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인가 하고 착각했지만, 이 고요함과 혼란스러움이 교차되는 328분의 러닝타임은, 주어를 대상으로 만들었던 우리의 수동태식의 서사들을 겨누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키라, 준, 사쿠라코, 후미는 이혼했거나, 이혼에 실패했다. 혹은 이혼을 결심했거나, 그 결심마저도 되돌렸다. 이 영화를 헤어짐을 소재로 하는 단순한 '무소의 뿔'들의 당당한 홀로서기로 이해한다면, 이 작품의 의미값은 너무 축소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과'를 너무 쉽게 매칭해왔던 우리의 말버릇들, 즉 '사후 발명'된 원인들의 민낯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탓 혹은 덕으로 설명된 다양한 원인과 동기들에는, 실은 더 다양하고 교묘한 상황과 감정과 이해관계와 사람이 연루되었다. 어쩌면 어떤 일이 일어난 원인은 '~たい(~고 싶다)'와 'できる(~할 수 있다)'의 사이 그 어디쯤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마지막 후미와 사쿠라코가 이혼을 결심하면서 내뱉은 그 많은 문장들의 어미가 이 두 동사의 반복이라는 것은 이를 잘 방증한다.
2. 말로만은 설명하지 못할 부분들을, 많은 말로써 설명해내는 영화였다.
후미는 아키라의 예전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너도 전에 그랬잖아. 말로 하면 다 틀린 게 될 것 같다고. 나도 이해해. 솔직해지려 할수록 되레 말을 못할 때가 있으니까."
말로 하면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말할수록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명료히 찾아나간 경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말 때문이었을까. 수렁에 빠지게 하는 말과 광명 찾게 하는 말.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답은 없고, 찾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 영화의 캐릭터들의 말은 그 자체로 '행위'가 된다는 점이다.
'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곳 캐릭터들의 대사는 서사를 진척시키기 위한 수사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그 자체로 미장센처럼 다가왔다. 많은 의미를 함축한 채, 많은 것을 설명하려 들지는 않는. 각각의 인물들이 지닌 감정과 정서들을 단순화하지도 않고, 평면적으로 그 캐릭터를 구축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대사로 하여금 그들을 함부로 '이해할 수 있다/없다'로 환원해버릴 수 없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살아 존재하는 사람들의 '부대끼는' '대화'란...
3. 압도적이었던 장면은, 노세의 낭독회 후 회식자리. 네 친구들의 시선을 따라가던 관객으로서, 노세와 코헤이는 가장 먼 타인으로서의 캐릭터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주요한,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하여 핵심이 되는 대사들을 이들이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