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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쑤 Nov 03. 2015

화분


1

 당신의 어깨를 보고있노라면, 갓 세상에 고개를 내민 새싹이 된 것 같았다. 그늘의 아래에서 발버둥칠 때 햇빛으로 인도했고, 숨가쁜 레이스에 지쳐 걸음이 느려질 때 목을 적셔주었다. 언제나 올곧게 키우기위해 때로는 강하게 날 동여맸고, 매서운 풍파에 견딜 수 있도록 날 내버려두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났고 어느덧 더이상 화분에서 기를 수 없을 만큼 커버렸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 던져졌다.


2

 노력하지 않더라도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을 행운이라고 하고, 노력을 하고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 차라리 행운을 찾기위해 세잎클로버를 짓밟는 적극적인 행동이라도 했었어야 했던걸까.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내 어깨를 톡톡 다독여줄 것만 같았던 아버지는 나보다 먼저 눈을 감았다. 똑똑, 내 방문을 두드리던 노크소리는 뚝뚝, 이제 왜 내 눈에서 나는걸까. 정상은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데 산소는 부족해지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신은 왜 나에게서 지팡이를 앗아갔을까. 원망도 자책도 이제는 소용없지만 여전히 쳇바퀴 돌아가듯 그렇게 머물러있었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는게 아닌, 그저 하루가 지난 또 하루였고 그렇게 그 하루에 고여있을 수 밖에 없었다. 세켤레가 놓여있던 현관에는 이제 단 두켤레만이 우두커니 날 기다린다. 자고나면 돌아오는 그 날은 조금은 다를까,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 최면을 걸듯 잠을 청해본다.


3

 엇나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표 내 장래희망란에 쓰여있던 우주비행사라는 삐뚤삐뚤한 글씨가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바쁜 아르바이트 생으로 전락한 내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시간이 흐른다는건 결국 수많은 물감이 뿌려진 추억들을 연필 하나만으로 어둡게 지우며 새롭게 그려나가고 있는게 아닐까. 문득 그 사이사이 아직 빛나는 아름다운 색을 볼 수 있기에 회상이라는걸 할 수 있는건 아닐까. 그렇다면 난 이미 시커멓게 멍들어버린 종이 한 장을 미련으로 잡아두는 것이리라. 남아있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집을 나왔고, 시급 몇 천원을 위해 로보트처럼 일을 했다. 친구는 내 침대였고, 내 방이었으며, 내 공간에 머물러 있는 한숨이었다. 다분히 통장의 잔고는 늘어갔고, 월급날 집에 사들고 간 통닭은 어머니에게 작은 웃음과 작은 슬픔을 선물했다. 이게 내 삶의 전부였다.


4

 인생은 토너먼트와 같았다. 한 사람을 이기고 올라가면 또 다른 사람과 마주하게 된다. 몇 강으로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대회의 우승자는 도대체 누가될까. 음, 마지막 결승전의 상대는 신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죽음일까.


5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각종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경력과 부지런하지도 게으르지도 않는 중도의 성격으로 어느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되었다. 한달쯤 지났을때였을까 어머니를 초대했다. 정성껏 차려진 음식 앞에서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셨다. 이 못나고 한심한 아들놈때문일까, 내가 사가던 아니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늘 사오시던 통닭이 생각나서일까, 그 날 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주름이 깊게 파인 그 손을 꼭 쥐어보았다.


6

 나는 섬이다. 갈라지는 파도소리뿐인 공간속에 저 멀리 다가오는 작은 새 한마리는 반갑기 그지없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고 나는 맞잡는다. 우리는 쏟아지는 석양을 앞에두고 해변가에 나란히 앉는다. 지긋지긋한 고독의 침묵보다 함께하는 고뇌의 침묵이 더 아름답다고 착각한다. 바닷물이 모래 사이에 스며드는 소리와 하루의 태양이 저물어가는 순간은 누구보다 아껴주는 우리의 감정을 표출했다. 자취를 감춘 노란 해를 등 뒤로하고, 나는 이내 다시 혼자이고 싶어진다. 놓지않을 것 같던 당신의 손을 외면했고 내 눈의 초점은 흐려졌다. 결국 그는 떠났고 아쉬운 내 마음을 위로한다. 그래, 이게 편해. 나는 섬이다.


7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한산한 그 날의 밤 9시. 데면데면하는 한 여성이 들어왔다. 오늘도 다름없이 늘 앉던 그 자리를 찾아간다. 저기요. 주문이 끝나면 양 귀에 이어폰을 꼽으며 단절을 즐긴다. 자연스레 턱을 괴고, 발을 탁탁. 조금은 위로 묶은 머리와 하얀 셔츠, 조금은 찢어진 청바지, 거추장스럽게 꾸미지 않은 모습이 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항상 같은 시간, 항상 같은 자리, 항상 혼자. 그녀도 섬일까.


8

 항상 같은 시간에 찾아오는 그녀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수수한 그 매력에 아련하게 다가왔다. 뜨거운 커피 한잔이 다 식어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것 같았다, 눈을 보면서. 세상에 던져진 그 순간에 깨져버린 화분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내 작은 화분 하나를 샀다. 내 마음 한켠에 두고 작은 씨앗 하나를 꾹 눌러심었다. 이미 손님들은 없고 싸구려 와인을 홀짝거리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9

 식물은 애지중지한다고 해서 잘 자라는게 아니다. 가끔은 무심하게 대해주고, 죽은 잔가지는 무정하지만 확고하게 잘라내야한다. 그건 비정이 아닌, 사랑의 다른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 그렇게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다. 꽃잎이 다 뜯겨나가고 줄기가 휘는 시련의 순간은 많았지만, 뿌리는 얇고 깊게 박혀있었고 버텨냈다. 축복을 받았다고는 생각치 않았지만 예전과는 다른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꽃에게 벌과 나비라는 매개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작은 연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검은 하늘과 투명한 바다가 머무는 그 곳, 그 곳에서 내가 그녀에게 선물해준 작은 반지는 네번째 손가락에서 만개했다.


10

 행복했지만 꼭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힘든 시기들은 나를 덮쳤고, 그녀의 품에서 나는 눈물을 가슴에 머금었다. 이를 악물고 참아보려해도 한 없이 약해지는 이 마음은 그 누구도 모르리라. 두 아이가 생겼고 두 켤레뿐이었던 현관에 이제는 네 켤레의 신발이 놓여있다. 어느덧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었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좋은 일 이었다. 아마 유일한 즐거운이 아니었을까. 허나 책임이라는 두 글자는 나를 끊임없이 짓눌렀고 부담에서 헤어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삭막한 세상속에서 입력이 되어있는대로 움직이고 그 대가로 그저 몇 푼 벌어가는 기계가 되어있을 뿐이었다.


11

 천둥이 치는 비 오는 밤, 나는 땅에 다리를 박고 서 있었다. 매서운 바람에 내 몸은 요동쳤고, 중심을 잡기위해 이를 악물고 발을 땅에 더 깊숙하게 박았다. 요령따위는 없었다. 단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이 풍파에서 견뎌내기 위해서. 이 밤은 무척이나 길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계속 찾아왔다. 땅에 박힌 내 발 아니 내 자존심, 아니 내 삶을 그만두고 싶어지기도 했다. 무엇을 위해 나는 이토록 살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슬픔을 토해내지 못하고 왜 견뎌내야만 하는가. 좌절의 기로에서 있는 힘껏 발을 더 깊숙하게 파묻었다.


12

 동이 틀 무렵이 되어 비와 바람이 그쳤다. 버텨냈다는 희열은 없었다. 단지 이렇게까지 해야했나 후회했고, 지칠대로 지쳐버린 내 몸은 걸레조각이 된 마냥 힘이 없었다. 내 몸에 이슬이 맺힐 무렵,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고, 화분에 옮겨졌다. 아늑했다, 당신의 품은. 세상을 알았다, 당신이 내몰아졌을 저 밖을. 깨달았다, 당신은 신보다도 위대하고 누구보다 크다는 것을. 당신이 겪던 그 세상에 결국 나도 던져졌지만, 당신이라는 화분안에서 나는 그저 작은 새싹이고 싶고 당신을 위해 작은 꽃을 피우고 싶다. 당신이 주던 아늑함을 이제는 느낄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느꼈던 그 세상을.


 그립다. 당신의 화분이.





글을 잘 쓰고싶은 작은 청년.

keeep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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