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세상을 바꾸는 힘

부쿤 / 2022 소소기록 희망의숲 청년 비건의 시선

   나는 비건지향을 하고 있는 브랜딩, 패키지 디자이너이다. 치밀하게 계획되고 설계된 디자인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고 배웠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과장 직급이 되기까지의 경험에서 느낀 디자인이란, 의뢰사가 요구하는 퀘스트에 맞춰 심미적 경향에 따른 시각 이미지를 창출해 매력적인 언어로 의뢰인을 설득하는 일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대개 의뢰인에게 디자인은 ‘이 물건을 사면 당신의 삶은 더 풍족하고 만족스러워질 것’이라고 대중을 현혹시켜 과잉 소비를 부추기는 수단이다. 그렇게 보면 ‘디자인에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바꾸든 간에.


   다양한 사용자를 수용하는 유니버설 디자인과 같이 사회를 더 좋게 바꿔나가는 디자인도 물론 존재한다지만, 대중 디자인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과잉 생산, 과잉 소비와 땔 수 없는 관계인 건 부정할 수 없다.


   기업은 원료, 생태계 등 공동체적 자원을 탈취하거나 이용해 인류에게 필요도 없는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 단가를 낮추고, 또 이를 최대한 팔아야 수지가 맞다. 그 과잉 생산된 상품의 시장을 형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디자인’이다. ‘브랜딩 디자인’이라는 설계된 이미지 수식 과정을 통해, 물질이 수행하는 기능적 가치를 넘어 ‘소유’ 행위 자체를 통해 얻게 되는 심리적 가치를 부여하는 일. 의뢰받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그린워싱이지 않나 생각이 드는 작업들을 접하게 된다. 대체로 그런 요구를 하는 측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아 보인다. 사회적 인식 변화에 발맞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일환으로, 환경적으로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수준이 미미함에도 브랜드 이미지를 좋게 보이기 위해 홍보하고 디자인하길 요구한다.


   사례*를 들어 보자면, ‘지속가능성’을 키워드로 한 프로젝트 중에 플라스틱으로 판매되던 기존 제품의 일부를 실리콘으로 교체해 새롭게 출시하는 제품군의 브랜딩과 패키지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고 널리 알려진 실리콘으로 교체하는 것이 언뜻 듣기엔 친환경적인 시도라 생각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실리콘 소재 자체의 실질적인 지속가능성을 차치하더라도, 패키지에 친환경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지속가능성’, ‘eco’, ‘nature’ 등의 문구를 넣고 자연 느낌을 주는 잎사귀, 나무 일러스트, 손으로 쓴 듯한 타이포그래피를 배치했다. 재생용지에는 원하는 색상 및 인쇄 품질 구현이 어려워, 결국엔 가공이 많이 된 백색 용지에 친환경적인 느낌을 주는 크라프트 패턴을 인쇄하는 주객전도까지 행해졌다. 이목을 끌고 제품을 소유하고 싶게 만들려면 일단 예뻐야 하니까. “일단 예뻐야 팔려.”라는 말은 디자이너라면 항상 듣는 말일 거다. 나를 포함해,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제품은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 현저히 떨어지는 사용감을 무시하고 개발했기에 출시된 후 결국엔 시장에서 외면받았다. 그에 더해 기존 제품은 분리배출이 비교적 쉽게 가능했지만, 새 제품은 재활용이 불가능해 통째로 일반쓰레기로 배출해야 했기에 결과적으로 쓰레기 양까지 느는 셈이었다.


   환경 인식이 높아진 소비자가 불필요한 소비를 마음 편히 지속할 수 있도록 발 빠르게 친환경을 표방한 새로운 제품군을 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겉핥기식 친환경 제품의 박스에 ‘지속가능성’, ‘eco’ 등의 문구를 박아 넣는 게 과연 기후위기의 대응책으로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까. 의뢰받은 일의 그린워싱스러운 과정에 흐린 눈을 뜨고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게 나의 일 중 하나이다.


   이게 싫어 사회적 기업이나, 적어도 채식과 관련된 사업군 조직으로 이직을 해야 하나?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패키지를 개발할 수 있는 신소재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등 다양한 방향을 고려해봤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남아있는 이유는 사실 지금 하는 일이 재밌기 때문이다. 짧게는 1개월에서 8개월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평균 2개월이면 한 프로젝트가 마무리된다. 보통 2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니 업무 전환도 잦고, 진행 속도도 빠르다.


   내가 재밌게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하나는 연례행사를 위한 에디션 패키지디자인이였다. ‘한국에서 자란 농산물을 현대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미학을 담는다.’라는 큰 방향이 퀘스트로 주어졌다. 현대적임과 동시에 전통적인 미학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영감을 받은 것은 한국 현대 공예 작품들이었다. 텍스쳐가 도드라지는 삼베를 배접한 쟁반. 모나지 않게 정제된 타원 형태의 단순한 식기. 돌의 질감에 금분으로 포인트를 준 문진.


   작업에 돌입했다. 정원, 타원 등 군더더기 없는 기본 도형으로 농산물을 표현하고, 농산물에서 추출한 색상의 색감을 조정해 종이, 나무, 돌 등의 질감을 채웠다. 그 도형들을 수차례 배치해보고 그 중에 가장 감각적인 비율로 세트를 구성했다. 공예적 맛을 살리기 위해 포근한 질감이 느껴지는 평량이 높은 종이를 선택하고, 금박 후가공도 더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작업들이 나왔다. 시안들을 늘어놓고 총평을 하는데 보고 또 봐도 좋았다. 민망스럽지만 도취란 작업자의 덕목이 아닐까. 의뢰사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모든 요구사항을 충족시켰으며,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평가, 뿌듯했다.


   나는 짧은 기간으로 프로젝트가 교체되는 업무 흐름이 좋고, 의뢰받은 일의 요구사항 안에서 나름의 창의성을 발휘해 다양한 접근으로 시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시쳇말로 ‘예쁜 쓰레기’를 만들며 환경에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다.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 내가 뿌듯하게 내놓은 작업물도 잘 팔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게 나의 지향점과 충돌하는 딜레마이다.


   이쯤 되면 ‘비거니즘을 지향하고 있으니, 내 몫의 사회적 책임은 어느 정도 희석이 되지 않았나.’하는 안온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나를 잠식한다. ‘당장에 내가 업을 바꾼다고 획기적인 효과가 있거나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자생할 돈도 벌고 재밌기까지 한 업을 포기하는 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도덕적 결백성에 대한 갈망이 아닌가?’하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사실 이같은 고민의 굴레는 비단 디자이너만 느끼는 아닐 것이다. 경쟁사회를 심화하는 대한민국 사교육 산업에 일조하고 싶지 않은 과외선생님, 노동 착취를 바탕으로 구워진 빵을 파는 아르바이트생, 동물실험을 한 화장품의 기능에 대해 자세히 안내하고 구매를 유도하는 매장 직원 등 나의 주위에 비슷한 고민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다. 업의 형태가 달라도 우리의 지향점은 한 곳으로 모인다. 생명과 공동체적 가치 위에 개인의 이윤을 두는, 허물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완고한 육식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흠집 내기.


   소위 학벌주의의 중심 학군에 위치한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친구는 노트와 노트북에 잘 보이게 ‘Vegan, Milk is not for human’, ‘동물해방’과 같은 슬로건 스티커를 잔뜩 붙이고 다닌다. 학생들이 무슨 뜻인지 물어오면 우유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 인간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친절히 설명해준다 한다. 또 화장품 판매업을 하는 친구는 의도적으로 비건인증 여부를 자주 안내해 비건 제품에 대한 인식도를 높인다고 한다. 작은 의도가 쌓여 흠집 내기.


   업에 소명을 더해 스스로를 고문하지 말라고 한다. 당장의 불일치에서 벗어나 업을 바꾸는 선택을 하긴 어렵다. 시스템의 내부자의 위치에서 자리를 보전하는 선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우선하는 의견을 내고, 크고 작은 결정에 개입하는 것이 모두가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 이 글에 소개된 사례는 글쓴이의 자리보전을 위해,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며 각색이 이뤄졌습니다.


-


부쿤


모두가 함께하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마음이 주는 힘을 믿는 사람.

작가의 이전글 이름 따라 마음 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