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게 배우는 10가지 인문학적 지혜
2019년, 등신(藤身)처럼 살아가자!
나무에게 배우는 10가지 인문학적 지혜
한 해 동안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갈등(葛藤)으로 대결과 투쟁, 반목과 질시를 거듭해왔다. 갈등(葛藤)이라는 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칡 나무(葛)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등나무(藤)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 갈등을 겪고 있는 등나무는 자신의 몸으로 한여름 사람들에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준다. 갈등(葛藤)을 해소하고 등신(藤身)처럼 살아가는 등나무에게서 등신(等身)처럼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내 한 몸 던져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등지면 악연이고 등 대면 인연이다. 살아갈 날이 무한정 남아있지 않다. 남은 날이라도 등지고 살지 말고 등 대고 살자.
나무의 물리학
나무의 크기는 뿌리의 깊이에 비례한다.
보잘것 없이 초라한 그 나무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나뭇잎이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나무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나무에 대한 첫사랑이었다.
김인육의 ‘사랑의 물리학’을 패러디한 시다.
나무를 너무 사랑하면서 나무로 하루를 시작하고, 나무를 바라보며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 나무가 가르쳐주는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무를 뜻한 한 자 목(木)은 열십자(十)에 사람(人)이 걸려 있는 모습이다. 나무가 두 그루 모이면 수풀 림(林), 세 그루 모이면 삼림 삼(森)이 된다. 나무가 많아지면서 숲을 이루고 숲은 사람에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을 주면서 세상을 푸르게 만들어간다. 거꾸로 나무가 한 그루씩 없어지기 시작하면 숲이 점차 황폐해지면서 세상은 십자가(十)에 사람(人)이 걸려 있는 나무 목(木) 자를 상징하는 형상으로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본(基本)이나 근본(根本), 본질(本質)이나 본색(本色)의 본(本)에도 여지없이 나무(木)가 중심(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깊게 그리고 가장 높게 자라는 생명체가 나무라는 사실, 그 나무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나무를 바라보는 인문학자의 시선을 나무와 대화하면서 깨달은 10가지 색다른 교훈을 쓴 책이 바로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이다.
나무에게 배우는 10가지 인문학적 지혜
①나무는 생명의 근본(根本)이다.
존재의 본질은 뿌리를 아래로 뻗는다. 뿌리를 아래도 뻗은 깊이만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결정한다. 위로 성장하려거든 아래로 먼저 파고드는 나무에게서 생명의 성장과 성숙을 배운다. 아래로 뻗은 깊이가 위로 성장할 수 있는 높이, 즉 진리를 결정한다. 나무는 위로 성장하기 이전에 철저하게 아래로 파고든다. 뿌리를 내리는 공부에 힘써야 앞으로 나갈 길을 만날 수 있다는 논어의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을 철저하게 닦아야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인다는 의미다. 뿌리를 내리는 공부를 해야 여러 가지 분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씨앗을 뿌리리 않으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뿌리를 내리는 일, 모든 생명체의 출발점이자 근본(根本)을 만드는 작업이다.
②나무는 꿈을 꾸지 않는다.
나무에게는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나무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 또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 주어진 자리에서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목숨을 걸고 살아갈 뿐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무는 그저 매 순간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다. “평생 동안, 삶의 결정적인 순간을 찍으려고 노력했는데,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을 깨달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처럼 나무도 매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나무의 꿈은 명목(名木)이나 낙락장송이 아니라 더불어 만들어가는 숲이다. 숲을 만들어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는 지극히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할 때 부산물로 다른 생명체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단풍도 이기적인 나무가 보여주는 부산물이다. ‘이기적’일 때 ‘기적’이 일어난다. 나무는 주어진 자리에서 가장 이기적으로 살아가면서 생기는 부산물로 사람을 비롯하여 다른 생명체에게도 부가적인 혜택을 선물로 준다. 기적을 일으키려면 우선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가야 함을 나무에게서 배운다.
③나무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나무는 씨앗이 떨어진 자리가 자신이 살아갈 자리다. 나무에게는 자리 선택권은 없고 오로지 자세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자리를 탓하거나 꿈꾸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한탄과 실망을 거듭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나아가 자리를 선택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느냐고 그 자리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갈지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리보다 자세를 먼저 선택할 때 자립심이 생기고 자격지심(自激之心)도 생기는 법이다. 선택한 자세가 나의 자질과 역량을 결정해주는 선물이다. 우리말에 ‘엿같다’는 말이 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쓰는 속어다. 하지만 나무는 아무리 환경이 열악해도 자신이 뿌리내린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주역에 보면 엿 같아도 ‘역(易)같이’ 살아가는 나무의 위대함을 지칭하는 말이 나온다. '역이불역(易而不易) 불역이대역(不易而大易),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다. 바로 그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다운 대역(大易)이다.” 나무는 역같이 살아간다. 세상이 아무리 역 같아도 역같이 살아가야 변화의 물결을 헤치고 큰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
④나무의 본질은 나목(裸木)이다.
나무는 때가 되면 버리고 비운다. 버리지 않으면 버림받고 비우지 않으면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나무는 야생에서 야성을 배운 것이다. 나무의 진면목(眞面目)은 나목(裸木)이다. 물론 나무는 새 봄에 새싹을 틔울 때, 한 여름 녹음으로 우거져 있을 때, 가을에 단풍으로 불태울 때마다 저마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무는 이제 혹한의 겨울을 버텨내기 위해서 자신을 덮어 씌우고 있는 모든 것을 땅으로 돌려주고 가장 가벼운 나목으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네이키드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누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혼자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미술 평론가 존 버거의 말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누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네이키드가 바로 자신의 진면목이다. 사람도 이름 앞뒤에 붙어 있는 형용사의 거품을 걷어내고 이름 석자로 버틸 수 있는 힘이 곧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이다.
⑤나무는 절망 속의 희망이다.
겨울눈은 겨울에 만들지 않는다. 나무가 겨울눈을 겨울에 만들다가 눈, 즉 새봄에 희망을 싹 틔울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 겨울눈은 나무가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만든 눈을 말한다. 겨울눈은 보통 가을에 만들기 시작한다. 이 겨울눈에서 새봄에 꽃이나 잎이 나온다.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나무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갖고 있는 모습은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지혜에서도 배울 수 있다. 마지막 남은 씨 과실에서 새봄의 희망을 본다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석과불식의 지혜는 나무는 저마다의 끝에서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나무는 낙엽으로 뒤덮인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거품과 환상을 제거하는 엽락(葉落), 그런 다음 자신의 몸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체로(體露)로 뼈대를 직시하고 삶의 근본과 대면한다. 자신의 몸에거 걷어낸 나뭇잎으로 뿌리가 다시 성장할 수 있도록 거름을 만드는 분본(糞本)의 과정은 자연의 평범한 순환이지만 통렬한 깨달음을 준다.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말이다.
⑥나무는 여러 가지다.
나뭇가지는 여러 가지지만 하나의 줄기에서 나온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를 뻗다 보면 때로는 마음대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중간에 장애물을 만나기도 한다. 나뭇가지를 잠시 숨을 고른 후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기어코 햇볕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굽은 곡지(曲枝)가 있어야 결심을 하고 각오를 하면서 심지(心志)도 굳어진다. 굽은 길을 우여곡절 살아봐야 꿈을 향하는 의지도 더욱 불태운다. 여러 가지로 뻗어봐야 ‘고지(高地)’에도 오르고 ‘경지(境地)’에도 이른다. 가지가지해봐야 ‘고지’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무는 참으로 위대하다. 나무는 자라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지만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내 삶을 성장시키기 위한 걸림돌이자 장애물이라는 점에서는 다 마찬가지다. 나뭇가지는 가지치기(branching) 없이 가지치기(pruning)를 할 수 없다. 가지치기(pruning)를 해줘야 가지치기(branching)를 잘할 수 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지치기를 해야 나의 가능성으로 새로운 가지치기를 할 수 있음을 나무에게서 배운다.
⑦나무는 불타는 의지다.
의지(依支)할 곳이 없을 때 가장 강력한 의지(意志)가 발동된다. 나무는 발버둥 치면서 성장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살아간다. ‘힘에의 의지’는 니체가 만든 개념이다. ‘힘에의 의지’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저기로 가려는 상승작용의 의지이자 나에게 없었던 힘을 주는 의지,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면서 힘이 되는 의지다. 나무 역시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여기서 저기로 성장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갖고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치열한 존재다. 의지(依支)하고 싶은 나무가 우리에게 무한한 의지(意志)를 심어주는 이유다. 열정(passion)의 어원은 ‘고통스럽다’, ‘괴롭다’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파세인(pathei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열정은 어렵고 익숙하지 않고 괴로운 것을 자신의 본질로 수용하려는 마음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이다. 우리는 나무에게서 주어진 삶을 살아내려는 불타는 열정과 의지를 배운다. ‘단풍’은 살아남은 나무가 마지막 사투를 벌이며 보여주는 ‘열풍’이다. 치열하게 한 해를 살아온 나무일수록, 혹독한 환경 속에서 시련받은 단풍일수록 그 ‘앓음다움’이 눈물겨운 이유다.
⑧나무는 비움이자 쉼이다.
녹음을 자랑했던 나무는 가을이 되면서 마지막 발악을 한다. 단풍으로 자신의 온몸을 불태운 다음 그 잎을 모두 땅으로 떨어뜨린다. 겨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에너지 소모량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잎으로 가는 에너지 통로를 차단하고 몸에 붙은 모든 잎을 땅 위에 버리고 자신의 뿌리에 영양분을 만들어낸다. 나뭇잎을 떨어뜨려내야 새 봄의 희망을 꽃피울 수 있다. 버리고 떨어내야 버림받지 않고 덜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져야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무는 온몸으로 배운 것이다. 휴식(休息)이라는 단어도 사람(人)이 나무(木) 옆에 기대서 자신(自)을 생각하는 마음(心)이다. 진정한 휴식은 나무에게서 비롯된다. 나무도 쉬지 않으면 쉬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 동안거나 하안거와 같은 해거리를 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 몸부림친 나무는 한 해를 걸러 열매 맺기로 결심한다. 연속해서 열매를 맺다가가는 자기 몸에도 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해거리는 나무가 살아남기 위한 비장한 결단이자 몸부림이다.
⑨나무는 모든 사람에게 스승이다.
진정한 스승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가르침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지만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가리킴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시도와 모색 끝에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깨우침이 될 수 있다. 나무는 나무는 고난 극복의 지혜를 온몸으로 알려주되 생색을 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나무 씨앗은 다른 동물들에게 먹혀야 부모 곁을 떠나 멀리 가서 생존할 수 있음을 몸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나무는 먹혀야 먹고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씨앗도 바람에 날리면서 모험을 감행해야 꿈을 펼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미래는 생각지도 못한 타자가 나타나 나와 맺는 관계가 결정한다는 사실은 자연 표류 끝에 깨달은 삶의 교훈이다. 나무줄기는 “줄기가 있어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줄기차게 자라야 슬기롭게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무옹이는 나무의 한이 맺힌 ‘응어리’이자 ‘옹알이’다. 외부의 상처가 안으로 깊어져 생긴 고통의 흔적이자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 몸에 아로새긴 삶의 얼룩이다. 옹이는 아픔을 견뎌내고 피워낸 아름다운 상처다. 나무는 이런 상처가 있어야 비상하는 상상력을 배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무는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배움의 천국이다.
⑩나무는 방랑하는 예술가다.
모든 생명체는 본질보다 존재가 앞선다. 존재로 태어나서 자신의 존재가 지니는 목적과 본질을 나중에 깨닫는다. 나무도 태어나고 싶은 의지가 욕망으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나무는 씨앗이 바람에 날리는 순간 자연 표류를 시작한다. 어디까지 날아날 수 있을지, 어느 곳에 터전을 잡을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다. 그래서 나무는 자연선택이 아니라 자연 표류의 결과다. 이런 생각은 생명체의 탄생과정을 자연 표류의 결과로 분석한 칠레의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앎의 나무》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나무는 환경에 따라 표류하면서 부딪히는 돌발적 변수가 낳은 우연의 산물이다. 나무는 방랑하는 예술가다. 나무는 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부딪치는 마주침으로 생긴 우연한 관계와 자연 표류의 부산물이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명대사,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우연한 상호접속(Serendipitious Interactions)이 만든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다.
나무는 뿌리로 땅(地)의 소리를 듣고, 줄기와 가지로 하늘(天)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깨달은 지혜를 인간에게 전해주며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를 꿈꾸며 살아간다. 나무를 우러러봐야 되는 이유는 가장 낮은 땅에서 씨앗을 뿌리고 가장 높은 하늘을 향해 하루도 쉬지 않고 분투노력하는 치열함 때문이다. 나무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니 나무의 마음을 가슴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려다봐서는 안 되고 오로지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나무를 깔보지 않고 우러러봐야 되는 이유다. 당신은 지금 나무를 우러러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래로 내려다보며 깔보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은 근본을 다지지 않고 날뛰고 널뛰면서 나무만도 못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무를 알기보다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머리로 자연을 이해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소중함을 역설한 레이첼 카슨의 명언이다. 마가지로 나무를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책상에 앉아서 나무에 관한 책을 수십 권 보는 것보다 직접 나가서 나무를 만나 말도 걸고 어루만지면서 나무가 살아온 지난 삶의 여정을 조용 들어보는 게 중요하다.
나무에 관한 기도문
언제나 우리 주변에 계신 나무여!
나무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 주시고
나무에게 배우며 살아가는 길이
생명과 우주의 본질을 만나는 길임을
온몸으로 증거 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변에 계신 나무여!
우리에게 나무로 사색할 여유를 주옵시고
진정한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나무를 통해 성찰하게 해 주심에
눈물겨운 감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무가 나무라지 않으면서 인간이 저지른 죄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인간이 나무에게 남긴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나무가 전해주는 감동과 위대한 지혜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속도와 능률 복음에 왜곡되지 않게 도와주시고
허황된 욕망으로 유혹하는 불행한 미래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자고.
나무의 꿈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이나
명목(名木)이 되는 게 아니라
더불어 숲이 되는 것입니다
- 신영복 -
나무가 살아가는 세계,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무가 나직하게 들려주는
나무와 숲이 만들어가는 지혜의 향연,
나무는 흔들리며 자란다.
흔들려봐야 뒤흔들 수 있다.
‘거목(巨木)’은 흔들리지만
‘고목(古木)’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무가 보내는 긴 침묵과 기도
그리고 지혜의 숲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 ‘나무 생각’ 홈페이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