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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eyview Aug 07. 2022

고도를 기다리던 빨간 차는, 긴긴 밤의 연속을 달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리뷰


'고도를 기다리던' 가후쿠의 빨간 차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미사키에게로.


1. 

하마구치 류스케는 무대와 카메라의 언어들을 교차시켜 언어 위주의 '극'을 점검한다. 이때 그의 점검은, 기존의 언어들을 경계함과 동시에 기존의 언어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의 모색이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오토(音, 소리)'가 가득하다. 그러나 대개의 영화들에는 말로는 전달하지 못할 감각과 감정들을 '온가쿠(音樂, 음악)'들로 대체하여 전달하는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온가쿠'를 배제한 '오토' 즉 언어로 미처 전달하지 못하는 사이사이의 소리들을 '친모쿠(沈黙, 침묵)'로써 내버려둔다. '비어 있음'을 그대로 '비어 있게' 두는 것이다. 


'글(문자)'로 고정된 체홉의 희곡을 '말(소리)'로 반복하여 듣는 가후쿠의 차 안. "극의 흐름을 전부 머릿속에 넣어야 하"는 과정에서, 그는 분명 소리로서의 말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이때 말은 전부가 아니다.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가후쿠는, 자신의 무대에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배우들을 등장시켜, 배우 당사자에게 편한 언어로써 대사를 발화하게 한다. 무대 위의 말은 절대적이다. 말 없이 배우들은 감정과 극의 흐름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고, 관객들 또한 말만으로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가후쿠는 지독히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모두 다른 언어'를 무대 위에 함께 올린다. 


관객들에게는 이 모든 다른 언어를 '배우의 대사'와 '화면의 자막'으로 전달받는다. 우리는 문자언어와 소리언어, 그리고 몸짓언어 등 다층적인 언어들의 세계에 속해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할 지점이었다. 말은 '한 국가'의 '청인'의 언어만으로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만남' 그 자체가 된다.



2. 

중요한 것은 가후쿠의 연극 내 배우 각자에게 '편한' 언어란 '모국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이지만 그가 '말할 수 있는' 언어는 아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언어는 '한국 수어'. 그래서 우리는 언어의 본질이 내셔널리티의 경계성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재밌었던 장면이 바로 윤수-유나-가후쿠-미사키가 함께 했던 저녁 식사 장면이다. 가후쿠와 유나 사이에는 다층의 통역이 자리한다. 일본 청인의 소릿말, 한국 농인의 몸짓말. 그 사이에는 외국어와 장애라는 '장벽'이라 여겨졌던 '소통 도구 간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다. 윤수는 가호쿠의 일본어 소릿말을 듣고, 유나에게 한국어 소릿말을 전해준다. 유나는 이를 '듣고' '한국어 몸짓말'로써 말한다. 그러면 윤수는 가호쿠에게 일본어 소릿말로 전해준다. 이때 미사키는 이를 가만히 듣고-보고 있다. 이 대화 씬에서 '말하기'는 발화뿐 아니라 몸짓이며, '듣기'는 한 국가의 언어만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말들의 격전.



3. 

가후쿠는 다카츠키에게 "대본에 응답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이 대사의 발화자이자, 동시에 청자였다. 그는 문자화된 드라마를 소리로 입체화하여 대답할 수는 있었지만, 오토(가후쿠의 죽은 아내)의 가시화되지 않은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세계에 혼란스러워하던 오토는, 그리고 자신이 이 변함을 온전히 인지하고 '반응'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할까 두려워 외면했던 가후쿠는 모두 '고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도는 죽음이 되었다. 오토(音)의 죽음은 곧 하나시(話)의 죽음이기도 했다. 가후쿠가 '바냐'를 직접 연기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그는 자신을 직접 드러내게 만드는 체홉의 희곡을 직접 연기하는 일을 두려워했다. 또한 오토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사랑은 '모순된/배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사키는 '모순되지 않았다'고 한다. 가후쿠 이외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 곧 가후쿠를 사랑하지 않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후쿠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면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가후쿠는 그러지 못했다. 오토는 그렇게 변하지 않은 세계를 참을 수 없었고, 가후쿠는 변화된 것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모순된 상황이 '종결'되는 '고도'를 부른다.



4.

레코드에 박제된 오토 대신, 가후쿠는 드라이브에서 미사키와 '대화'한다. 무대 위의 세계를 '대화적'으로 구성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도리어 '박제하였던' 가후쿠. 그는 운전대를 놓음으로써, 미사키와 함께 차 안에서 담배를 함께 피움으로써, 그가 오래간 지켜온 '소중히 여김'의 감각을 재편시킨다. 


소냐 역을 맡은 유나의 수어는 여기서 중요한 참고점이 된다.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간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얘기해요. 우린 고통 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리고 아저씨와 나는 밝고 훌륭하고 꿈과 같은 삶을 보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드디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열렬히 가슴 뜨겁게 믿어요. 그때가 오면 우린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내 삶을 내가 '바라볼' 수 있을 때, 삶의 고통을 '말할' 수 있을 때. 살아갈 수밖에 없어서 살아가다 보면, 그 일이 가능해진 순간이 올 수 있다. 그래서 영화 결말에 이르러 카메라의 방향은 무대의 위뿐 아니라, 정면을 비춘다. 또한 무대 뒤편에서 무대와 객석 전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기도 한다. 삶은 무대 위에만 있지도, 무대 뒤에만 않다. 삶은 무대의 여러 각도뿐 아니라, 무대 자체의 안팎에도 자리한다. 



방향은 고정되지 않아야 한다. 세계는 절단되지 않아야 한다. 고도는 종결이 아니다. 그래서 가후쿠가 15년 간 소중히 여겨 온 이 빨간 차는, 제법 능숙하게 한국에서 장을 보고 있는 미사키의 발이 되었다. 미사키는 이제 조금은, 나즈막이 미소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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