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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 언어의 틈새에서 철학적으로 사유하다

어른의 전달력, 언어의 틈새에서 철학적으로 사유하다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계절의 변화가 주는 온도 차이로 완연하게 느끼며 8월도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전경이 끝을 모르는 하늘과 연결되는 카페, 창밖으로는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은은한 코나투스 주제가 흐르는 가운데, 지식생태학자가 좌장으로 참여하는 흥미진진한 어른의 전달력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인문학적으로 사유해 보고 사색해 보기 위한 향연이 기획되었다. 참석자는 ‘언어의 틈새’라는 개념으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소설가 배수아, 그리고 세계적인 철학자 네 분을 모셨다. 우선 ‘눈먼 각인(blind impress)’과 아이러니스트라는 개념을 창조한 미국의 신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갖는 아우라를 연구한 독일의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 사진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으로 밝힌 프랑스의 문화비평가이자 기호학자이며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 언어는 의미가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을 남긴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동일성을 거부하고 다름과 차이 반복을 강조하며 아장스망과 리좀 개념으로 어제와 다른 인간으로 변신하기를 강조하고 있는 질 들뢰즈를 모시고 경험적 깨달음을 언어로 번역하는 어른의 전달력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이끌어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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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불완전한 미완성의 틈새에서 발아된다


지식생태학자: (따뜻한 차를 마시며 미소 지으며) "여러분, 비 오는 날 귀한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랜 시간 ‘어른의 전달력’에 대해 깊이 탐구해 왔습니다. 제게 ‘어른의 전달력’이란 단순히 정보를 '배달(配達)'하거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닦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양한 산전수전(山戰水戰)의 경험이 만들어낸 명불허전(名不虛傳)의 영향력이며, 기존의 규정된 의미를 파괴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미지의 도끼’와 같은 것이죠. 궁극적으로는 그 전달을 통해 청중이 '숙달(熟達)'에 이르거나 새로운 지평으로 '창달(暢達)'하게 돕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여러분 각자의 철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이 ‘어른의 전달력’이 의미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논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배수아 작가님의 소설 《당나귀들》에서 언급된 ‘언어의 틈새’라는 개념에서 출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낯설고 생생한 경험들을 어떻게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그 정수만을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함께 지혜를 모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이 개념을 던져주신 배수아 작가님, ‘언어의 틈새’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배수아: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네, 지식생태학자님. ‘언어의 틈새’는 제가 《당나귀들》라는 소설을 쓸 때 언급했던 개념입니다. 저는 소설을 쓸 때마다 직면하는 한계이자 동시에 극복의 대상입니다. 언어의 틈새는 한 마디로 의식 밖의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직감적으로 몸이 느끼거나 지각한 현상이나 사물의 모습 또는 이미지를 내 안에 있는 언어 꾸러미로 표현하기에는 여전히 언어의 부족을 절감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 맛을 보는 순간, 그 국물에 녹아든 신비한 미각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언어를 찾기란 불가능하죠. 혀로 그 맛을 감각적으로 느꼈지만, 그 느낌에 해당하는 맛을 고스란히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격차가 있습니다. 언어는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는 개념적 렌즈이자 일종의 그물망이라서, 심장으로 포착된 느낌과 머리로 생각한 사유를 그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감각과 지각의 잔여물들이 늘 생겨납니다. 그 틈새 때문에 제가 몸으로 겪은 경험 그대로가 아니라, 경험에 대한 저의 치명적인 한계일 수밖에 없는 ‘언어적 재구성’을 독자에게 전달하게 되고요. ‘어른의 전달력’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 ‘틈새’에는 여전히 저의 언어로 포착하지 못한 수많은 의미의 여백과 잔여물들이 몸을 빠져나가려고 흐느끼면서 울부짖지만 결국 적확한 언어를 찾지 못하고 의미의 뒤안길을 헤매고 있을 때, 느끼는 절망감을 극복하려는 안간힘의 다른 이름입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바로 이 ‘언어의 틈새’를 인정하고 역이용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언어의 틈새를 전달자가 다 메꿔서 단순히 정보를 청중에게 채워 넣는 ‘배달’이 아니라, 그 틈새에 생긴 여백과 공간을 통해 듣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 스스로가 언어의 틈새에 생긴 언어적 격차를 채워 넣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산전수전 겪은 어른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기보다, 적절한 여백과 미완성의 공간을 통해 듣는 이가 스스로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벼리고 벼려서 ‘숙달’의 경지에 이르도록 이끌어냅니다. 이 침묵과 빈틈이 오히려 정병근 시인이 말하는 ‘눈은 미지의 도끼’처럼 타성에 젖은 언어로 메꾸려는 관성을 거부하고 기존의 언어사용 방식과 결별을 선언하고, 듣는 이를 새로운 이해의 지평으로 유도하고 ‘창달’시키는 것이죠. 이처럼, 명불허전의 어른의 전달력은 완벽한 설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이나 미완성의 틈새를 통해 열리는 생각지도 못한 낯선 가능성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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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눈먼 각인’을 흔들어 깨우는 각성제다


리처드 로티: “배수아 작가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말하는 ‘눈먼 각인(blind impress)’은 바로 그 ‘틈새’의 필연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눈먼 각인’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부적 자극이 내 몸으로 들어와 강렬한 인상과 지각을 남겼지만 정확하게 그것을 언어를 사용하여 재현하기에는 불가능한 흔적이나 얼룩입니다. ‘눈먼 각인’은 어느 특정 시점과 특정한 상황에서 우연히 마주쳤지만 전율하는 경험적 흔적으로 내 몸에 남아있는 특이하고 고유한 과거의 추억이자 경험적 느낌입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뇌리에 깊이 박힌 개념적 인식틀이나 경험적 충격으로 생긴 감각적 지각방식입니다. 살아와면서 나의 사고와 경험에 영향을 주는 문화적 고유함이나 자라온 환경, 인간관계나 교육 방식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개입하는 인식의 도장과도 같은 생각의 틀입니다. 예를 들면 비교적 장기간 해외여행을 하다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 들린 미국 시애틀의 한식당에 맛본 김치찌개 맛은 형언할 수 없는 미각을 자극해서 그걸 담아내는 적확한 언어가 부실한 실정입니다. 눈으로 바라본 침샘을 자극하는 김치찌개의 비주얼이 마침내 뜨겁게 끓어오르며 김치와 돼지고기는 물론 각종 양념이 뒤엉켜 붙어 생긴 얼큰하면서도 시원한 미각의 향연은 언어적 진술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언어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언어로 번역해서 이해합니다. 어떤 경험을 하든 무슨 언어로 그 경험을 번역하느냐에 따라 경험은 언어가 가진 해석 틀에 맞춰 재구성되는 과정일 뿐입니다. 모든 경험은 그 자체로 언어 이전에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물이 끓는 소리를 듣고 ‘부글부글 끓는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소리는 ‘부글부글’이라는 부사의 언어적 틀 안에서 ‘각인’되는 것이고, 그 이전의 물이 끓는 현상을 다르게 생각하는 감각은 사라집니다. ‘눈먼 각인’은 나도 모르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의 의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직관적으로 각인되어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나 프레임으로 작동합니다. ‘눈먼 각인’이라는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어른의 전달력은 그 핵심과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마다 몸에 축적되어 있는 무의식적 ‘눈먼 각인’의 치명적 한계를 직시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은유와 재해석을 통해 기존의 언어적 각인을 흔들고 재구성하는 능력입니다. 각인된 고정된 의미체계를 고착화시키는 일방적 전달이 아니라, 청중이 기존의 ‘눈먼 각인’으로 아로새긴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수는 새로운 방식이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하는 꿈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각인’하도록 돕는 노력이 바로 어른의 전달력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되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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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대체불가능한 아우라를 복원하는 능력이다


발터 벤야민: “흠, ‘눈먼 각인’이라…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접근하고 싶어요. 제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에서 언급한 ‘산딸기 오믈렛’은 그냥 하나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 오믈렛은 어린 시절의 표현할 수 없는 무더운 여름, 할머니 댁 부엌의 독특한 냄새와 오래된 요리가 풍기는 향기, 햇살 가득한 오후의 평온함까지, 제게는 그 모든 감각적 깨달음의 묘미가 통합되어 단순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의 아우라'를 형성했죠. 이 ‘아우라’는 오믈렛의 맛이 지닌 대체불가능한 컬러와 스타일로 형성되는 독특한 역사성과 유일무이함,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색다른 분위기의 합작품입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기술발달로 인해 무한 복제가 가능해져서 ‘산딸기 오믈렛’ 같은 원본이 지닌 독특한 풍미를 언어화시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특유의 맛이 지닌 아우라를 만날 기회가 점차 상실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딸기 오믈렛’의 복사본이 대량 양산되고 있기 때문에 원본이 지닌 대체불가능한 ‘아우라’가 사라져 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산딸기 오믈렛’이 지닌 상황맥락적 맛의 아우라에 담긴 뒷 이야기를 말씀드릴까요? 옛날 한 시대를 풍비했던 왕이 전쟁 중에 쫓기며 산골짜기의 한 노파에게서 얻어먹은 산딸기 오믈렛의 맛을 궁정 요리사에게 재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전쟁에서 참패하고 길을 잃어 기진맥진한 채 한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한 노파가 뛰쳐나와 반기며 산딸기 오믈렛을 먹여주었습니다. 오믈렛을 먹자마자 난 기적처럼 기력을 회복했고 희망이 샘솟았습니다. 자네가 그 오믈렛을 만든다면 짐의 사위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음뿐이네.” 그러자 궁정 요리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산딸기 오믈렛 요리법과 하찮은 냉이에서 시작해서 고상한 티미안 향료에까지 이르는 모든 양념을 훤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믈렛을 만들 때 어떻게 저어야 마지막 제 맛이 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오믈렛은 폐하의 입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그 당시 드셨던 모든 영양분을 제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


전쟁에 쫓기는 위험한 분위기와 당시의 절박한 긴장감, 산딸기 오믈렛을 만들 당시의 부엌의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와 온기,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관심, 산딸기가 품고 있는 태생적 향기와 맛과 식감, 반갑게 맞이해 주었던 노파의 긴장된 듯한 표정, 적막한 밤을 뚫고 들리는 요리하는 소리와 풍기는 음식 냄새 등은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고 할지라도 과거의 맛이 지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그대로 재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산딸기 오믈렛의 아우라는 시공간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시기와 장소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상황맥락적 합작품입니다. 산딸기 오믈렛의 맛은 해당 음식이 내는 맛뿐만 아니라 그 음식 맛을 본 주체의 맥락적 경험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자료를 동일한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오믈렛을 만드는 과정과 맛을 보는 상황에 담긴 분위기와 환경과 사람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우발적 마주침을 그대로 복제 불가능합니다. 산딸기 오믈렛의 맛이 내는 아우라는 산딸기 오믈렛 자체의 음식 맛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과 상황의 고유한 특성, 그리고 그 상황적 맥락에서 맛을 본 사람의 주관적 감정이 함께 만든 사회적 합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오직 그 존재만이 지닌 독특한 컬러이자 스타일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입니다. ‘아우라’는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는 당사자의 독특한 칼라이자 스타일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관여된 사람과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대로 재현해 낼 수 없는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전대미문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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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예기치 못한 앎의 상처를 만드는 푼크툼의 자극이다


롤랑 바르트: “벤야민 선생님의 ‘아우라’ 개념에는 동의하지만, 저는 아우라가 주는 그 ‘충격’과 ‘유일무이함’이 무엇인지 좀 더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푼크툼(punctum)’이라 부릅니다. 푼크툼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제가 《밝은 방》에서 말하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 자극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튜디움은 어떤 이미지를 보자마자 “이 사진은 가족 사진이구나”와 같이 관성적으로 모든 사진에 익숙한 의미와 이미지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푼크툼’은 사진 속의 특정한 이미지나 부분이 갑자기 콕 찔러서 예측할 수 없었던 깊고 날카로운 개인적 상처를 남기는 자극입니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익숙한 자극입니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낯선 자극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라는 점에서 리처드 로티의 ’ 눈먼 각인‘과 비슷합니다. 익숙한 개념으로 전달하면 청중은 스투디움의 자극으로 받아들입니다. 달리 보이는 것 없이 늘 세상과 일상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다가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했던 세계가 다르게 보이면서 불편한 문제의식을 잉태합니다. 낯선 개념과 경험적 깨달음을 기반으로 푼크툼의 자극으로 전달하면 그저 그렇게 보였던 세계가 다른 자극으로 각인되면서 깊은 앎의 상처가 만들어집니다.


푼크툼은 한 마디로 생각지도 못했던 이미지나 자극이 갑자기 뇌리를 찌르고(punctum) 날카롭게 꿰뚫어 깊은 앎의 상처를 만드는 예기치 못한 ‘자극’입니다. 그것이 왜 이런 방식으로 지적 자극을 주는지는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특정 개인에게만 의미 있게 다가오는 의미심장한 감각적 깨달음의 원동력이죠. ”낯선 경험으로 지각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전달하려 할 때, 자신이 겪은 모든 자극과 맥락을 6하원칙에 근거해서 일일이 다 설명하려다 오히려 더 오리무중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듣는 이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며 강력한 자극을 주며 ‘찌를’ 수 있는 화룡점정의 ‘푼크툼’을 찾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다 느닷없이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로 대낮처럼 환하게 비친 바깥 풍경 속의 빗줄기 하나가 다른 모든 빗줄기와 다르게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는 순간이 있습니다. 빗줄기와 천둥과 번개를 만나 강렬하게 수직으로 내리꽂는 그 장면에서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한 무리의 현란한 빗줄기처럼요. 설명은 설명할수록 ‘언어의 틈새’를 좁히지 못하고 무한 반복하지만, 푼크툼은 그 틈새를 단번에 메우고 듣는 이의 감각에 직접적으로 개입합니다. 이 빗줄기는 전후좌우 인과관계를 다 따져서 설명하기보다 그 자체로 논리적 서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푼크툼의 자극입니다. 그저 ‘거기’ 존재하다 우발적으로 다가와 잠자던 마음속으로 갑자기 파고드는 깊게 파인 틈새입니다. 우리가 낯선 경험을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배수아 작가가 말하는 언어의 틈새에 직면할 때, 바로 이 ‘푼크툼’을 찾아야 합니다. 뜻밖의 우연한 경험적인 ‘찌르기’로 내면에 생긴 깊은 앎의 상처를 포착하여 짧고 응축된 언어로 제시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 그때 받은 감각적 깨달음을 상징적 이미지로 전달하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논리적 언어로 정리해서 설명하려 할수록 ‘푼크툼’은 사라집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바로 이 ‘푼크툼’을 찾아내고, 그것을 짧고 응축된 언어로 제시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덜어냄으로써 더 많이 전달하는 역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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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문맥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는 게임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저는 '어른의 전달력'을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을 깊이 이해하는 능력, 즉 '언어 게임'과 그 배경이 되는 '삶의 규칙'에 대한 통찰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언어는 세상의 그림 같은 거야!”라는 생각을 《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을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더 이상 언어에 대해 공부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뒤늦게 크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제 초기 연구에서 밝힌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림이 아니라,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말 그대로 언어를 가지고 어떤 규칙으로 어떻게 노는지, 즉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생각을 《철학적 탐구》라는 책을 통해 새롭게 하기 했습니다. 바르트 선생님이 푼크툼은 고정된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고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자극을 받는지에 따라서 푼크툼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이해되는 것처럼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그 의미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도 않고 의미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축구경기를 할 때 골대에 골을 넣으면 득점이고 골문 가까이서 심하게 반칙을 하면 페널티킥을 허용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처럼 언어도 특정 상황에서 정한 규칙 안에서 쓰여야 제대로 된 의미가 통한다는 겁니다. 즉 언어는 의미가 고정된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삶의 형식 안에서 각자의 사용법이나 규칙을 따른다는 겁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단순히 ‘정확한 말’을 고르는 걸 넘어서야 해요. 상대방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우리 관계는 어떤지 등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퇴근길에 던지는 “수고하셨습니다”는 덕담이지만 밤샘 야근하고 녹초가 된 팀원에게는 비꼬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상대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당시의 맥락에 맞는 말을 쓰는 언어를 써야 말이 통하고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낯선 경험을 적확한 언어로 번역하여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맥락에 맞는 말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단순히 지식을 ‘배달’하는 행위를 넘어서서 특정 ‘언어 게임’의 규칙을 따르는 언어 사용을 할 수 있습니다. 산전수전 겪은 어른은 다양한 경험과 그에 따른 ‘언어 게임’을 경험했기에, 어떤 맥락에서 어떤 언어가 적절하게 작동하는지 본능적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물이라는 단어도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는지에 따라 언어 게임 규칙을 달리 적용해야 합니다. 갈증이 나는 친구가 물이라고 하면 “목이 마르니 물을 좀 달라”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가 놀다가 실수로 물그릇을 엎었을 때 ‘물!’은 “내가 평소에 조심하라고 했잖아”와 같은 질책의 의미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물먹지 말고 물처럼 살자”라고 말할 때 전자의 ‘물’은 힘든 일 당하지 말자는 뜻이고 후자의 ‘물’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슬기롭게 대처하라는 의미입니다. ‘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바깥의 물의 이미지와 똑같이 그림처럼 1:1로 정확하게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표정과 의도로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전달됩니다. 이게 바로 제가 말하는 ‘언어게임’이고,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이라는 진짜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른의 전달력 ‘미지의 도끼’처럼 기존의 틀에 박힌 언어 사용 방식을 부수고, 새로운 ‘언어 게임’을 제안하며 듣는 이를 새로운 이해와 지식에 ‘창달’시킵니다. 이들의 언어 사용은 교과서적인 '닦달'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로 듣는 이를 ‘숙달’에 이르게 하는 명불허전의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언어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로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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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우발적 마주침으로 깨달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능력이다


질 들뢰즈: "저는 앞선 모든 말씀에 동의하며, 이를 더 유동적이고 생성적인 관점에서 보충하고 싶습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고정된 지식을 일방적으로 '배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연결과 확장이 가능한 '리좀(rhizome)'의 형태로 전달하면서 우발적 마주침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리좀은 뿌리-줄기-가지-잎으로 정해진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땅속에서 뿌리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가면서 어떤 뿌리와 만날지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없이 어디로든 연결될 수 있고, 어디에서든 다시 시작하면서 누구와 어디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우발적 마주침의 향연을 즐기는 축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위계적 질서에 근거해서 강제성을 띤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평등한 관계에서 끊어져도 다른 곳에서 또 싹이 트고 다른 뿌리와 연결되어 생각지도 못한 만남의 끈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리좀이라는 개념에 어른의 전달력에 던져주는 시사점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다음 그것들과의 우발적 마주침으로 전혀 다른 생각을 잉태하는 만드는 겁니다. 엉뚱한 질문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해답을 끌고 오면 또 다른 질문을 던져 전혀 다른 해답과 부딪치면서 뜻밖의 가능성의 문을 계속 열어갈 수 있는 무대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깨달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연속적인 연상작용이 일어나게 화두를 던지는 것이 어른의 전달력에 리좀이 주는 시사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수아: “바르트 선생님의 ‘푼크툼’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이라는 주장’, 그리고 들뢰즈 선생님의 ‘리좀’ 개념은 저같이 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결정적인 사유가 담긴 개념과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쓸 때,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면 독자는 지쳐요. 오히려 한두 개의 강렬한 이미지나 특정 감각적 묘사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의 내면에 ‘틈새’를 메우는 자신만의 푼크툼을 만들어내게 하죠. 그리고 특정 문맥에서 똑같은 언어적 의미를 담고 있는 개념이라고 해도 그 말이 쓰이는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놔야 한다는 게 비트겐슈타인 선생님에게 배운 소중한 언어적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되,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상상력의 여지를 만든다고 봅니다. 완벽히 채워진 언어는 독자를 질식시키고, 적절히 남겨진 ‘틈새’가 독자가 그 안으로 들어올 공간을 주는 거죠. 느슨한 개념적 관계가 이전과 다른 연결을 통해 전혀 다른 의미를 잉태할 수 있는 리좀의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전달력은 화자가 모든 것을 채워서 완벽하게 설명하는 논리적 구성력에 있지 않고, 청중이 들으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색다른 연결과 조합을 통해 낯선 생각을 잉태하게 만들어주는 여백과 공간을 제공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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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문맥에 맞는 언어를 사용하는 게임이다


리처드 로티: 바르트 선생님의 ‘푼크툼’은 결국 그 경험에 어떤 이름을 부여하는 과정이고 벤야민 선생님의 ‘아우라’ 역시 언어로 표현될 때, 그 이름이 가진 과거의 맥락과 연결되어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푼크툼으로 날아든 뜻밖의 자극과 아우라에 담긴 상황맥락적 의미를 담아내는 적확한 언어를 찾기 힘들어서 소설가 배수아 선생님이 ‘언어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눈먼 각인’도 역시 언어가 우리가 겪은 현실저적 경험을 1:1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냉정한 인식이지만, 동시에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경험적 미지의 세계를 어제와 다른 언어로 여전히 탐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타성에 젖은 언어사용방식에서 벗어나 어제와 다른 언어로 경험을 재구성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전히 번역하고 해석합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바로 이 ‘번역’과 ‘해석’의 과정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어떤 ‘번역’과 ‘해석’을 동원해도 ‘언어의 틈새’를 완전히 메꿀 수 있는 완벽하고 투명한 방식을 개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은유를 만들고, 기존의 언어를 재배치함으로써 ‘눈먼 각인’에 가려져 있는 감각과 지각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파고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유 역시 들뢰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우발적 마주침을 만들어가는 리좀의 산물입니다. 비트겐슈타인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언어게임이론도 결국 언어의 의미를 고정시켜 놓지 않고 맥락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는 언어적 의미를 어제와 다르게 부단히 창조하면서 자신을 재서술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삶과도 맞닿아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듣는 빗소리는 우울할 때 들었던 어둔 그림자 속의 절망적인 소리가 아니라 시심을 자극하는 ‘밤하늘의 현악기’라고 표현하는 순간, 듣는 이는 기존의 언어가 만들어낸 익숙한 비의 이미지를 넘어, 새로운 은유적 언어 사용 경험으로 색다른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그래서 ‘설득’을 넘어 비슷한 맥락에서 은유법에 담긴 경험적 의미를 공감하는 ‘초대’입니다. 기존의 언어 습관에 갇히지 않고, 기꺼이 새로운 은유를 창조하고, 듣는 이가 그 언어 안에서 자신만의 ‘각인’을 만들도록 유도하는 유연함과 창의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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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사라진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마법이다


발터 벤야민: “로티 선생님의 ‘초대’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합니다. “새로운 은유의 창조도, 너무 적확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은유가 경험의 ‘아우라’를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산딸기 오믈렛’이 주는 충격은 단순히 달콤 새콤한 맛이 아니라, 그 경험이 우리에게 남긴 잔상, 유일무이한 감각적 흔적입니다. 언어를 동원해 지나치게 논리적 연관성을 캐물으면서 인과관계를 밝히거나 느낀 감정이나 생각이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미적분하듯 잘게 쪼개서 다 표현하려는 순간 종종 이 잔상을 뭉개버리죠. 제가 말하는 ‘아우라’의 환기도 결국 듣는 이를 과거의 특정한 경험이나 감각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언어를 통해 그 초대장을 아주 매력적으로 쓰는 것이죠.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이야기, 즉 서사의 힘을 통해 경험의 시간과 공간을 되살리는 것. 구체적인 묘사, 개인적인 감정의 진솔한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그 경험의 유일무이함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아우라’는 다시 피어납니다. 언어는 단순히 정보를 나르는 수단이 아니라, 사라진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마법의 보조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지닌 ‘아우라’를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말을 배열하고, 멈추고, 강조하는… 일종의 ‘시적’ 기술이 필요합니다. 언어는 경험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는 마법의 열쇠여야 합니다.”


롤랑 바르트: “네, 그리고 그 마법적인 도구는 때론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곳에서 발현됩니다. ‘푼크툼’은 설명으로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감각의 제국입니다. “벤야민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 ‘문을 열어주는’ 순간은 바로 ‘푼크툼’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많은 설명보다, 단 하나의 찌르는 듯한 표현이 때로는 더 큰 전달력을 가집니다. 복잡하고 낯선 경험일수록, 우리는 그 전체를 설명하려 들지 말고, 가장 날카롭고 개인적인 ‘푼크툼’을 포착해야 합니다. 그것을 언어로 ‘명명’하는 순간,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도 그 푼크툼이 작동하여,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의미를 재구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처럼요. 이런 언어가 어른의 전달력을 진정으로 드높일 것입니다. 설명을 덜어내고, 본질적인 ‘찌르기’를 남기는 것. 이것이 언어의 틈새를 메우는 방법입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내가 가진 복잡한 경험을 구구절절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의 핵심에 있는 단 하나의 날카로운 ‘지점’을 찾아내어 과감하게 내보이는 용기입니다. 듣는 이는 그 ‘지점’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연결되어, 그 경험을 ‘자기화’하게 됩니다. 언어의 경제성, 즉 불필요한 설명은 제거하고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전달력을 극대화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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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무의미한 상황을 의미심장한 맥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이다


어른의 전달력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상황(situation)을 특정한 의미로 다가가 전혀 다른 감각적 자극이 일어나는 맥락(context)으로 바꾸는데 일조합니다. 푼크툼은 누구에게 동일하게 작용하는 상황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 맥락입니다.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보이는 환경(environment)이나 배경(surroundings)입니다. 상황은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남다르게 와닿거나 특이하게 기억됩니다. 그 상황에서 다가온 특별한 푼크툼 덕분에 나의 특별한 의미나 의도가 잠자고 있는 곳이 바로 맥락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말 못 할 사연이 그 상황에 숨어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에 상황은 그냥 저쪽에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깊은 관심과 해석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정황(情況)이기도 합니다. 상황은 화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이전에 도처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광경(光景)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맥락은 무수히 많은 상황 중에서 나의 주관적 관심과 애정의 손길로 포착되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뜻밖이 정경(情景)입니다. 상황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 맥락은 담벼락 너머에 존재하는 상황이어도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벼락처럼 달려오는 푼크툼 같은 특별한 장소적 지각입니다.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시간에 머물렀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깊은 의미로 찌르는 색다른 장소 감각입니다.


상황은 스투디움처럼 틀에 박힌 방식으로 바라보니 고리타분하게 다가오는 공간입니다. 길들여진 눈으로 바라보니 여기저기 상황이 널려 있지만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반면에 맥락은 푼크툼처럼 동일한 상황이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옵니다. 이전과 다르게 보이면서 색다르게 나를 자극합니다. 그 속에는 어제의 나와 다른 또 다른 자아가 숨 쉬고 있습니다. 아니면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다른 사람이 맥락 속에서 어제와 다른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이 푼크툼으로서 맥락으로 변신할 때 세상은 의미의 천국이자 배움의 텃밭으로 변신합니다. 어른의 전달력의 핵심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로 다가가는 배경이나 광경, 즉 상황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독적인 의미가 살아 숨 쉬는 정황, 즉 맥락으로 탈바꿈시켜 주는 데 있습니다. 상황에서는 익숙한 스튜디움 자극이 오고 가지만 맥락에서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푼크툼의 자극이 색다른 각성을 일으키고 의미심장한 시사점으로 자랍니다. 어른의 전달력도 결국 익숙한 스투디움으로서의 상황을 푼크툼으로서의 낯선 맥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입니다. 학습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로 작용했던 객관적 배경으로서의 상황을 의미심장한 사랑과 의도성을 반영한 정경으로서의 맥락으로 바꾸는 과정입니다. 도처에 산재하는 상황을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눈길을 보내주고 손길을 내밀면 상황은 맥락으로 탈바꿈을 시도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김춘수의 꽃처럼 내가 의미를 심어 불러주기 전에는 모두 상황이었지만 내가 의미를 갖고 어제와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니까 나에게로 와서 의미심장한 맥락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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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임을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결국 낯선 경험의 전달은 ‘언어 게임’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어른의 전달력이란, 낯선 경험이라는 새로운 ‘게임’에 대한 규칙을 듣는 이에게 제대로 이해시키는 능력입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규칙을 따르라고 강요하거나 ‘닦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는 ‘생활 형식’을 함께 만들어가며,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주어진 문맥에서 의미공유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리처드 로티가 말한 ‘아이러니스트’처럼 기존의 언어 사용 방식을 고수하지 않고 어제와 다른 은유로 자아를 재서술하면서 낯선 사유를 촉진하는 삶을 살게 만드는 무대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가 문맥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는 게임규칙을 지속적으로 개발함으로써 고정된 의미체계로 굳어져버린 타성을 흔들어 깨우는 과정이 바로 어른의 '전달력'입니다. 진정한 소통은 함께 언어 사용 규칙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언어게임은 한 명이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복종해야 되는 명령체계가 아닙니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의미사용 규칙을 함께 만들고 지켜나가면서 신뢰를 쌓는 과정입니다.


어른의 전달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고, 공감하고, 때로는 침묵하면서 의미의 공백이 어디서 왜 생기는지를 순간적으로 성찰한 다음 메시지를 구상하는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입니다.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사용’이라는 말도 고정된 표현으로 자기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상황과 사람에게 맞춰 말투, 어휘, 비유를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어른의 전달력은 언어가 단순히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청중의 반응과 행동을 유발하는 중요한 기능이 있다고 제가 주장하는 까닭입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과 깊이가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규정합니다. 언어는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이야기는 그 언어가 품고 있는 세계를 배우는 관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려면 렌즈를 바꿔 끼워야 하듯, 언어적 렌즈를 부단히 정련하고 바꿔가면서 어제와 다른 세계를 바라봐야 합니다. 어른의 전달력도 결국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격, 즉 언격이 결정하는 인격에 좌우됩니다. 언어를 벼리고 벼리지 않으며 언어가 나를 버립니다. 언어가 나를 버리기 전에 고정된 도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상황과 사용에 따라 언어를 지속적으로 벼리고 벼려서 날 선 언어로 낯선 어른의 전달력‘을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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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배치를 바꿔서 낯선 생각을 잉태하게 만드는 상상력이다


질 들뢰즈: "저는 앞선 모든 말씀을 배치와 연결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낯선 경험적 자극을 전달할 때, 어른은 듣는 이의 사고를 고정된 경로로 이끄는 대신, ‘미지의 도끼’로 기존의 단단한 연결들을 부수고,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이종적으로 결합시키는 ‘아장스망(agencement)’을 만듭니다. 저는 여기서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하는 핵심을 포착하는데 아장스망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영어로 ‘arrangement’를 의미하는 ‘배치’나 ‘조합’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면 제가 ‘지식’과 ‘산부인과의사’라는 개념을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리좀’ 개념에 비추어 ‘지식산부인과의사’라는 새로운 연결을 만들었다면 새로운 의미 덩어리가 생긴 겁니다. 흔히 ‘지식’이라는 개념에 ‘경영’이라는 단어가 배치되어 ‘지식경영’이라는 경영혁신 전략을 탄생시켰습니다. ‘지식’이 ‘산부인과의사’ 옆에 배치되는지, ‘경영’이라는 개념 옆에 배치되는지에 따라 ‘지식’이라는 개념에는 전혀 다른 의미의 덩어리들이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는 겁니다. 아장스망은 배치를 바꾸면 상상력도 바뀐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대학교수 유영만 옆에 배치되어 있는 단어는 연구와 개발을 하는 연구실과,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의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배치가 한정되면 경험도 그 배치안에 가두어집니다. 하지만 지식산부인과 유영만 의사 옆에 배치되어 있는 단어는 연구실 대신 진료실, 학생 대상 강의 대신 환자 대상 진료라는 단어가 배치되며 이전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합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고정된 지식을 일방적으로 ‘배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연결과 확장이 가능한 '리좀'적 마주침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다양한 개념을 낯설게 배치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상상력을 일으키는 장소로의 초대입니다. 어른의 전달은 듣는 이의 사고를 고정된 경로로 이끄는 대신, ‘미지의 도끼’ 기존의 단단한 연결들을 부수고, 다양한 생각과 경험을 이종적으로 결합시키는 ‘아장스망’을 만듭니다. 막걸리 옆에 배치된 단어가 비오늘날이고 안주는 파전이라는 단어이면 늘 틀에 박힌 막걸리에 대한 상상력만 생깁니다. 하지만 막걸리 옆에 비 오는 날 대신에 새벽을 배치하고, 파전 대신에 스테이크를 배치하면 막걸리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마시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 덕분에 이전과 다른 상상력이 생기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글을 쓸 수 있는 연상능력도 생깁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아장스망이 제시하는 철학처럼 색다른 배치와 조합을 통해 이전과 다른 경험적 마주침, 즉 리좀을 통해 전혀 다른 생각의 씨앗이 잉태되도록 촉진하는 일종의 각성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로티의 ‘눈먼 각인’, 벤야민의 ‘아우라’, 바르트의 ‘푼크툼’,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 모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깨달음이니 지침이 아니라 사람마다 고유한 감각적 자극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성을 일깨우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지극히 맥락 의존적이고 단독적인 자극이나 언어사용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특정 언어나 비유가 나만의 ‘각인’된 경험적 자극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런 언어로 전달되는 의미 역시 대체불가능한 독특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어른의 전달력으로 거듭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언어 게임 이론 역시 어디서 누구와 어떤 게임을 어떤 문화적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에서 하는지에 따라 언어 사용 규칙은 다르게 바뀝니다. ‘푼크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사진을 봐도 누구에게는 머리 스타일이 될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이목구비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푼크툼이 어른의 전달력에 전달하는 시사점은 동일한 메시지가 전달되는 순간에도, 상대방의 마음에 ‘콕’ 박히는 의미는 논리나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작고 사소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호도의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됩니다. 즉 보편타당한 메시지나 효과적인 전달전략보다 전달자가 의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적 맥락이 지향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가 전달력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눈먼 각인’은 무의식적인 작용이고, ‘언어 게임 이론’은 맥락 의존적인 일리이며, ‘푼크툼’은 의도와 상관없이 발현되는 우연의 영역이기 때문에 전달자가 일방적으로 의미사용방식을 결정하고 통제할 수 없는 미지의 자극과 이론이자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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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전달력은 언어의 틈새를 좁히는 명불허전의 영향력이다


배수아: 결국 우리가 낯선 경험을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가진 한계, 즉 ‘틈새’를 인정하되,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은유를 통해 의미를 ‘재구성’하고(로티 선생님), 경험의 유일무이한 ‘아우라’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환기’하며(벤야민 선생님),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강렬하게 마음을 ‘찌르는 푼크툼’을 포착하여 간결하게 ‘제시’하고(바르트 선생님),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이기에(비트겐슈타인 선생님), 다양한 개념적 우발적 접촉인 리좀을 통해 익숙한 단어의 낯선 배치를 통해 아장스망을 바꿔가는(들뢰즈 선생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이 모든 과정에서 ‘전달자가 의미를 구조화시켜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채워서 전달하기보다, 듣는 이가 언어의 틈새를 메꾸며 철학자 선생님들이 주신 다양한 개념적 의미를 활용해 빈 공간과 여백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과정에서 어른의 전달력이 발휘해야 되는 핵심적인 역할이 있다고 합니다.


지식생태학자: (환하게 웃으며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와...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통찰의 향연이었습니다! 오늘 이 대화를 통해 ‘어른의 전달력’이 이렇게 깊은 의미가 있었는지는 새삼 깨닫는 깨우침의 축제였습니다. 배수아 작가님께서는 ‘언어의 틈새’를 통한 여백의 미와 듣는 이의 ‘숙달’을 유도하는 ‘비움의 지혜’를, 로티 선생님께서는 부단히 자기 변신을 거듭하는 ‘아이러니스트’의 자아 창조력과 ‘눈먼 각인’에 잠재된 의미를 깨우는 미지의 도끼로서의 새로운 ‘창달’을, 벤야민 선생님께서는 산전수전 겪은 경험의 ‘아우라’가 만들어내는 ‘명불허전의 영향력’과 '삶의 현현(顯現)‘으로서의 전달력을, 바르트 선생님께서는 ’푼크툼'을 통해 가장 핵심적인 ‘정곡 찌르기’로 ‘숙달’과 ‘창달’을 이끌어내는 힘을, 비트겐슈타인 선생님께서는 ‘언어 게임’이론을 바탕으로 언어사용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과정을, 마지막으로 들뢰즈 선생님께서는 ‘리좀’처럼 끊임없이 연결되고 확장하며, '아장스망‘을 통해 새로운 연결과 조합을 촉발시켜 경험적 상상력을 바꾸는 노력이야말로 어른의 전달력임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결국 ‘어른의 전달력’은 단순히 정보를 ‘배달’하는 행위를 넘어, 자신의 삶의 경험과 지혜를 응축하여 듣는 이의 사유와 삶에 깊은 ‘숙달’과 새로운 ‘창달’을 이끌어내는 ‘명불허전의 영향력’ 임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익숙한 규정된 의미를 파괴하는 ‘미지의 도끼’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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