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세유,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지문(指紋)
시간의 두께가 의미의 무게를 만들어
바다가 밀어 올린 소금기 어린 문장을 건축하고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석회암 벽마다
시간을 붙잡고 하루 종일 물어본
의문의 화살과 질문의 얼룩이
파편화된 기억의 주석(註釋)으로 박혀 있다.
미로같은 마르세유 골목은
흔들려봐야 뒤흔들 수 있다는 걸
흔들리고 나서 깨닫는 마르세유의 골목은
페니키아의 돛이 가져온 낯선 지혜와
이민자의 낡은 가방에 실려 온 고단한 희망이
아직도 흔들리는 가운데 뿌리가 깊어감을 배우는
거대한 도서관이다
역사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흐르는 숨결이고
메마른 활자 속 ‘이론(理論)’이
삶의 진흙탕에서 뒹구는 밑바닥 경험으로
구두굽 닳는 고단한 소리를 받아 적으며
비로소 땅에 뿌리박은
참된 ‘진리(眞理)’가 편파적 일리로 해석된 산물이다
르 파니에(Le Panier) 언덕 위로 부는 미스트랄 바람은
온실 속의 안온한 ‘무풍(無風)’이 아니라
시들었던 영혼을 되살리는 거친 들판의 ‘역풍(逆風)’이자
고대와 현대, 정주와 이주 사이의 경계를 지우며
단절된 과거를 현재의 삶 속으로 부단히 수혈하는 몸부림이다
푸른 목도리를 두른 사색가는 이제 질문을 던진다
머리로만 조립한 ‘사고(思考)’의 탑은
예고 없이 들이닥친 현장의 ‘사고(事故)’로
대책없이 무너진 뒤에야
깊게 패인 주름살의 나이테에서 배우는 까닭은 무엇인지
답은 골목 끝,
지평선 너머의 호화로운 꿈의 목적지보다
신체의 ‘신음(呻吟,身音)’이 발바닥을 자극하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통증이 말해주는 의미에 비추어
이 단단하고 거친 돌길의 감촉 속에
이미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깨닫는다
진정한 스승은 단순히 지식을 배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비바람을 맞고 토양을 일구고
수많은 시행착오로 꽃을 피워내며
자기 삶으로 역사를 창조하는
서사의 전달자라는 사실을
지금 마르세유이 골목이 말해주고 있다
인생의 ‘걸림돌’을 만나 넘어졌을 때
그것을 원망의 대상으로 버려두지 않고
성장의 거름으로 발효시켜
‘디딤돌’로 삼는 지혜,
버려진 ‘쓰레기’ 같은 경험마저
‘쓸 이야기’의 퇴비로 만드는
탁월한 유기농법을 배운다.
오늘도 나는 당신과 관계가 만드는 비옥한 숲에서
삶이 곧 앎이 되는
경이로운 배움의 끈을 이어가며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
2026.2.1일 골목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