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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왜 전달에 실패하는가?

전달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전달하는 것이다

어른은 왜 전달에 실패하는가?

전달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전달하는 것이다


비 오는 어느 날 카페에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따뜻한 커피 향이 감도는 자리에 모여 앉은 소설가 배수아, 리처드 로티,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비트겐 슈타인, 질 들뢰즈가 모여 앉아 자신만의 개념으로 어른의 전달력을 논의하기 전에 진정한 어른은 과연 누구인지, 그런 어른이 왜 이 시대에 많이 보이지 않는지, 그리고 어른은 왜 전달에 실패하는지를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대화의 맥락을 무시한다든지,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의미가 달라지는 언어적 사용보다 언어적 의미 자체를 강조한다든지, 메시지에 담긴 숨은 의도나 의중을 담고 있는 메타 메시지의 의미를 오해한다든지, 과거의 경험에 갇혀 있다든지 주로 어른들이 전달과정에서 실패하는 이유를 소설가 배수아가 말하는 언어의 틈새,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 이론, 질 들뢰즈의 아장스망과 리좀 개념에 비추어 어른의 전달력이 왜 실패하는지를 저마다의 철학적 신념과 개념을 근간으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기획해 보았다.


지식생태학자: 좌장 (유영만 교수님의 페르소나를 가진 AI 사용자분)

배수아: 소설가 (《당나귀들》의 저자, ‘언어의 틈새’)

리처드 로티: 철학자 (‘아이러니스트’, ‘눈먼 각인‘)

발터 벤야민: 철학자 (‘아우라’)

롤랑 바르트: 철학자 (‘푼크툼’)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자 (‘언어 게임’, ‘생활 형식’)

질 들뢰즈: 철학자(‘아장스망’과 ‘리좀’)


지식생태학자: (따뜻한 차를 내밀며) 여러분, 비 오는 궂은 날씨에도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평생을 '어른의 전달력'을 탐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탐구하면 할수록, 과연 ‘진정한 어른’은 누구이며, 왜 이 시대에 그리 많지 않은지, 더 나아가 그 어른들의 ‘전달’은 왜 종종 실패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합니다. 특히 전달 과정에서 일어나는 저마다의 다른 실패 요인들에 주목한 다음 공통적으로 어떤 요인이나 조건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하고 오해를 사거나 심지어 불만을 터트리게 만드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 각자의 깊이 있는 통찰을 듣고자 합니다. 먼저, 가장 근원적인 질문부터 시작해 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은 과연 어떤 사람이며, 왜 우리는 이 시대에 그런 어른들을 만나기 어려운 것일까요? 더불어서 어른의 전달은 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어른은 어제와 다른 언어로 자아를 재창조하는 아이러니스트입니다


배수아: (잔잔한 눈빛으로) 지식생태학자님 말씀처럼, '진정한 어른'은 쉽지 않은 질문이죠. 저는 진정한 어른이란 제가 《당나귀들》에서 말했던 ‘언어의 틈새’를 이해하고 그 틈새를 좁히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틈새’는 내가 사물이나 어떤 현상에 대해 느낀 감각적 깨달음에 상응하는 적확한 언어를 선정해서 표현해도 여전히 표현한 말이나 문장에는 내가 느낀 점이 고스란히 담기지 못하는 안타까움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언어가 경험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 그 불가능성을 직시하고 인정하며 더 적확한 언어를 벼리고 벼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저는 진정한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입장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의 틈새는 사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메꿔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그것으로 배운 모든 깨달음을 언어로 분명하게 정의하고 ‘배달’하려는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하면 오히려 주어진 사물이나 현상을 왜곡해서 전달하기 쉬워요. ‘언어의 틈새’를 미완의 가능성으로 유보시켜 놓지 않고 그 틈새를 무조건 언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그 틈새 때문에 소통이 더 답답해지는 역설이 발생하죠. 자신이 갖고 있는 언어 꾸러미로 ‘언어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완벽한 설명을 고집할 할수록, 오히려 청중의 상상력과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니, 진정한 ‘창달’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걸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리처드 로티: 배수아 작가님의 ‘언어의 틈새’는 제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에서 말하는 ‘언어의 우연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책상과 책은 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그건 처음부터 의미가 정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보통명사가 아니라 저렇게 생긴 건 책이나 책상이라고 부르자고 사회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책상과 책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우연히 그렇게 정해진 겁니다. 이게 바로 ‘언어의 우연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언어는 어떤 의미를 품고 미리 정해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정된 절대적 진리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현상을 만날 때마다 기존 언어를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언어를 계속 만들어 낯선 의미를 잉태하자는 겁니다. 앞으로 어떤 언어가 새로운 의미를 품고 나타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연히 새로운 언어가 부각될 가능성은 배수아 작가가 말하는 ‘언어의 틈새’를 메꾸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부각되는 적확한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래서 언어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철학자보다는, 기존 언어 사용방식이나 틀을 깨부수고 이전과 전혀 다른 언어사용 방식을 열어가는 ‘시인’이나 ‘소설가’ 같은 사람들을 더 높게 평가하는 까닭입니다. 진정한 어른은 기존 언어 사용방식에 갇혀 지내지 않고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부단히 타성에 젖어 언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아우라가 사라지면 어른의 전달력도 실패하기 시작합니다


발터 벤야민: 저는 어른의 전달 실패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에서 말한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의 경험에 녹아 있는 '아우라'를 인지하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 아우라는 유일무이한 현존감에서 오는 무게와 깊이죠. ‘아우라’는 대체불가능한 카리스마의 위용을 내뿜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감입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원본 그림이 내뿜는 카리스마 기운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작가의 숨결이 바로 원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아우라입니다. 아우라가 뿜어내는 고유한 독창성이 강력할수록 다가갈 수 없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의 실종'은 왜 생길까? 대량 복제가 가능한 시대, SNS 기술이 발전하고 특히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원본의 아우라는 복사본으로 무한 복제되고 있습니다. 원본의 아우라가 품은 신비감과 경이로움은 더 이상 만나기 어려운 신비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어른의 전달이 실패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도 대체불가능하고 범접 자체가 어려운 어른들의 아우라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경험을 마치 복제품처럼 의미 없이 나열하며 ‘배달’만 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유일무이한 가치와 현존감을 듣는 이에게 아우라의 이미지로 환기시키지 못합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그 어른만이 겪어본 경험적 지혜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운이나 느낌이 반영될 때 임팩트가 높아집니다. 하지만 누구나 복제할 수 있고 대체가능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할 때 청중은 단순히 지식 소비자가 되어버리고, 결국, 내 삶에 적용할만한 인생의 교훈도 없이 자기 생각에 갇힌 지루한 이야기로 전락해 버립니다. 특히 유튜브, SNS, 숏폼 영상 등 빠르고 자극적인 정보나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이미지를 아무 때나 수시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는 어른의 지혜가 담긴 아우라의 현존감은 거의 완전히 상실되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한 시대일수록 깊은 사유가 담긴 어른의 지혜는 자극적이고 반복 가능한 것으로 만들며 제가 말하는 아우라를 소멸시킵니다. 아우라가 살아 숨 쉬지 않는 모든 어른의 전달은 실패를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어른의 전달력은 나의 푼크툼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의 푼크툼을 읽어내는 능력입니다

롤랑 바르트: 벤야민 선생님의 ‘아우라’는 제가 《밝은 방》에서 말하는 ‘푼크툼(punctum)’과 일맥상통합니다. 아우라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존재감이듯이 푼크툼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뇌리에 아찔한 자극으로 들어와 패인 깊은 앎의 상처입니다. 어떤 이미지나 정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가와 강렬한 자극을 남겼지만 그 자극의 정체나 본질을 한 두 마디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이나 혹은 타인의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푼크툼’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논리 너머의 날카로운 ‘찌르기’입니다. 푼크툼은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예를 들면 모두가 공부 열심히 하는 교실 모습에 주목하고 있지만 나는 교실 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밤 12시인지 낮 1시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시계 모습을 보며 학생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만 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푼크툼입니다. 푼크툼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자극이라기보다 가슴으로 확 와닿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은 남의 푼크툼을 읽어내는 능력, 다른 말로 하면 공감과 통찰이고, 나의 푼크툼을 만들어내는 능력, 즉 색다른 깨우침의 자극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어른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상적인 모습이나 상투적인 이미지, 즉 ‘스투디움(stúdĭum)’만 보는 게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속에 담긴 의도나 의중을 알아맞힐 수 있는 작은 단서, 예를 들면 사소한 몸짓이나, 눈빛, 또는 무심코 내뱉는 단어 같은 ‘푼크툼’을 놓치지 않고 읽어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푼크툼에 비추어 본 또 다른 의미의 진정한 어른은 메시지를 전달할 때 단순히 틀에 박힌 관성과 타성에 젖은 언어로 전달되는 자극, 즉 스듀디움의 틀에 박힌 메시지나 이미지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청중의 마음을 후벼 파며 전율하는 느낌으로 찌르는 깊은 각성의 메시지로 예상치 못한 통찰을 전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른의 전달력이 왜 실패하는지는 푼크툼의 자극을 주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면 됩니다. 틀에 박힌 논리로 구식의 전달방식과 과거의 향수에 젖은 전달은 백발백중 실패합니다. 푼크툼의 자극이 없는 어른의 전달력은 수많은 정보를 받고 지적 자극도 받았지만 진정한 공감이나 강렬한 깨달음의 자극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휘발되면서 실패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뇌는 정상적인 스튜디움과 같은 틀에 박힌 자극이 들어오면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습관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지만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낯선 푼크툼과 같은 자극이 입력되면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두뇌작용을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뇌리에 깊이 박혀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면 청중들에게 삶의 지침을 제공하는 정문일침의 자극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어른의 전달력은 실패의 지름길로 향합니다. 푼크툼 자극이 없는 어른의 전달력은 정병근 시인의 《눈과 도끼》 시집 표사에 등장하는 ‘미지의 도끼’로 기정사실이나 고정관념을 통렬하게 부정하고 강렬한 지적 자극으로 단번에 각성시키지 못하고, 중언부언(重言復言)하고 횡설수설(橫說竪說)하며 새로운 ‘창달’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의 쓴웃음을 짓습니다.



어른의 전달력은 문맥이나 맥락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언어 게임이 좌우합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저의 후기철학적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는 《철학적 탐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정한 어른이나 어른의 전달력 관련된 모든 문제는 결국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어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저마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 즉, 제가 자주 강조하는 특정한 ‘생활형식(Forms of Life)’ 속에서 일어나는 ‘언어게임(Language Games)’의 규칙임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생활형식’이란 가족이나 회사 또는 친구들이 저마다 살아가고 일하며 배우며 즐기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밥 먹을 때 시끄럽게 떠들면서 먹으면 안 되는 ‘생활형식’을 갖고 있지만 서구 사람들의 ‘생활형식’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먹어도 되는 생활 방식이다. 문화적 특성이나 고유한 전통방식에 따라 저마다 다른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갑니다. ‘언어게임’은 특정한 단어가 저마다 다른 생활 형식에서 어떻게 다른 의미로 쓰이는지, 즉 언어 사용 규칙이 달라지면 언어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친구에게 “밥 먹었어?”라고 물어보는 것은 실제로 밥 먹을 때가 되어서 밥을 끼니로 먹었는지 물어보는 의미와 지나가다 만났을 때 가볍게 건네는 인사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처럼 밥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른 언어 사용 규칙을 따르는 게임과 같다는 의미로 ‘언어게임’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언어게임’에 비추어 보면 진정한 어른은 사람마다 다르게 살아가는 다양한 ‘생활양식’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에게 익숙한 생활양식에 비추어 자기 방식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다른 세대의 ‘생활양식’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어른은 맥락에 맞는 적확한 언어 사용 방식을 이해하고 당사자가 놓인 생활양식에 맞게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진정한 어른은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으로 정체되어 있지 않고 말하는 사람의 직업이나 일하는 영역에 따라 다르게 요구하는 언어 사용 규칙을 숙지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직면하는 상황에서 어떤 언어 사용 규칙을 따라야 소통하고 싶은 메시지의 의미가 가장 잘 전달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규칙에 맞춰 유연하게 소통하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입니다.


‘생활형식’과 ‘언어게임’에 비추어 보면 어른의 전달이 실패하는 이유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해집니다. 전달자가 자신의 언어 게임 규칙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혹은 다른 언어 게임의 맥락에서 쓰인 말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시작되는 순간 어른의 전달력은 실패의 지름길로 접어듭니다. 특히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언어를 고정된 의미로 일관되게 사용하는 것은 언어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라테는 말이야~”처럼 특정 ‘생활양식’에만 갇혀서, 다른 세대나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 전달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황양식에 따라 언어게임을 바꾸지 않고 자기가 살아가는 생활양식에서 사용하는 언어게임으로 전달하기 시작하는 순간 실패를 전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 언어게임을 바꾸지 못하면, 사람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 어렵고, 딱딱하거나 거리감이 느껴져서 친밀한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생활양식에 맞는 언어게임을 하면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과거 경험에만 갇혀 꼰대짓을 하면서 과거의 언어게임 규칙만을 고집하면서 현재의 변화된 상황에 맞는 규칙을 거부한다면 결국 소통의 채널은 닫히고 어른의 전달력은 실패로 전락합니다. 결론적으로, 어른의 전달력이 성공하려면, 상대방의 ‘생활양식’을 존중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언어게임’의 규칙에 맞춰 유연하게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어른은 어제와 다른 언어로 자아를 재창조하는 아이러니스트입니다


질 들뢰즈: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했던 ‘리좀(rhizome)적인 사고를 하고, 유연하게 ‘아장스망(agencement)’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리좀은 뿌리, 줄기, 가지처럼 위계적 질서로 규정된 나무가 아니라 감자나 잔디뿌리처럼 시작하는 중심도 없고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연결되고 접속되면서 일정한 방향도 없이 우발적으로 만나는 마주침을 의미합니다. 리좀처럼 우발적으로 뻗어 나가다 갑자기 만나는 다양한 접속으로 생기는 새로운 배치나 배열이 바로 아장스망입니다. 학습과 건강이라는 개념과 전문의사라는 개념이 리좀처럼 우발적으로 만나 ‘학습건강전문의사’라는 새로운 아장스망을 만들어냅니다. 레고블록도 언제 어디서 어떤 레고블록과 마주치는지에 따라 집이라는 아장스망의 배치가 되기도 하고 자동차나 비행기처럼 운송수단이라는 아장스망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선생님이 말씀하신 생황양식에 따라 언어게임이 달라질 때마다 언어의 의미도 달라지듯이 세상에는 정해진 본질이나 고정된 의미로 정체되어 있지 않고 리좀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다양한 구성요소들이 부단히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낯선 아장스망을 만들었다 다시 해체하며 어제와 다르게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리좀이나 아장스망에 비추어 본 진정한 어른은 한 마디로 리좀처럼 사고하고 어제와 다른 아장스망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어른은 세상이 나무처럼 질서정연하고 딱딱한 위계적 구조로만 이루어져 고정된 위치에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리좀처럼 쉴새없이 변신을 거듭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낯선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연결이 끊임없이 생겨나며, 하나의 중심에서 출발하지 않고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유동적으로 흘러간다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어른은 자신이 겪어본 경험과 그것으로 얻은 통찰력도 단 하나의 정답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언제든 자신과 다른 리좀적 접속으로 새로운 아장스망을 만들어내면서 낯선 배치로 색다른 상상력을 잉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도 언제든 통념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자신의 사유체계조차도 뿌리째 흔들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진정한 어른은 지금 이 세상을 이끄는 주도적인 힘의 원천은 어디서 유래되는지, 그런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낯선 연결과 배치는 무엇인지를 부단히 연구하고 관찰하면서 통찰력을 얻습니다.


리좀이나 아장스망에 비추어 볼 때 전달에 실패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고정된 사고에 갇혀서 변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다양한 연결과 접속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계속 탐색하지 않고 나무처럼 명확한 중심과 정해진 질서, 수직적 위계구조에 근거해서 원래, 물론, 당연이라는 생각의 교도소에 갇혀 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사고방식에 갇혀서 과거에나 통용되었던 상식을 여전히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믿고 옛날부터 그래왔으니 지금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주장할 때 어른의 전달력은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합니다. 어른의 전달력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에 배운 교훈도 오늘 다른 경험적 깨달음과 연결,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실의 접속으로 새로운 인사이트를 만들어내는 리좀적 사고와 활동을 통해 늘 낯선 배치를 만드는 아장스망을 즐겨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선생님이 주신 통찰력 중에서 상대방이 어떤 ‘언어게임’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듯이, 상대방이 우발적 접속으로 만들어가는 ‘아장스망’을 읽어내지 못하면 아예 소통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진정한 어른은 ‘눈먼 각인’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입니다


지식생태학자: 지금까지 저마다의 문제의식으로 창조하는 자신의 신념이 담긴 철학적 개념으로 진정한 어른의 의미와 어른의 전달력이 왜 실패하는지를 독특한 컬러와 스타일로 주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출발점의 문제의식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지는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수아 작가님께서는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늘 한계로 작용하는 ‘언어의 틈새’를 외면하고 자기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의미만 강조하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 강박관념이 맥락에 담긴 말할 수 없는 의미의 뒤안길을 무시할수록 전달에 실패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로티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며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는 ‘아이러니스트’를 거부하고 ‘한때 강렬하게 자극으로 다가와 몸의 어디엔가에 축적된 ’눈먼 각인‘에 갇혀 ’과거의 경험‘을 반복할수록 젊은 꼰대처럼 새로운 맥락적 의미를 무시하며 전달에 실패한다고 진단해주셨습니다. 특히 진정한 어른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어제와 다른 자아를 재창조하면서 색다는 언어와 은유적 사유로 자기를 재서술하는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어제와 다르게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는 ‘아이러니스트’만이 진정한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어른은 자신의 과거 경험에 갇혀 깨달은 깨우침이 마치 절대적인 교훈인양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각색해서 ‘배달’하려 들지 않습니다. 지금 진정한 어른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많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한 때 겪었던 과거 경험이 만들어낸 ‘눈먼 각인’에 갇혀 모든 판단과 생각의 기준을 그 당시의 상황적 맥락에 근거해서 절대적인 진리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이미 지나간 시절의 경험에 발목이 잡혀 그것이 마치 영원한 진리인 양 반복해서 적용하려 들 때, 바로 ‘전달의 실패’가 시작됩니다. 현재가 아무리 역동적으로 변화되는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과거 어느 시절에 몸에 아로새겨진 ‘눈먼 각인’을 벗어나는 새로운 해석을 하지 못하고, 반복해서 ‘맥락을 무시’한 채 옛 교훈이나 옛 방식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고집할수록 실패를 전달하는 과정을 반복할 뿐입니다. 새로운 맥락에 맞춰 자신의 언어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유연성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이 지녀야 할 가장 시급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벤야민 선생님께서는 SNS를 기반으로 원본의 대량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대체 불가능한 ‘아우라’는 실종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대신 원본이 갖춘 모방불가능한 독특한 이미지가 건조한 의미로 번역되어 신속한 ‘배달’만 급증할수록 범접할 수 없는 독특한 카리스마의 위용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달자는 원본의 진정성을 잃어버리고 피상적 이미지만 전달할수록 오히려 원본이 품고 있는 고유한 이미지는 왜곡된다고 경고해주셨습니다.



전율감이 감도는 아우라가 전율하는 감동을 부릅니다


어른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정보나 지식뿐만 아니라 그 어른이 살아오면서 겪은 시행착오의 깨달음과 이것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진심과 진실, 그리고 경험적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메시지에 담긴 진심과 지혜는 대체불가능한 그 어른만의 고유한 아우라를 품고 있고, 쉽게 모방할 수 없는 존재감이 독특한 컬러와 스타일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원본의 아우라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만약 어른의 전달이 어디선가 많이 본 정보나 지식을 복제한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순간부터 전달자와의 신뢰는 무참히 깨지고 전달되는 모든 메시지는 불신만 증폭시킬 뿐 아무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즉, 단순히 책에서 본 내용이나, 남들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거나, 혹은 수없이 인터넷에 떠도는 상투적인 이야기들만 한다면 그런 전달은 그 어른의 고유한 경험이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복제품처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율감이 감도는 아우라가 없으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전율하는 감동도 줄 수 없는 겁니다. 결국, 공허한 정보의 나열일 뿐이고, 전달력이 실패하게 되는 거는 당연지사입니다. 강연이 실제 이루어지는 무대나 현장에서 화자와 청자 사이이에 관계가 맺어지면 그 사이에 오고가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습니다. 눈빛, 목소리 톤, 표정 등은 복제될 수 없는 그 순간의 고유한 존재감이 직접 청중과 만나는 그 순간에 대체불가능한 아우라로 폭발하게 만듭니다.


바르트 선생님께서는 뇌리를 찌르는 ‘푼크툼’을 놓치고 타성에 젖은 스튜디움의 메시지만 강조하며 장황한 설명만 중언부언 남용하는 것이 소통의 핵심을 놓치고 전달에 실패 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선생님께서는 ‘언어 게임’과 ‘생활 형식’의 이해 부족으로 저마다 다른 언어 사용 규칙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으로 언어적 의미를 강조할 때 어른의 전달은 무참한 실패에 이른다고 명쾌하게 진단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 선생님께서는 불확실한 상황이자만 우연한 만남으로 새로운 의미를 잉태하는 우발점 마주침, 즉 리좀적 사고를 통해 과거 경험에 갇힌 고정적이고 위계적인 나무적 사고에서 벗어나 낯선 배치로 새로운 상상력을 잉태하는 아장스망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할 때 진정한 어른의 전달력이 살아 숨 쉰다고 강조해 주셨습니다. 만약 어른 자신이 새로운 ‘아장스망’을 만드는 노력을 포기하거나 게을리할 때 과거의 경험에 안주하며 익숙한 생활방식에만 머물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과 자신을 연결 지어 낯선 연결과 접속 자체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낯선 생각은 리좀적 접속으로 시작되어 아장스망의 텃밭에서 꽃이 핍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 선생님은 어른의 전달력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방향이나 전략의 핵심을 꼬집어 지적해주셨습니다. 리좀적 접속을 통해 만들어가는 낯선 배치, 즉 아장스망은 끊임없이 기존의 경계나 안정된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뻗어 나가려는 안간힘입니다. 기존 영토에 안주하지 않고 낯선 미지의 세계로 탈주하면서 낯선 만남으로 생기는 이질적인 배치를 통해 그동안 안주했던 과거의 영토, 즉 익숙하고 안전한 사고방식, 경험으로 축적한 기존 지식, 반복되는 경험으로 만들어낸 성공 방정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는 탈영토화를 시도할 때 꼰대라는 오명을 벗고 고정된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가는 노력을 부단히 경주할 것입니다. 영토는 지금 현실에서 안주하는 공간이고 탈영토화는 익숙한 삶의 터전을 낯선 삶이 펼쳐지는 새로운 영역으로 탈바꿈시키는 탈출의 현장입니다. 진정한 어른일수록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항상 전제조건으로 생각하며 새로운 의미가 잉태될 수 있는 조건을 리좀과 아장스망을 통해 부단히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들뢰즈 선생님의 ‘리좀’과 ‘아장스망’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진정한 어른은 고정된 사고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며, 낯선 배치를 만들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시키면서, 상상력을 돋움으로써 듣는 이가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창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어른은 과거의 경험이 만든 ‘눈먼 각인’에 눈이 멀지 않고 ‘언어의 틈새’를 부단히 메우기 위해 언어적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주어진 삶의 형식에 적확한 언어 사용 규칙을 만들어 갑니다. 진정한 어른은 주어진 맥락에서 언어의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늘 새롭게 창조하며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지적 자극이 앎의 상처를 만들 수 있는 ‘푼크툼’ 자극을 생산합니다. 진정한 어른일수록 대체 불가능한 ‘아우라’로 경이로운 전율감을 주기 위해 어제와 다른 낯선 ‘리좀’적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상상력을 잉태하는 나천 배치를 만드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아장스망’을 만들어갑니다. 어른의 전달력 실패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언어와 경험, 그리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깊이의 문제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오늘 이 귀한 논의는 제가 앞으로 탐구할 ‘어른의 전달력’에 더할 나위 없는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정말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역시 함께 질문하고 탐구하는 것이 최고의 공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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