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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Jan 05. 2024

서명을 받는 일만 남았다

“문제가 있으면 이따가 나한테 와” 엘레나 교수님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강의실에 학생이 서른 명 정도 있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탁.탁.탁. 교수님이 빔프로젝터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프로젝터 지지대가 균형이 맞지 않아 덜컹 거렸지만, 프로젝터가 쏘는 빛줄기는 강의실 앞 스크린에 끈질기게 닿아있다. 끝내 그 빛은 하얀 스크린에 커다란 표를 그려냈다. 표 맨 왼쪽에는 러시아 알파벳 순으로 이름이, 중간에는 해당 이름을 가진 학생이 수업 중에 어떤 활동을 해냈는지, 출결은 어떤지 등등으로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맨 오른쪽 칸에는 숫자가 놓여있다. 왼쪽에 적힌 아나스타샤부터 이름을 순서대로 따라가다 К로 시작하는 내 이름이 보였고, 반쯤 감은 눈으로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71이다. 100점 중 71점이다. 만족이다. 이 정도 점수면 장학금은 받을 수 없지만, 내년에도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다. 만약 64점을 넘지 못했다면 새 집을 알아봐야 했다. 문제는 새집에 들어갈 월세보다 내 러시아어 실력이었다. 혼자서 살아가기엔 아직 부족했기 때문에, 기숙사에 일 년 더 머물고 싶었다. 다행히 출석률에는 러시아어 실력이 필요하지 않았고, 몇 개의 과제와 한 번의 발표는 소피아가 도와줘서 잘 해냈다. 소피아를 비롯해 수업 시간마다 적극적으로 발표했던 나스쨔와 바냐는 역시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특히 바냐는 발표를 마치고, 매번 엘레나 교수님과 불(?)같은 토론을 했는데도 좋은 점수를 얻어냈다(러시아인의 소통 방식을 잘 모르는 사람이 그 둘의 모습을 봤다면, 분명 싸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발표는 최소 한 번 이상 해야했기 때문에 나도 발표를 딱 한 번 했다. 발표라기보다는 스크립트를 대놓고 읽기에 가까웠다. 스크립트의 첫 장은 연습 때처럼 자연스럽게 읽어 냈지만, 그 뒤로는 나 혼자 무언가에 쫓기는 듯 고개를 처박고 스크립트를 빠르게 읽었다. “더 궁금한 거 있는 사람?” 발표가 끝나자, 엘레나 교수님은 다른 학생들에게 물었지만, 건물 밖에서 트램이 천천히 지나가는 소리만 울렸다. 그러자 교수님은 나에게 러시아에서 듣는 수업은 어떤지, 한국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는지 등등 물었다. 나는 수업은 괜찮다고, 한국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다고 대답했다. 교수님은 본인도 대구에 있는 대학교에서 6개월 정도 지낸 적이 있다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컴퓨터를 최초로 만든 국가가 어디인지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스샤(미국)이라고 대답했고, 선생님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에쎄쎄르(소련)이라고 답했다. 부족한 러시아어 실력으로 자세히 설명할 자신도 없었고, 엘레나 교수님과 바냐가 토론할 때 튀던 불꽃이 너무 강렬했기에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순간 컴퓨터를 만든 최초의 국가는 소련이 되었다. 그 후로 엘레나 교수님이 수업 때 하는 말은 나에게 더 강력하게 다가왔다. 마치 용광로에서 갓 제조된 뜨겁고도 단단한 철강처럼. 그래서 나는 종강할 때 문제없이 64점을 넘겨서 교수님을 찾아가야만 하는, 금방이라도 땀이 날 거 같은 면담을 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대로 71점을 받아낸 나는 교수님과의 면담을 피했다. 남은 건 자쵸뜨나야 까르따(성적카드)에 교수님의 확인 서명을 받는 일만 남았다.


자쵸뜨나야 까르따는 손바닥만 크기의 파란색 수첩처럼 생겼다. 양쪽으로 펼치면 첫 장에는 학생의 정보가 적혀있고, 두 번째 장부터는 표가 삽입되어 있다. 표의 첫 번째 칸은 교수의 이름, 두 번째 칸은 담당 과목, 세 번째 칸은 점수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칸은 서명란이다. 학생들은 그 수첩을 들고 이번 학기에 만났던 교수님을 한분 한분 찾아가 성적을 기입해달라고 한다. 엘레나 교수님의 강의가 가장 늦게 끝났기에, 나는 마지막 빈칸을 채우기 위해 교수님 연구실로 향했다. 똑-똑. “자이지”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진본, 아 까르따?” 교수님은 내 생각보다 뜨겁지 않게,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셨고 이번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첫 학기인데 잘했다며, 다음 학기에는 더 높은 성적을 받으라며.


마지막 서명란에 확인까지 받고,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를 하며 연구실을 나왔다. 길에는 아침에 내렸던 눈이 벌써 녹아 있었다. 물웅덩이를 밟지 않게 조심히 걸으며 교수님 생각에 빠졌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에게서 느낀 뜨거움은 얼어붙은 내가 더 큰 온도 차로 느낀 따뜻함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있던 나만의 수첩 속 표에 적혀있던 ‘엘레나 선생님 - 상당히 엄격하심’이라는 글자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가끔 내가 당신을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라는 말이 빽빽하게 머릿속에 적혀있는 만큼 상대방에게 전달이 되지 않아 아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머릿속 나만의 수첩에 적힌 생각이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엘레나 선생님 - 상당히 따뜻하심’으로 고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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