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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원의 초고들 Mar 01. 2024

경쟁이 아니야

두번째 택시를 기다린다. ‘Шелехов[셸레호프]’라고 쓰여진, 한번도 와본 적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나, 유첸, 신야오, 사샤가 십분째 서성이고 있다. 유첸과 신야오는 나의 중국인 친구들이고, 사샤는 러시아인 친구다. 우리 넷은 학기가 끝나면 ‘Аршан[아르샨]’이라는 산마을로 여행 가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는 유첸 집 앞에서 모였고, ‘아르샨’으로 갈 택시를 불렀다. 버스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르쿠츠크 중심부에서 아르샨까지 갈 수 있었다. 소요 시간은 약 네시간이고, 교통비는 일인당 삼백루블이었다. 다만 우리는 버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편하게 가고 싶어서 택시를 선택했다. 비용은 세 배나 더 비쌌지만 나름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유첸이 어플을 보고 “택시 도착했는데?” 라고 말했을 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택시 운전사나 차종은 선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더니 레이(Ray)보다 작은 자주색 차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샤를 조수석에 태우고, 우리 셋은 뒷 자석에 옹기종기(?) 붙어 앉았다. 산행을 대비해 셋 다 두꺼운 옷을 입고 왔기에, 마치 에어백이 터져버린 차에 타고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사십분 정도 이동했을 때, 택시가 갑자기 멈춰 섰다. 사고가 난 건 아니지만, 그래서 실제로 에어백이 터진 건 아니지만, 택시 기사는 갓길에 차를 세웠고, 우리에게 “미안하다. 이 상태로 아르샨까지 못 갈 거 같다”며 다른 택시를 부르라고 했다.


“Блин[블린]” 신야오가 담배를 태우며 말했다. 유첸은 오히려 잘 됐다며, 덕분에 큰 차를 탈 수 있다고, 빨리 가는 것보다 편하게 가는 게 더 낫다고 대답했다. 나는 ‘보다 빠르게 도착하는 것도 우리가 원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지만, 말로 뱉진 않았다. 그리고 마실 물을 사오겠다며 멀리 보이는, 유일하게 익숙한 ‘Абсолют’라는 글자가 쓰여진 노란 건물을 향해 걸었다. 그 사이 유첸은 어플로 두번째 택시를 불렀고, 내가 물을 사고 마트에서 나올 때 나에게 전화했다. “형, 택시 잡혔어. 이쪽으로 와”. 그렇게 넷이서 오백미리리터 짜리 물을 한모금씩 나눠 마셨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지금 두번째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어떤 택시가 오려나.


도착했다는 알림을 받았는지, 유첸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저기, OOO!” 차 번호를 얘기하고, 다가오는 하얀 승용차를 향해 검지를 쭉 내민다.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자주 봤던 차종이다. 차 앞에 붙어있는 폭스바겐 엠블럼은 태양을 그대로 반사시키며 어느때보다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차가 멈춰서고, 짐을 넣기 위해 차 뒤쪽으로 이동한다. 트렁크에 적힌 ‘폴로(Polo)’라는 글자는 다른 날보다 거대하다. 사샤는 다시 조수석으로, 나머지 셋은 뒷 자석에 앉는다. 보다 널널해진진 공간 덕에 기사와의 대화도 여유롭게 흐른다. 대화를 하다보니,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 초원과 하늘의 경계는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택시는 관광 안내소 앞에 멈춰서 있다.


“자연 보호를 목적으로 1인당 200루블씩 지불해야 한대” 유첸과 사샤가 안내소에서 나오며 말한다. 안내소 밖에서 광할한 대지를 바라보던 나와 신야오는 ‘그정도야 뭐’ 하는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건낸다. 주위에 구김살 없이 펼쳐진 자연을 보니, 200루블 지폐말고 500루블짜리도 기꺼이 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아까 마시고 꾸깃하게 접어 넣어둔 플라스틱 병이 걸리적 거린다. 유첸과 사샤는 확인증을 받았는지 안내소에서 나온다. 신야오가 마지막으로 택시에 들어와 앉아 차 문을 닫자, 기사는 도착까지 30분도 안 남았다고 한다. 택시 바퀴가 아무 방해 없이 구르고, 잠들기 전에 창 밖으로 보였던 초원과 하늘이 계속 이어진다. 문자 그대로 자연의 방대함(?)을 철저히 느끼고 있으니, 어느 순간 저 끝에서 건물 같은 것들이 하나둘 일어선다.


택시 기사가 반 정도 열어둔 창문으로 여행 잘하라는 인사를 건내고, 차를 돌린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마을 중심부에 서있다. 정류장처럼 보이는 공터와 작은 매표소가 보이고, 건너편에는 큰 수퍼마켓도 있다. 마을에 아직 버스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우리는 확실히 버스보다 빠르게 온 거 같다. 사샤는 지도 앱으로 예약해둔 숙소를 찾아보고는, 이십분정도 걸어가면 된다고 말한다. 출발하기 전에 간단하게 장을 보고 가자는 나의 말에  세 명 다 고개를 끄덕이고, 줄줄이 찻길을 건넌다. 마트에서 물, 각자 먹을 것 그리고 저녁에 함께 먹을 샤슬릭 재료를 계산하고 나온다. 사샤는 지도를 보며 길을 안내하고, 우리 셋은 장바구니를 나눠 들고 뒤따라간다.


숙소에 도착해 나무로 된 대문을 열자, 진한 갈색 털을 가진 거대한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복도 바닥에 누워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니 여행객이 익숙한 거 같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2층에서 숙소 주인 같아 보이는 사람이 내려온다. “제시카”하고 그녀가 부르니, 그제서야 갈색 리트리버는 움직여 길을 비켜준다. 사샤는 숙소를 예약한 알렉산드라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그 사람은 자신은 발렌티나라며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다. 나와 유첸, 신야오도 사샤를 따라 인사한다. 중국에서는 왔냐는 발렌티나의 물음에 유첸과 신야오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한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 즈음에, 방을 보여주겠다며 발렌티나가 앞장서 걸어간다.


“감사합니다” 사샤는 방을 보여주고 나가는 발렌티나에게 또 한번 감사를 전한다. 사샤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르샨에 있는 숙소 중에 외국인을 반기지 않는 곳이 꽤 있다는 얘기를 해준다. 내가 기숙사를 떠나 자취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집을 구하기 힘들었던 이유와 비슷하려나…. 살아갈 집을 힘들게 구하고 계약서에 싸인을 마쳤을 때, 나는 집주인에게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집주인은 간혹 잠깐 살고 떠나는 외국인 중에서 아파트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그래서 외국인을 환영하지 않는 집주인이 가끔 있는 거라고 얘기를 해줬다. 그랬구나… 그런데 분명한 건 그건 국적이 다른 외국인이라서 그런게 아니다.


3년 전, 신 사장님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같은 해에 나와 내 룸메이트는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둘이서 함께 살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신 사장님은 요식업 뿐만 아니라, 여행업도 하시고 임대업도 하셨다. 그래서 사장님은 우리가 집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두 명의 한국인 학생이 나가면 우리에게 집을 임대해주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사장님은 우리에게 전화를 주셨고, 그날 우리는 식당에서 사장님을 뵈었다. 뾰족하게 각진 4인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주문하고 나서, 신 사장님이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뗐다. “나 이제 한국인한테 방 못 빌려주겠어”.


신 사장님은 상대방이 ‘한국인 학생’이라는 이유로 보증금 없이 월세만 받았다고 했다. 사장님도 이 도시에서 집 없이 기숙사 생활을 했던 때가 있어서, 기숙사를 벗어나 자취하고 싶은 학생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 ‘한국인’과 ‘학생’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자신이 베풀 호의에 대한 정당성을 충분히 부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한국인 학생은 집 안 곳곳을 파손시켜 놓고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났다. 사장님의 정당성은 철저하게 부서졌고, 집은 엉망이 되었다. 충격이 컸던 걸까. 사장님은 떠나버린 두 명에게 통화를 걸어 따질 힘을 잃었고, 끝내는 우리 둘에게 집을 임대해주기 힘들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샤, 가는 길이 힘들수도 있어” 유첸이 우리 넷 중 마지막으로 숙소 밖으로 나오며, 사샤를 쳐다본다. 사샤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아무렇지 않게 대문 쪽으로 걷는다. 나무로 된 문을 아까와 반대로 열자, 이번에는 하얀색 도요타 승용차 한 대가 문 밖에 서있다. 차 옆에는 발렌티나가 차체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대문 밖으로 나온 우리를 발견하고, 발렌티나는 자신도 곧 시장에 갈 거라며, 괜찮다면 아르샨까지 태워준다고 한다. “제대로 아르샨을 즐기려면, 꼬박 하루가 필요한 거 알고 있지?” 발렌티나가 청소를 마무리하며 말한다. 내가 같은 과 친구들에게 아르샨에 간다고 했을 때 들었던 말이다. 그때도 친구들이 나에게 세네시간으론 안된다고,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발렌티나가 여기가 아르샨의 시작점이라며 차를 멈춰 세운다. 우리 넷은 감사 인사와 저녁에 뵙겠다는 말을 전하고 차에서 내린다. 차문을 닫고 몇 걸음 걸으니, 네 쌍의 눈동자 앞에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우뚝 서있다. 아치 구조를 이루며 높게 쌓인 벽돌들은 마치 하얀 독립문처럼 보인다. 다만 가장 높은 부분에는 빨간 글씨로 아르샨이 써있고, 아치 아래에는 철제로 된 회전문이 있다. 회전문은 구조물에 비해 작아서 차례 차례 한명씩 문을 직접 밀어 통과해야만 한다. 유첸, 사샤, 신야오가 지나간 뒤 나는 마지막으로 회전문을 잡는다. 찌릿하고 순식간에 올라온 한기는 이 길은 너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고 말해주는 거 같다.


회전문 뒤쪽에는 산이 바로 나타나지 않고, 대로를 가운데 두고 갈라진 두 개의 큰 공터가 있다. 왼쪽 편은 운동기구가 가득 차있는 걸로 보아 일종의 훈련장처럼 보이고, 오른쪽 편은 운동기구 하나 없는 평범한 공터 같다. 대로를 따라 걷다보니,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이 하나 오른 편에서 나타났다. 건물 벽면에는 소련식 그림체로 수영, 레슬링 등 각종 스포츠가 그려져 있다. 소련의 비밀 훈련장 같은 뭐 그런걸까? 멋을 하나 부리지 않은 듯한 투박한 그림체는 그림 자신이 그려진 목적만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때 신야오가 멀리 보이는 독수리를 가리킨다. 독수리는 살아있는 독수리가 아닌 목조 구조물 위에 설치된 조각이다.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독수리 조각은 생각보다 더 거대하다. 채색 되어있지 않았지만 독수리임에 분명하다. 독수리 다리는 또 하나의 거대한 문 위에 놓여있다. 출입구에서 보았던 문보다 두 배는 크다. 통로도 넓어서 여러 명이 한번에 쉽게 통과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서로를 도우며 올라갈 준비를 하라는 의미일까? 독수리 맞은 편에는 아르샨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다. 아르샨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자세히 들여다 보진 않는다. 여기를 통과하면 정보를 위해 적혀있는 한글자보다 내딛는 한걸음에 집중해야 한다. 문을 지나가기 전에, 우리는 다 같이 사진을 찍는다. “가보자, 한번!” 신야오가 기세 좋게 한마디한다.


산 1/4정도 되는 위치에 도착했다. 등산자를 위해 산을 깎은 듯한 작은 평지가 있다. 바닥이 시멘트로 포장되거나 의자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다. 나, 유첸, 사샤 그리고 신야오는 따로 챙긴 등산 방석이 없어 연갈색 바닥에 풀썩 앉는다. 앉아서 체력을 보충하면서 오고 내리는 사람을 구경한다. 다양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오고 간다. 우리처럼 옷을 가볍게 입은 사람들도 있었고, 백패킹 장비를 챙기고 움직이는 사람도 많이 보였다. 흐른 땀이 식어 몸이 조금 차가워 질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지나온 등산길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릎을 세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경사가 한순간에 가팔라졌다.


최대한 배에 힘을 주고 두발로 올라가려 했지만, 이미 허리는 굽었고 두 손은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기어가다싶이 산을 올랐다. 이 부분이구나, 이 부분이 모두가 산행이 쉽지 않을거라고 이야기 했던 이유구나. 나를 포함한 유첸, 사샤, 신야오 모두가 빠짐 없이 숨을 거칠게 쉬었다. 결국에 땀 흘리는 걸 싫어하는 신야오는 아까 앉아 쉬었던 곳에 내려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산을 오를 때 흔히 보이던 데크나 손잡이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그때 유첸은 어디서 구했는지 큰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짚었고, 남은 한손은 사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아, 나도 내려가서 쉴까라는 생각이 짙어질 때 비로소 경사가 완만해졌다.


경사 때문에 한정적이었던 시야가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위로 바짝 들지 않아도 가야할 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니, 발바닥이 닿는 지면에는 연갈색 흙이 아닌 작고 큰 회색 돌이 깔려 있었다. 탁 트인 시야는 꽤 높은 곳에 와있다는 걸 알려줬다. 발자국이 쌓여 단단해진 길이 어디로 향하는 지도 눈에 잘 들어왔다. 그 길 끝에는 다시 경사가 조금 높아지는 거 같았지만, 오르막 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게 보였다. 오르막을 올라가니 아까보다 더 큰 휴식 공간 같은 게 있었다. 신야오가 앉아서 기다리겠다고 한 곳과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누가 산을 깎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만큼 의자는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거대한 바위에 기대 앉거나, 그 바위 위에 올라가 누워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챙겨온 방석 혹은 담요를 바닥에 깔고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담요 중앙에 누군가가 가져온 보온병을이 있었고, 사람들은 차를 서로 나눠 마시고 있었다. 그 중 보라색 스카프를 이마에 두르고 은색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우리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 유첸 그리고 사샤는 스스럼 없이 그에게 다가갔고, 담요에 엉덩이를 붙였다. 같은 담요 위에서 서로 이름을 나누며 인사했다. 그는 알렉세이라고 했고, 아르샨에 자주 온다고 했다. “여기가 산의 어느 지점인가요?”라고 사샤가 물었다. 알렉세이는 “산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야, 지금부터 시작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거 없으면 힘들텐데”라는 말을 덧붙이며 가방에 꽂혀 있는 등산 스틱을 흔들었다.


‘아, 그래서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등산 스틱을 빌려주는 작은 가게가 있었던 거구나’. 나는 유첸을 보며 “아까 그거”라고 말했고, 유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담요 위에서 알렉세이와 그의 일행은 오늘 아르샨에서 밤을 지새울 거라는 말, 우리는 오늘 처음 와서 잘 모른다는 말 등등을 나눴다. 알렉세이가 나누어준 차를 다 마실 때 즈음에, 유첸은 선글라스를 벗고 안경을 썼다. 그리고 유첸은 지쳐보이는 사샤를 보머 “만약 힘들면, 여기까지만 보고 내려가도 좋아”.라고 말했다. 사샤는 괜찮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유첸은 곧바로 “이건 경쟁이 아니야. 그리고 다른 사람이 올라간다고 해서 우리도 따라 올라갈 필요는 없어.”라고 했다. 사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첸이 한 말을 내가 초등학교 때 들었다면, 체력장 때 했던 달리기 측정이 그리 창피하지 않았을까. 그늘이 드리운 스탠드 앞에서 담임 선생님이 라인기를 끌며 하얀 줄을 그리고 있었다. 달리기를 위한 트랙을 만들고 있다. 선생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가 흔들릴수록 트랙은 점점 완성되어 갔다. 완성된 트랙에는 5명씩 번호순대로 줄 맞춰 섰다. 성 씨가 김인 나는 매년 10번 근방의 번호를 받았다. 그래서 보통 2회 안에 트랙으로 나섰다. 트랙에 서고, 선생님이 오른손엔 초시계를 들고, 왼손으로 호루라기를 입에 가져다 댈 때면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이유는 달리기가 느려서였다. 느린 속도가 창피했다. 그때는 이 트랙이 내가 가진 속도를 측정하기 위한 장치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보다 빠르게 뛰어야하만 하는 줄 알았다.


그때 휘날리던 운동장의 연갈색 모래가 신야오의 엉덩이에서 떨어졌다. 경사가 급해서 기어 가듯이 올랐던 오르막 길은 내리막이 되었을 때도 발걸음을 늦추게 만들었다. 세 명 모두 다치지 않고, 천천히 신야오가 앉아 쉬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신야오는 멀리서 우리가 보이기 시작할 때 쯤 자리에서 일어났고,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네 명이 된 우리는 나란히 걸어 내려오면서 독수리 조각을 다시 한번 마주했고, 독수리를 머리 위에 두고 발 앞으로 나타난 대로를 따라 걸었다. 왼쪽에 소련식 그림체를 가진 건물을 지나서 등산 스틱을 대여해주는 작은 가게를 지났다. 그리고 회전문을 잡고 돌려 차례대로 나왔다. 등산으로 인해 체온이 올랐는지 이번에는 회전문이 그리 차갑지 않게 느껴졌다.


“아르샨에서 홍콩 와플을 팔아?” 숙소로 가는 도중 길가에 있는 와플-아이스크림 가게를 보며 유첸이 말했다. “진짜네…”. 나는 홍콩식 와플을 먹어보지 않았기에, 한번 먹어보겠다고 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니, 가게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테이블에서 그림을 그리며, 다른 아이는 아이패드로 만화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들은 카운터 건너편에 있는 사람과 얘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이스크림 가게라기 보다는 아르샨에 사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카운터를 두고 오가는 대화 사이에 어색하게 서서, 토핑 없는 가장 기본 형태의 와플을 주문했다. 생각보다 좋았던 맛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왔다. 옆에 있던 신야오에게 한번 먹어볼거냐며 와플을 내밀었다. 고맙지만 괜찮다고 신야오는 거절했다. 그렇게 남은 와플을 가게에서 마저 다 먹고, 숙소로 움직였다.


숙소 대문을 열었을 때, 나타샤는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만큼 2층에서 발렌티나와 식사를 하는 거 같았다. 우리 넷은 다 마치 같은 생각을 하는 듯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에서 각자 쉰 지 얼마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렌티나였다. 발렌티나는 바냐를 언제 시작할 건지 물었고, 사샤는 곧 바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불을 지피고, 준비를 할테니 30분 뒤에 나와” 라며 발렌티나가 문을 닫고 나갔다. 나와 유첸과 사샤가 각자 챙겨온 수영복과 세면 용품을 준비하고 있을 때, 신야오는 더는 땀을 흘리기 싫다며 자신은 빼달라고 했다. 유첸은 예상했다는 듯이 알겠다고 대답했고, 준비를 마친 나와 사샤에게 바냐로 이동하자고 했다.


바냐는 러시아식 사우나를 뜻한다. 바냐를 위해 만들어진 작은 집은 자작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문 위에는 러시아어로 <баня:바냐>가 적혀 있었다. 사샤가 문을 밀고 들어가자, 발렌티나가 바냐 준비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렌티나는 작은 집을 이루고 있는 공간을 하나하나 소개해줬다. 긴 테이블이 놓여 있는 방은 바냐 후에 쉬면서 차를 마실 공간이라고, 물이 가득 담긴 큰 양동이가 놓여 있는 방은 바냐 후에 샤워를 할 공간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열기가 가득차 있는 사우나 실을 보여줬다. 사우나실 방 안 왼편에 놓인 허리 춤까지 쌓여 있는 돌을 가리키면서 “여기에 물을 살살 부으면 돼”라고 설명했다. 직접 시범을 보이기 위해 발렌티나는 바닥에 놓인 작은 대야에서 물을 길러 돌에 살살 얹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물은 뜨거운 수증기로 날아올랐고, 이내 이마 위 땀으로 변했다.


“자, 그렇게 땀이 나기 시작하면 이걸로 몸을 탁탁 쳐” 발렌티나는 엮은 나뭇가지를 주며 말했다. 나뭇가지는 자작나뭇가지였고, 잎사귀도 잔뜩 붙어있었다. 유첸이 그 뭉치를 건네받고, 장난스럽게 내 등을 탁탁 쳤다. 그러자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잎사귀가 하나 둘 떨어지고, 또 몇 몇은 등에 붙었다. 나는 시원한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이래서 바냐를 하는구나”라고 뱉었다. 발렌티나는 유첸을 보며 잘했다고 하면서, “땀을 한번만 빼고 나오는 게 아니야. 반복적으로 왔다갔다 해. 테이블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천천히 쉬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건 머리카락이 탈 수도 있으니까 쓰는 거야. 불편하면 굳이 안 써도 돼” 부직포 같은 걸로 만들어진 모자를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냐를 얼마나 오랫동안 할 예정인지, 그래서 저녁을 언제 먹을 건지를 정했고, 발렌티나는 그럼 저녁 준비를 하겠다며 집을 나갔다.


유첸이 물을 두번째 돌 위에 부었다. 그리고 수증기가 다시 한번 실내를 가득 채울 때 자신은 기관지가 별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 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생긴 질병이라고 했다. 그래서 빠르게 움직이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숨이 차는 건 괜찮지만, 누구보다 빠른 속도를 가져야만 하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등산을 좋아하게 됐고, 아르샨에 꼭 와봐야겠다는 생각을 들었다고 했다. 유첸은 그래도 심장은 건강하다면서, 혈액 순환이 잘 되어 나와 사샤보다 많은 땀이 흐르고 있는 거라며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전혀 몰랐다. 유첸, 신야오와 함께 카페에 가면, 둘이서 한시간마다 담배를 태우러 왔다갔다. 그래서 유첸에게 기관지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내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유첸은 이제는 괜찮다면서 나에게 나뭇가지 뭉치를 건냈다. 한번 탁탁 쳐달라는 뜻이었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자작나무 잎이 다 떨어지고, 몸을 행궈낸 뒤에 그 작은 집을 나왔다. 바냐를 하지 않은 신야오는 숙소 마당에 준비된 모닥불 앞 벤치에 미리 앉아 있었다. 나, 유첸, 사샤는 밖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덕 앞으로 갔다. 화덕 속 장작은 활활 타기보다는 잔잔하게 자신의 열기를 지키고 있었다. 옆에는 망갈이라고 하는 고기 굽는 화로가 있었다. 사샤는 가져온 샤슬릭용 고기를 보면서 숙소 안에 있는 식당에 인덕션이랑 후라이펜이 있어서 거기서 빠르게 요리할 수 있다고 했다. 유첸은 그건 나중에 고기가 안 익을 때 쓰자면서, 우선은 숯불로 익혀보자고 했다. 우리 넷은 양념에 버물어진 고기를 비닐에서 꺼내 하나 하나 꼬챙이에 끼우고, 다섯개 정도가 꽂혔을 때 숯불이 깔린 망갈에 걸쳐두었다.


고기는 천천히 익어갔다. 바냐에서 우리가 땀을 뺀 것처럼, 수분인지 기름인지 하는 액체가 고기에서 숯불로 떨어졌다. 그때마다 사우나 안에서 돌에 물을 붓는 것처럼 치익 소리가 났다. 치익 소리는 반복됐고, 그 사이 어느새 나타샤와 길고양이가 망갈 주변을 서성였다. 고기 색이 변해가는 동안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첸의 고향은 장쑤성 근처라고 했고, 한국처럼 교육열이 엄청난 곳이라고 했다. 어릴 때 운동을 그만두고, 고등학생이 됐을 때 공부를 따라가기 위해 기숙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 생활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첸은 사샤가 씻어둔 쪽파를 자르지 않고, 돌돌 말아서 입에 넣었다.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는 쪽파를 이렇게  생으로 고기와 함께 먹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신야오도 본인 고향에서도 똑같다면서 쪽파를 두 손으로 돌돌 말았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보다 느린 새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다. 잠귀가 밝은 나는 핸드폰 알람이 울리지 않았지만, 일어나서 침대를 정리했다. 유첸, 신야오, 사샤는 잠을 자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심스레 문을 열고 숙소 마당으로 나갔다. 어제 식사를 마치고 미처 치우지 못한 것들이 있는지 확인하러 망갈 쪽으로 갔다. 빨갛게 타오르던 망갈 속 숯과 그 앞에 모닥불은 아침이 되니 조용한 회색을 띠었다. 벤치에는 어제 두고온 담요가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 외 숙소 마당은 낙엽송으로 빼곡하게 차있었다. 그 때문에 햇빛도 나무 사이 길을 찾느라 속도를 늦추는 듯 했다. 바닥에는 작은 물줄기를 위해 파인 홈이 있었는데, 물은 조금씩 얼어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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