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열 / 반려종의 시선 1장.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결국 나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지낼 곳이 없었다. 부모의 집이 바뀔리 없었다. 식구가 늘어날 일도 없어 내 방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시 돌아온 내 방은 큰 창문이 있는 환한 방이었다. 그렇지만 방은 차가웠다. 창밖엔 십자가가 있었다. 집 맞은편 교회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4년간 비웠던 방은 창고처럼 쓰이고 있었고, 내가 중학생 때부터 쓰던 책상만 그대로 있었다. 오래된 낮은 책상이 어딘가 끈적거리고 기분 나빠서, 돌아오자마자 버렸다. 방에는 다른 사람이 쓰던 물건들이 가득했다. 왜 내 방에 물건을 버려두는지 의아했다. 집은 넷이 살기에 충분했다. 모두 각자의 방도 있었다. 그런데도 왜 형의 악기가 내 방에 놓여 있는지. 나는 쌓여있는 그의 악기를 보면서 그가 정말로 무책임하다고 느꼈다. 방 절반이 가족들의 짐으로 가득 찼지만 방은 파주에서 지내던 방보단 훨씬 넓었다. 그러나 거슬렸다. 결국 어디에도 나를 위한 공간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생각하기가 싫었다.
2017년 겨울부터 2023년 겨울까지 나는 파주에 있었다. 파주에서 처음 마주한 계절은 겨울이었다. 겨울의 파주는 막막하고 아득했다. 안개가 자욱했다. 습지는 꽁꽁 얼어 붙어있었다. 언젠가 물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었는데, 그게 축축한 습지일 줄은 몰랐다. 꾸역꾸역 살았다. 다른 학생들은 어딘가 반짝였고, 결국 뭔가 해냈다. 하지만 나는 그냥 꾸역꾸역 시간을 보냈다. 내가 사는 곳을 부모님은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게 나는 괜히 분했다.
새로 간 학교에는 하얀 진돗개가 산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학교에 오니 개가 없었다. 그 사이 가족이 생겼다고 했다. 개에 관해서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볼 때 조금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동물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디자인 학교 학생들은 철학과 학생들보다 말이 많았다. 유난스러운 학생들도 많았는데, 종종 본인이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채식을 한다나 뭐라나 그런 이야기도 자꾸 해서 신기했다. 종종 유난스럽게 느껴졌지만, 어딘가 재밌어 보였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보여서 흥미로웠다. 가끔 참 힘들어 보였다. 매번 크게 어려운 요구를 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정말 힘들어하는 것 같았고, 자주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도왔다.
파주에서 처음 살던 집은 고시원이었다. 그런대로 깨끗한 고시원이었다. 고시원 주인은 고시원이라는 말을 안 쓰려고 무척 애를 썼다. 미니 오피스텔이라고 불렀던가, 줄여서 미니텔이라고 불렀나. “고시원 얼마에요?” 하고 물었는데 “고시원 아니고 미니텔입니다”라며 주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처음 살았던 집은 그러니까…. 어딘가 불편했다. 상상하던 생활과는 많이 달랐다. 시간이 자꾸만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기분이었다. 시간과 체력이 남아돌 줄 알았다. 자꾸만 수업 시간에 늦게 되고, 어딘가 계속 피곤했다. 집에서 빠져 나왔다는 안도감이 들긴 했지만, 공간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혼자 울 수는 있었지만, 자위를 하기엔 불편했다. 결국 4개월을 그 집에서 지내고 다른 집으로 옮겼다.
파주 출판 단지에서 자취를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출판사 건물에서 살거나 혹은 출판 단지에서 조금 떨어진 원룸촌에서 살았다. 몇몇 출판사 건물 1층에는 카페가 있었고, 3층에는 의외로 월세방이 있었다. 주거용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신축이었고, 대부분 깨끗했다. 나는 빌라나 아파트에서 살던 기억이 전부라, 출판사 건물에 방이 있는 게 썩 신기했다. 내가 살던 집은 단지와 원룸촌 사이에 있었다. 근처에 사는 학생들은 없었고, 집 주인 어른도 출판단지에 학교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겨우 얻은 집은 반지하에 있었다. 집은 늘 습했다. 꿉꿉한 냄새가 났다.
동네엔 개를 키우는 집들도 많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모퉁이에 개가 한 마리 묶여 있었다. 이름은 몰랐다. 나는 그 개를 싫어했다. 밤이고 낮이고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서 짖는 까닭에 놀라고, 무서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가다 넘어질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 늦은 밤 괜히 성도 내보고, 나름대로 위협도 해봤다. 위협같지도 않은 위협이라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쩐지 나는 개가 조금 미웠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개라고 단정 지었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조금 안쓰러웠다. 그는 사람이 두려웠던 걸까.
개의 털은 검고 몸에 흰 얼룩이 있었다. 흰 얼룩은 대부분 발 주변에 붙어 있었다. 흰 양말을 신은 듯한 모습이었다. 몸집은 크지 않았다. 진돗개보다는 작고 시츄 같은 개보단 컸다. 어느 정도 중대형견으로 분류될 만했다. 개는 꼬리가 예뻤다. 까만 강아지풀 같은 꼬리가 있었다. 털색은 검정보단 어두운 고동색에 가까웠다. 주둥이는 짧지 않고 길었고, 귀는 뾰족했다. 개는 트럭 뒤에서, 승합차 밑에서 주로 잠을 잤다. 늘 더러웠다.
하지만 개는 의외의 곳에서 보살핌을 받았다. 늘 신경질적으로 짖던 개가 어느 순간부터 잘 짖지 않았다. 나는 점심 때 즈음 그 길을 지나는 출판사 직원이 검은 개에게 간식을 먹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더러운 발을 껑충 들고 안기는 모습이 신기했다. 개는 결국 사람에게 기댔다. ‘저런 개도 예뻐하는 사람이 있구나. 저 개는 저렇게 살면서도 사람을 반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출판사 사람들이 양말이라고 개를 부르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양말이는 사람에게 보살핌을 받을수록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털도 반질반질 윤이 났다. 출판사 사람들은 짧은 점심 시간을 쪼개서 양말이를 산책시켰다. 어느새부터 양말이는 늦은 밤에 나를 마주쳐도 갑자기 짖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개를 어떻게 부르는지 기억해 뒀다가, 나도 그 이름을 따라서 불러주었다. 그리고 양말이에겐 다른 이름도 있었을 것이다. 점점 그를 돌보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므로.
언제부터인가 양말이 옆에 아주 작은 강아지가 한 마리 더 생겼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동그란 눈코입이 달린 작은 먼지떨이 같은 강아지였다. 양말이의 새끼인 듯 했다. 작은 솜뭉치가 생긴 후로부터 양말이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더 커졌다.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작고 까만 먼지떨이 같은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느 작은 강아지가 그렇듯, 조그만 솜뭉치는 사람을 무서워할 줄도 몰랐다. 작은 먼지떨이가 아장아장 기어 오면 사람들은 귀여워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이 과정들이 기쁘지만, 어색했다. 사람이 개를 보살피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언제까지 돌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만 봤다. 양말이 옆, 작은 강아지가 생기고 나서, 아슬아슬하게 묶여 있던 양말이에게도 그럴듯한 집이 생겼다. 이제야 비를 피할 지붕도 생겼다. 결국 나도 양말이를 돕기로 했다. 시작하는 일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먼저 돌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사람들을 도우면 되지 싶었다. 나는 내가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출판사 사람들이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도 양말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양말이를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끌어들일 꿍꿍이도 있었다. 나는 학교 사람들에게 이런 개를 출판사 사람들이 돕고 있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는데 같이 도왔으면 좋겠다고 주변에 계속 알렸다. 모두가 선뜻 도움을 주겠거니 했는데 반응은 제각기 달랐다. “나도 한때는 모르는 개를 도왔었는데 말이지, 한계가 있더라. 어쩔 수 없더라.”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미지근해서 놀랐다.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할 일은 아니었다.
양말이를 산책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래 묶여있던 개에게 산책이 너무 큰 자극이었는지 개는 통 말을 듣지 않았다. 목줄은 항상 팽팽했고, 양말이는 어디로 튈지 몰랐다. “안돼!”라고 수없이 소리쳤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양말이에게 익숙한 산책 코스가 어딘지도 몰라서 우왕좌왕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산책을 마쳤다. 대변을 보게끔 도와주고, 물과 간식도 먹였다. 그날이 혼자 개를 산책시켰던 첫날이었다. 그날 밤, 나는 개를 묶어놓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도 묻지 않았고, 철장에 들어가서 뭘 하느냐 묻지도 않았다. 양말이에게도 별로 아는 체를 안했다. 그리고 다음날 개가 사라졌다.
다행히도 먼지떨이는 그럭저럭 커서, 입양을 전제로 임시보호를 나간 상태였다. 학교 친구들에게 양말이가 없어진 이야기를 했더니, 대부분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더 이상했다. 내가 수고한 일이 있나 싶었다. 수고한 것도 없는데. 양말이는 없어졌고, 나는 기껏해야 하루 산책을 시킨 정도인데, 왜 친구들은 개를 걱정해주지 않고,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걸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슬퍼 보였을까, 아니 나는 그렇게 슬픈 마음은 들지 않았는데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양말이의 행방이었다. 소문으로는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조금씩 양말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를 돕던 이들이 주로 A 출판사의 직원이었다는 것, 이미 양말이를 그곳에 묶어 놓았던 이들과 출판사 사람들이 꽤나 많이 부딪혔다는 것, 주말에 찾아와 양말이를 씻기기도 했다는 것. 입양 문제, 돈 이야기가 오가며 양말이를 입양하고 싶던 분들이 꽤 큰 돈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결국 양말이를 묶어놓은 이들이 양말이의 소유권을 끝끝내 주장했고, 결국 양말이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결말. 제법 뻔한 이야기였다. 이미 어디선가 일어난 일, 그리고 어디선가 계속될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신경 쓰였다. 내가 처음 개를 산책시켰던 날, 양말이를 묶어서 ‘키우던’ 그들과 마주쳤던 날, 나는 견사에서 쪼그려 앉아 흥분한 개를 한참 동안 달래고 있었는데, 줄을 어디에 묶으면 좋은가 고리를 찾고 있었는데, 내가 그들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때 그들이 어딘가 불편한 기분을 느껴서, 양말이를 치워버린 거라면, 내게도 책임이 있었다.
나는 또 휘말리고 말았다. 책임 지지도 못할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이 문제에 부딪혔지만, 나는 망설이다 결국 개가 사라지는 모습만 목격하고 만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게 신경 쓰였던 많은 일들이 이런 식으로 끝났다. 문제에 부딪히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다가 누군가 사라지는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만 보고 말았다. 매번 문제를 외면하지도 못했고, 문제에 뛰어들지도 못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양말이가 있던 자리에 다른 개가 묶여 있었다.
새로 나타난 개는 양말이와 제법 닮아 있었다. 알고 보니 양말이의 새끼가 맞았다. 양말이는 털이 새카만데, 이 녀석은 털이 더 밝았다. 아주 어두운 갈색의 개였다. 눈빛이 양말이처럼 맑지 않았다. 개는 털색이 나무뿌리 같아서, 다 같이 뿌리라고 불렀다. 나는 이번엔 뿌리를 빨리 돕기로 마음 먹었다. 정말 다행히도 함께 할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았다. 호시탐탐 개를 도왔다.
뿌리가 사는 곳을 자세히 보니 엉망이었다. 대소변을 치우는 것은 물론 밥도 물도 제때 주지 않았다. 밥그릇은 늘 비어있기 일쑤고, 비가 오면 사료는 퉁퉁 불었다. 사료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출판사 직원들은 스스로 돈을 모아서 샀다. 뿌리가 묶인 자리도 어딘가 불안했다. 뿌리는 비닐하우스 앞에 묶여있었는데, 그 비닐하우스에는 오가는 사람이나 물건이 없었다. 뿌리는 길에 바짝 묶여있었는데, 차 한 대가 다닐 폭의 좁은 비포장도로였고, 차들이 오갈 때마다 흙먼지가 잔뜩 날렸다.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고 어느 여름, 양말이가 막 새끼를 낳았던 계절이지 않았을까. 뿌리는 임신했다. 건강한 새끼를 네 마리 낳았다. 다시 무엇인가 또 똑같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의 결말부터 말하자면, 같은 일이 반복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다섯 동물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 줄 인간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마침내 뿌리를 포함한 다섯 마리의 개는 모두 새집을 찾았다. 아마 지금은 잘 지내리라 믿는다. 새로운 가족과 함께, 새로운 집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에게 새로운 기억이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오랜 기억에 내가 없었으면 한다. 더럽고 축축한 바닥, 더운 공기, 시끄러운 소음, 우글거리는 벌레가 그들의 기억에 없었으면 한다. 양말이와 뿌리가 묶여있던, 뿌리의 새끼들이 잠시 지냈던 파주의 비닐하우스도 어느샌가 무너지고 말았다. 모두가 흩어졌다. 결국은 아무도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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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열
여전히 맴도는 사람,
그래도 이런 일이 무엇인가의 과정이길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