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보름간 배가 아팠다. 명치 부근이 살살 아프기도 하지만, 피로감과 무기력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처음 겪는 통증이라, 이렇게 오랜 기간 앓는 것도 처음이라, 몸의 통증은 마음의 통증으로도 이어졌다.
가장 가까운 이의 생사의 기로를 줄곧 마주했으면서도, 죽음 자체를 직시해보지 않았던 내 게으른 인식을 꾸짖는 나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음을 늘 호명하고 있음에도 죽어가는 순간 자체는 떠올려보지 않은 게으른 사유를 꾸짖는 나날이었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고통 속에서 그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어떻게 견뎠을까. 나는 언제까지 아파야 할까.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이 아픔은 죽음을 떠올리게 하여 더욱 괴로웠다.
그러던 중 스물 아홉 번째 생일을 맞았다. 이 아픔이 고독의 흔적이었기에(혼자 지내본 적 없던 내가 홀로 됨을 못 견디고 술에 의존함과 동시에 지독한 다이어트를 병행해왔던 터), 고독한 생일이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하나 둘 도착하는 카카오톡 메시지들에 눈물은 솟구치고야 말았다. 형식적인 인사치레부터 생각지 못한 이에게서 받은 마음까지. 외로움에 울부짖다가 처절하게 넘어져 있는 내게, 그 간결하고도 소박한 언어들은 밧줄 같았다. 이 밧줄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음'을 표상했다.
희미할 지라도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주는 그 선은, 이벤트는커녕 앓이와 의무로 가득했던 지독한 하루였던 오늘을 '아직은 그래도 살아볼 만한' 마음으로 견디게 했다.
몸과 마음의 유기성을 절감하고 있다. 절망과 고독은 물리적인 고통으로 직결되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은 심리적인 고통으로 직결되었다. 나의 멱살을 삶의 반대항으로 끌고가는 선명한 실선들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희미한 점선에 의하여 단절되고 있는 아이러니.
오늘은 내 스물 아홉 번째 생일이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살고 있다. 살아짐과 살아냄 사이를 오가는 삶이지만, 여전한 사실은 살아감 그 자체다. 보잘것없기에 살고 싶지 않지만, 보잘것없음들이 나를 살아가게 한다. 소박한 언어들은 소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