주로 묶어 구분함으로써, 우리의 감정과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더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것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확실한 결론의 마침표를 제시하는 전달의 명료함보다 지금은 모르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밝혀질 도래할 미지의 의미를 맞이하는 겸손한 호기심으로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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