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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와 메타 메시지 사이, 의미의 차이가 살아간다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 사이, 진짜 메시지의 숨은 의미가 살아간다


우치다 다츠루의 《소통하는 신체》에 보면 누군가 “너 나, 좋아해?”라는 질문과 대답, “좋아해” 사이에 시간의 짧고 긴지의 여부에 따라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의미와 이성으로서 좋아하는지의 여부를 순식간에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좋아해?”라는 물음과 “응, 좋아해”라는 대답 사이의 시간이 짧으면 이성으로는 관심이 없고 친구로 좋아한다는 의미다. 반면에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좋아해?”라는 물음과 동시에 잠시 머뭇거리면서 “음… 좋아해”라고 대답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똑같은 “좋아해”라는 말에는 이처럼 친구사이로 좋아한다는 말과 이성 친구로 좋아한다는 이중적 의미가 들어 있다. 우치다 타츠루의 관심은 잘 못 해석하면 심각한 후유증이 올 수도 있는 이런 말을 쓰면서 왜 인간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면서 언어 사용 방식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일까이다. “좋아해?”라는 물음 앞에서 이 사람이 물음을 통해 나에게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물음에 관한 물음을 던져 진짜 알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물음을 메타 메시지(Meta-Message)라고 한다. 메타 메시지는 메시지 뒤에 숨어있는 메시지 전달자의 의미전달 의도나 메시지를 통해 진짜 전달하고 싶은 깊은 의미다. 예를 들면 “오늘 저녁에 뭐 먹을까?”라는 질문에 담긴 메시지는 저녁 메뉴 추천해 달라는 표면적 의미다. 하지만 메시지 이면에 숨어 있는 진짜 의미는 “나는 너랑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싶어! 너랑 함께하는 시간, 우리 관계가 소중해!”라는 나와 너 사이의 소중한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따듯한 관심과 애정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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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의 뒤안길에 메타 메시지가 살아간다


박사논문을 쓰는 제자에게 “학위논문 심사 날짜를 잡아라”라고 말했다면 다른 논문 심사위원들과 일정을 조율해서 모두가 가능한 날짜를 가급적 빠른 시간에 잡아서 심사를 진행하자는 메시지다. 메타 메시지에는 “내가 네 논문을 읽어보니 이 정도면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논문을 잘 썼으니 심사날짜를 잡아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나가자”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메타 메시지에는 제자를 믿고 박사학위를 별 문제가 없으면 수여하는 절차를 밟아나가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우치다 타츠루에 따르면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의 관계는 암호로 쓰인 전보와 암호로 쓰인 전보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는 해독표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암호 해독표가 없으면 암호를 해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메타 메시지에 담긴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해독하지 못하면 겉으로 드러난 메시지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생각을 파악하기 어렵다. ‘메시지’가 겉으로 드러나는 ‘정보’라면, ‘메타 메시지’는 그 정보가 오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관계는 어떤지를 확인시켜 주는 훨씬 중요한 본질적인 소통의 층이다. 어른의 전달력이 살아나지 못하고 실패하는 주원인도 사실은 메타 메시지를 오독할 때 일어난다. 어른의 전달력을 높이려면 결국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메시지에 담긴 메타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번 여행에 너도 갈 거야?”라는 질문의 표면적 메시지는 너도 이번 여행에 참석할지의 여부를 물어보는 의미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담긴 비언어적 메타 메시지는 너는 이번 여행에 빠지면 좋겠는데 만약 같이 가게 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좀 피곤할 것 같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문제는 주로 몸으로 말하는 비언어적 메타 메시지를 알아듣지 않고 입으로 말하는 메시지의 표면적 의미로만 이해할 때 소통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어른의 전달력도 그 핵심은 언어적 메시지보다 비언어적 메타 메시지를 해석하는 힘에 달려 있다. 겪어본 경험을 근간으로 말로 전달하는 설명은 언제나 행동을 따라가지 못한다. 뭔가 감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메시지에는 언어로만 전달할 수 없는 복합적 감정이 스며들어 있어서 언어와 더불어 비언어적인 신체적 반응과 신호가 결부되어야 비로소 메시지의 뒤안길에 숨어 있는 메타 메시지의 의미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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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와 메타 메시지가 충돌하면 딜레마 상황에 빠진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메타 메시지에 담긴 의미를 왜곡하게 만들거나 메타 메시지를 적확하게 해석하는 일을 조직적으로 방해받는 상황이 비일비재로 발생한다. 이런 상황을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이중구속 이론(Double Bind Theory)’으로 정리한 바 있다. 이중구속 이론을 한 마디로 말하면 언어적 의미가 겉으로 드러나는 메시지와 의미가 숨어 있는 비언어적 메타 메시지가 충돌할 때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혼란을 겪는 상황이다. 즉 두 가지 이상의 모순되고 양립 불가능한 메시지를 동시에 받는 상황에서, 그중 어떤 것도 피할 수 없고, 게다가 그 모순에 대해 말할 수도 없는 환경이 지속될 때, 개인이 극심한 심리적 고통이나 혼란을 겪게 된다는 이론이다. 좀 더 풀어 말하면, 한 사람이나 집단이 동시에 서로 상반되는 지시나 기대(메시지)를 보내는데, 이걸 받는 사람은 어떤 쪽을 따라도 결국 문제가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면서도 ‘이게 모순된 상황이다’라고 지적할 수도 없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받는 사람은 뭘 해도 비난받고, 결국 정신적인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중구속이론이 어른의 전달력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아랫사람에게 엄청난 혼란과 해를 끼칠 수 있다. 이중구속이론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부모와 자식 관계나, 상사와 부하 직원 관계다. 예를 들면 부모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족쇄로 이중구속적 메시지를 던지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는 널 정말 사랑한단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메시지 속에 숨겨진 비언어적 메시지는 사실 그렇지 않다. 자식이 자신의 생각이나 다른 길을 선택하려고 하면, 부모는 매우 불안해하거나, 슬퍼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네가 그걸 선택하면 엄마(아빠)는 너무 실망할 거야.”, “정말 날 사랑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몸을 파고든다. 자식은 ‘사랑한다’ 말과 ‘나의 선택을 막는’ 부모의 행동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기 어렵다. “부모는 날 사랑하니까 저러는 거야”, “감히 부모님에게 따질 수 없어”와 같은 생각에 갇히는 순간 이중구속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 부모의 전달력은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식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과 혼란을 주는 파괴적인 전달력으로 작용한다. 자식은 “사랑한다는데 왜 이렇게 숨 막히지?”, “내가 뭘 해도 결국 엄마/아빠 마음에 안 드나?”하고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자존감을 잃게 된다. 결국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 속에서 무기력해지거나, 심하면 거짓말을 하거나 회피하는 행동을 보는 모순에 빠진다. 이중 구속 상태에서 뇌로 이해되기 전에 몸으로 감지되는 순간, 몸이 말하는 메시지를 들으면 이중구속 상태에서 의의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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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의 의미와 메타 메시지의 진심이 만나야 안심이 된다


“김대리, 이번 프로젝트는 자율적으로 알아서 진행해 봐! 자네 판단을 믿으니, 소신껏 해!”라는 말에 담긴 이중구속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그런데 막상 김대리가 주도적으로 진행하면, 상사는 사사건건 개입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하고, 심지어 원래 김대리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슬쩍 자기 아이디어인 것처럼 포장해서 보고하거나, 나중에 결과가 안 좋으면 “김대리 혼자 판단해서 그렇게 됐지!”하고 모든 책임을 김대리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알아서 해”라는 말속에 “결국 내 눈치를 확실히 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김대리는 '자율적으로 하라면서 왜 이렇게 간섭하지?'라는 모순을 상사에게 직접적으로 따져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상명하복'이라는 직장 문화나 인사고과 등의 불이익을 걱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상사의 전달력은 겉으로는 ‘쿨하고 자율적인’ 리더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하 직원의 자율성을 꺾고, 혼란과 불신을 심는 무책임하고 파괴적인 전달력의 한 가지 사례다. 김대리는 뭘 해도 욕먹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결국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자’, ‘내 의견은 말하지 말자’ 식으로 수동적인 사람이 되거나, 심한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 결국 어른의 전달력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는 걸 넘어서 메시지와 메타메시지가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을 때 발휘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에게는 혼란과 상처만 줄 수 있다. 메시지에 담긴 의미와 메타메시지에 담긴 진심이 일치하면 팀원은 안심하고 적극적으로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보면 보기의 본질과 핵심은 통찰들이 줄지어 나온다. 뭔가를 아무리 많이 봐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본다는 것은 선택이기도 하지만 차단이거나 배제이기도 하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으니 보고 싶은 전경을 선택하면 전경으로 선택되지 못한 다른 모든 것은 배경으로 깔린다. 인식과 관심을 바꿔서 이번에는 배경을 전경으로 끌어당겨 보는 순간 전경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배경의 풍경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어찌 보면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다. 뭔가를 보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다. 무엇이 보이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게 보이고 내가 보고 싶은 게 보인다. 사막에 가면 모래가 보인다. 모래가 보이기 때문에 모래를 보는 것이고, 사막에 갔으니 모래가 보고 싶어서 모래를 보는 것이다. 보이는 모래 이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에서 배제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문재 시인은 ‘사막’이라는 시에서 모래를 보지 않고 모래와 모래 사이를 본다.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 가면 모래만 보이는 이유는 사막이 모래와 언어적 점성으로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가면 다른 것을 볼 수 없거나 보지 못하는 이유는 사막이라는 관념의 망토가 모래라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사막과 모래라는 지식이 상식의 텃밭에서 자란다. 상식이 일상에서 생겼지만 상식의 틀에 갇혀 살면 상식은 식상한 관념의 덧옷을 입고 감각의 촉수를 덮어 씌운다. 이문재 시인이 사막에서 모래보다 더 많은 모래와 모래 사이를 본 것은 낯선 것을 찾아보려는 시인의 시선이 시적 상상력으로 물들어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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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는 지도이고 메타 메시지는 지형이다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은 남들이 봤어도 못 본 것, 지나치거나 간과하고 무시한 것을 선택해서 본 다음, 본 것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서 전하는 색다른 시력(視力)이다. 이런 시력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관념적 지식으로 포장된 기호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감각적 자극을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된다. “지식이 관념의 처자라면, 지각은 감각의 자손이다”(223쪽). 오민석의 《이 황량한 날을 글쓰기》에 나오는 말이다. 관념의 베일에 휩싸인 사물들의 기호는 감각의 발기를 가로막는 장본인이다. 관념의 처자식들이 기존 지식으로 재단해 버린 일상은 상상력이 비상할 수 없어서 죽은 폐허나 다름없다. 어른의 전달력은 기정사실을 관념적으로 정리한 기존 지식을 추상명사의 무게감으로 설명하는 논리적 설명력이 아니다. 오히려 어른의 전달력은 깊고 넓은 경험세계에서 깨달은 감각적 깨우침으로 황홀한 쓸쓸함과 찬란한 슬픔의 뒤안길을 어루만지다 만나는 마주침의 위력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 맛의 기가 막힘을 기존 지식으로 설명하고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어른의 전달력은 메마른 지식보다는 지각작용으로 생긴 감각적 깨달음의 언어를 몸의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가운데 그나마 청중의 몸에 다다르는 힘겨운 안간힘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처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게 있다. 어떤 메시지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해도 내가 그걸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듣지 못하고 흘러간다. 듣기 역시 선택이자 배제다. 수많은 소음이 들리지만 그 소음 중에서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것이다. 소음도 소리로 번역할 지각이 작동되어야 언어적 감각으로 벼리기 시작한다. 듣고 싶어서 선택했어도 안 들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걸 해석할 수 있는 삶의 깊이와 넓이가 없으면 안 들린다. 내 삶을 능가하는 이야기는 전달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전달자의 메시지도 잘 보이는 게 있고 잘 안 보이는 게 있다. 그나마 메시지는 잘 보이지만 메타 메시지는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메시지에 가려진 배경으로서의 메타 메시지는 다양한 의도와 사연을 품고 있다. 메타 메시지를 파고드는 감각의 칼날이 무뎌질수룩 전달자가 전달하고 싶었던 의중이 숨어있는 메타 메시지로 파고들어 갈 수 없다. 메시지가 안내하는 지도를 따라가다 보면 메타 메시지가 품고 있는 지형의 다양한 굴곡과 그 속에 담긴 혜안을 상상하기 어렵다. 지도는 메시지다. 메타 메시지는 지명과 지명 사이에서 지도로 형식화되어 드러나지 않는 동네 주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이며 골목길에서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조용한 함성이다. 이런 메타 메시지에 숨어 있는 사연과 배경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메시지가 안내하는 지도만 따라가지 말고 전달자가 안간힘을 통해 전달하는 맥락적 지형에서 벌어지는 온갖 표정과 복잡한 상황적 난맥상을 몸으로 읽어보려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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