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개념이 꽂히면 신념의 꽃이 핀다!

당신이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5가지 이유

개념이 꽂히면 신념의 꽃이 핀다!

당신이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5가지 이유    

 

사람은 개념으로 세상의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파악한다. 예를 들면 미늘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은 낚시 바늘에 걸린 고기가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미늘은 “낚시 끝의 안쪽에 있는, 거스러미처럼 되어 고기가 물면 빠지지 않게 만든 작은 갈고리”를 뜻한다. 미늘을 잘 못 알아듣고 마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바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낚시 바늘이 고기를 낚아서 빠져나가게 할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을 이해시키기 어렵다. 내 앞에 사과가 있어도 사과라는 개념을 모르는 사람에게 사과는 그저 빨간색 과일로 보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사과라고 개념으로 눈앞의 사물을 포착하는 순간 사과는 비로소 나에게 인식된 것이다. 이처럼 개념은 인간의 인식 과정을 매개하는 중요한 도구다. 개념이라는 단어의 concept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함께(con) 낚아채다 또는 붙잡다(cept)는 말을 의미한다. 이런 속성을 가진 사물이나 현상은 이런 개념으로 부르자고 약속하면서 해당 공동체는 그 개념으로 소통하면서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개념은 말 그대로 어떤 현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순간 다르게 포착할 가능성을 봉쇄하는 영면성을 지니고 있다. 개념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개념대로 파악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전과 다르게 주어진 현상의 본질이나 의미를 포착할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폐단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근배 교수의 《끌리는 컨셉 만들기》에 보면 컨셉은 무기이며 동시에 족쇄라고 한다. “개념에 붙잡힌 마케터의 생각은 고정관념이 되어 창의성을 제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개념에 사로잡혀선 안 될 때가 있습니다”(222쪽). 우리가 끊임없이 개념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습득하거나 기존 개념을 다시 정의하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려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해야 되는 이유다.    

  


1.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다르게 생각하기 어렵다    

  

“언어와 유리된 사고는 있을 수 없으며, 사고는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언어 사용 과정에서 구체화된다”(358쪽). 사고를 바꾸려면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도 “철학한다는 것은 곧 글쓰기”(141-160쪽)라고 했다. 글쓰기는 글 쓰는 방법을 배우는 테크닉 연마 과정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해서 언어로 문장을 건축하는 사고 과정이다. 글쓰기는 살아가면서 몸으로 느낀 체험과 독서를 통해 습득한 개념의 합작품이다. 다른 개념 또는 기존 개념을 다르게 사용할 경우 이전과 다른 생각을 낳는 문장을 건축할 수 있다. 언어의 차이는 생각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생각의 깊이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동인이다. 풍부한 개념을 갖고 있으면 사고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그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생각의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그 깊이에 상응하는 언어가 없으면 생각은 퍼 올려지지 않는다. 생각의 깊이는 언어의 깊이에 비례한다. 언어 사용이 틀에 박히면 사고도 틀에 박힌다. 왜냐하면 “습관은 새롭게 다가오는 지금을 볼 수 없게 만드는 눈가리개”(259쪽)이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생각의 재료인 언어가 바뀌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몇 가지 개념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면 내 생각도 내가 사용하는 틀에 박힌 개념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생각의 전환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전환에 맞물려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실 자체는 바꿀 수 없다. 사실을 묘사하는 단어를 바꾸는 것이 사실을 다르게 보는 역전승의 핵심(119쪽)”이다. 송숙희 작가에 따르면 부정적인 ‘별거’를 ‘결혼 방학’으로 바꿔보고, ‘동거’를 ‘결혼 인턴’으로, ‘샘플’을 ‘1회용’으로 바꿔서 사용하면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는 생각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특정 개념에는 개념을 만든 사람이나 개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남교사나 남류 작가라는 말은 없어도 여교사라는 말과 여류작가라는 말은 있고, 여간호사라는 말은 없고 남간호사라는 말은 있다. “여고사와 여류문인은 ‘교사는 보통 남자’라는 이데올로기와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사람은 보통 남자’라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교사는 기본적으로 남성이기 때문에 굳이 남성교사를 지칭하는 단어를 만들 필요가 없다. 반면 여성이 교사인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교사의 성별을 표현해야 한다는 언중들의 욕망이 여교사라는 단어를 만들었다”(172쪽). 교사는 남성 직업이고 간호사는 여성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이상 우리는 교사와 간호사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는 셈이다. 모든 개념에는 고정관념이 숨어 있다. 개념이 품고 있는 고정관념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해당 개념으로 새로운 신념을 만들어낼 수 없다. 개념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 품고 있는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신념이 담긴 개념으로 재개념화시키거나 이전과 다른 개념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개념의 재개념화 또는 개념의 창조가 곧 색다른 생각을 잉태하는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2.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사물이나 현상의 미묘한 차이를 간파하기 어렵다      


‘병마개’와 ‘병뚜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주둥이 안으로 들어가 있으면 병마개이고 겉표면만 둘러싸고 있으면 뚜껑이다. 화가 나면 마개 열린다고 하지 않고 뚜껑이 열린다고 하는 이유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 준다(낱말편 1, 2)》는 책에는 이외에도 태어날 때부터 목적과 용도가 정해져 있는 ‘방망이’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엄마가 급하면 아무거나 들고 위협을 가하는 ‘몽둥이’의 차이점 등 일상생활에서 크게 구분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 간의 미묘한 차이점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의미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으면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보고 구분해낼 수 있는 혜안이 생긴다. 정유정과 지승호의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 나오는 행동과 활동의 차이가 바로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인물의 행동과 활동은 다르다. 활동이란 가치의 변화가 거의 없는 움직임이다. 먹거나,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 자전거를 몰고 가다 친구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행동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행동은-그것이 작든 크든-인물이 목적과 의지를 갖고 선택하는 움직임이다”(104쪽). 사람은 활동하다 행동하는 경우도 있고 행동하다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가치중립적인 활동에 비해 가치 지향적인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꾸는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꿈의 길목에서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할 때 사람들은 많은 성취감을 느낀다. 활동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은 인간관계 맺음 방식에도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이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71쪽). 활동하는 사람은 주로 품격으로 접대하는 일을 즐기고 행동하는 사람은 존엄으로 환대하는 관계를 맺어나간다. 접대와 환대의 차이는 접대와 대접의 차이와도 맞닿아 있다. 유영만의 《체인지》에는 그 차이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대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선물을 주지만 접대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뇌물을 준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더없이 즐겁고 기쁘지만, 뇌물을 받은 사람은 참을 수 없는 꺼림칙한 기분에 억눌리기 쉽다”(152쪽).    


 

비슷한 단어에 담긴 의미상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닭고기와 치킨은 각각 동일한 실물을 가리키는 국어와 영어 단어지만 사실은 그 의미상의 차이가 있어서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고유어인 닭고기는 일반적으로 닭의 살코기를 의미하지만 치킨은 닭에 밀가루를 입혀서 굽거나 튀겨서 만든 요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닭백숙의 닭고기는 닭고기이지 치킨이 아니다”(111쪽). 유사 개념 간에 존재하는 의미상의 차이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비슷한 개념이지만 의미상 많은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쓸 경우 잘못된 사유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함으로써 심각한 폐해를 유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서 프랭크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구분한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질환으로 구분되는 몇 가지 범주로 나눈 다음 다른 환자도 그 범주에 집어넣어 일반화시켜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똑같은 병명으로 판정되어 비록 같은 질환의 범주에 포함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질병은 같지 않기 때문에 질환의 범주별 일반화는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돌봄에는 방해가 된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해당 환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느끼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같은 범주로 일반화시켜 같은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의 효율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제고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고유함을 목격하고 차이를 전부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돌봄이다”(82쪽).     



3.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사물을 차원이 다르게 볼 수 없다     


우치다 타츠루와 오오쿠사 미노루의 ‘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이라는 글에 보면 어휘가 늘면 감정이 세밀해지고 표현을 쪼개서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만날 수 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누군가는 아주 구체적으로 정밀묘사를 하지만 누군가는 언어가 빈약해서 표현력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동원할 수 없는 단어가 빈약하니 단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고력도 지극히 빈약하기 짝이 없다. 저자들에 따르면 언어가 풍부해질수록 표현의 해상도가 치밀해진다고 한다. 저자들은 표현의 해상도를 소리의 해상도에 비유한다. “한 건반을 누를 때 손가락이 10 단위의 운동을 하고 있고, 다음 건반을 칠 때는 5 단위의 운동을 하고 있다면 첫 음과 두 번째 음은 운동 단위수가 달라 소리의 해상도도 다릅니다. 거기서 소리의 깊고 얕음에 차이가 납니다. 그러니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순서대로 쳐도 그 안에 삼차원적인 깊이가 생겨납니다. 청중은 소리의 순서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음이 구축하는 깊이나 음과 음이 만나서 어우러지는 중후감을 듣는 것입니다”(89쪽). 소리의 해상도에 차이가 나는 것은 작은 동작을 얼마나 잘게 쪼개서 미묘한 동작과 동작을 절묘하게 연결해내느냐의 차이다. 초보자와 고수를 구분하는 연주의 차이는 바로 소리의 해상도 차이다. 초보자는 건반을 치는 동작 하나밖에 없지만 고수는 건반에 다가가서 접촉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동작 단위가 녹아들어 있고 건반에서 손을 떼고 다른 건반으로 이동하는 매 순간에 혼신의 힘과 에너지를 넣어서 미세한 동작의 연속으로 소리의 중후함과 감동적인 하모니를 연출한다.    

  


소리의 해상도가 소리를 내기까지의 미세한 움직임을 잘게 쪼개서 연속되는 하나의 동작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구현되듯이 언어의 해상도도 마찬가지다. 같은 감정이라고 해도 얼마나 적확한 감정표현을 미세하게 포착해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감정상태 묘사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사용 가능한 언어가 늘어난다는 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 변화나 표정과 행동변화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는 무기를 지니게 되었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표현이 단순해진다는 의미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부실해진다는 의미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해진다는 의미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그저 “재미있다”라는 말 이외에 특별히 다르게 묘사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사람과 그 영화를 한 사회의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사건과 연결시켜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다시 배치해놓고 깊은 생각을 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쪼개서 보는 사람과는 사유의 구조가 다를 것이다. 사금을 고르듯 우리말을 고르고 골라 쓰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 이태준에 따르면 “물이 퍽 맑다”라는 것과? “어찌 맑은 지 돌 틈에 엎드린 고기들의 숨 쉬는 것까지 보인다”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한 사람은 얼른 바쁘게 보았고, 한 사람은 오래 고요하게 보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은 얼른 대충 보고 한 순간을 하나의 동작으로 표현했고, 한 사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한 순간을 수많은 작은 순간으로 쪼개서 표현의 해상도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 표현의 해상도가 달라지면 사물을 차원이 다르게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이 생기기 시작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PGnpHPzcho&t=83s


4.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어울리기 어렵다     


개념적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예 특정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 대화는 깊이를 더해갈 수 없다. 겉으로 도는 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다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다.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 전달되는 개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거나 유사 개념 간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할 때 오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네게 꽂히고, 너는 내게 꽃이다”라는 말이 있다. 꽂혔다는 말은 마음을 파고들어 심장을 움직였다는 말이다. 단순히 이해가 되었다기보다 와 닿았다는 말이다. 모호한 개념으로 상대방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보다 짧지만 강력한 사운드 비트가 있는 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대화가 이루어질 때 공동체는 튼실한 신뢰로 강한 연대망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가 구사되면서 공동체 내에서의 인간관계도 무너지고 있다. “동행의 언어는 사라지고 동원의 언어만 남았다”(275쪽). 여기서 말하는 동행의 언어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주고받는 언어다. 반면에 동원의 언어는 상대보다 나를 내세우고,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건드려 상처를 내려는 언어다. 동원의 언어는 같은 공동체 사람들이 보다 쉽게 즉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극적이지만 동행의 언어를 타자를 따뜻하게 품기 위한 정감의 언어다. 문제는 동행의 언어보다 동원의 언어가 자주 구사되면서 공동체는 붕괴되고 인간관계는 피폐해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도 자기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은어, 약어, 속어, 신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어른들이 못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다. 신어와 유행어도 신세대들은 끊임없이 만들어내서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유롭게 소통한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른들은 아이들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공감되는 언어적 소통도 거의 차단되어가는 추세다. 어른과 동행하려는 의도보다 자기들끼리의 폐쇄적 연대망을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체불명의 동원의 언어만 동원된다.      



“언어는 세계를 짓는 도구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듣고 그 말에 응답하면서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 말을 통해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그 안에 나와 그가 머무른다. 이것을 공동의 집, 세계라고 한다. 언어는 바로 이 공동의 집인 세계를 짓는 도구다”(13쪽). 언어는 공동체가 약속한 규칙대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빨간 불은 교통 신호등에서 정지를 의미한다. 왜 빨간 불이 정지를 의미하는지는 이유가 없다. 그렇게 사용하기로 약속한 언어적 규칙이다. 특정 언어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언어적 규정을 모르면 해당 공동체에서 소통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해당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어렵다. 사회적 약속으로 만들어진 규칙에 따라 언어적 의미를 공유하면서 공동체가 더욱 결속력을 갖춰 나간다. 언어적 약속과 규칙에 반기를 들거나 주류 담론과는 다른 입장에서 기존 언어를 새롭게 규정할 경우 한 사람은 해당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약속해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의미 변화가 일어난 특정한 언어 표현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한 사회적 공동체는 양분돼서 심각한 이데올로기 싸움을 벌일 수 있다.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라는 부제목이 붙은 신지영의 《언어의 줄다리기》에 따르면 한 사회에 주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특정 언어 표현이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 의해 의미 변경을 요구하는 비판과 저항이 일어날 경우 언어 줄다리기는 시작된다고 한다. 모든 단어나 개념에는 그것을 그렇게 쓰기로 합의한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나 권력이 숨겨져 있다. 모든 단어는 권력이다. 단어를 이해하는 노력은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5.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어제와 다른 개념을 만나지 않으면 오늘을 살고 미래를 지향하고 있어도 여전히 나의 세계는 과거의 개념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의 세계로 떠나는 모험을 거듭하지 않는 한 나는 언제나 어제의 개념으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관념적으로 꿈꾸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역사는 내가 습득한 개념의 역사다. 교육학을 기반으로 책을 읽으면서 교육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교수-학습, 교육, 성장과 발달, 변화와 혁신, 인지와 행동, 자아발달과 자기 계발 등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교육학적 개념에 익숙해지다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낯선 개념에 한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개념 모험을 여러 분야로 넘나들었다. 같은 교육적 가르침과 교훈도 어떤 개념적 틀로 그 세계를 조명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이 성립될 수 있음을 예를 들면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 배웠다. "문제는 스스로 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그들이 빠져 있던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 늪"(194쪽)이었다.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가르침의 역설을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라는 개념에서 배웠다. 



한편 철학자마다 고유하게 생각하고 만들어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건축해가는 사유방식을 보면서 새로운 개념 습득 과정으로의 무한 탐험을 계속했다. 앎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철학과 패러다임, 그리고 인식론과 방법론을 공부하면서 참된 앎에 이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유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참다운 앎에 이르는 미완성의 길을 엿보기도 했다. 사회학적 상상력으로 학문 세계를 파헤친 C. W.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과 취미는 계급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면서 습관이 구조화되는 메커니즘을 밝혀냈던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은 색다른 인식의 세계로 나를 끌어올리는 개념 탐험이었다.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일본 철도(JR: Japan Railroad) 카피 중의 하나다. 모험이야말로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가장 확실한 보험이다. 그래서 일본 철도는 어른들에게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추천하는 것이다. 그것도 철도를 타고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언어도 마찬가지다. 개념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부족한 개념을 보충하는 방법은 개념의 향연이 이루어지는 각종 문학작품이나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도 이제껏 읽어보지 못한 개념의 세계로 진입하지 않으면 늘 익숙한 개념의 세계에 안주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철학자 들뢰즈는 “개념은 인격”이라고 했다. 내가 습득한 개념의 품격이 나의 인격을 좌우한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의 세계를 보면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한계를 알 수 있다. 그동안 나에게 우연히 꽂혔던 수많은 개념은 성숙과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념의 꽃으로 피어났다. 사실 김춘수의 ‘꽃’도 본래는 꽃이 아니었다. 들판에 피어 있는 이름 없는 한 식물의 움직임을 포착한 시인이 이름, 즉 개념을 부여하면서 나에게 다가와 의미심장한 꽃이 된 것이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수많은 꽃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꽃의 이름(개념부여)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그 꽃은 새로운 의미를 갖고 나에게 특별한 꽃으로 바뀐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개념도 내가 의도적으로 포착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부표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그런 관념에 나의 신념을 추가하면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개념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골치 아픈 인생, 운치 있게 바꿔주는 마법의 가치사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