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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완 Nov 12. 2015

젊은이와 노인, 노인과 젊은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인구 25만의 작은도시 포르투에서는 노인/중년들과 젊은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섞여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좋다. 한국과는 매우 대조적인 면이다. 그런다면 젊은이와 노인은 반드시 같이 살아야 하는걸까?  


본격 귀농장려하는 일본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보면 일단 주인공과 친구2명은 매우 젊은데 완전 시골에서 산다. 영화라서 상당히 미화되었는데 주인공은 혼자 사는데도 별로 심심해보이지도 않고 여자인데도 예초기를 돌리고 장작을 패고 온갖밭을 재배하다가 심지어는 논에서 벼까지 키운다. 정말 어마무시한 괴력과 지식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의 친구(여자)가 집에 놀러왔다가 주인공한테 자기가 다니는 회사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 친구는 농사안짓고 시골에서 회사다니나보다. 그 불평이란 나도 수없이 했고 내 친구들도 입이 닳도록 하는 그런 평범한 불평들이다. 상사가 있는데 나 힘들게하고 재수없고 하지만 난 어쩔수 없고 짜증나고 꼴보기싫다는거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지나가면서 그런 불평따위 하지말라고 버럭 화를내고 지나가버린다. 영문도 모른 주인공의 친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벙 찐채로 한마디 한다. 

어른한테 혼나는거 오랫만이야.. 


영화 줄거리상에서 연관도 없고 별로 중요한 장면도 아니라서 나도 보고는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노인과 젊은이의 상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 이 장면이 떠올랐다. 젊은이에게 과연 노인이 언제 필요하냐고? 바로 이럴때이다. 젊은이는 능력과 체력, 에너지가 있어서 무슨일이든 척척 해낼 수 있는데, 노인은 힘과 의욕도 없고 맨날 지나간 옛 이야기만 할줄알지만 그래도 공경해야 되니까 어쩔수없이 공경해야되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무자비한 정의같지만 내가 살았던 서울, 모든이슈가 자본과 경제원리, 경쟁의 이데올로기의 톱니바퀴에서 굴러가는 곳에서는 맞는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젊은사람들은 가진 능력과 에너지만큼 불안해하고 작은 사건에도 쉽게 흔들린다. 인생을 길게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있는 행복이 영원할것처럼 생각하고 불행 또한 마찬가지다. 이 투덜대는 습관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젊은사람들이 가지는데 이럴 때 참어른같은 사람이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큰 위안과 안도가 된다. (꼰대제외)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알수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보다 조금 오래 여기 있었던 사람들을 보고 나의 삶을 예측한다. 현재 한국의 20,30대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않아 출산률이 세계 최저가 된데에는 누가 겁주지 않았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나 팍팍하게 보였기 때문일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이 회사에서 내가 하는 업무를 5년, 10년동안 한 상사의 말이나 표정에 회색빛이 돌고 행복해보이지 않을때 두려워지고 앞날이 깜깜해지는 순간이다. 닮고싶은 어른이 옆에 있다는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지금 하는 일이 고되고 어려워도 이 일을 예전부터 해왔던 참어른의 인자하고 정확한 태도를 보면 이까짓 고난쯤은 충분히 이겨내야 하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멋진 어른들은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냐고? 그런분들은 어디서든지 존재한다. 다만 같이 어울려 살지않아서 모를뿐. 가까운 내 친구가 알고보면 꽤 좋은사람이라는 것도 같이 버스를 타고 어딘가 가보지 않으면 모른다. 맨날 자가용만 타고 다니는데 타인의 좋은점을 어떤 기회에 발견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의 삶은 마치 자가용처럼 서로 칸막이를 치고 조금이라도 저쪽에서 넘어올까봐 신경쓰며 옆차에 뒤쳐지지 않고 뒷차에 무시당하지 않게 앞으로 빨리 달려가는 삶이다. 젊은이에게 노인이 들어갈 자리는 없고 도시에서 쓸쓸하게 살아가는 노인에게도 젊은이의 자리는 없어보인다. 


문득 참된 혼냄에대해서 생각해본다. 일상적인 혼이라면 윗사람이 기분이 나빠서 아랫사람을 나무라는 형태일것인데, 바람직한 혼은 윗사람의 개인기분과는 상관없이 대의와 명분에 따라서 아랫사람을 나무라는 것 아닐까. 내가 봤던 영화의 그 장면이 그런 형태일것 같다. 우리는 좀 더 뒤섞여 살면서 잘못하고 있을때는 서로를 좀 더 혼내줄 수 있어야 한다. 나도 아직은 더 혼나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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